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이야기(6)
퇴계 선생의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6일] 4월 9일(토) 배개나루(이포보)→ 강천섬(흔바위나루) (31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9일 퇴계 선생]
○ 여강(麗江)을 지나면서 세찬 비바람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웠다. ― 《퇴계집》
○ 내 친구 상사(上舍, 진사) 홍응길(應吉, 홍인우의 字)은 도학(道學)에 간절히 힘쓰더니 불행히 부친상을 당해 너무 슬퍼하다 죽었으니, 애통한 일이다. 응길이 일찍이 나에게 〈금강산유람록(金剛山遊覽錄)〉을 보여주기에 내가 서문을 써주었다. 지금은 모두 기억할 수 없다. 서울에서 동쪽으로 가는 배에서 우연히 한 중을 만났다. 바로 (홍군이) 금강산 유람하였을 때 길 안내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당시에 탐승하였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나는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부족하나마 시 한 편으로[詩軸(시축) 가운데 朴栗(박률)의 운을 次韻하여] 그리운 정을 표시했다. ― 《퇴계집》 (余友洪上舍應吉。求道甚切。不垂遭親喪。過毁滅性。痛哉。應吉曾示余以遊金剛山錄。余爲之敍題。今不復能記。東歸船上。偶逢一僧。乃所與導遊山者。能言當日探歷事。余感涕久之。聊以一詩[次詩軸中朴栗韻]*見情云。)
楓岳久聞天下勝 풍악구문천하승 전에 풍악산이 명승이란 말 들었는데
洪君可惜後來賢 홍군가석후래현 애석하게 홍군이 뒤늦게야 왔네.
盪胸曾喜憑遊錄 탕흉증희빙유록 일찍이 유람기 읽고 가슴 뛰었는데
隔世今嗟遇伴禪 격세금차우반선 이제 스님 만나 함께 하니 격세지감 드네.
只爲相同從學道 지위상동종학도 서로 만나 함께 도를 배웠지만
非緣長往獨求仙 비연장왕독구선 오래 지냈는데 신선될 인연은 아니었네.
冷烟風雨驪江上 냉연풍우여강상 여강에 찬 연기 끼며 풍우 치는데
回首平生思惘然 회수평생사망연 고개 돌려 평생을 돌아보니 뜻이 서글프네.
- 융경 기사년(선조 2, 1569) 늦봄 퇴수 쓰다(隆慶己巳 暮春 退叟書)
◎《退溪先生文集》 卷之五 續內集 ☞ * 《퇴계집》을 편집한 류성룡이 시 제목에서 박률(朴栗) 이름자와 '차운(次韻)'한 내용을 빼버렸다. 69세 이황이 40세에 요절한 제자를 벗으로 칭하며 사제의 정을 담은 시로써 유명해져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 등 다수의 책에 옮겨져 널리 알려졌다. 박률의 시를 차운했다는 내용은 빠져있다. 홍인우의 아들 홍진(洪進)이 이이(李珥)에게 편집을 부탁하여 ‘편집인 율곡’이 간행한 책이 되며 유명세를 탔다. 박률은 홍인우가 죽은 지 4년 후 명종 13년(1558)에 39세 나이로 벼슬에 나아간다. 식년시 갑과 2등으로 급제했는데 그 때의 과문(科文) 2편이 《진영수어(震英粹語)》에 실려 있다. 《진영수어(震英粹語)》는 ‘동쪽 영재들의 빼어난 말(글)’이란 뜻으로, 과제(科題) 별로 모범답안지를 선별하여 과거를 준비하는 사림들에게 필독서로 전국의 고을에 보급된 책이다.
◎ 며칠 뒤, 선생이 (마지막 귀향길) 죽령을 넘기에 앞서 손자 이안도와 기대승, 김취려 등 문인에게 보냈던 편지에 의하면, 여주강을 지날 때에 세찬 비바람 때문에 춥고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도 배 안에서 승려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이미 고인이 된 여강의 벗 홍인우(洪仁祐, 1515~1554)가 금강산을 유람할 때 길 안내를 하며 함께 다녔던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홍인우와의 금강산 유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생은 옛 벗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기록하고 지은 시(詩)가 《퇴계집》에 실려 있다.
* [2022년 4월 9일 토요일 귀향길 재현단]
▶ 오전 8시,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단은 배개나루 부근 이포대교 아래 주차장에서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였다. 배개나루는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와 건너편 대신면 천서리를 잇는 남한강의 대표적인 나루였다. 1991년 이포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배개나루는 충주와 한양 사이의 사람과 물자를 나르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포(梨浦)’는 ‘배개’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곳 천서리는 ‘막국수’로 이름이 나 있어 요즘 주말이면 성시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이다. 어제까지 그렇게 맑던 날씨였는데 … 이 또한 하늘의 조화이다. 1569년 퇴계 선생도 배개나루를 지날 때 차갑고 엄습한 비바람이 몰아쳐 심한 고통을 겪으셨다는 기록[제자 김취려에게 보낸 편지]이 있다. 그러나 오늘을 비록 흐리지만 차가운 바람은 불지 않는다. 귀향길 재현단 일행이 주차장에 둥글게 서서 이동신 별유사로부터 오늘의 일정을 듣고 〈도산십이곡〉제5곡을 반주음에 맞추어 다함께 노래했다.
산전(山前)에 유대(有臺)하고 대하(臺下)에 유수(流水)로다
떼만한 갈매기는 오명가명 하거든
엇디다 교교백구(皎皎白駒)는 멀리 마음 하는고
— 산 앞에 대(臺, 정자)가 있고 대(臺) 아래에 물이 흐른다 / 떼를 지어서 갈매기들은 오락가락하는데 / 어찌하여 하얀 말은 멀리 마음을 두는가! … 아름다운 자연을 완상할 수 있는 누대가 있고 그 앞에는 유유히 맑은 강물이 흐른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는 유현한 삶의 풍경이다. 부족한 것이 없다. 이는 비로소 정신적 가치 즉 도(道)의 세계에 이르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교교백구(皎皎白駒)’는 ‘흰 말’로 뜻하는데, 도를 추구하는 선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선비들이 세속적인 가치만을 좇아서 마음을 멀리 두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단순한 대조법으로 실태를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끝내 지향해야 할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향해 딴 마음을 먹지 않고 도(道)를 추구하겠다는 자기 경계가 함축되어 있다.
오늘의 귀향길 재현단 — 이포대교(여주 천서리)
▶ 귀향길 재현단은 이동신 별유사의 구령에 따라 전신 준비운동을 하고 오늘의 여정에 돌입했다. 선두의 이한방 교수를 비롯하여 의관을 갖추어 입은 이광호 박사, 이재찬·이원필 님. 홍덕화 님, 송상철·오상봉 님 등이 대열을 이루고 그 뒤에 평상복을 입은 국학진흥원 권진호 박사, 어제 서울에서 내려온 국제퇴계학연구회의 나대용 박사·정학섭 박사, 강희복 박사, 윤재철 님, 그리고 이동진·이선기·이동식·이문원 님 등 후손방손들과 이상천, 진병구, 진현천 님 등 종주단이 뒤를 따랐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안창섭 과장이 안전요원 역할을 하고 필자가 선두에서 향도를 맡았다.
[오늘의 여정] ☞ 배개나루 이포보 — 강천섬 굴암리(31km)
오늘은 천서리 이포대교 아래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강천섬 앞 굴암리까지 31km를 걷는 여정이다. 귀향길 노정 중에 하루의 일정으로는 가장 긴 구간이다. 퇴계 선생은 자기 수양의 중심에 참다운 마음을 간직하는 방법으로 경(敬)을 두셨다. 우리 귀향길 재현단은 서울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걸으면서 선생의 그 뜻을 마음에 두고 몸의 고단함을 마다하지 않고 나선 것이다. 비록 멀고 먼 길이지만 퇴계 선생의 삶과 뜻을 새기고 자기성찰의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453년 전, 1569년 오늘 퇴계 선생이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신 남한강을 바라보며 강변의 자전거길을 따라 걸어가는 여정이다. 출발 당시의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늘고 성긴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다. 바이크로드 바닥에 '여주보 12km'를 써 놓았다. 강변의 둔치의 길을 따라 가다가 이포보 오토캠핑장을 지나면서 제방(堤防)의 길로 접어들었다. ‘여주강저류지’라는 팻말이 보인다. 이곳 여주군 대신면 양촌리 설치된 저류지(貯流地)는 홍수가 날 때 농지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물을 저장하기 위한 시설이다. 지금은 수로와 습지 등에 식물과 어류, 조류, 양서류 등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는 자연생태공원이다.
여주시 대산면 양촌리—당산리 강변길
길은 아득하게 직선으로 뻗어 있다. 성긴 빗방울도 그치고 날씨가 흐리지만 공기는 신선했다. 얼마 가지 않아 광주(곤지암)-원주간고속도로(제2영동선) ‘남한강대교’ 아래를 지나고 나서도 길은 직선으로 아득하게 뻗어 있었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남한강에서 준설한 모래들을 산처럼 쌓아 놓은 야적장을 지나고 양촌리 들판이 보이는 긴 제방이 이어진다. 촉촉한 보도의 좌우에 노란 산수유가 피어 정취를 더해주었다. 양평의 물소리길이 벚꽃이라면 여주는 강변에는 산수유꽃이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면 길목에 정원이 아름다운 이층 양옥집이 보인다. ‘이포보 강변팬션’이란 작은 팻말이 붙어 있다.
우측은 이포보 담수로 인하여 강물이 호수를 이루고 좌측은 한가로운 들판과 띄엄띄엄 집들이 보였다. 차도와 바이크로드 그리고 보행자길이 구분된 길이 이어진다.
여주시 대신면 당신리 강변, 계속 직선의 아득한 길이 이어진다. 비상시에 비행기 활주로로 쓰이는 너르고 팍팍한 광장의 길을 한참 동안 걷기도 했다. 아득하고 먼 길이었다. 꽤나 지루하고 힘든 길이다. 오늘은 국제퇴계학연구회 인사들과 후손방손들이 재현단에 합류하여 서로 담소를 나누면서 함께 걸으니 지루하지 않고 힘이 많이 난다.
후포천 다리 건너 — 당산1리 고개를 넘다
길고 먼 직선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후포천을 만난다. 천변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다리를 건너 당산1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다시 강변의 직선의 길로 들어섰다. 자주색 아스콘 길바닥에 '여주 2km'가 씌어있다. 멀리 여주보 구조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중도와 함께 강안의 둔치는 습지로 이루어져 있다. 길목에 2018년 여주시장의 이름으로 설치한 ‘어량진(魚梁津) 나루’에 대한 해설판이 있다.
어량진 나루터
‘어량진(魚梁津) 나루터는 여주 대신면 가산리에 위치한 남한강 나루터 중 하나로 여주와 한양을 잇는 한강의 유명한 황포돛배의 정박지였다. 또한 가산리 마을 주민들이 백석리 구진머리 방면으로 물을 건너 여주장이나 이천장을 갈 때 이용했던 나루터이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여주목〉 고적 부문에는 나루터 인근의 지역이 어량소(魚梁所)라고 표기되어 있다. …어량진 나루터는 마을 주변에 당산사창(堂山社倉)이 있었고 양평, 여주, 등신(현 대신면) 방면으로 가는 세 갈래의 길이 만나는 중심 지점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번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강변의 지형이 오래전에 변형되어 50여 년 전에 폐쇄된 것으로 전해진다.’ …
대신면 상구리에서 발원하여 가산리에서 남한강에 유입되는 한천을 만났다. 한천에 가설된 150m의 긴 가산교를 건너서 여주보 둔치의 조성된 너른 공원에 들어섰다. 휴게소가 있는 쉼터에서 잠시 다리를 풀고 휴식을 취했다.
남한강 여주보
‘여주보’는 남한강 동쪽의 여주시 대신면 천남리와 서쪽의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를 잇는 보(洑)이다. 용수 확보와 이상 기후에 따른 홍수 예방, 수질 개선과 생태계 복원, 주민을 위한 복합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강 중심의 지역 발전을 목표로 하는 4대강 정비 사업에 따라 추진되었다. 보(洑)의 길이는 525m로 여주에 세종대왕릉이 있는 것을 감안해 세종대왕의 발명품인 해시계와 물시계의 형상으로 디자인하였다.
발전시설용량 4950kWh의 소수력발전기가 운영 중이다. 2~3m 높이의 수문 12기가 유압식 승강장치에 의해 상하로 오르내리며 수위를 조절한다. 우안에 자연형 어도가, 좌안에 인공어도가 설치되어있다. 왼쪽 지역에는 관리소 및 홍보관과 전망대가 위치해있다. 발전소 벽에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어제 서문이 새겨져 있다. 보의 교각 형태는 용(龍)을 형상화했으며, 보의 우측에는 앙부일구(仰釜日晷)를 형상화한 세종광장이 있다. 보 공도교에는 인도와 자전거길이 있다. 4대강 자전거 길로 구성되어 한강종주 남한강 구간이다.
왕대리 강변길 — 여주시 세종대왕면
▶ 조형미가 아름다운 여주보 다리[공도교]를 건너면, 우리가 가야할 자전거길이 왼쪽으로 껶여 여주시내로 내려간다. 자주색의 아스콘 포장이 되어 있는 남한강 강변 길이다. 직선의 도로를 한참 걸어 내려오면 왼쪽의 강안에 수중도 ‘양섬’의 공원이 있고, 그 위로 여주에서 양평으로 이어지는 37번국도의 완강한 콘크리트 세종대교가 남한강을 가로 질러간다. 양섬은 남한강의 하중도(河中島)로 강의 유속이 느려지면서 퇴적물이 쌓여 강(江) 가운데에 만들어진 섬이다. 여주8경 중 제5경 양도낙안(羊島落雁)으로 기러기떼가 내리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양섬에는 야구장과 여주시민들의 산책로 및 쉼터로 잘 꾸며져 있고, 캠핑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영릉(英陵) — 세종대왕과 왕비릉
양섬을 지나는 강변 길 우측의 산록에 여주의 ‘영릉로’로 불리는 왕대리 333번 국도가 지난다. 우리가 걷는 강안의 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도로인데, 바로 그 선왕동고개 위에 세종대왕릉[英陵]이 있다.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 영·녕릉지구에는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이 있다.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그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이고, 영릉(寧陵)은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이다. 한국의 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양섬과 강변의 습지 위로 뻗어 있는 세종대교의 아래를 지나서, 소양천을 거슬러 올라가 왼쪽의 다리[하리 보도교]를 건너면 남한강변 여주시 하리이다. 청심로(하리)에 있는 ‘조선막국수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봄 더위에 지친 길손에게 시원하고 구수한 육수는 가히 일품이었다.
여주시 중심의 강변길 — 여주대교
식사 후, (구간 걷기에 참석한 일부 인사는 상경을 하고) 재현단은 오후의 장정에 돌입했다. 쾌청한 날, 오후의 햇살은 눈부시고 따가웠다. 좌측에 남한강을 끼고 있는 제방 아래의 강변길이 바이크로드이다. 직선으로 축조된 강안의 길. 오른 쪽 높은 제방 너머에는 여주의 중심 시가지가 있다. 강변의 고층아파트와 여주시청 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좌측의 남한강 건너, 여주시 오학동은 여주의 신도시로, 고층건물과 아파트 군이 맑은 하늘 아래 산뜻하게 솟아 있다. 길의 저 만큼 앞에 여주대교가 보이는데, 그 강 건너편에 높은 고층건물과 일성콘도가 보이기도 했다.
여주대교 아래에 이르렀다. 여주대교는 여주의 관문이자, 오학동과 천년 고찰 신륵사로 가는 다리이다. 1964년 8월에 처음 다리가 준공됐지만, 노후화로 인해 이 다리를 그대로 놔둔 채 바로 옆에 새로운 다리를 세웠는데, 길이는 500m, 너비는 9.4m 지금의 여주대교다. 이전의 여주대교를 편의상 구(舊) 여주대교로 부른다. 새 여주대교가 생긴 뒤에는 인도(人道)로만 사용되고 있다.
영월공원 — 호국영령 추모비
‘여주대교’ 앞에서, 재현단 일행은 다리를 건너지 않고 나무테크 통로를 따라 충혼탑과 산정에 영월루(迎月樓)가 있는 ‘영월공원’으로 들어갔다. 귀향단 여정이 여주 시내도로(주내로)를 지나서 조포나루터 공원을 경유하여 가야하기 때문이다. 공원 입구에 ‘麗興閔氏貫鄕碑’(여흥민씨관향비) 자연석 비가 있다. 고개를 돌려 좌측을 보니 언덕마루에 영월루(迎月樓)가 보이고 그 아래 기념비들이 즐비하다. ‘여주군6·25참전기념비’와 ‘대한민국무공수훈자공덕비’가 나란히 서 있고 그 앞에 순백의 대리석으로 만든 ‘그리스군참전기념비’가 서 있다. 그러고 보면 영월공원은 호국영령을 추념하는 공원이다.
영월루 — 마암의 전설(여흥 민씨 시조의 탄생)
영월루 아래에는 1958년에 이건된 창리 삼층석탑(보물)과 하리 삼층석탑(보물) 이 있다. 영월루(迎月樓)는 큰 바위 언덕에 있는 고풍스런 누각으로, 누대에 오르면 푸른 강물과 신륵사의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학동모연·팔대장림·마암어등 등의 여주팔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이다. 시원스레 탁 트인 전망으로 가슴까지 후련해진다. 영월루는 원래 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신헌수 군수가 지금에 자리에 누각으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누각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괴암이 절벽을 이루는데 바위 위에는 힘 있는 필치로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 말엽에 여주목사를 지낸 이인응(李寅應)이 썼다고 한다. 이 바위 밑 암혈(巖穴)에서 여흥 민씨 시조가 탄생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암혈에서 황마(黃馬)·여마(驪馬)가 승천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이것이 구전되어 여주군명을 ‘황려(黃驪)’라 칭했다는 것이다. 이 황려의 군명은 후에 ‘여흥’이라 했고 그것이 다시 지금의 ‘여주’로 바뀐 것이다.
조포나루 강변공원
영월공원을 가로질러 여주시내 도로에 들어섰다. 여주 시내에서 동쪽의 외곽으로 나가나는 345번 지방도로[주내로]이다. 그 완만하게 내려가는 인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강천보 4km’ 자전길 이정표를 만나게 되고 거기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니 다시 남한강의 강변공원(유원지)이다. 바로 ‘조포나루’가 있었던 강변이다. 지금은 유람용 황포돛배 선착장이 있는 곳으로 예전의 조포나루이다. 남한강 건너ㅇ 여주시 천송동에는 천 년 고찰 신륵사(神勒寺)가 있다. 남한강의 대표적이 명찰로 보물 226호 전탑(塼塔, 벽돌로 쌓은 탑)이 있으므로 ‘벽사(甓寺)’라고도 한다.
여주 신륵사
여주 신륵사(神勒寺)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봉미산(鳳尾山) 아래 남한강에 임에 있는 고찰이다. 신륵사는 깊은 산중이 아닌, 푸른 물이 넘실대는 강변에 임해 있어 그 풍광이 아름답다. 강가의 바위 위에 팔각정이 있고 그 옆에 우뚝 ‘다층전탑’이 서 있어 더욱 아름다운 절경을 이룬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1379년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으며, 1382년 대장각 안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 때 억불정책으로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 영릉의 원찰이 되었고, 1472년 절이 확장되고 다음 해에 보은사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그 후 수차례 중수하였다.
신륵사(神勒寺)는 남한강변에 위치하여 그 풍경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신륵사에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등이 있으며,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조포나루 — 퇴계선생과 홍인우 이야기
지금의 황포돛대 선착장 자리에 예전에 ‘조포나루’가 있었다. 우리 재현단은 신륵사가 건너다보이는 조포나루 강변공원 벤치에 다리를 풀고 휴식을 취했다. 국제퇴계학연구회 회장이신 이광호 박사가 ‘퇴계 선생과 제자 홍인우에 대한 이야기와 퇴계 선생이 지은 시(詩)를 소개하고 설명했다. ☞ 선생의 시는 이 글의 앞부분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9일 퇴계 선생]에서 소개했다. …
… 치재(耻齋) 홍인우(洪仁祐, , 1515~1549)는 퇴계 선생이 서울에서 자주 만나 의리를 토론하던 벗이자 제자였다. 그로나 부친의 상례를 치르면서 너무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선생이 동지들과 함께 힘을 모아 장례를 도왔다. 생전 홍인우가 〈금강산유람록〉을 짓자 선생이 그 서문을 쓴 일이 있었다. 그리고 1569년 3월,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에 뜻밖에도 15년 전에 고인이 된 옛 제가 홍인우가 금강산을 유람할 때 길잡이를 해준 승려를 우연히 만났다. 승려에게서 당시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퇴계는 몹시 아꼈던 제자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시(詩)를 지었다. 오늘 조포나루를 바라보는 남한강 현장에서 이광호 박사가 옛날의 현장에서 그 시를 소개하고 설명을 베푼 것이다. 저간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시를 다시 인용한다.
楓岳久聞天下勝 풍악구문천하승 전에 풍악산이 명승이란 말 들었는데
洪君可惜後來賢 홍군가석후래현 애석하게 홍군이 뒤늦게야 왔네.
盪胸曾喜憑遊錄 탕흉증희빙유록 일찍이 유람기 읽고 가슴 뛰었는데
隔世今嗟遇伴禪 격세금차우반선 이제 스님 만나 함께 하니 격세지감 드네.
只爲相同從學道 지위상동종학도 서로 만나 함께 도를 배웠지만
非緣長往獨求仙 비연장왕독구선 오래 지냈는데 신선될 인연은 아니었네.
冷烟風雨驪江上 냉연풍우여강상 여강에 찬 연기 끼며 풍우 치는데
回首平生思惘然 회수평생사망연 고개 돌려 평생을 돌아보니 뜻이 서글프네.
— 홍인우의 〈금강산유람록〉에는 선생이 귀향길에 배에서 만난 승려를 ‘여강벽사승(麗江甓寺僧)’이라고 적었는데, ‘벽사(甓寺)’는 바로 여주 ‘신륵사’의 별칭이다. 이를 통하여 선생이 승려를 만난 곳은 신륵사 앞에 있었던 ‘조포나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배가 조포나루에 잠시 들렀을 때, 우연히도 그 승려가 배에 탔던 것이다. 그를 통하여 선생은 홍인우의 옛일을 듣고 그리워하였으니, 이는 조포나루에서 흔바위나루로 가는 중간이었을 것이다.
홍인우(洪仁祐)에 대한 행장(行狀)은 본고 전편(제5일)의 ‘기천서원’ 편에서 자상하게 소개한 바 있다. 홍인우 38세 때 한양에서 퇴계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접한 이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편지를 질문하는 등 한결같이 스승으로 존숭하며 배웠기에 퇴계의 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에 올라 있다. …
‘한편 퇴계의 문집에는 홍인우에게 보낸 편지 5통과 답한 편지 2편, 홍인우 관련 시편과 만사, 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편지의 주된 내용은 일상적인 학문에 대한 가르침과 금강산 유람을 위한 ‘관동록’을 위해 퇴계가 쓴 서문에 관한 것이다. 퇴계는 홍인우의 아버지 홍덕연의 신도비문을 짓기도 했다. 이를 통해 홍인우에 대한 퇴계의 사랑과 여망이 컸고, 그런 만큼 일찍 떠나보내야 했던 안타까움도 컸음을 알 수 있다.‘ ☞ 박경환, 이광호 외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푸른역사, 2021. p. 122)
여주시 연양동 강변 제방길—이호대교—강천보
▶ 조포나루 강변공원에서 강천보까지는 직선의 제방 길 바이크로드, 주말을 맞아 둔치에는 가족 단위의 캠핑족이 넘치고 우리가 걷는 제방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나 오토바이크를 즐기고 있었다. 길의 좌측은 남한강 둔치의 습지이고 오른쪽은 생태공원으로, 연꽃연못, 야외무대, 체육장이 조성되어 있는 ‘금은모래공원’이다. 길은 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다. 비록 봄 햇살이 따갑지만 바람결이 시원했다. 이곳 여주와 원주를 잇는 ‘42번 국도 이호대교’ 아래를 지나고 나니, 금방 남한강을 가로질러 가는 교량형태의 구조물이 보인다. 강천보이다. ‘강천보’는 여주시 단현동과 강천면 이호리를 가로지르는 남한강 보(洑)이다. 상판은 황포돛대를 형상화한 구조물이다.
독특한 디자인으로 건축된 ‘강천보 전망대’가 있는 공원에 도착했다. 재현단 일행은 공원 앞 사각정 쉼터에서 다리를 풀고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의 지도위원 노복순 님이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환담하며 피로를 풀었다.
강천보 건너, 남한강 동쪽 강천면 가야리 강변길
성찰과 고뇌, 구도의 길 —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귀향길 재현단은 ‘강천보’의 통행로[공도교]를 건넜다. 보를 건너자마자 길은 q자 형태로 감아 돌아서, 이제 남한강 동쪽의 강변으로 접어들었다. 여주시 강천면 가야리이다. 이 길은 신륵사에서 강천섬까지의 ‘여강길 3코스’로 설정되어 있다. 길은 직선으로 뻗어있다. 원근법의 소실점이 보이지 않는, 먼 강변의 길 — 아, 그 길의 아득함이여. 이 길은 선생의 높은 학문과 덕망의 경지에 이르는 아득함을 은연히 암시하는 것 같았다. 어렵게 얻은 마지막 귀향길 ― 선생이 아호를 ‘퇴계(退溪)’라 하시고 무엇보다 ‘물러남’을 구하셨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선생은 스스로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하는 군자(君子)의 길을 추구하는 도학자였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닌, 소위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통해 인간의 착한 본성, 참다운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도산서원 유물전시관[玉振閣]에 선생의 친필 유묵 ‘愼其獨’(신기독)과 ‘無不敬’(무불경)이 있다. — ‘愼其獨’(신기독)은 《중용》에 나오는 말로, 전시관 해설에는 ‘홀로 있게 되면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흐트러지기 쉬우므로 늘 조심하라’는 뜻이라 했는데, 이광호 박사는 '자기 혼자만 아는 마음의 자리를 삼가다'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無不敬’(무불경)은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반드시 조심하고 공경(恭敬)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퇴계 선생의 마지막 귀향은 ‘돌아감’을 통해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참다운 도(道)를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온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아지기[善人多]’를 바라는 것이었다.
— 필자가 귀향길 종주에 임할 때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라는 재현단의 표제를 마음에 새긴 것도, 선생의 거경정진(居敬精進)하는 삶을 통해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 자신을 성찰(省察)하는 뜻이었다.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필자의 70생애는 나름 보람도 있었지만, 젊음은 설익은 격정(激情)이 많았고 그리하여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이 적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내 탓’이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갔고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다. 어찌할 것인가. 이제 ‘청산에 가는 날까지’ 비록 멀기는 하지만 ‘그분의 마음’을 좇아가는 것이 상수라고 생각했다. 그런 뜻에서 선생의 귀향길 종주는 나만의 절실한 ‘고뇌(苦惱)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현이 이르기를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논어(論語) 〈이인(里仁)〉》)고 하셨으니, 그 절절하고 참다운 길[道]이 얼마나 멀고 아득한 것인가.
그러나 이 길은 아무리 멀고 힘들어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의 길[道]을 따라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도(道)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니, (거기에서) 벗어나면 이미 길[道]이 아니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라고 했다. ― 세상의 삶이 온통 물질주의(物質主義)에 경도되어 있고, 세상 사람들이 마음보다 몸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에, 참다운 마음, 인간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눈앞에 보이는 저 먼 길보다 ‘마음의 길’은 더 힘들고 먼 길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렇게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 일인가!
‘여주팔경’ — 해설 입간판
멀고 지루한 길목에, ‘아름다운 여주팔경(麗州八景)을 함께 걷는 길’을 소개하는 〈입간판〉이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
제1경은 ‘신륵모종(神勒暮鐘)’으로, 신륵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이고, 제2경은 ‘마암어등(馬巖漁燈)’으로 마암 앞 남한강에서 등불을 밝히고 고기 잡는 풍경이요, 제3경은 ‘학동모연(鶴洞暮煙)’인데 강 건너 학동에 저녁밥 짓는 연기이며, 제4경은 ‘연탄귀범(燕灘歸帆)’으로 돛단배가 제비여울을 지나 청심루로 향하여 돌아오는 풍경이고, 제5경은 ‘양도낙안(羊島落雁)’인데 양섬에 기러기 떼가 내리는 모습이요, 제6경은 ‘팔수장림(八藪長林)’으로 오학동 강변의 무성한 숲이 세종대왕의 8대군처럼 영릉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며, 제7경은 ‘이릉두견(二陵杜鵑)’으로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에서 우는 두견새 소리이고, 제8경은 ‘파사과우(婆娑過雨)’로 여름철 소나기가 파사성을 지나 청심루를 향해 들이치는 풍광을 말한다. — 그러나 여주팔경은 4대강 정비 사업 등으로 여주 남한강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으므로 몇 군데를 제외하고 옛날의 정취와 풍경이 거의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남한강대교—강천면 굴암리 강변길
머리 위로 강을 가로질러 온 ‘인천-강릉 영동고속도로 남한강교’가 지나간다. 일행은 그 콘크리트 다리 아래 그늘에서 잠시 땀을 식히고 휴식을 취했다. 이미 30km 가까이 걸었으니 다리는 경직되고 온몸은 무거웠다. 잠시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강천면 굴암리 제방 길이다. 4월의 햇살이 비록 따갑기는 하지만, 맑은 하늘, 신선한 강바람이 쾌적하게 온몸을 감싼다.
오늘의 도착점 강천면 굴암리 — 강천섬(흔바위나루)
드디어 오른 쪽으로 강천섬의 유원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퇴계 선생이 1569년 이날 머물렀던 흔바위나루는 강천섬이 있는 굴암리에 약 2km 못 미치는 지점이었지만, 그곳에는 나루터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강 건너편의 여주시 점동면 ‘흔암리’에 그 지명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흔바위나루는 강천면 굴암리와 점동면 흔암리를 잇는 나루였다. 이곳 여주 남한강 긴 수중도인 강천섬은 기다랗게 누어있는 모습이다. 시민들의 유원지로 개발된 섬에는 굴암리에서 들어가는 다리가 있고 그 남쪽에도 다리가 있다. 우리가 편하게 가는 길은 강천섬으로 들어가서 그 남단의 다리를 건너가야 하지만, 그 길은 거리가 멀어서, 강변길 끝에서 이어진 산길로 접어들었다. 강안의 산길은 좁고 가파른 산비탈 길이어서 지친 다리가 더욱 아프다. 그렇게 산길을 넘으니 아, 오늘의 도착 지점인 굴암리이다.
▶ 오늘은 이포대교에서 강천섬까지 장장 31㎞의 먼 길을 걸었다. 다리가 아프고 온몸이 물먹은 솜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런데 산길을 넘어 오늘의 종착지 굴암리에 도착하니 마음은 오히려 맑은 기운으로 충만했다. 장거리 순례를 마친 귀향길 재현단 일행은 길목에 길게 늘어서서 무탈하게 여정을 마친 오늘에 감사하며 내일을 다짐했다. ― "상읍례(相揖禮)로써 오늘의 귀향길 일정을 마치겠습니다." 도산서원 이동신 별유사의 말씀에 따라 허리를 정중히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경(敬)을 따르는 퇴계 선생의 귀향길, 그 뜻을 받들어 걸어온 순례자들의 등 뒤로 강천섬의 저녁 노을이 눈부시게 내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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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이한방 교수의 선몽대(仙夢臺) 이야기
먼 여정을 걸어오는 동안, 무거운 발걸음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선두의 이한방 교수(전 대구대 지리학과)는 서울을 출발하면서 줄곧 휴대용 마이크를 잡고 끊임없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특히, 오늘의 이포대교―강천섬 여정에서는 퇴계 선생의 방손인 이한방 교수가 예천의 선몽대 이야기를 들려주어 주목을 끌었다. 필자가 ‘2020-낙동강 1300리 종주’ 중에, 일정상 탐방하지 못했던 곳이라 더욱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한방 교수가 설명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선몽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머리속에 선연히 그려졌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경치만큼이나 당대의 최고의 명사들이 찾아와 시(詩)를 남기고 갔다 하니 더욱 선망하게 되었다. 언젠가 날을 잡아 꼭 찾아가 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 그런데 실제 가 보니 명불허전이었다.
[별도 탐방] 예천 백송리 선몽대 — 2022년 5월 31일
드디어 선몽대를 탐방할 기회가 왔다. 필자는, 지난 5월 31일 이한방 교수의 안내로, 이선기 회장, 이광호 박사, 이명기 선생, 이동식 작가(전 KBS 부산총국장)로 구성된 문진(聞眞, 문경의 진성)의 인사들과 함께 선몽대를 직접 탐방하였다. 오월의 하늘이 티없이 곱고 맑은 햇살이 내리는 화창하고 눈부신 날이었다.
선몽대(仙夢臺)는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내성천에 임해 있는, 약 450여년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곳이다. 우암(遇巖) 이열도(李烈道, 1538~1591)가 1563년 26세 때 지은 누정이다. 우암의 할아버지 이하(李河)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둘째 형으로 예천 박심의 딸과 결혼해 예천 용문의 금당실에 살았다. 그 둘째아들 이굉(李宏)이 이곳 백송마을로 들어왔다. 선몽대를 지은 예천훈도 이열도는 이굉의 둘째 아들이요 이하의 손자이다. 그러므로 이열도(李烈道)는 이황 의 종손(從孫)이다. 그리고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한 제자였다. 이한방 교수는 이하(李河) 공의 15대손이다.
선몽대 소나무숲 ― 선대동천
우선 선몽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울창한 송림(松林)이 시야를 압도한다. 이 송림은 수해방비림, 방풍림, 수구막이숲으로 비보림(풍수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숲)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안내판에 의하면, 선몽대 일원은 평사낙안형으로, 맑은 내성천의 백사장과 송림과 어우러져, 절벽 위의 누정(樓亭)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선몽대 일원은 2006년 11월 국가명승 19호로 지정되었다.
▶ 울창한 소나무 숲에는 두 개의 비(碑)가 있다. 그 하나는 화강암을 투박하게 다듬은 ‘善臺洞天’(선대동천) 비(碑)이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노닐만한 깊고 아름다운 곳을 말한다. ‘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山河好大’(산하호대) 비가 서 있다. ‘산이 아름답고 하천은 장대하다’라는 의미다. 이 비는 후손들이 ‘선몽대지(誌) 간행’을 기념하여 1975년 11월에 세운 것이다.
우암선생유적비(遇巖先生遺蹟碑)
▶ 솔숲 안쪽에 ‘遇巖先生遺蹟碑'(우암선생유적비)가 있다. 당당한 형상의 거북이 등[龜臺] 위에 까만 오석(烏石)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화강암 이수(螭首)를 얹었다. 비석의 좌우와 후면에는 우암 선생의 행장(行狀)이 새겨져 있다. 우암(遇巖) 이열도(1538~1591) 공은 내외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경산현감을 지낼 무렵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 예천 백송리 고향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그가 독서당 삼아 지은 내성천 강가의 누대가 선몽대인데, 그 이름을 지은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퇴계, ‘仙夢臺’(선몽대) 이름을 짓고 시를 쓰다
퇴계 선생은 어느 날 밤 꿈에 신선이 되어 아름다운 선경(仙境)을 유람하였다. 이후, 꿈에서 노닐었던 그 선경이 눈에 아른거리고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예천 백송리에 사는 제자 이열도(李烈道)가 내성천 가에 정자를 짓고 그 일대의 풍경을 일러주면서 누대(樓臺)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이열도가 말하는 그 풍경을 들은 퇴계는 깜짝 놀랐다. 그곳이 바로 자신이 꿈속에서 신선이 되어 노닐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퇴계(1501~1570)는 아끼던 종손(從孫)이자 제자인 우암이 지은 정자를 ‘仙夢臺’(선몽대)라 이름 짓고 편액의 글씨를 손수 써서 보내며, 아울러 〈선몽대 이름을 짓다(寄題仙夢臺)〉라는 시(詩)를 지어 보냈다.
松老高臺揷翠虛 (노송고대삽취허) 노송과 높은 누대 푸른 하늘에 솟아 있고
白沙靑壁畵難如 (백사청벽화난여) 강변 흰 모래와 푸른 절벽은 그리기조차 어렵네
吾今夜夜凭仙夢 (오금야야빙선몽) 나는 이제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서니
莫恨前時趁賞疏 (막한전시진상소) 예전에 이 멋진 경치 감상 못함을 한탄하지 않노라
▶ 멋들어진 노송(老松)들이 선몽대로 가는 길을 인도해 준다. ‘우암선생유적’비를 둘러보고 ‘선몽대’에 다가갔다. 높은 누대가 푸른 하늘에 솟아 있다. 내성천 강변 흰 모래와 푸른 절벽이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오늘 와서 눈으로 직접 보니 — 그 실제의 풍경이 그렇다. 선경후정(先景後情)으로 구성된 시의 내용이 선몽대 일원의 풍경과 서정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문진의 선비들, 선몽대에 오르다
선몽대(仙夢臺)는 우암산이 내성천으로 뛰어드는 벼랑에 있다. 선몽대 일대는 기러기가 내성천에서 내려 한가로이 노니는 형이라고 풍수상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이라고 전하는데, 실제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선몽대는 내성천 강물과 아주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어우러져 가히 선경을 방불케 한다.
▶ 거기에 전면 여섯 칸의 행랑채 중간에 큰 대갓집에 있을 듯한 2층 솟을대문이 당당하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었다. 행랑채 옆으로 통로가 있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행랑채는 좁지 않은 살림집이었다. 정자로 올라가는 길은 암반을 깎아 만든 자연석 계단이다. 선몽대는 우암산 발치의 강안의 바위 위에 지은 집이다. 비탈진 암벽 위, 낮은 곳에는 자연석 주초(柱礎) 위에 반듯하게 다듬은 긴 돌기둥을 세우고, 뒤쪽은 자연석 위에 그대로 정자를 앉혔다. 지대가 낮은 마루 아래에 있는 아궁이가 한참 높다. 서서 불을 때야 한다.
우측의 자연석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을 오르면 누대의 뒤쪽이다. 누대의 문이 둘 있다. 이 문으로 정자를 드나든다. 평상시 누대로 들어가는 문이 잠겨 놓았는데, 오늘은 백송리 우암의 후손인 이한방 교수가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으므로, 일행은 흔쾌히 누대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 4칸으로 되어 있는 정자는 양쪽의 한 칸씩 방(房)을 들이고 가운데 두 칸이 내성천을 관망하는 다락마루이다. 두 개의 방은 대청과 이어지는 마루를 앞에 두고 있다. 다락마루의 전면은 문이 잠겨있었다. 활짝 문을 열었다. 광활한 내성천의 풍경이 마루 안으로 환하게 들어왔다.
선몽대을 아름다운 비경으로 만드는 첫 번째 요소는 단연 내성천(乃城川)이다. 거기에 장송이 드리워진 절벽에 지어진 정자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내성천 맑은 물줄기가 상류에서부터 크게 S자형으로 감돌아 흘러내려 와서 선몽대 아래에서 비단결처럼 내려간다. 동서로 흐르는 내성천이 너른 백사장에 비단 폭처럼 휘감아가는 듯한 물길이 길게 이어진다. 이광호 박사를 비롯한 문진의 선비들이 대청마루에 정좌하고 환하게 열린 내성천을 관망한다.
요즘 가뭄이 극심하고 상류에 영주댐으로 인해 수량은 아주 적지만, 내성천 맑은 물줄기가 상류에서부터 크게 S자형으로 감돌아 흘러내려 와서 선몽대 아래에서 비단 폭처럼 휘어져 간다. 오늘 따라 백주의 적요함이 흐르는 가운데 동서로 흐르는 내성천 너른 백사장에 크게 휘감아가는 듯한 물길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작은 병아리 서너 마리를 거느린 물오리가 한가로이 물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 아, 고요한 백주의 유유자적 경(景)이로다!
선몽대 안쪽에는 예의 퇴계 선생이 쓰신 ‘仙夢臺’ 현판과 시(詩)가 게시되어 있고, 이곳을 찾은 명사들이 남긴 시들이 걸려 있다. 그런데 여기에 게시된 현판과 시판은 모두 복제품이다. 문화재를 온전히 보존하고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국학진흥원에 보내져 보존하고 있다.
선몽대의 시편(詩篇)들
이렇게 선몽대(仙夢臺)는 산수와 누정이 어우러진 경관도 수려하기 그지없지만 퇴계 선생의 ‘仙夢臺’(선몽대) 편액 글씨와 시(詩)로 말미암아 더욱 유명해졌다. 그 후 당대 내로라하는 명사(名士)들이 방문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대표적인 사람이 김성일, 류성룡, 정탁, 김상헌, 이덕형, 정약용 등이다. 이와 같이 그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와 아름다운 경치를 찬탄하며 시를 지은 것이다. 오늘은 은혜롭게도 편액과 시판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진품은 국학진흥원에 소장 되어 있다고 한다.
▶ 이곳 예천 출신의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이곳을 찾아와 〈삼가 퇴계 선생 시를 차운하다(謹次退溪先生韻)〉의 제목으로 시를 썼다. — 칠언절구 한시(漢詩)의 차운(次韻)은 제1·2·4구의 끝 자의 소리[韻]를 맞추는 것이다. 퇴계 선생이 지은 〈선몽대 이름을 짓다(寄題仙夢臺)〉의 운(韻)이 ‘虛(허)·如(여)·疏(소)이니 여기에 소리[韻]을 맞추는 것이다.
主人能自卜淸虛 (주인능자복청허) 주인이 능히 스스로 맑고 빈 곳을 점쳤는데
閬苑玄都此不如 (랑원현도비불여) *閬苑(낭원)과 玄都(현도)가 이보다 못하도다.
夢罷幾回臺上臥 (몽파기회대상와) 꿈을 깨고 몇 번이나 臺(대) 위에 누워서
滿天明月看星疎 (만천명월간성소) 하늘에 찬 달과 별을 보았을까
―* 閬苑(낭원)과 玄都(현도) : 신선이 사는 곳.
— 정탁(鄭琢)은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자정(子精)이며, 호가 약포(藥圃)·백곡(栢谷)이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 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에도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 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변호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 풍산의 하회마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선몽대에 올라 시 한 수 읊었다. 〈삼가 퇴계 선생의 선몽대시 운을 이어 짓다(謹次仙夢臺韻)〉이다. 서애는 퇴계 선생의 수제자이다.
高臺登眺若憑虛 (고대등조약빙허) 높은 대에 올라 보니 허공에 기댄 것 같구나
漁釣生涯我不如 (어조생애아불여) 고기 낚으며 사는 삶 나는 그러질 못 하네
花落半庭春事晩 (화락반정춘사만) 꽃 떨어져 뜰을 반이나 채우니 봄도 이미 깊은데
碧簾松影更蕭疎 (벽렴송영갱소소) 푸른 주렴, 솔 그림자가 다시 고요하고 쓸쓸하도다
▶ 퇴계 선생의 고제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도 퇴계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선몽대 시를 썼다.
半畝松陰倒碧虛 (반무송음도벽허) 푸른 하늘에 매달린 반이랑 솔 그늘에서
玉壺今日興何如 (옥호금일흥하여) 옥호의 술 따르는 오늘의 흥취 어떠한고?
凭君更聽遊仙句 (빙군경청유선구) 그대에게 청하여 선경에서 노닌 시구 다시 들으니
便覺塵緣立地疎 (변각진연입지소) 속세의 인연이 당장 소원해짐을 깨닫겠네
▶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도 선몽대를 찾았다. 퇴계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선몽대 시를 읊었다. 한음은 인품이 넉넉하고 남다른 우국충정과 도량을 지닌 명신이요, 외교가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많은 인사들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풍파에 휩쓸리고 비난에 시달렸으나, 이덕형만은 그렇지 않았다.
山環蒼壁地凌虛 (산환창벽지능허) 산은 푸른 벼랑을 싸고 땅은 허공을 압도하는데
水釣氷耕儘自如 (수조빙경진자여) 낚시하고 얼음밭 가는 건 다 옛날 그대로구나
未到此坮名已好 (미도차대명이호) 이 대에 이르기 전에 명성은 익히 아름다워
賞情難動世情疎 (상정난동세정소) 즐거운 마음 변함없으나 세상 물정은 소원하네
— 이덕형(李德馨)은 이항복(李恒福)과 한 스승 밑에서 함께 학문을 닦은 벗이었다.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체구는 작으면서도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솔직 대담성, 소탈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기지와 해학, 재기발랄함과 명민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을 사랑하고 인정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한음 이덕형(李德馨)은 위풍이 당당하고 언변이 뛰어났으며, 언제나 상대에게 호감을 주면서 상대를 압도했다. 이 세 사람은 남다른 교분을 지녔고, 또 영의정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이원익은 오리(梧里) 정승으로 통했고, 이항복은 오성(鰲城) 대감으로 불렸다. 이덕형은 세 사람 중 나이가 제일 적으면서도 먼저 높은 벼슬을 얻었고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항복은 이덕형이 죽은 5년 뒤, 인목대비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북청의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이원익도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홍천에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뒤 영의정에 추대되었고,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을 수습하고 난 뒤 천명을 다했다.
▶ 병자호란 때의 명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도 이곳을 찾아와 시(詩)를 남겼다. 〈경건히 퇴계 선생의 선몽대 시를 차운하다(敬次仙蒙臺韻)〉이다.
沙白川明澹若虛 (사백천명담약허) 모래는 희고 내가 밝아 맑기가 텅 빈 것 같으니
玉山瓊圃較何如 (옥산경포교하여) 옥산과 구슬 가득한 정원에 비교하면 어떨까
仙區萬里應難到 (선구만리응난도) 만리 되는 신선의 땅에 이르기 응당 어려울 테지만
來往斯亭且莫疎 (내왕사정차막소) 이 정자에 오고감을 또한 소홀히 하지 말자
▶ 어릴 적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부친을 모시고 선몽대에 올라(陪家君登仙夢臺)〉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썼다.
中天樓閣枕高丘 (중천누각침고구) 높은 언덕, 공중에 솟은 누각
杯酒登臨散客愁 (배주등림산객수) 술잔 들고 올라가니 객의 수심 사라지네
山雨著花紅滴瀝 (산우저화홍적력) 산간의 비, 붉은 꽃에 방울져 떨어지고
溪風入檜碧颼飅 (계풍입회벽수류) 푸른 노송 사이로 불어오는 강바람 소리
使臣冠蓋悲陳跡 (사신관개비진적) 사신의 의관은 지나간 자취를 슬프게 하고
丞相衣巾憶舊游 (승상의건억구유) 승상의 옷과 갓은 예전에 노닐던 일을 생각게 하네
丹竈無煙仙夢冷 (단조무연선몽냉) 붉은 부엌 연기 없고 신선의 꿈은 싸늘한데
水雲今古自悠悠 (수운금고자유유) 강물과 구름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유유하구나
— 정약용(丁若鏞)이 17세 때, 1780년(정조 4)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예천군수로 부임하여 따라왔다. 하루는 아버지와 선몽대를 찾아와 현판에 걸려 있는 7대조인 감사공(監司公) 정재유가 퇴계의 시를 차운하여 쓴 칠언절구 시를 발견했다. 아버지 정재원이 기뻐하며 다산(茶山)에게 시를 쓰라 했다. 다산은 선대 할아버지의 시(詩)에 칠언율시로 화답했다. 어린 나이에도 풍경과 서정이 조화된 놀라운 시를 남겼다.
유서 깊은 내성천(乃城川)
소수서원—이산서원—도정서원
내성천(乃城川)은 백두대간의 산곡 내성(乃城, 봉화)에서 발원하여 영주를 거쳐서 이곳 예천을 경유, 삼강(낙동강)으로 흐르는 긴 강이다. 영주에서 삼강까지는 경사가 아주 완만하고 곱고 깨끗한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어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류(曲流)를 이루고 있다. 하류(예천군 용궁)에 아름다운 회룡포(回龍浦)가 있어, 그 곡류의 절정을 이룬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대체로 모래 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원(書院)을 세웠는데, 강모래의 움직임을 통해 기(氣)의 흐름을 잘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성천의 상류 풍기에는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고, 영주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이산서원(伊山書院)’이 있으며, 중류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조정에 천거한 약포 정탁(鄭琢, 1526~1605)의 위패를 모신 ‘도정서원(道正書院)’이 있다. 도정서원은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내성천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의 도정서원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고 옥중의 이순신을 구한 정탁(鄭琢)을 숭모하여 그 뜻을 본받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 선몽대에서 약 5km 상류에 있는 고평교와 그 아래 형호교 일대에서는 강에 펼쳐진 거대한 모래톱이 유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또는 계절에 따라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었다. 10여 년 전 만해도 드넓은 백사장이 형성 돼 있었지만 지금은 영주댐 건설 등으로 물의 수량이 줄어들고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모래톱이 곳곳에 형성돼 백사장이 줄어들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