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四禪八定)을 닦는 사람 및 참선하는 사람은 자력에 의지하고 불력의 가지를 구하지 않기에 공부가 득력함에 진심과 망심이 뒤섞여 번갈아 공격할 때 갖가지 경계가 출현함에 있어 환이 나타나기도 하고 환이 사라지기도 하니, 비유컨대 장맛비가 장차 개이려 할 때 먹구름이 터져 틈이 벌어지면서 갑자기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다가 다시 어두컴컴해져서 그 변화가 심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모든 경계는 진정으로 도안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식별할 수 없다. 만약 한 소식을 얻었다고 잘못 인식하면 마가 붙어 미치니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
염불인은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나무아미타불」만덕홍명을 집지하니, 비유컨대 밝은 해가 중천에 걸린 대낮에 큰길을 가는 것과 같아 산속 요괴와 물속 괴물이 얼씬도 못하고 자취를 감출 뿐만 아니라 옆길로 빠지거나 시비를 따지는 생각이 이로부터 생겨날 리 없다. 이 일을 미루어 지극히 추구하면 「염불하여 공부가 순수하고 전력을 다하는 경지에 이르면 마음 전체 그대로 부처이고 부처님 전체 그대로 마음이며,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될 뿐이다」 말해도 괜찮다. 이러한 이치와 이러한 수행을 사람들이 잘 몰라서 부처님이 중생을 두루 제도하시겠다는 대원에 부합하지 못할까 걱정될 따름이니, 어찌 비밀에 붙이고 전해 주지 않거나 그대 한 사람에게만 전해 주겠는가? 만약 은밀하게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치는(口傳心授)」 미묘한 비결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마외도邪魔外道이고 결코 불법이 아닐 것이다.
【역주】 참선수행은 마사가 생기기 쉽지만, 염불은 마사를 분별하기 쉽다. 정종에서 염불할 때 마사는 적지만, 상대해서 말할 뿐이다. 만약 《인광대사 문초》를 독송하면 인광대사께서 염불하여 서둘러 견불을 구하고 수승한 경계를 바라며 감응을 욕심내면 마가 붙어 미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이런 종류의 법문이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다. 염불하면 마가 붙지 않는다고 결코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단지 선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을 뿐이다. 마의 경계를 쉽게 식별할 수 있지만 잘못 마음을 쓰면 여전히 마가 붙어 미치는 후과가 발생하게 되니,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선종이든 정종이든 상관없이 처음 배우면 진실한 공부가 없어 근본적으로 선정에 들 수 없고, 마가 붙어 미치는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이런 심각한 마사를 만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말법시기 수행인 중에는 거의 모두 산심위散心位의 사람으로 부처님의 가지加持가 어렵고 역용力用은 깊고 미묘하며, 이 또한 이와 같다. 지나치게 염려하고 마사를 두려워할 필요가 적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부체附體 등 장애와 인연이 있다.) 만약 계율을 엄정하게 지키면서 점차로 선정을 얻으면 반드시 마사에 대한 대치방법을 숙지하고 준비하면 우환이 없을 것이다.
[제 241칙] 선종의 향상은 한 법도 세우지 않고 진제와 속제가 원융하니, 정토에 태어나도 괜찮다.
선종의 경우 만약 단제향상單提向上을 말하면 한 법도 세우지 않는다. 부처님조차도 돌아갈 곳이 없거늘, 하물며 염불하여 정토를 구함이랴! 이는 「진제眞諦」에서 말하는 하나가 융통회합融通會合하면 일체가 융회(一泯一切都泯)함이니, 곧 이른바 진실본제의 이지(實際理地; 진여무상의 경지)에서는 먼지 한 알도 수용할 수 없고, 심성의 본체가 본래 청정함을 드러낸다!
만약 확실히 수지하면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거늘(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물며 염불하여 정토에 태어나길 구함이랴! 이는 「속제俗諦」에서 말하는 하나를 세우면 일체를 세움이니, 이른바 “불씨 문중에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고(佛事門中 不舍一法)” 심성이 일체법을 갖추고 있음을 드러낸다! 반드시 속세를 버리고 진제를 말하려고 하면 그것은 진제가 아니다.
예컨대 사대오온을 버리면 심성을 찾을래야 몸이 이미 존재하지 않거늘 마음 또한 어느 곳에 기탁할 것인가? 만약 속제를 여의지 않고 그대로 진제를 밝혀야 진실로 진제이다. 예컨대 심성이 눈에 있으면 봄이라 하고, 귀에 있으면 들음이라 하니, 사대오온을 여의지 않되 심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이전의 여러 조사들이 정토를 은밀히 닦은 대강의 요지이다.
【역주】 인광대사께서는 《문초》에서 “선종의 백장선사는 수행할 때 염불을 온당한 것으로 삼아야 하고, 병이 든 스님을 위해 기도하고 돌아가신 스님을 화송化送하여 모두 서방정토에 왕생함을 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로부터 서방극락세계는 위로는 성자에서 아래로는 범부에 이르는 모든 사람을 위해 불도를 닦는 자의 귀숙처로 삼아야 함을 알 수 있다.”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선문일송》이든지 《불교조모과송》이든지 상관없이 저녁일과에 모두 《아미타경》을 염하는데, 대다수 수행인은 그 가운데 밀의를 모르고 있다.
[보충] 단제향상單提向上: 관觀. 조照. 제提 화두를 드는 방법은 대단히 단순하다. 단지 한 마디 화두가 있을 뿐 다른 문제를 사고할 필요는 없다. 선종에서는 이를 「단제향상」이라 한다. 이른바 「단제」는 한마디 화두를 제기하기만 하면 전후로 생각할 필요가 없고, 이 한마디 화두를 분석 연구할 필요는 없다. 「향상」은 향상의 일착(一著: 한 수)이다. 향상의 일착은 명심견성이고, 무상보리심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다. 이미 무상보리심의 본성이 무엇인지 보았다면 불성이 무엇인지 보는 것은 「향상의 일착向上一著」이라고 한다. 만약 집착. 번뇌. 자아. 분별심에 머문다면 「향하의 일착」이다. 향상의 일착은 제1의제에 진입함이고, 향하의 일착은 제2.제3의제에 진입함이고, 심지어 제4의제에 진입하는 것이다.
제1의제는 일실상인(一實相印: 제법실상)으로 언어 문자 사상을 벗어나고, 「불가사不可思. 불가의不可議」.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는」경계이다. 이른 바 「사구」가 가리키는 것은 「유. 무. 역유역무. 비유비무」이다. 현대 논리학으로 말하면 「정립. 반정립. 긍정종합. 부정종합」은 동일한 사건이다. 말하자면 정립면에서, 반정립면에서 해석은 틀린 것이고, 정립. 반정립 양면에서 해석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그래서 불가사이고 불가의이며, 불가사의는 바로 향상의 일착이다.
향상의 일착은 이미 비유상이고 또한 비무상이며, 「비유상. 비무상. 비비유상. 비비무상」이다. 일반인은 늘 제2의제에 혹 제3. 제4의제에 처하니, 늘 향하의 일착이다. 설사 좌선이나 참선을 할 때도 이와 같다. 그래서 자신을 일깨우고 화두를 제기함은 향상의 일착을 위함이고, 향상의 일착에서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없고, 선악. 대소. 다소가 없으며, 불가사의한 경계이다.
만약 자신이 이미 성취가 있다고 느끼고, 향을 피우고 좌선하는 것이 매우 좋고, 대개 어떠한 경계에 도달하였다고 느끼면 이는 향하의 일착이다. 만약 좌선하여도 매우 초조하거나 매우 고뇌하면 향하의 일착이다. 무릇 마음속에 분별심을 일으킴도 모두 향하의 일착이다. 수많은 사람은 늘 향하의 일착에 머무니, 곧 한마디 화두를 제기하면 곧 망념과 뒤섞여 청정하지 않고, 망념의 방해를 받으면 곧 혐오가 일어난다. 망념이 없을 때면 스스로 득의하여 만족해하고, 이미 망념이 없다고 여기면 바로 있다는 경계이다. 이는 모두 향하일착의 범위 내에서 빙빙 돈다. 단제향상을 제기하지 않으면 향하의 일착이 도리어 매우 빠르니, 중생은 정말 매우 가련하다!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지 즉시 화두를 제기하여야 한다. 사변四辯하는 방식으로 화두를 참구함은 방법이 득력하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향하의 일착이다. 왜냐하면 사변은 자아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사구를 여의고 백비를 끊지 못한다. 여전히 자아중심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일체법은 불법이고 일체상은 실상이라 말하면 살인. 방화. 도둑질 혹은 구업을 지음도 불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역십악도 여래의 공덕인가? 아집을 벗어나기 이전에는 실상은 일체상이라 말할지라도 이는 절대 잘못된 전도된 견해이다.
과거의 일이든 상관 말고, 미래의 일이든 염려하지 말며, 잡념과 망상이 있어도 개의치 말라. 일념마다 모두 잘 염하려고 하지 말고, 자세를 반드시 안정되게 앉으려고 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염념마다 모두 화두에 계념하는 것이다. 어떻게 염념마다 화두를 제기하여야 하는가? 세 가지 매우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 관觀. 조照. 제提이다. 「관」은 화두를 쓰는 방법이고, 「조」는 자신이 쓰고 있는 방법을 알고 그런 후에 게다가 화두가 효과를 발생시키길 갈망하고 기대한다. 왜냐하면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다시 물어야 한다. 자신이 방법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떠나면 바로 방법을 제기한다. 이것이 「제」이다. ㅡ성엄법사, 《교화두선敎話頭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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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일이든 상관 말고, 미래의 일이든 염려하지 말며, 잡념과 망상이 있어도 개의치 말라. 일념마다 모두 잘 염하려고 하지 말고, 자세를 반드시 안정되게 앉으려고 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염념마다 모두 화두에 계념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수고하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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