월드컵 응원열풍을 일으킨 ‘붉은악마’ 신인철 회장의 사퇴는 모임의 순수한 이미지를 지키려는 ‘젊은 결단’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신선한 열정’마저도 놔두지 않는 정치생리가 야박하기만 하다. 홈페이지에 밝혔듯이 신 회장의 사퇴가 ‘개인적인 일과 향후 진로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결정’이라 해도 정치권의 입당 권유 등 압력과 부담을 견디기 어려웠다니 말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응원동호회로 출범한 붉은악마는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르면서 회원이 30만명에 육박하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팽창했다. 거리응원까지 발화시킨 붉은 악마의 응집력과 에너지는 세계가 놀랄 만큼 폭발적이었다. 12월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보면 붉은악마야말로 이미지도 좋고 파급력도 큰 유권자 집단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각 정당과 후보측에서는 붉은악마 조직에 집요한 영입공세를 펼쳤고, 열정적인 이미지를 선거전에 이용하려는 갖가지 제의에 집행부가 시달렸다고 한다. 정계에 입문하라는 압력이 오죽 심했으면 신씨는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라고 했을까. 지자체나 시민단체들까지 붉은악마를 끌어들이려 했다니 회장이나 집행부가 그런 외압을 견뎌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치권은 월드컵의 후광을 선거전에 이용해서도 안 되지만 붉은악마의 순수성에 정치적인 색깔을 덧칠하려는 어떤 시도도 자제해야 한다. 붉은악마 역시 정치권에 휘말리는 즉시 ‘정체성(正體性)’이 깨어지고 사분오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붉은악마 집행부는 오는 11월 중순으로 예정한 대의원회의에서 진로와 향후 운영계획을 논의하겠다고 밝혔지만 붉은악마가 정치에 시달리기 전에 단호한 입장을 추스려야 하며, 그것만이 ‘월드컵 신화’를 보존하는 길이 될 것이다. 붉은악마의 순수한 이미지를 그 누구도 훼손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