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후기를 하다 말아버려선지 뒷통수가 슬슬 가려워져 다시 시작 하면서...ㅎㅎ
차라리 시작을 안했으면 미련도 없을 것인데 후회도 되지만 사는게 그런 연속인지라 ~
두번째 이야기 보탬은 이성계의 황산대첩 !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이 앞을 가로막고, 남강지류 람천이 서출동류 들판을 적시며,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이 휘돌아 여원치로 이어졌다 지리산에서 마지막 용트림 하는 곳.
600여년전 고려말(1380년) 가을,
동아시아의 정치적 지각변동을 초래한 의미심장한 사건이 일어난 곳.
그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비전마을의 황산대첩비를 여름 한낮에 찾는다 ~
인월시장통 주문부터 혼잡스런 흑돼지구이와 약간의 알콜로 요기한 후,
식곤증과 한낮의 여름더위를 핑계로 비각의 정면은 차안에서 흘겨보고 지나,
옆의 나뭇그늘아래 쉼터에 썬한 바람 즐기게 앉혀놓고 자장가 삼아 '황산대첩' 썰을 푼다 ~
먼저와 낮잠 즐기던 다른 여행객은 깨어나 피해가고. . .ㅎ
그 썰은 아래의 지도와 표에서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고,
먼저 썰 푼후 그늘 나서기 싫지만 마지못해(?) 따라나선 비각 일대의 모습들을 올렸다.
앉아있던 곳에서 옆문으로 걸어들가면 바로 만나는 파비각 속에 갇힌 파비(깨버린 비).
대첩 후 200여년 후 1577년에 세운 비석을 1945년 1월,
일제말기 남원에 근무하던 일본경찰 애들이 한잔묵고와 깨버렸다는. . .
비석만 깨트린게 아니라 글자마져 철저히 파버린걸 보면
술이 많이는 않되고 상부의 지시를 따른 의도적 행위 였음을 알겠다.
그 전 1943년에 작성된 일제 총독부 '고적 파괴목록' 20여개 비석 중에 들어있었으니 ~
비석의 대부분은 이순신 기념하는 비석들을 포함해 임진왜란 관련 비석이고,
이 비만은 왜구 관련 기록으로 예외였으니, 왜구도 그네들 조상임을 인정하는 것.
[ 참고로, 18개 비석들을 열거해본다 ~
*.임진왜란관련 : 고양 행주전승비, 청주 조헌전장기적비,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
연안 연성대첩비, 회령 현충사비, 진주 촉석성충단비, 김시민 전성극적비, 부산 정발전망유지비,
*.명나라추숭 : 명남방멸종비, 망일사은비, 명위관사은비(이상 공주 공산성 소재), 남해 명장량상동정마애비,
*.이순신관련 : 경흥 녹보파호비, 아산 이순신신도비, 타루비, 이순신좌수영대첩비(이상 여수),
이순신충렬묘비(통영과 남해), 해남 이순신명량대첩비. . .
*. 그리고 ~ 황산대첩비.(좀 쪽팔렸던가 이 비는 적당히 처리하라 지시 함.)
*. 당연히 들어가야할 북관대첩비는 러일전쟁 때(1905년) 저네들 나라로 가져가 야스쿠니신사에 파묻어 버림.]
사적지 한가운데 자리한 복원 된 '대첩비각'.
그리고 그 앞 비문을 번역한 안내판.
'운성지'는 남원의 옛이름을 사용한 조선 후기에 편찬된 지리지의 이름이며,
여기에 다행히 비문이 옮겨져 있어 복원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태조 이성계의 혁혁한 무공 찬양과 조선을 역성혁명으로 개국할 수 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비명병서"(아래의 '명/銘'을 적기위해 먼저 사설/序을 풀어놓은~) 해놓았다.
서문 중,
전라감사 박계현이 1575년에 장계를 올려 비 건립이 시작되었다 하는데,
이 해는 을해년 동서붕당으로 사림이 나뉘는 때이고,
선조가 즉위 8년째 20대 중반에 접어들어 정통성 확보와 왕권강화에 노심초사 하던 때라,
이 건의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서 말미에는 중국의 고사를 끌여들여,
대첩 후 이성계의 행위를 애둘러 은유해 역성혁명의 성공을 정당화 한다.
이후 전해지는 말들을 모아보면,
이성계는 이 전투를 크게 승리하고 돌아가면서,
백두대간 여원치 고갯마루에 일본애들에 굴복치 않다 죽임당한 주모 기려
가슴가린 마애불 만들게 하면서 고개이름도 '여원치'라 하게 하고,
자기네 관향 전주에 들러 전승 축하연을 거하게 열며
한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으며 역성혁명의 뜻을 공공연히 하였고,
같이 전쟁에 종군했던 정몽주는 근심스레 산뒤로 돌아가 우국시를 뇌까렸다 함.
그후 12년 뒤 역성혁명은 성공하고 ~
그곳 전주는 유방의 고향 처럼 '풍패지향'으로 일컫게 되면서,
남문은 '풍'남문, 서문은 '패'서문, 객사 현판은 '풍패지관'이라 이름해 지금도 큼지막히 붙어있다.
근래에 복원된 대첩비는 다행히 깨트리지 않은 이수와 귀부를 사용했는데,
좁은 비각에 갇힌 큼직한 거북은 답답해 한숨 짓듯하고,
뒷발톱은 스트레스로 한껏 날카로워져 있다.
사적지 서편 끝자락에는 '어휘각'이 있고 둑 너머는 람천이다.
이 어휘각 아래 바위에 이성계가 1년 후 찾아 그때 전투를 기억하며
같이 싸운 부하(8원수 + 4종사)의 이름을 자기 이름과 같이 새겼다는데,
이마져도 일본애들이 파내버려 이렇게 알아볼 수 없게 되어있다.
멀찍이 걸어논 안내판 말미 국한문 혼용으로,
"춘풍추우 565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렸하였던 그 성적이 1945년 1월 17일 새벽
왜제의 독수로 본비전을 폭파하는 동시 철정으로 쪼아버려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있는 것이다."라
눈이 아프게 읽어 낸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그 오래고 지난했던 기억들을 되새김 하면서 ~
앞이 아닌 옆에 있는 마을이 '비전(앞)마을'이 된 유래를 안내해 놓았는데 무얼 이야기 하고자 하는지 아리까리 하다 ㅎㅎ..
비전마을 유래인지, 대첩비 역사 이야긴지, 판소리 명창 이야긴지. . .
이제 그날 풀었던 썰을 정리-보충 해본다 ~
먼저 답날자료에 붙혔던 연표 부터 보면 ,
이 연표는 미국의 학자들(페어뱅크.라이샤워.크레이그 공저)이 1990년에 개정 출간한 <동양문화사> 속에 있는 것으로,
출간된지 30년이 넘었서도 서양인이 작성한 동아시아 관련 역사문화 개설서들 중 지금도 권위를 인정 받고있는 책.
이것을 살펴보면 동아시아 지역은 중-한-일-베트남까지 포함해 정치적 역사적 공동운명체임을 알 수 있다.
600년 이전의 앞시대 연표는 인용하지 않았지만 각 지역이 그렇게 큰 연관성이 없는데 반해,
불교문화가 중국을 통해 전해지는 4세기 무렵부터
각 지역의 정치적 변화의 시점들이 거의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일단 600년대,
중국땅은 5호16국 시대를 끝낸 수-당의 건국, 한반도의 신라에 의한 삼국 통합,
일본의 고분-아소카시대에서 다이카(대화)개신(645)으로의 변혁이 큰 시차없이 일어났고 ~
900년 전후,
중국은 당의 멸망과 5대10국의 짧은 분열기를 거쳐 송나라로 통합되고,
북방 유목+만주지역은 거란의 요나라로 정리되는데,
비슷한 시기 한반도는 후삼국 쟁패기를 거쳐 고려가 들어섰다.
일본은 조금 앞서 헤이안시대에서 후지와라 섭정(셋칸)기로 넘어갔다 ~
1100년대 중반에는,
중국은 송(북송)과 요는 여진족의 금나라에 자리를 내어주고 남송정부를 꾸렸고,
일본은 카마쿠라막부가 들어선 반면,
한반도의 고려는 왕조는 바뀌진 않았지만 무신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300년대 후반,
중국은 세계제국 원의 퇴출과 함께 한족의 명이 들어서고,
한반도는 북로남왜(홍건적+왜구)의 혼란함 속에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고,
일본은 난보쿠쵸(남북조) 분열기를 거쳐 무로마치막부로 권력이 이동하였다.
1600년대 초반에는,
중국은 임진왜란기 부터 시작된 50여년의 전쟁 끝에 여진족 청에게 정권을 넘겨야 했고,
일본은 100여년의 센가쿠(전국)시대를 통합한 노부나가-히데요시의 짧은 치세를 끝으로 도쿠가와의 에도막부시대가 되고,
한반도의 조선은 '50년 전쟁'의 직접적인 폐해속에서도 왕조는 바뀌지 않고 인조반정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마지막으로 1900년 전후에는,
중국은 청일전쟁의 패배와 내정의 혼란으로 청은 멸망하고 열강의 반식민지화와 내분등으로
50여년의 분열기를 거쳐 지금의 중국정부와 대만으로 나눠지고,
일본은 서양열강의 진출에 발빠르게 대처한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의 기틀을 잡아
청일-러일전쟁 승리의 전과물로 한반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반도는 쇄국과 개화 뒤섞임과 중국사대, 내정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대한제국으로 허울뿐이 황제국을 자처하였지만
곧 일본의 40여년 식민지가 되었다 타율적 해방을 거쳐 남과 북의 분단국가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이같은 변혁의 시점은 어떻게 언제 다가올지 알수는 없지만
급속한 정보화와 이동수단의 초고속화로 볼때
동아시아 아니 세계의 변화는 바로 1년후에 닥쳐와도 전혀 이상할것이 없겠다. . .
위 연표에서 동아시아의 역사적 변화를 개괄적으로 살폈고,
이제는 황산대첩의 그때에 집중해 보자 ~
위의 그림은 '북로남왜'의 위기에 처한 1300년대 후반기 한반도 고려의 모습이다.
먼저 '북로'에 해당하는 1360년 전후 홍건적의 침범으로 공민왕은 안동까지 파천을 하였다가
이성계등 북방 군벌의 활약으로 홍건적은 물러났고,
(홍건적에 한때 가담했던 주원장은 1368년 몽골 원을 쫒아내며 명을 건국함.)
'남왜'의 왜구는 1350년 경인년 왜구부터 시작해 1380년 황산대첩으로 이성계의 군대에 패해 기세가 수그러들때 까지
한반도 전역을 유린해 도탄에 빠트리고 한때 수도 개경까지 진출해 고려왕조 몰락의 위기까지 갔었는데,
최영, 최무선, 이성계, 정지, 박위등의 활약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앞서 말한 것 처럼 이성계의 북녘과 남쪽에서의 영웅적 활약으로
최고의 정치적 스타가 되어 역성혁명의 날개를 달게 되었다.
(이때의 왜구/1350~1389.를 '전기왜구'라 칭하고,
일본의 가마쿠라정권 말기 분열된 난보쿠쵸(남북조/1336~1392)시대의
난민 또는 남조정권의 후원으로 발생한 해적집단인데 거의 정규군대와 같은 전력을 지녔음.
이때는 주로 고려 한반도 땅을 침범하였고,
1500년대의 '후기왜구'/1523~1588.는 중국 영파(닝보)에서의 일본교역집단 간의 다툼으로 사작되,
주로 중국 동남부 해안지역을 침범하여 약탈과 교역이 복합된 성격의 해적/교역 집단을 말 함.
이 후기왜구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의 센고쿠(전국)시대/1467~1573.와 겹쳐
임진왜란과 북방 여진족 청에 의한 명의 멸망(1644)을 가져옴을 볼때,
북로남왜를 먼저겪은 한반도는 조선으로 바뀌고, 나중에 겪은 중국땅은 청으로 바뀐다.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 둘 다(이성계, 누루하치) 대륙의 변방 동북땅/만주+함경도 출신임은 우연의 일치만으로만 봐야할런지. . .)
조금더 돋보기를 가까이 하여 황산대첩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 보자.
1380년 8월에 진포(서천 또는 군산?) 앞바다에서 500여척의 왜구선단을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와 화약으로 불살라 버리자(진포대첩),
뭍으로 탈출한 왜구들은 금강을 따라 옥천-영동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 상주까지 올라갔다가
선산-성주를 거쳐 가야산 뒷편으로 거창땅을 지나 함양의 사근내역(수동)에 진을 친다.
한마디로 한반도 남부 내륙을 휘저어 놓아,
이동중 지나는 지역의 약탈과 살상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
사근내역에서 제대로 맞딱뜨린 남쪽 진주방면의 고려 배극렴(진주도원수)군을 무참하게 박살 내버린
왜구 아지발도군대는 자신감을 얻어 진주방면으로 내려가 남해바다로해서 달아나려던 생각을 바꿔
전라도 곡창지대로 방향을 틀어 팔량치를 넘어 지금의 인월땅에 이른다.
그리하여, 9월달에 남원쪽에서 도착한 이성계의 군대와 자웅을 겨루게 된다.
위 그림은 황산 부근의 지도로 노란선의 왜구와 초록색의 이성계 군사의 대치모습이다.
전투가 시작되고 왜장수 아지발도의 용맹함에 힘들어하던 고려군은 이성계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춰 벗겨지는 순간에 이지란의 화살이 얼굴에 명중해 죽임으로써
전세가 역전되고 이후 일방적인 전투가 되어가는데~
해가 넘어가 어둠이 몰려오자 다시 이성계는
달을 쏘아 붙잡아 두고(인월리), 바람도 끌어당겨 잡아두고(인풍리),
왜구들을 전멸 시켰다. . .
사실과 신화와 전설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
아래 람천의 피바위는 아지발도의 피가 흘러 붉게 물들어 '피바위'로 불리게 된다.
(사실은 철분이 많이 함유된 운봉지역 바위의 산화작용 결과 이겠지만~)
여기까지 확인하려 했으나 주차공간이 없는 난도로변이라
땡볕에 걷기싫은? 맘들을 참작하여 그냥 차안에서 가리키며 패쓰하고 말았고 ~
어쨌던, 이 전투의 결과로 왜구들은 기세가 사그라져 9년 후 그네들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박위가 정벌하여 전기왜구의 종식을 가져왔고,
이성계는 정도전등과 손을잡고 8년뒤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최후의 걸림돌인 정몽주 마져 제거하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료에 좀은 생뚱맞게 올려논 초상화 내지 자화상들에 대해 썰을 덧붙혀 본다.
이것을 올린 것은 황산대첩의 주인공 이성계의 초상이 존재하고 있는데다
사진이 생기기 전 인물의 모습을 알 수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초상화이고,
또한 그 인물의 됨됨이를 가장 사실 또는 진실에 가깝게 알려주는 동시에
그 그림을 통해서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의 진면목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
익히 잘 알려진 황산대첩의 영웅이며 조선 건국자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초상화.
왕이라 그런지 우리 초상화로는 드물게 정면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날카로운 눈매와 꼭다문 다부진 작은 입, 세월의 흔적을 알게하는 주름들...등등
실제의 모습과 그 인물의 성격과 마음 까지도 표현하려 하는 우리네 초상화의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같은 시대 서양에서는 정면상은 신(예수)만이 할수있는 그림에서
서서히 자화상이나 초상화도 정면상으로 그리기 시작해 외부적인 신을 향한 시각에서
인간의 자신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흔히 르네상스라 뭉텅거려 정의되는 시대 즉, 근대로의 시작.
100년 쯤전에(1920~21) 영국인 판화가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가
일제하의 한반도 땅을 여행하다 어느 사당에 걸린 영정을 보고 그린 것이라 추정되는 그림.
사실, 이순신(1545~1598)의 진면목을 알수 있는 자료는 그림으로는 남아있지 않다.
몇몇 이순신을 접한 인물들이 글로서 기록해 놓은 것과 자신이 기록한 '난중일기'를 통해 짐작 내지는 추측 할 뿐.
그래서 지금 우리 곁에는 수많은 이순신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 그림도 배경의 거북선들과 무인다운 기운을 한껏 품은 인물이기에
이순신 초상이라 여기고 싶지만 아니라는 반론도 있는 그림.
어쨋던, 지금 이 그림은 캐나다에 있는 키스의 손자에게서 송영달이라는 교수분께서 어렵게 구입해
있어야 할 곳을 찾다가 통영시립박물관에 기증해 우리곁에 안겼다.
그래도 100원 동전에 새겨진 표준영정 이순신 보다는 더 이순신 스럽지 않은가....?
위의 자화상은 영정조대 르네상스 예술계의 영수였던 표암 강세황(1713~1791) 70세때의 모습.
늙은 나이에 벼슬에 올라 머리에는 관모를 써고 있지만 옷은 평상복을 입어
머리와 몸이 따로있어 평범으로 돌아가고픈 그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얼굴과 옷깃에 명암법을 구사해 입체감을 주면서 우리에게도 근대라는 세계가 가까이 왔슴을 알린다.
아래는~
너무도 유명하고 어쩌면 세계 최고의 자화상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을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작품.
세상의 심오한 이치에 한껏 다가가 세상을 경세하고픈 뜻을 품었지만 시대가 품어주지 못하고 내쳐지게된
서러움과 안타까움과 인간적인 분노로 이글거리는 48년 살이의 모습이 온전히 녹아있다.
이제 서양의 초상화를 구경한다 ~
"살바토르 문디(세상의 구원자/예수)", 현재까지 세계 최고가 낙찰 그림(우리돈 6000억원),
개인이 소장한 유일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1510 전후 그림, 처음엔 70.000원에 낙찰 되었다
진품으로 확인되 복원을 거쳐 완성된 그림,
현재 소장자는 세계 최고 갑부반열에 있는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 그의 개인 요트에 있다는 ~
이슬람인이 그리스도의 그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상할 수도 있지만,
돈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모든건 정당화 될 수 있고. .
또한 이슬람에서는 예수도 한 사람의 선지자로 인정한다 하니 그럴수도 있겠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에 자본주의도 같이 싹트기 시작했으니,
자본 즉 물질과 부(돈)이 인간이 원하는 솔직하고 확실한 본능임을 숨기지 않는 시대가 시작 된 것.
저멀리 지중해의 한 구석에서 시작된 서구문명은 중세의 오랜 꿈속에서 다시 깨어나(르-네상스),
대항해시대와 이어진 제국주의의 바탕이된 자본주의라는 날개를 달고 세계를 휘저어 지금에 이르렀고 ~
'하이 르네상스'의 시작점이 된 이 그림이 현재진행형 자본주의의 총아가 된 것은
500년 넘게 상영되고 있는 한편의 드라마인지도. . . .
아래,
윗 그림과 거의 같은 느낌의 이미지로 그려낸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1500년경 자화상.
뒤러가 자본주의가 일찍부터 발달한 독일의 뉘른베르크 출신임을 볼때
자본주의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원근법으로 그려진 그림과 개인의 발견과 근대의 시작. . .
이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사이좋게? 찾아왔음이니 ~
뒤러의 자화상을 벤치마킹해 이 시대 자본주의의 슈퍼스타 스티브 잡스(1955~2011)도 흉내를 내고 ~
뒤러는 이렇게 얌전한 자화상도 그렸다.(청혼용 브로마이드? 그림)
서양그림의 대가들 내지 유명화가들의 자화상을 시대 순으로 올려보니,
지금과 가까워 질수록 자기 내면의 생각과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는 표현주의적 경향이 농후해진다.
마치 이곳 인월-운봉땅 동네나 절간을 지키는 장승배기들 처럼. . .
램브란트(1606~1669) 자화상.
고갱(1848~1903)과,
고흐(1853~1890)의 자화상.
피카소(1881~1973)의 젊을 때와,
좀더 나이 먹었을 때의 자화상.
프리다 칼로(1907~1954)의 슬픈 자화상.
실상사의 장승.
유곡리의 장승 둘.
이번 답날에 만나보려 했으나 의지리의 장승은 차안 이야기하다 놓치고,
승안사의 돌부처는 진주 고집남에서의 삼겹살 저녁회식으로 안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