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三 章 天全敎의 正體
첫여름 밤은 길고 열기를 띤 대지는 침묵과 정적에 잠겨 있었다.
감숙성(甘肅省)의 회천현(會川縣) 부근의 널찍한 관도(官道) 위에는 한 노인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길을 걷는 노인의 풍채가 지나치게 의젓하였다. 마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숲 사이를 산책하는 것같이 천천히 점잖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노인의 입에서는 쉬지 않고 염불 비슷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침사곡(沈砂谷)……침사곡.』
길가에는 두 그루의 백양(白楊)나무가 나란히 서있어 관도 위에 기다란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나무 그림자는 바람이 불 때 마다 흔들거리더니, 노인은 이상하게도 이 그림자를 피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걸어가는 노인은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먼 곳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웃음소리는 일개 절정고수의 득의에 찬 것이었다.
『솜씨께나 있다는 장가 놈이 어떻게 냄새를 맡고서 끼어들었는지 모르겠는걸!』
웃음소리가 들려오던 곳에서 또 다시 말소리가 들려온다.
노인은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들풀이 가득 자란 긴 초원이 있을 뿐, 재차 먼 곳으로 눈을 드니 다만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두움뿐이었다.
그는 다시 주저하더니 이윽고 결심을 한 듯 앞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나간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고 앞으로 닥쳐 올 일이나 생각을 하여 보자. 나 임여(任厲)는 과거는 죽었다고 치고 현재에 살자. 여자의 홍분(紅粉) 속을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찾도록 하여 보자』
그러나 노인은 아직도 할 말을 다 못한 모양인지 또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그 전진(全眞) 문하와의 싸움은 내 아무리 늙었다 하더라도 의(義)를 사양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 됐다. 마교오웅 중의 노대를 찾아가서 의논하여 보자!』
혼잣말이 끝나자 그는 발걸음을 소리나는 쪽으로 옮겨갔다.
또 다시 어둠 속에서 장대가의 웃음소리와 함께 사나운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 풍노두(風老頭)야! 부끄럽지도 않으냐! 나는 너희들이 무림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과부가 재가하듯이 또 다시 무림계에 나타났으니……』
풍륜은 괴상한 목소리로 무엇인가 떠들어대었으나 그것인 무슨 말인지 또한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전연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결투를 시작하는 것 같았다.
노인은 목소리가 들린 곳까지 이르렀으나 장대가와 풍노두의 모습이나 발자국은 보이지 않으니 그야말로 절정 고수의 결투에 부끄럽지 않은 동작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때 맞은편 길에서 두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절정의 경공술을 발휘하면서 이쪽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서 약간 놀란 듯이 선비 옷을 입은 사나이가
『둘째 형! 그 풍노두가 발광을 하고 있는 것 같구려.』
이 두 사람은 바로 운학(鄆鶴)과 하마(何摩)였다.
운학은 몸을 날리면서,
『그가 표독스러운 손속으로 난투를 벌여 사형령주가 도망가게 하지 말아야 하겠는데…….』
하마가 말한다.
『형님, 좀 더 빨리 속력을 내어 봅시다.』
하마의 말이 끝이 나자 두 사람은 다시 몸에 경공술을 일으켜서 비호와 같이 달리니 달빛 아래 관도에는 길고 긴 두 줄기 가벼운 연기가 일어나는 듯하였다.
그들이 백양나무 밑을 지나고 있을 때 그 나무 위에는 하얗게 소복을 입은 여자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깊은 잠이 들었다가 두 사람이 나는 듯 바람을 가로 지르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또 다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자 그 여자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사형령주로구나! 뜻밖에도 이곳에서 너를 만나게 되니 이 기회에 너에게서 받은 치욕을 갚아 주리라.』
혼잣말이 끝이 나자 그는 가볍게 몸을 날려 땅 위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땅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경공술을 발휘하여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임여(任厲)가 걸어가는 반대 쪽 관도 위를 세 필의 말이 죽을 듯이 기를 쓰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중간에서 두 사람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한 가운데로 달려오던 백삼광이 놀란 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다른 두 사람에게 명령을 하듯 말을 하기 시작한다.
『양노제(梁老弟), 빨리 이 영지를 영좌호법(令左護法)에게 갖다 드리도록 하여라. 나는 이곳에서 이 떠들썩한 진상을 알아 볼 터이니, 너희들은 빨리 본부로 돌아가거라. 알아둘 것은 천만 조심할 것과 이 물건은 교주가 요구하시는 것이니 조심해서 가지고 가도록 하여라.』
말이 끝나자 그 양노제는 말고삐를 당기니 질풍과 같이 달리던 말이 우뚝 그 자리에 서버렸다.
앞발을 번쩍 쳐들고 그 자리에 서 버린 말 머리를 왼쪽으로 돌려 다시 앞에 보이는 교차로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조금 전에 백삼광 이 말한 양노제란 바로 풍뢰수(風雷手) 양초(梁超)였다.
그는 백삼광 호법의 명령을 받고서는 곧 영호진(令狐眞)을 찾아가는 것이다.
한편 이 관도의 한 그루의 다른 백양나무 위에서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원숭이처럼 나무 위의 가지를 따라서 몸을 날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가 교차로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머뭇거리면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교차로를 왼쪽으로 꺾어들면서
『너 이놈 백삼광! 네가 하늘 위로 올라가더라도 나는 너를 쫓아 갈 것이다. 또한 이 사여안은 무림의 의혹을 풀기 위해서라도 사형령주의 복면을 벗겨서 참 얼굴을 보고야말 것이다.』
혼자 중얼거리며 달빛에 허옇게 꿈틀거리며 뻗고 있는 관도 위로 그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지금 이 조용한 심야의 평탄한 관도 위에는 각기 뜻을 달리한 네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자기 목적을 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하마와 운학이 제일 선두를 달리고, 신비스런 소복(素服)의 여인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고 바로 뒤에는 말 위에 백삼광이 말고삐를 확 풀어 질풍같이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마가 달리면서
『천전교의 회천분타(會川分舵)는 저 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허리에 있어요.』
운학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삼제(三弟), 자네는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가게. 나는 왼쪽으로 가겠으니.』
이들이 달리고 있는 관도 앞에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었다.
그 산 옆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 하나의 언덕이 보였다.
달빛을 통해서 자세히 보니 그 동굴의 입구는 매우 좁아 보였다.
찾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 것 같았다.
이 동굴은 관도에서 좀 떨어져 있었고 동굴 입구가 산에 가려져서 주의하여 보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난날 하마는 이곳을 답사하여 천전교의 분타가 이 동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던 것이다.
달려가고 있는 하마는 곁눈으로 운학의 경공술을 살펴보고는 분명히 자기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운학의 말을 듣고서는 하마는 몸을 오른쪽으로 비틀어 동굴을 향하여 나는 듯 공동(崆峒)의 신공(神功)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달빛 아래 운학을 바라보니 분명히 자기보다 앞서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에 한 가닥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강호에 발을 디딘지 얼마 되지 않은 운학에게 자기의 모든 것이 형편없이 뒤지는 것으로 봐서 전진파가 천하무림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일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운학은 언덕에 오르자 몸에 진기를 운행시켜서 몸을 나무 위로 날리다가 나무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그는 시각을 재촉하여 동굴 속의 정세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동굴 속은 완전히 칠흑의 어둠 속에 잠겨 있어 전연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곳의 방비가 허술한 것으로 봐서 아직 한 번도 소란을 겪은 적이 없는 것 같구나. 아니라면 언덕 위에 경계하는 사람이라도 배치하여 놓았을 터인데……
운학과 하마는 약속한 자리에 모였다가 밑의 동굴 입구를 향하여 걸어갔다.
두 사람의 발이 마악 동굴 출입구에 도착하였을 무렵에 사방에서 요란하게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때 한 마리의 흉맹스럽게 생긴 개가 운학이 골짜기 밑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운학에게 덮쳐오려 하고 있었다.
운학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비틀면서 몸의 공력을 운행시켜서 개의 목덜미를 향하여 일 장을 쳤다.
『꽥!』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황소만한 몸을 꼿꼿이 세우더니 땅 위에 쓰러뜨리며 죽어 넘어갔다.
이 잠깐 동안에 일어난 소동은 골짜기 사람들을 놀라 깨우게 하였다.
이때 조용한 밤공기를 뒤흔드는 것 같은 사나운 소리로
『이놈!』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웃통을 벗어 제친 장한(壯漢)이 손에 한 개의 수화곤(水火棍)을 들고서 튀어나왔다.
그는 운학의 몸을 보자 정수리를 노려서 머리가 빠개져라 하고 수화곤을 내리쳤다.
그러나 운학은 이런 몽둥이에 맞아 죽을 만한 허수룩한 인물이 아니었다. 속으로는 가소로움을 참지 못하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웠다.
운학은 이 자의 수화곤 따위는 두렵지 않았으나 사형령주가 자기들이 나타난 기미를 알고 뺑소니를 칠까 두려워서 개를 후려친 술법과 같은 술법으로 장한을 향하여 몸을 돌리면서 오른발로 장한의 넓적한 엉덩이를 힘껏 찼다.
장한은
『으악!』
하는 비명을 내면서 산 밑의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다가 면상이 나무와 부딪쳐서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진다. 그러나 몸은 꼼짝하지 않는 대신 가슴이 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죽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운학은 재빨리 몸의 원상을 회복하고서는 동굴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려고 할 때 별안간 주위가 대낮과 같이 밝아졌다.
수십 명이 횃불을 밝혀 들고 동굴 입구를 향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운학은 갑자기 사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버럭 소리를 질러
『소인은 운학(鄆鶴)이라는 사람이올시다. 사형령주(蛇形令主)를 만나러 왔으니, 수고스럽지만 나오셔서 면담에 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소리는 벽력과 같아서 사방의 나뭇가지가 흔들리기까지 하였다.
불씨를 들고 올라오던 뭇 사람들도 운학의 사나운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로 마주쳐다보고만 있을 뿐 한 사람도 대답을 하려는 자가 없었다.
이 때 마침 운학과 하마의 뒤를 따라오던 소복의 여인이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이 여인도 울려 퍼져오는 목소리를 들고서는 깜짝 놀란다.
『운학! 아, 운학!』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는 수줍음과 희열에 차서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뒤에 여러 사람의 무리 중에서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앞으로 썩 나서더니 운학을 바라보았다.
얼마 뒤에 그 노인은 운학에게 손자를 타이르는 듯한 점잖은 목소리로,
『운모(鄆某)는 미쳐 날뛰지 말아라. 이곳은 천전교의 회천분타(會川分舵)란 것을 잊지 말아라. 이 황야에 사형령주가 어디 있단 말이냐!』
그러나 운학은 노인의 이 말에 간단히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하마(何摩)가 기지(機智)를 이용해서 벌써 이곳의 판국을 짐작하고 일부러 나타나지 않은 것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생각하면서 노인과 여러 사람을 쳐다보니 모두가 한풀 죽어 있는 꼴이 운학을 겁내고 있음을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띠우고
『각하는 천전교 회천분타의 책임자가 아니십니까? 이 운학은 오래 전부터 노인장을 앙모(仰慕)하여 왔소이다.』
노인은 대답을 하려다가 멈칫거리면서 당황한 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 곳의 책임자 번(樊)노대는 출타중이시다. 운(鄆)가는 무슨 일이 있어 이곳에 왔느냐?』
운학은 먼저 나타났던 노인의 관자놀이에 시퍼런 힘줄이 뻔히 일어남을 보고서는 내공의 힘이 대단한 고수라고 짐작이 되었다.
천전교의 일개 분타에 이런 고수가 있을 적에는 이들 교중(敎中)에는 정말 훌륭한 고수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운학은 하마가 뒤에서 충분한 활동을 하는 기회를 받들어 주기 위하여 무엇인가 잔소리라도 늘어놓아야 할 형편이었다.
운학은 마음에도 없는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럼 당신은 누구요?』
이 천전교도들은 평소에 자기를 높이며 남을 무조건 얕보는 습관을 길러 오고 있었다.
이 근래 운학의 무공이 훌륭하다는 소문은 들어왔으나 그의 실제의 무공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운학을 노려보고 있었으나 몸에서는 자기 수양을 상당히 쌓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때 별안간 짙은 눈썹의 사나이가 음성을 높여
『노당주(老堂主)께서 네깐 놈의 일에 간섭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알아 모셨거던 빨리 꺼져버려라!』
운학은 웃음을 참지 못하여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이놈은 분명히 이 노인보고 당주라 했다.
그런데, 노인이 왜 떳떳이 자기 이름을 대지 않으려고 하는지 새로운 의심이 생겨났다.
무엇인가 비밀이 숨겨 있는 것에 틀림이 없었고 혹시 이 자가 사형령주(蛇形令主)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운학이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보자 그가 화를 내어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는 자신들도 언제나 공격하고 방비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자기의 수하(手下)들의 이런 동작을 알아차린 노인은 양팔을 들어 수하들을 진정시키면서 조용히 타이르기 시작하였다.
『영호진(令狐眞) 호법께서 이 운소협에게 격패를 당하였는데 감히 너희들이 누구 앞이라고 까불려 하느냐? 모두 고정하여라. 아니면 규칙에 의하여 엄히 다스릴 것이로다.』
이들은 원래부터가 이 노인에게 맹종(盲從)하는 터이라 노인의 말이 떨어지자 한 마디도 못한 채 꼼짝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운학은 하마가 그들 무리에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다.
그의 몸매로 봐서 그가 목적하였던 일이 이루어진 것같이 보였다.
운학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운학과 하마의 이런 동작은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천전교의 무리들을 눈 아래에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만만한 행동이었다.
하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뒤흔들어 들려온다.
『구미신구(九尾神龜) 육노당주(陸老堂主)께선 별고 없으십니까?』
그 무리들은 자지러지게 놀라면서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육노당주(陸老堂主)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하마(何摩)라는 것을 알고서는 삽시간에 얼굴이 잿빛으로 되었다.
그 천전교도 중에는 지난 날 하마가 홀로 한 자루의 칼을 들고 천전교 본부에 쳐들어가서 공동신검(崆峒神劍)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
『공동신검(崆峒神劍)이다.』
하마를 본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공동신검을 본 천전교도들은 누구나가 최명부(催命符)로 생각을 하는 터이었다.
왜냐하면 지난 날 하마가 단신으로 천전교 본부에 쳐들어갔을 때 천전교의 사대당주(四大堂主)를 격파시켜서 교중(敎中) 인물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하마를 두려워하는 정도는 운학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마의 출동으로 인하여 천전교도들은 두 사람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어쩔 수가 없는 경지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요란한 말굽소리가 들리면서 검은 그림자가 번개같이 언덕 위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말 위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몹시 조급하게 보였다.
그는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말안장 위에서 몸을 허공으로 날려 번개와 같이 몸을 날려 하마 앞에 우뚝 섰다.
하마가 그를 보니 대단히 수척하여 보이며 턱 아래 염소수염이 한층 처량하게 보였다.
그러나 말에서 뛰어 내리는 공력으로 보아서는 영호진(令狐眞)에 못지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금시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주위에 서 있던 교도 중의 한 사람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야아, 백노호법(白老護法)께서 오셨구나.』
그 백노호법이란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하마를 한번 훑어보고서는 마음에 선뜻함을 느꼈다.
――이 사람은 영기가 발랄한 소년 영웅에 틀림이 없다. 얼굴을 관옥(冠玉) 같고 그 자세에 빈틈이 없으며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기(精氣)가 사라의 심금을 위압하고도 남으니 공력이 절정에 달한 고수로서 흔히 볼 수 없는 천하 고수의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로구나――
사실 그 노인은 요 며칠 사이에 연달아 천하 고수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하마를 보자 마음에 두려움이 생겨나서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공손한 태도를 지으면서
『이 분은 누구이신지 저의 안목이 좁아서 잘 몰라 뵙겠습니다.』
얼마 전에 하마가 천전교를 떠들썩하게 한 다음에 교중에서는 교도들이 실력을 더욱 연마하기 위하여 억만금을 아깝다 하지 않고 영호진과 백삼광을 초청하여 무술 사범으로 모시고 후대(厚待)를 하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의 교중에서의 지위도 사대당주(四大堂主) 이상으로 대우를 하였기 때문에 교도들도 지극히 존경하고 있었다.
육당주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백형의 물으시는 말씀에 제가 대신 소개하여 드리겠습니다. 이 분은 바로 당대 무림에 그 이름이 크게 떨치고 있는 공동신검(崆峒神劍) 하마(何摩)라는 분입니다.』
백삼광은 흰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아――』
하며 하마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둘레에 있던 천전교도들은 육당주와 백노호법이 있음을 보고서는 저윽이 마음이 놓이며 두 젊은 친구쯤이야 하는 자신이 생겨서인지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운학은 침착한 어조로
『동생, 정말 천전교의 호법(護法)들의 존재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라네. 그런 여기 그 무서운 호법이 나타나셨어!』
하마가 얼굴에 차가운 웃음을 띠우면서
『어쩐지 섬서ㆍ감숙 양성에는 천전교도들이 잘 나타나지 않더라니 그 두 사람의 호법과 사대당주가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그랬었군!』
하마가 말을 계속하는 동안에도 교도들은 계속해서 웅성거리며 하마와 운학에게 멸시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이 백삼광은 운태파(雲台派)에서 백 년 내에 드물게 보는 장문으로서 그의 무술은 강호에서도 매섭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백삼광은 얼굴에 괴상한 웃음을 띠우면서
『하마야! 기왕 너의 신분을 확실하게 알게 된 이상 살려 보낼 수는 없다.』
말이 끝이 나기가 무섭게 오른손을 허리띠 쪽으로 가져가더니
『번쩍!』
하고 검광이 사방을 비치면서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칼이 쥐어지는가 했더니 하마의 머리를 향하여 쳐 내려갔다.
운학은 본래가 참을성이 있고 도덕과 윤리를 지극히 존중하게 여기는 성품이었으나, 이 백삼광이 소위 명가(名家)의 장문(掌門)으로서 무인의 취해야 할 태도를 벗어나 야비한 수단을 부리는 것을 보았고, 더욱 하마의 형세가 위급함을 보자, 대갈일성과 함께 몸은 늘어 서 있던 천전교도들의 머리 위를 번개같이 날아가면서 날카로운 쌍장(雙掌)이 백삼광의 등덜미를 내려쳤다.
그러나 하마는 칼을 쓰는 검술로서는 당대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백삼광의 손이 허리띠를 향하여 움직일 때 벌써 다음에는 어떤 동작이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백삼광은 칼을 휘둘러 하마를 치는 순간에 등에 강력한 압력이 짓눌러 오는 것을 느꼈다.
더욱이 하마보다 더 강력한 공력으로 쳐 들어오는 것을 알게 된 백삼광의 당황하는 빛은 컸다.
백삼광은 무서운 압력을 느끼자 운태파의 추풍검(追風劍) 중의 절초(絶招) 유운관일(流雲貫一)을 써서 막았다.
노인은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왼손으로 일 장을 쳐서 반격하면서 뒷면에 서 있는 하마의 추격을 막았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칼이 그의 손을 벗어나면서 운학의 질풍과 같은 장풍 속으로 몸을 돌리며 전진하였다.
이 때 별안간
『숙―― 숙――』
하는 요란한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오니 백삼광의 손을 떠난 칼이 운학의 장풍의 힘에 의하여 충격을 받아 그 검신(劍身) 전체가 벌겋게 달아 오는 것이었다. 동시에 백삼광은 허리를 꺾어 가까스로 운학의 장풍의 주력을 피하였다. 허리를 굽힐 때 주저앉는 기세를 따라서 오른발을 유성처럼 차 내었다. 이것이 소위 무림에서 오랫동안 이름을 떨치는 무영퇴(無影腿)의 각법(脚法)이었다.
그들 세 사람이 쓰는 초식은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기백과 성난 사자가 황야를 질주하는 것 같은 빠르기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당주 육기상(陸琪祥)은 운학의 몸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보자, 이 기회를 놓칠세라 몸을 한 번 굽히면서 대갈일성
『얏!』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쌍장(雙掌)이 운학을 향하여 뻗쳐갔다.
이 모양을 보고 있던 천전교 교인들은 일제히,
『얏!』
하는 기합소리를 내어 당주의 장풍에 응원소리를 보내었다.
동생의 위기를 구하려던 운학은 드디어 위기의 경지에 빠지고 말았으니 허공에 떠 있는 그가 더 앞으로 전진하여 땅으로 떨어진다면은 그의 무영퇴(無影腿)의 술법에 걸리게 되고 뒤에서는 육기상(陸琪祥)의 장풍이 협공하여 오고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편 하마는 억지로 백삼광의 돌발적인 공세를 피하여 칼을 손에 뽑아 들었다.
이 위기일발의 사세를 보자, 급하게 일 검을 쳐내어 백삼광의 공세의 힘을 꺾어버렸다.
그러나 그 유명한 하마의 공동신검(崆峒神劍)이 신속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으나,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백삼광과 당주의 공세를 완전히 타개하여 운학의 위기를 구출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얏!』
『이놈들앗!』
하는 천지를 호통하는 목소리가 들리면서 소복의 여인과 사여안(查汝安)이 일시에 언덕 위에서 동굴을 향하여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더욱 소복의 여인이 달리는 모습은 허공을 나르는 화살과 같이 빨랐다.
그의 모습이 산꼭대기에 펄떡하였는가 하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싸움판으로 뛰어들면서 그의 손에 쥐었던 백금색의 수실이 달린 채찍의 실이 한번 감기고 한번 엉키니 여인은 온 몸의 진기를 채찍 끝에 모아 한 수를 쳐 내었다.
백삼광의 장검은 드디어 그 여인의 채찍의 방향을 따라서 세차게 돌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채찍의 반사력을 이용하여 이어타정(鯉魚打挺)의 술법을 써서 몸을 허공으로 뽑았다.
그 여인은 운학의 위기를 구출하려는 일념에 마음이 다급하여 남녀유별(男女有別)의 관념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백옥 같은 오른쪽 손으로 운학의 오른 팔을 잡고서 위로 치켜 올렸다.
운학은 그 여인에게 팔목을 잡힌 뒤에는 오히려 힘을 쓸 수 없는 경지에 빠져 버렸으나, 몸이 허공으로 더 높이 떠오르니, 완전히 위기(危機)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으나 여인의 몸은 땅으로 곤두박질을 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운학은 순간 여인의 앞 일이 크게 걱정이 되었다.
자기의 위기는 이 여인의 기발한 술법에 의하여 모면하였으나 거꾸로 위기에 빠진 여인을 버려두고 안일하게 자기만이 살아날 수는 없었다.
순간 운학은 전신의 힘을 빼내어 그 여인이 자기 몸을 공중으로 끌어올리기 좋도록 하였다.
세상에 어찌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남의 위기를 구해 준다는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마와 천전교도 일행은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운학 자신 또한 황망한 가운데에서도 마음에 깊은 의문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운학은 여성 특유의 체취(體臭)가 자극하자 신비스러운 감동(感動)에 도취하고 말았다.
한편 이 여인과 백삼광의 순간적인 난투극이 끝날 무렵에야 사여안(查汝安)이 싸움터에 도착하였다.
그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구미신구(九尾神龜) 육기상(陸琪祥)과 맞섰다.
일검쌍탈진신주(一劍雙奪震神州) 사여안(查汝安)이 육기상을 노려보니 육기상은 선뜻하여짐을 느끼면서 정세가 극히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 것이냐?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 재빨리 자기 초식을 거두고서는 몸을 땅에 뉘이면서 사여안의 장풍을 피했다.
사여안의 무서운 장풍을 육기상이 피하는 바람에 뒤에 옹기종기 서 있던 교도들의 몸을 엄습하니 교도들은 일제히 당황하여 피할 곳을 찾지 못하여 우왕좌왕하는 차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달빛 아래 자세히 보니 교도(敎徒)의 반(半) 이상이 살상(殺傷)을 당하고 말았다.
백삼광은 자기의 검법(劍法)ㆍ각법(脚法)이 운학을 수세에 몰아넣어 버리니 승리는 분명히 자기에게 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두 남녀의 난입(亂入)과 그들의 날카로운 공격과 하마의 무서운 반공(反攻)이 어울려 맹렬하여지자 그의 손과 발은 황란(慌亂)의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의 추풍검법에는 본래 기특하고 절묘(絶妙)한 술법이 숨겨 있었고 특히 그의 칼자루에는 한 묶음의 검은 채찍이 달려있었으니, 칼이 그의 손을 벗어나면 하나의 암기(暗器)로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검신이 소복의 여인에 의하여 자기에게 반사되자 몸을 움직이지 않고 급히 오른발을 기준으로 하여 몸을 돌렸다.
그 칼은 그가 몸을 돌리는 힘을 받자 하마의 검과 마주치게 되었다.
쇠가 엇갈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고막을 울린다.
하마가 백삼광의 옆구리를 후려치려는 자세는 갑자기 좌절되고 백삼광 역시 두어 걸음 후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일대 접전은 결과적으로 자기의 화(禍)를 자기가 초래한 결과가 되었다.
천전교의 이삼류의 졸개들은 반 이상이 사여안에게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으나 운학이나 하마는 상처 하나 입은 곳이 없지 않은가?
백삼광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여안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자, 또 한 번 사세가 좋지 않음을 느꼈다.
사여안은 백삼광의 이러한 눈치를 재빨리 알아차리고는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띠우면서
『훌륭한 백 노선배님, 쌍나발을 잘도 부시네. 안공자님들도 당신에게 속았으니, 오늘은 육당주께서 입을 열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사형령주를 천전교의 사람이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똑똑히 밝혀 주시오.』
백삼광은 사여안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그대로 버려 둘 수는 없어서,
『사여안! 도일강(陶一江)을 못 봤나? 이 백삼광은 너를 살려둘 수가 없다.』
구미신구(九尾神龜)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대화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순간 구미신구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자기에게 몹시 불리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위엄을 가장하고서는
『이 천전교와 여러분과 또 무림 중의 고수들과는 평소 접촉이 별로 없어서 서로 침범함이 없었었다. 그런데 어찌 여러분은 또 다시 서로 다투려고 하십니까? 우리 교중에 사람이 없다거나, 우리 교가 공도(公道)를 지키지 못했다고 원망하시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사여안이 펄쩍 뛰며 화를 내고 삿대질을 하면서,
『천전교주는 바로 사형령주에 틀림이 없는데 천전교와 무림의 사람들이 왜 접촉이 없다고 어찌 거짓말을 하느냐?』
이때 하마가 때는 왔다는 듯이
『사대협의 말씀에 일리가 있으십니다. 이 하마가 증거물을 갖고 있소이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마에게로 쏠렸다. 그의 손에는 사형령주가 쓰던 가면이 들려 있었다.
하마는 웃으면서
『조금 전에 운형과 천전교도가 일전을 벌리고 있는 사이에 내가 동굴 속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수색한 결과 이 가면을 찾아냈고 가면에는 아직도 체온이 가시지 않은 것으로 봐서 사형령주는 분명히 천전교의 사람일 뿐 아니라 오늘 이 골짜기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말을 들은 천전교도들은 일제히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으며 백삼광과 육기상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러나 백삼광은 무림에서 태어나 무림에서 뼈가 자란 사람이라 금시에 얼굴빛을 회복하고서는
『이놈! 아직 나이 어려 배움에 힘써야 할 나이에 건방지게 무고한 소리를 함부로 하는구나!』
하마는 이들이 이렇게 나오리라고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연하게,
『너희는 천전교 중에 방의 구조를 하마가 알지 못한다면 모르겠다마는 네가 만약 양심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하마로 하여금 여러 사람 앞에서 그가 입었던 검은 옷의 소재를 밝힐 기회를 주기 바란다. 동굴 속을 여기 계신 여러 고수 선배들에게 보이기 쑥스럽다면 내가 혼자 들어가서 옷을 들고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달란 말이다.』
육기상이 화를 버럭 내면서
『네 놈이 우리 천전교의 성지(聖地)를 더럽혔으니 용서를 빌어도 시원치가 않을 터인데 무슨 돼먹지 않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정말 염치도 없는 놈이로구나.』
이때 천전교도들이
『죽여라, 죽여!』
하고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백삼광은 이 소리를 힘을 얻었는지 거만한 태도를 하면서
『본부의 집법(執法)은 어디에 있느냐?』
교도 중에서 한 사람의 사팔뜨기가 고개를 숙이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본인이 삼가 직명을 받드오리다.』
천전교도들은 이 백삼광 호법의 명령을 최고로 알고 있었다.
『외인(外人)이 성지(聖地)를 침범하였으니 어떤 처분을 내려야 하오?』
그 사나이는 침중한 목소리로
『나는 평소에 관대한 것을 신조로 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사지(四肢) 중의 하나만을 잘라 없애겠습니다.』
백삼광이 뚫어져라 하고 하마를 노려보면서
『만약에 저 놈이 개과천선(改過遷善)을 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소?』
집법(執法)이란 자가 몸자세를 바로 잡으면서
『몸에 칼질을 해도 모른다면 찢어 죽이는 수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천전교도의 졸도(卒徒)들이 일제히,
『죽여라, 죽여!』
교도(敎徒)들은 일제히 함성을 울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하마는 고함소리를 듣고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픽!』
하고 억지로 웃음을 참고는 운학의 태도는 어떤가 하고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러나 운학과 소복의 여인의 모습은 그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소란한 틈을 타서 언덕 너머로 도망친 것이 분명하다.
사여안은 백삼광과 육기상이 자기들의 비밀이 탄로될까 두려워서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여 자기들이 우세를 점하여 좋지 않은 소문이 나는 것을 막으려고 할 뿐이 아니라, 기회만 있으면 자기와 하마를 죽일 꿍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갑자기 백삼광은 오른손을 휘두르면서
『교중의 제자들은 일제히 우리 교의 법을 진행하라.』
교의 졸도들은 일제히 무기를 들고서는 큰 소리로
『하늘의 혜택을 입어 하늘을 대신하여 도(道)를 행하는 것이 천전교의 교리(敎理)이다. 천전교 만세!』
제각기 소리를 지르면서 두 사람을 완전히 포위하고 말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들을 두려워할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은 공포에 쌓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졸도들의 반 이상이 사여안에게 맞아 죽었다고는 하지만 삼십 여명의 장한이 대열을 지어서 포위하고 있었으니 중과부적이라고나 할까?
두 사람은 장검을 손에 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섰다.
사여안의 허리에는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쌍탈검(雙奪劍)이 걸려 있었다.
일검쌍탈진신주 사여안은 백삼광에게 쳐들어가면서
『허허!』
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귀교의 금강회나한(金剛會羅漢)은 드디어 이따위 두부쪽 같은 투세를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그의 이 말은 영호진(令狐眞)이 자기를 불러내어 죽이려다가 오히려 운학에게 격패당했던 일을 말함이니 백삼광이 마음속으로 어찌 알지 못할 것인가?
그는 크게 화를 내면서
『사(査)가 놈아! 네 어린 입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네가 우리들을 눈 아래로 보지만, 네깐 놈이 능히 금강회나한의 이런 대례(大禮)를 받을 수가 있겠는가?』
뒤를 이어 하마가,
『애석하게도 몹쓸 나한(羅漢)이 되어서 사형(查兄)과 같은 진짜 금강께서는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이다. 나와 같은 이런 강호소졸의 손에 죽을 너희들이 정말 불쌍하기만 하구나!』
이 말을 들은 구미신구(九尾神龜)가 참고 견딜 리가 없었다.
『백형! 저따위 놈들과 무슨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빨리 결판이나 내고 맙시다.』
백삼광(白三光)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손에 들고 있는 장검을 휘두르며 마악 앞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이 때 갑자기 골짜기의 입구로부터 한 필의 말이 비호같이 달려왔다.
말은 코에서 흰 김을 뿜으면서 숨이 막힐 듯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분명히 먼길을 비호와 같이 달려왔음이 틀림이 없었다. 말의 안장(鞍裝)에는 한 사람이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백삼광은 말 위의 그 사나이가 풍뢰수(風雷手) 양초(梁超)임을 알고서는
『일은 모두 틀렸도다.』
하고 중얼거린다.
말은 백삼광을 알아 본 듯이 나는 듯 그의 앞으로 다가와서 급히 멈추면서 앞 말굽을 높이 들고 한 소리 긴 울음소리를 내었다. 마치 말은 등 위의 사람이 빈사상태라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안장 위의 양초는 말이 발굽을 번쩍 쳐드는 바람에 땅 위에 굴러 떨어지니 백삼광이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서면서 허리를 굽혀 가슴의 옷을 헤쳐 보니 왼쪽의 갈비뼈가 으스러져 있었다.
절대로 목숨을 건질 수 없는 절망상태에 놓여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여기까지 달려와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 준 것만 해도 백삼광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양초는 숨을 거두려는 순간이었으나 그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최후의 외침이 울려나왔다.
『안...복...언...(安...復....言....)』
하는 한 마디로 말을 끝맺는다.
육기상이 곁에서 이 말을 듣고는
『농서대호(隴西大豪)!』
백삼광은 순간 양초를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서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핏자국이 선명한 양초(梁超)의 가슴속을 더듬었다.
백삼광은 갑자기 발을 둥둥 구르면서
『육노제, 이번 일은 완전히 글렀소이다.』
육기상이 몹시 흥분하면서
『이런 바보 같은 놈아! 너 때문에 안노두(安老頭)에게 오히려 길을 가르쳐 준 꼴이 되었구나!』
그는 쓸어져 있는 양초를 몹시 원망하는 눈초리로 내려다보면서 소리친다.
백삼광이 정신을 차렸는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도제(徒弟)들이여, 올라오라.』
말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오른쪽 산정(山頂)에는 이상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나는 손을 쉬지 않겠다.』
모든 사람들이 아연실색하여 그 쪽을 쳐다보니 은빛 수염을 길게 늘어뜨릴 점잖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홍면노인(紅面老人)이 서있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섬서성과 감숙성 흑백양도(黑白兩道)의 정신상의 총영도자격인 농서대호(隴西大豪) 안복언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꿈틀거리며 손을 쓰려던 졸도(卒徒)들은 백삼광의 명령을 들은 척 만 척 멀거니 그 자리에 서서 사태의 귀추를 주시하고 있었다.
백삼광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본보기를 보여서 혼을 내어 줄 생각으로 급히 명령을 내렸다.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내가 엄격한 계(誡)를 내리겠노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을 번쩍 들어 사팔뜨기 집법(執法)의 왼쪽 어깨를 후려치니 이 사나이는 불의의 참화(慘禍)를 입어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 교중의 졸도들에 대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시위였으나 실은 참혹한 죽음이었다.
천전교의 무리들은 이것을 보고 심한 반발심이 일어났다.
평상시에 이 두 호법이 갑자기 자기들 교의 높은 자리를 받고서는 부하들을 함부로 다루려는 것을 불만으로 여기어 왔던 터이며 더욱 먼젓번에 영호진(令狐眞) 호법이 처음으로 솜씨를 보이다가 운학(鄆鶴)에게 참패를 당하였고 지금 또 백삼광이 하마(何摩)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보고, 더욱 함부로 평상시에 존경하는 집법을 무참히 참(斬)하는 것을 보고서는 평상시에 좋지 않던 감정이 폭발하여 대담하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이 천전교에 입교하여 하늘을 대신하는 행도를 함에는 부모자녀의 간섭을 받지 않소. 백호법은 어찌 감히 무고한 분을 살상하오. 반드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직위를 대신하도록 해야 하겠소!』
군중의 심리란 한 번 폭발하면 끝장을 내게 마련이다.
교의 졸도들은 한 번 소란을 피우더니 사여안과 하마 두 사람은 버려둔 채 백삼광과 육기상이 서 있는 곳으로 눈을 부릅뜨고 다가가고 있었다.
육기상(陸琪祥)은 고개를 들어 안씨 부자와 낯 설은 남곤(南琨)과 살천조(薩天雕)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산상에서 이곳을 향하여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급히 백삼광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기면서
『백형, 정세가 긴박하니 도망갑시다.』
백삼광은 노기(怒氣)가 충천하였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틈을 보아서 왼쪽 산 위로 도망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산상 위에는 다섯 사람이 서서 두 사람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이 길로는 못 가!』
바로 규염객(虯髯客)과 오비 등 다섯 사람이었다.
그들은 다른 길을 더듬어 오다가 중간에 풍륜(風倫)과 장대가(張大哥) 등과 일전을 싸웠기 때문에 시간을 빼앗겨 지금에서야 이곳에 도착하여 이들의 퇴로를 막았던 것이다.
백삼광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서는 교도 한 사람을 향하여 칼질을 하고는 그의 손에서 횃불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횃불을 들어 당주가 살고 있던 목조건물에 던져버리니, 때는 초여름 서북풍이 살랑거리고 불어와 그 목조건물은 일시에 화염에 싸여버리고 말았다.
하마는 즉시 이의 그와 같은 행동이 증거를 인멸하려는 의도가 잠재하여 있음을 알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다급하여졌다.
그는 몸을 재빨리 날려서 동굴 옆에 있는 목조건물 안에서 사형령주의 검은 옷을 찾아오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백삼광은 이 기회가 자기의 도망가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서는 왼손으로 손바람을 일으키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온 몸의 공력을 모두 솟구쳐 내었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고 눈을 치뜨고 두리번거리는 기세가 누구든 가까이 가기만 하면 일격을 가할 자세를 잡고 있었다.
육기상 역시 천전교의 쌍장을 날려가며 퇴로를 찾고 있었다.
이들은 길을 가로막는 천전교도들은 두 사람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순식간에 몇 사람이 생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사여안은 이들을 뒤에서 추격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중간에 교도들이 서성거리는 바람에 길이 막혀버리고 말아서 여의하지 못하였다.
앞을 보니 백삼광은 벌써 골짜기를 빠져 나갔고 육기상 역시 죽을힘을 다하여 그를 뒤쫓고 있었다.
백삼광은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순간 큰 낭패라도 당한 것 같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육기상은 앞을 가로막는 교도들을 향하여 쌍장을 쳐내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골짜기를 빠져나왔으나, 백삼광의 비명도 듣고 대경실색하여 몸을 돌이켜 볼 사이도 없었으니 어느새 그의 눈앞에 장검을 들은 준수한 청년이 우뚝 섰다.
청년은 크게 호통을 치기 시작하니,
『천전적자(天全賊子)여, 이 한약곡(韓若谷)의 일 검을 받아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칼이 육기상의 정수리를 찔러 들어가니 그는 한약곡의 칼 아래 고혼(孤魂)이 되고 말았다.
일검쌍탈진신주 사여안은 뒤에서,
『목숨만은 살려 줘라!』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때 하마는 불 속의 목조 가옥에서 얼굴이 시꺼멓게 그슬려져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가까스로 화염을 벗어난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그 검은 옷은 발이 달린 것도 아닐 텐데 보이지를 않으니!』
하마는 사여안의 외침을 듣고서는 그 쪽을 바라보니 오랫동안 약속을 어긴 한약곡이 서 있는 것을 보고서는 가슴에 뭉클한 것을 느꼈다.
한약곡이 들고 있는 장검에서는 아직도 붉은 선혈(鮮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기고만장하여 우뚝 서서 침착한 어조로,
『천전교도 전체를 주륙해야 할 것이나 이 한약곡이 무림을 대신하여 본을 보인 것이다.』
말을 마치자, 눈을 돌려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천전교도들을 바라보았다.
하마는 그의 이런 기개가 천하에 다시없는 것으로 보고 마음속으로
――한약곡과 운학 형은 무림의 쌍벽에 틀림없으나 운형에게는 충후(忠厚)한 인간성이 있고 한약곡에게는 과인한 용맹이 있다. 참으로 봄꽃에 가을 열매로서 각기 그 장점이 있으니 나는 형들을 잘 만났군!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 때 모든 사람은 골짜기로 모여 들었다.
하마가 막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농서대호(隴西大豪) 안복언(安復言)이 웃으면서
『영웅은 소년에게서 나온다더니 이 한(韓)영웅께서는 정말 쾌남아(快男兒)이오. 그러나 오늘 이 골짜기에서 이렇게 많이 모인 천전교의 문하인들을 모조리 살육하여 저의 섬ㆍ감 양성 친구들의 분기(憤氣)를 씻어 주심이 어떻겠소이까?』
한약곡은 칼을 칼집에 넣고 머리를 가볍게 숙이면서,
『안노영웅(安老英雄)의 말씀을 한모(韓某)가 어찌 듣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하마가 앞으로 나오면서 한약곡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니 한약곡은 깜짝 놀란다.
『삼제(三弟), 어찌 운형제와 헤어져 왔소. 내가 성 안에 그려 놓은 암호를 보았소?』
『둘째형은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는데? 우리들이 형의 암호를 따라 오지 않았다면은 어찌 이 회주현에 왔겠습니까?』
『이 몇 달 수색한 결과 아주 수확이 컸어! 아니나 다를까 천리(天理)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사형령주는 틀림없는 천전교주의 화신(化身)이었어! 동생이 조금 늦게 이곳에 왔더라면 그 사형령주의 정체가 오늘 완전히 벗겨질걸 그랬어!』
하마는 크게 놀라면서,
『큰형께서는 이 동생보다 먼저 동정을 살피신 모양이군요. 혹시 몰래 곁에서 지금의 이야기를 들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한약곡은 사형령주를 놓친 것이 아깝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면서
『내가 그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하여 닷새 동안이나 이곳에 머물고 있었어! 매일 밤 사경(四更) 때가 되면 한 사람의 극히 공력이 큰 사람이 이곳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거든! 그가 사형령주인지는 단정을 내릴 수가 없었으나 십중팔구(十中八九)는 그라고 짐작을 하면서 좀 더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오늘 이 북새통이 일어나니 그와 흑백을 가릴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지!』
모든 사람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던 중에 규염객(虯髯客)이 화난 음성으로,
『사형령주가 공적(公敵)인 이상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는 철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보네.』
이 때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음침한 어둠속에 잠겨 들었다.
희미하게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마른번개가 번쩍하니 이곳에도 멀지 않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기도 하였으나, 하늘의 조화를 누가 알리오.
여기는 비탈진 산언덕 아래다.
이 비탈진 언덕은 저 멀리 검광이 번쩍이는 싸움터는 관계없다는 듯이 한가하기만 하였다.
운학은 몽롱한 정신으로 언덕 위에 누워 있었다. 맞은편에 누워 있는 사람은 그 소복(素服)의 여인이었다.
운학의 마음에는 의문이 생겨났으나, 어떤 방법으로 말을 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자신에게 질문을 하였다.
『저 여자는 누구냐? 왜 나를 구해 주었는가?』
그 소복의 여인과 운학은 위기를 벗어난 다음 여인은 운학의 손목을 잡고 이 언덕으로 온 것이다.
여인은 고개를 흔들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를 어깨 뒤로 넘겼다.
그 찰나 운학의 눈에 들어 온 여인의 얼굴, 운학은 깜짝 놀랐다.
오! 하늘이여! 그 여자는 바로 다름 아닌 화산 산록에서 운학의 구원을 받은 절색의 소녀가 아니었던가!
소녀의 얼굴에는 일종의 부끄러움과 기쁨이 엇갈려 있었다. 상기된 그의 백옥같은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하여 주었다.
운학은 술에 취한 사람 모양으로,
『아가씨! 바로 아가씨였군…….』
아가씨는 검은 수정과 같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그래요, 저예요.』
운학은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아가씨의 의로움에 내가 구원이 되었으니…….』
『아니예요, 저는―― 저는―― 』
달빛도 흐리기는 하였지마는 주위의 만물이 운학의 눈에는 모두 비단장막을 쳐 놓은 듯 희미하게 보였다. 그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가볍고 부드러운 숨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운학의 마음은 뜨겁게 고동치기 시작하였다.
지난 날 화산에서 자기 품에 안겨서 흐느껴 울던 소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으나 그가 바로 자기 옆에 누워 있다는 것이 도시 믿어지지 않았다.
순간 그는 소녀의 옆에 누워 있는 자신이 몹시 비열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불안에 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소녀도 역시 무엇인가 생각이 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녀는 일어나는 순간,
『아야!』
하고 가볍게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러시나요, 아가씨? 아아, 다치셨군!』
소녀는 자기 손가락으로 다리의 복사뼈를 가리킨다. 골짜기에서 이곳으로 옮겨 올 때 다친 모양이었다.
운학은 재빨리 소녀를 부축하여 일으키려 하니 소녀는 손을 내밀어 운학의 손을 요구하였다.
운학이 손을 내미니 소녀는 손을 마주 잡고서 빤히 운학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운학의 그리움에 찬 눈동자와 마주친 소녀의 눈매는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두 사람은 어느 사이엔가 서로 손을 굳게 잡고 있었다. 운학은 가볍게 소녀를 끼어 안을 듯이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소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쏟아져 나왔을 때 운학의 마음에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저를 구하시느라고 상처까지 입으셨으니…….』
소녀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검고 빛나는 머리가 가볍게 날린다. 운학은 이 감동적인 재회를 토로하고 싶었으나 얼른 말이 뛰어 나오지를 못했다.
이 때 갑자기 언덕 위에서는 불을 뿜는 칼과 창이 날뛰고 있었으나, 이곳에 있는 운학과 소녀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소녀는 운학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 부끄러운 듯이
『당신은 이곳에 왜 오셨지요?』
『사람을 하나 찾으려고――』
운학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녀는 반문을 하였다.
『사형령주?』
운학이 놀라면서,
『오! 아가씨께서도 사형령주를 아시나요? 아가씨도 역시 그 때문에 이곳에 오셨나요?』
소녀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다시 운학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요즈음 강호에는 심한 풍운이 몰아치고 있소이다. 아가씨께서 홀몸으로 강호를 돌아다니다가 만일에――』
운학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녀에게 깊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다.
소녀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저는 사람을 찾고 있어요!』
이런 대화가 오가는 중에 두 사람의 몸은 다정하리만치 가까워지고 있었다. 운학이 누구를 찾고 있느냐는 암시를 보내며 다음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소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저는 저의 장부(丈夫)를 찾고 있었어요!』
말을 마친 소녀의 얼굴은 지나치리만치 상기되어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들지 못하고 있었다.
운학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아, 그 사람, 그 사람은 누군가요?』
소녀에게 있어서 운학의 이 질문은 야속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였으나, 운학은 사실 그 장부란 누굴까? 하는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어서 물었던 것이다. 소녀는 수줍음을 참지 못하여 눈매를 찡끗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그 이름으로 말하면 운학(鄆鶴)이에요.』
운학은 깜짝 놀라면서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는 손을 이마에 대면서 자신의 이성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가씨, 아가씨의 이름을 밝혀주실 수 없습니까?』
아가씨는 말했다.
『저는 사여명(查汝明)이라고 해요.』
사여명! 반동강이로 끊어진 옥환에 새겨졌던 그 이름 사여명 석 자가 아닌가? 설마 이럴 수가 있으랴.
운학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넓은 관도 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바람 소리와 멀리서 개 짖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 때 관도 위의 허공을 무서운 경공술로 날아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조금 지나서 또 다시 한 사람의 그림자가
『휙――』
하는 소리를 내면서 허공을 제비같이 날라가고 있었다.
앞을 달리던 사람이
『허허.』
하고 웃으면서
『그 빌어먹을 풍가, 늙은 것이 뭣 때문에 나를 쫓아온담! 정히 쫓아오겠다면은 내가 도망갈 필요가 어디 있어! 에이 여기서 결판을 내 버리리라!』
뒤를 쫓아가던 사람은 앞 사람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이런 어머니 배에서부터 거꾸로 낳은 녀석 같으니라구! 네가 어느 면으로 보나 나의 적수가 될 수는 없지 않느냐?』
앞을 달려가던 이는 장대가(張大哥)였다. 그는 다시 입을 열어 응수하였다.
『내가 자네에게 지는 척 한 것은 자네가 나를 쫓아오지 않을까 하여 그랬던 것이라네.』
뒤쫓아 오던 풍륜(風倫)이 발을 번쩍 들어 허공을 차면서,
『에이, 이 장 호로자식 같은 놈아.』
『에잇, 이 풍가 늙은것아! 무슨 경(經)을 읽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백룡수(白龍手) 풍륜(風倫)은 전진파 제삼십일대 조사(祖師)에게 격패되자, 삼십 년 동안을 억지 화상(和尙)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그동안 남에게서 욕설을 들은 적이 없었으나, 오늘 이 장가한테서 경을 읽느니 어쩌니 하는 모욕을 당하니 불끈 화가 솟아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복파보(伏波堡)에는 너를 위시하여 똑똑한 놈이 한 놈도 없는 게로구나!』
『그 따위 소리는 해서 뭘 한담!』
풍륜은 더욱 약을 올리기 위해서
『그 중에서도 네 놈이 가장 얼간망둥이지?』
장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좀 더 똑똑히 말을 해 봐!』
『나는 너를 요(姚)가 계집애보다 더 못난 놈으로 보고 있어!』
장가는 그가 계집아이란 말을 듣고서 속으로 깜짝 놀라면서
『어째서?』
『고 계집아이는 나이 어린 것이 겁도 없이 황산에서 우리와 내기를 하기도 하였지만 네깐 놈은――』
장가는 귀에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황산(黃山)?』
하면서 말을 계속하였다.
『난 여러 곳을 요원(姚畹)을 찾아 헤메였는데 너한테서 황산 이야기를 듣고서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로구나!』
그는 갑자기 몸을 왼쪽으로 꺾으면서
『풍가야! 실례하네.』
한 마디를 남기고 무서운 경공술을 발휘하며 몸을 날려 가니 그의 경공술에는 분명히 심오한 조예가 깃들어 있었다.
풍륜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예, 이 얼간이 같은 놈아! 나의 일 장을 받아라!』
그러나 장대가도 앞으로 몸을 날리면서도 일 장을 뒤로 쳐 보냈다.
장대가는 날랜 경공을 운행시켜 앞으로 나가니 풍륜의 공격이 미치지 못하였다.
장대가는 다시 상승경공을 발동하여 풍륜의 위협권을 벗어나 버리고 말았다.
풍륜은 쫓아가며,
『죽일 놈아, 이 씨 없는 놈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지쳐버렸는지 땅으로 내려서서 정지하고 말았다.
그는 장가가 가버린 어둠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이놈 때문에 영지초(靈芝草)를 뺏겼으니 정말 죽일 놈인데――』
이 때다. 그의 등 뒤에서 갑자기 일진의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사람의 기척이 났다.
풍륜은 대경실색하며 도대체 어떤 놈일까? 이놈의 공력도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하고는 쌍장을 쳐서 한편의 흐릿한 그림자를 향하여 날려 보냈다.
『휭――』
하고 장풍이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상대방도 장풍을 일으켜 쳐들어왔다.
순간 풍륜의 몸은 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침중한 목소리로
『소제, 임여(任厲)가 노대(老大)를 뵈우오.』
풍륜은 늙은 눈을 크게 뜨고 오랫동안 못 만났던 노삼(老三)을 응시하고 있었다.
풍륜은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하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서 임여의 양 어깨를 덥석 잡으면서 감격의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해후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 희색이 만면하였다.
풍륜의 감격어린 웃음소리가 끝나자, 뒤를 이어서 임여가 웃어대기 시작하였다.
임여는 낮은 목소리로
『노대, 수척해졌소이다 그려.』
『노삼도 많이 늙으신 것 같소. 이 몇 해 동안 어데 있었소?』
임여는 멀거니 허공을 쳐다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이 몇 년 동안 나는 지옥(地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풍륜은 멀거니 임여를 바라보았다. 임여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 속에는 고동의 기색이 역력히 나타나 보였고,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던 그의 입가에도 많은 고통의 빛이 깃들어 보인다.
다시 풍륜은 왼손으로 임여의 오른팔을 쓰다듬고서는 낮고 다정스럽게
『노삼 당신, 왜 그런 말을 하오! 무슨 고생을 하였기에…….』
임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리들은 일생을 미친 노래를 부르면서 세상을 떠돌아다닌 것 같지 않소? 이것도 나이의 탓일까?』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회천현의 서북쪽 겨우내 무서운 눈에 덮였던 이곳에도 억지로 봄기운이 찾아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이곳은 혹한(酷寒)이었다.
두 사람의 기인(奇人)의 공력이 불세출(不世出)의 것이었기에 혹한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늙은 마음만은 혹한 속에서 녹일 수가 없었다.
풍륜도 무엇인가 애수(哀愁)에 잠긴 듯이
『노삼, 전진파 청목도장(青木道長)의 제자가 강호에서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날뛰고 다닌다 합니다.』
『알고 있어요. 만나보기까지 하였습니다.』
대답하는 임여(任厲)의 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풍륜은 깜짝 놀라면서,
『어데서 그를 만났단 말이오?』
그러나 임여의 얼굴에는 다시 무거운 애상(哀傷)이 뒤덮이는 듯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
『내가 만약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일생을 새출발하려는 각오가 우러나지 못하였을 것이오.』
이 말을 듣고 풍륜은 그 말에 어떤 뜻이 담겼는지 알지를 못하여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임여를 바라보면서,
『노삼!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청목도장의 제자와 명년 봄 일전을 치르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와 헤어져 살겠는가?』
임여는 이 말을 듣고 비통한 목소리로
『노형들의 곁을 떠날 뿐이 아니라, 온 천하의 인류를 떠날 각오요.』
풍륜은 하마터면 그에게 욕설을 퍼부을 것 같은 흥분을 억지로 참고 견디었다.
그것은 뜻하지 않게도 임여의 얼굴이 심한 애상에 잠겨 있는 표정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두 노인은 누가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침묵에 잠긴 채 조용히 걷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의 걷는 뒷모습은 천하무적 고수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처량하고 비참한 모습이었다.
풍륜이 갑자기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지난 날 청목도장의 사부와 동해(東海) 진주도(珍珠島)의 파죽검객(破竹劍客)이 우리들을 찾아서 분풀이를 하고 간 일을 노삼은 기억하겠소?』
임여가 고개를 끄덕이자, 풍륜이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하였다.
『이 분풀이를 하자면 우리들은 무당산(武當山)에 가서 무당파 장교(掌敎)의 사제 남석노도(藍石老道)의 수염이나 각자 한 움큼씩 뽑아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지 않은가! 전진노도사(全眞老道士)는 늙어서 관계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그러나 임여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미소가 떠 오른 것을 풍륜은 곁눈으로 보았다――
『전진노도사는 늙어 폐물일 것이고, 가장 미운 놈이 파죽검객 서(徐)가 놈이란 말야! 우리는 그 무당노도의 수염을 뽑아 그 서가 놈이 어쩌는가 한번 봤으면 좋겠어!』
임여가 비로소 입을 열고,
『그래요.』
다분히 관심이 없다는 대답이었으나 풍륜은 모른 척하여 버리면서,
『서가 놈이 밉기는 하지만 그의 검법은 상당히 세거든! 그 당시 그 늙은 것이 노삼에게만 공격의 화살을 집중하던 생각이 나나? 왜 그랬는지 말 좀 해보게!』
『아마 이 임여가 살인마가 되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였고 악한 행적 역시 가장 많았기 때문이겠지요.』
풍륜은 갑자기
『하, 하!』
하고 너털웃음을 웃어가면서
『그 서희팽(徐熙彭)은 청목노도사의 옥현귀진(玉玄歸眞)의 위엄을 이용하여 그의 파죽검(破竹劍)을 종횡무진으로 휘둘러 노삼, 당신을 성내게 하지 않았소. 내 이 늙은 목숨을 걸고 그에게 복수하리다.』
임여의 흰 수염은 바람에 날리니 관운장(關雲長)과 같은 위엄이 보이기도 하였다.
풍륜은 굳은 결심이라도 한 것같이
『그 서가 놈 배짱도 좋았지! 그 놈은 당신을 깔보고 지금도 벼르고 있다더군! 내가 기회만 있으면 단 한 칼에 그 놈을! 하하――』
그는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시늉을 하더니 두 손을 허리로 돌리고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한다.
임여는 풍륜의 웃음이 끝이 나기를 기다렸으나 미친 사람 모양 계속해서 껄껄대고 웃는 것을 보자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노대! 기회 있어 그를 한 칼에 혼을 내주되 그의 옷자락을 반만 찢어 놀라게 하는 것을 잊지 말아요.』
풍륜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 다시 웃기 시작하였다.
임여는 풍륜의 웃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서희팽(徐熙彭)이 그의 칼에 맞아 선혈을 흘리며 죽어 넘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그와 함께 껄껄대고 웃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웃음소리에는 한 가닥의 근심걱정도 없이 비할 데 없는 인간의 환락가경에 강림한 듯 주위에 쌓인 빙설마저 녹는 듯 온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