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 덕산면 용몽리에 들어서자, 길가에 독특한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거무스름한 나무벽, 함석으로 된 합각지붕, 녹슨 철창이 달린 오르내리창…. ‘덕산양조장’이라는 나무간판이 걸린 목조건물은 주변의 건물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시큼하면서 구수한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든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과거의 건물 속에서 현재의 술이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술의 역사를 지켜온 곳
“이 나무를 보세요. 아직도 끄떡없어요.”
이방희 덕산양조 대표가 기둥과 천장의 목재를 가리키며 말했다. 밖에서 보면 2층처럼 보이는 높은 천장에는 단단한 목재들이 복잡하게 트러스를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 쓰인 목재는 백두산의 전나무와 삼나무를 압록강 제재소에서 다듬어 수로를 이용해 2개월 동안 운반해왔다고 한다.
천장 마룻대의 상량문에는 ‘소화 5년’이라는 건립 시기가 적혀 있다. 1930년 양조장을 세우고 탁주와 약주를 빚은 이는 1대 창업주인 이장범 사장이다. 그러다 1961년 아들인 2대 이재철 사장이 물려받았고, 1998년엔 3대 이규행 사장이 대를 이었다. 3대에 걸쳐 전통을 지키며 술을 빚어온 것이다.
그러나 우여곡절도 많았다. 한국전쟁 때는 군인들이 양조장을 소각하려 하자 이장범 사장이 그때 돈 45원과 장작 두 트럭, 소 한마리를 주고 설득했다고 한다. 또 1970년대 이후 탁주가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진천지역 탁주회사의 통합으로 덕산양조장은 1990년부터 10년간 폐쇄되기도 했다. 그러다 3대 이규행 사장이 2000년대 들어 다시 이곳에서 탁주와 약주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막걸리 붐과 함께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2014년 또 한차례 경영위기가 닥치면서 지난해부터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이방희 대표가 맡아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말통부터 주전자까지 옛이야기가 술술∼
“여기 어르신들에게 먼저 인사하세요. 이 항아리들이 나이가 더 많을걸요?”
이방희 대표가 전시실에 진열된 항아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커다란 술독 하나에는 ‘탁사 제3호 370ℓ 1963.9’라는 글씨가 흰색 페인트로 적혀 있다. 1960~1970년대 밀주 단속을 위해 표시한 것이라니, 술독은 그보다도 더 전에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고색이 완연한 외관과 달리 양조장 내부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출입구 왼쪽의 전시실은 과거의 모습을 재구성해놓은 곳.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조장 내부는 거의 예전 그대로였는데, 지난 5~9월 문화재청에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롭게 단장됐다. 양조과정에서 나오는 수분으로 인해 상한 내벽과 천장을 복원하고 전시공간을 만든 것이다.
전시실에는 양조장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물건들이 놓여 있다. 하얀 플라스틱 말통과 깔때기, 술을 거르는 체, 간이 증류기 등 술과 관련된 도구들은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또 벽에는 농촌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촬영지임을 알려주는 대본과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도 걸려 있다. 이 양조장이 배경이 된 <식객> 100화 ‘할아버지의 금고’ 편에는 양조장을 지키는 가족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며 100년, 200년까지
전시실이 과거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이라면 술을 만드는 발효실과 종국실은 과거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복원공사 전까지는 양조장에서 모든 작업을 했지만, 지금은 균을 배양하고 발효시키는 과정만 이 건물에서 한다. 목재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조건물 뒤편에 현대식 건물을 지은 것이다.
“오랫동안 술을 빚어온 목조건물에는 야생 효모균들이 서식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른 양조장처럼 별도의 효모를 넣지 않아도 배양이 잘됩니다. 덕산막걸리만의 술맛도 여기에서 비롯된 거죠. 그래서 술을 빚는 중요한 작업은 예전처럼 이곳에서 하고, 포장 등의 작업만 뒤쪽 건물에서 해요.”
양조장 건물은 술을 빚기에 알맞도록 과학적으로 설계됐다. 술 제조 때 발생하는 열을 배출하기 위해 천장을 높이고 천장에 고측창과 환기구를 단 것이다. 양조장의 통풍을 돕는 것이 또 있으니 바로 정문 앞에 늘어선 10여그루의 측백나무와 향나무다. 건립 당시부터 심어진 이 나무들은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막는 것은 물론 특유의 향으로 유해균의 번식도 막아준다.
더 놀라운 것은 벽체와 천장에 들어 있는 왕겨다. 술을 빚을 땐 온도와 습도가 중요한데, 90㎝의 두꺼운 황토벽 속에 든 왕겨가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또 발효실과 종국실 천장에도 푹신한 이불처럼 왕겨가 깔려 있다.
이렇듯 근대 양조장의 독특한 형태와 전통 양조기법을 이어온 덕산양조장은 2003년 양조장으로서는 최초로 등록문화재(제58호)로 지정됐다. 이제 새로운 진용을 갖춘 덕산양조장은 앞으로 양조장의 역사를 어떻게 써 나갈까? 이 대표는 이렇게 미래를 구상한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속에서 100년, 200년 이어가는 술도가를 만들고 싶어요. 누구든 추억을 떠올리며 술맛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이면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