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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서 온 편지
이영숙
전선前線은 ‘우리’라는 보편에서 가장 멀리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파생하지만 우리는 함께 가지 않으며,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홀연히 떠난 ‘너’나 그 도정, 귀착점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이를테면, 우리라는 보편은 수세식 화장실이다. 배출되는 순간 분뇨는 변기 속으로 사라지고 동시에 의식 속에서도 사라진다. 정화조에 모였다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초록색 탱크로리로 옮겨지던 인상적인 냄새와 소음의 과정을 생략하고 언제부터인가 변기에서 직접 하수종말처리장으로 직행하게 되어 이제는 그것을 환기할 기회조차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오수 정화 작업을 거쳐 강과 바다로 유입되고 그것이 우리의 식수로 환원되고 있지만, 우리는 수돗물에 대한 중금속 오염 수치 정도를 궁금해할 뿐 분뇨와의 연계성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여기를 떠나 그것으로 떠난 ‘너’만이 그 전선에 머물며 분뇨의 생성과 소멸과 재생의 전 과정을 이해하고 통찰한다.
물론 전선은 공간적 개념만은 아니다. 시간일 수도 있고, 역사나 정서, 관념이나 제도 혹은 꽃잎 벙그는 어떤 찰나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전선은 ‘그곳’이 아니고 ‘그것’이다. 우리라는 보편이 가 닿지 못하는 그것에서 가을의 사서함으로 ‘너’들이 보낸 다섯 통의 편지가 당도했다.
체제의 전선
한 몸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거기
나라를 지키려는 간절한 비무장의 지대와
민족혼을 뿌리째 뽑으려는 무장의 지대가
공존하는 거기
번뜩이는 칼과 칼집 속의 칼이 부딪히는
허공의 거기
총과 칼로 누르면 누를수록
더 단단해지는
더 날카롭게 벼리는
정복자들은 결코 알 수 없다
목숨 너머
불의 눈동자들, 천 년 별빛으로 흐르는 것을
소리 없는 울음이 켜켜이 쌓여가는
거기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영하의 최전선이다
―문현미, 「얼음 전선―서대문형무소」 전문(《시와세계》 2023년 가을호)
역사는 시간과 함께 흘러서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라 그때 “거기” 그대로 있다. 옛 건물들은 헐리고 시대의 공법에 맞게 새로 지어지며 달라진 길에 다른 사람들이 오가지만, 보존 잘 된 문화유산이 먼지를 털어내고 후손들을 만날 때 여전히 낯선 표정을 짓는 것은 그것이 당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하수종말처리장을 찾아가듯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 전선이 있다.
3ㆍ1운동 시위관련자와 항일독립운동가를 가두기 위해 일제가 만든 서대문형무소는 체제 간의 첨예한 접경 “지대”였다. “나라를 지키려”다 잡혀들어간 국내 인사들에게는 “칼집 속의 칼”을 “더 날카롭게 벼리”던 “최전선”이었고, 일제로서는 “총과 칼”로 누르고 눌러 “민족혼을 뿌리째 뽑으려”던 “최전선”이었다. ‘너’는 텅 비어 있는 서대문형무소를 그저 둘러보고 돌아가는 ‘우리’라는 보편의 행렬에서 벗어나 그때 “거기”로 홀로 걸어 들어간다. “한 몸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형무소의 좁은 철창 안. “목숨”이 아니라 “목숨 너머”를 보는 수감자들 곁까지 가서 보고 듣고 기록한 이 시는 20세기라는 체제의 전선에서 ‘너’가 보내온 편지다.
감각의 전선
창문은 작아지려고 한다. 방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어디서나 제 몸을 따르려 한다. 흐르려 한다. 천장이 기울고 바닥이 튀어오르려 한다.
창문은 가끔 사시가 된다. 풍경과 방 안을 동시에 바라보려고 한다. 바람이 자신을 통과하기를 자신이 바람을 통과하기를 둘 다이기를 바라고 있다. 누군가 속삭였을 때 창문은 흔들린다. 대체로 창문이 흔들리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노을이 질 땐 노을이 붉게 물드는 것을 지켜본다. 사라지기 전이다. 어두워지기 전이다.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을 바라본다.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는 것 속에 들어 있어서. 사라지기 전에 창문을 닫는다. 창문은 감정과 상관없이 움직인다. 하루에 한번은 뜨겁고 하루에 한번은 차갑다. 열면 닫히고 닫히면 열린다. 반대로도 움직인다.
창문은 늘 흐르고 있다. 창문은 상태다. 부드러운 물결. 물고기를 담지 않는 수족관이다. 투명하고 불투명하다.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감고 있다. 눈을 던질 곳이 없다. 눈이 마주치니까. 보는 눈과 보이는 눈 사이를 창문은 본다.
창문은 놓여 있다. 창문은 펼쳐져 있다. 창문은 궁금하지 않다. 열려 있으면 열릴 것이고 닫혀 있으면 닫힌 것이다. 반대는 없다. 풍경은 훼손되지 않은 채로 전달되어야 한다. 아무 의미 없는 구멍처럼. 지금 열린 그것은 꼭 열린 것처럼 보인다.
―김석영, 「내가 모르는 장면」 전문(《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창문은 채광과 환기, 통풍, 온도와 소음 조절 및 조망 등을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지만, 단열재와 냉ㆍ온방 장치의 발달로 본래의 물리적 기능에서 건물 내부와 외부의 미적 기능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창문은 틀로 고정되어 있어 유동적이지 않으며, 안과 밖을 경계 짓는 기능과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창문은 인공사물이며 비인격체다. 그러나 ‘너’는 다르게 생각한다. “창문은 상태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처해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상태’는 주변 환경과 미세하게 연결됨으로써 변화 가능성 혹은 운동성을 내포한다. ‘너’에 의하면, 심지어 ‘창문’은 “늘 흐르고 있다.” 이는 ‘창문’의 중용적 속성의 결과인데, “방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작아지려고” 하면서도 “어디서나 제 몸을” 기울여 “따르려” 하는 능동과, “열려 있으면 열릴 것이고 닫혀 있으면 닫”히는 수동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자유에서 비롯한다. ‘창문’이 “풍경과 방 안을 동시에 바라보려고” “가끔 사시”가 되거나, “바람이 자신을 통과하기를” 바라면서 한편 “자신이 바람을 통과하기를” 바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누군가 속삭였을 때” 정작 자신은 “흔들”리면서도 “풍경”을 “훼손되지 않은 채로 전달”하는 일 역시 자유가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너’는 ‘창문’에 이런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창문’의 감각을 끝 간 데까지 따라 들어간 것일 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을 바라본다.”에서 앞의 ‘바라보는’ 행위의 주체는 ‘창문’이고, 뒤의 ‘바라본다’의 주체는 ‘너’다. ‘노을’이 “사라지기 전에 창문을 닫”는 ‘너’는 그러므로 창문이라는 감각의 전선에서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이 모든 것을 「내가 모르는 장면」이라고 짐짓 부인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창문’의 첨예한 감각에 도달한 ‘너’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계의 전선
믹서기 날을 물에 담그고는 그릇들과 함께 휘저었다 물 밖으로 손을 꺼냈을 때는 손에서 낭자하게 피가 나고 있었다 화를 낸다는 건 자신을 자해하기도 한다. 그릇을 던져버렸다면 내 손은 무사하고 그릇은 깨졌겠지. 믹서기날은 운명 같은 거다. 나를 베는 운명 분명 씻는 날이 아닌데 날은 아픈 날 물 속에 담겨 있었고 주의하지 않고 물을 휘저었다 그릇아 꺼져라 하고 그릇을 깨지 않으면서 구정물만 튀기면서 내 손을 회를 쳐 놓으면서 손을 치켜들고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흐르는 피를 다 막지 못하면서 휘저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들어낸 것은 없었다 손등과 손가락에 자잘한 흉터만 잔뜩 남았다 깨어지지 않은 그릇은 여생의 반려가 되었다
―이점선, 「오늘 나는 네가 살지 못한 만구백오십번째 밤*」 전문(《시와세계》 2023년 가을호)
*시집 『어느 푸른 저녁』 88인의 트리퓨터 시집
불화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 간, 내전은 권력과 권력 간, 환경 문제는 정치와 경제 간, 폭력은 에고(Ego)와 이드(ID) 간…. 그 어느 것에나 강자와 약자 사이의 불평등이 전제된다. 개인 간의 사소한 다툼에서조차 그렇다.
이 시에서 전경화된 상황은, 드러나지 않은 어떤 대상에 의해 ‘나’가 “화”났다는 점이다. 약자인 ‘나’는 화풀이로 ‘나’보다 더 약자인 “그릇을 던져” 깨뜨림으로써 심리적 위안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대신 “믹서기 날”을 넣은 물속에서 자신의 손을 “자해”한다. “그릇”이 ‘관계’를 상징하고 “믹서기 날”이 “운명”을 상징하므로, 시적 서사는 ‘흉터는 잔뜩 남았을지언정 자해 행위가 결과적으로 관계의 파국을 막았다’로 귀결된다. ‘우리’라는 보편이 직면한 현실의 삶이기도 하다. 몇 문장은 문법을 벗어나기도 하고(“화를 낸다는 건 자신을 자해하기도 한다.” 등), “분명 씻는 날이 아닌데 날은 아픈 날 물 속에 담겨 있었고”와 같은 구절에서는 ‘날’이라는 세 겹의 절묘한 언어유희가 아쉽게 불발되기도 했지만, 이를 화난 자의 비논리적 어투로 보면 의도적인 시적 표현으로도 읽힌다. 그런데 ‘너’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시는 기형도에 대한 헌사로도 읽힌다는 것이다.
심층적으로 결을 달리할 수밖에 없는 단서가 있다. 시의 제목 중 ‘만구백오십번째 밤’을 365일로 나누면 30년이 산출된다. 그리고 각주에 있는 『어느 푸른 저녁』은 기형도의 시집 『잎 속의 검은 잎』 발간 30주년 기념으로 젊은 시인 88인의 시를 문학과지성사에서 묶어 간행한 시집이다. ‘트리퓨터 시집’을 트리뷰트의 오자誤字로 간주하여 해석하면(시집에도 실제 ‘트리뷰트’로 표기됨) ‘헌정 시집’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릇”은 시를 상징하고, “믹서기 날”은 기형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믹서기날은 운명 같은 거다.”라고 시에 이미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운명적으로 만난 기형도로 인해 시를 “여생의 반려”로 삼게 된 ‘너’가 보내온 편지에는 기형도에 바치는 89번째의 헌사가 담겨 있다.
감정의 전선
어떤 마음은 모래에 사장되고
어떤 기분은
파도 속에 잠긴다
여기에 데려다 놓고 떠나가 버린
어떤 날씨와
여기에 불러다 놓고 사라져버린
어떤 생각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를 맞고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목격되고
싶고
나는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고
우리는 숨겨진 바닥이 되었다
어떤 마음은 모래사장이 묻어두고
어떤 기분은 파도가 다가와 가만히 가져간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사라지고 있다
가장 먼 바깥을 향해
마침내 바깥이 우리를 안에 가둬두고 문을 잠가버렸다
그것은 문어단지 속에 좌초된 안쪽이었다
—위성욱, 「난파」 전문(《시와반시》 2023년 가을호)
감정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는 가운데 외부자극에 대한 신체 반응을 지각한 결과로 어떠한 정서를 경험하게 된다는 비교적 최근의 이론은 미국의 윌리엄 제임스와 덴마크의 카알 랑게의 것이다. 이는 감정이 외부자극 없이는 스스로 발생하기 어려운 어떤 느낌, 곧 현상 뒤의 지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부모의 절규, 반려견을 학대하는 견주에 대한 기사 같은 것이 우리를 슬픔과 분노로 이끄는 것은 명백하지만, 지는 꽃이나 얼굴을 스치는 바람도 우리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것은 매일반이다. 감정을 만 악의 근원으로 보고 통제의 대상으로 삼은 영화 <이퀼리브리엄>(2002)에서처럼 그것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고,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015)에서처럼 인간이 성숙하고 행복해지는데 필요한 요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주제는 철학적 명제를 품은 거대 담론만큼 규모가 커서 이 시의 슬라이스 된 ‘어떤’ 감정과는 괴리가 좀 있어 보인다.
도시적 일상에서 여가 생활을 고려하더라도 배가 난파당할 확률은 높지 않지만, 경쟁과 부조리가 일상이 된 현실 속에서 생활환경의 직ㆍ간접적 자극을 받고 우리의 감정은 자주 ‘난파’ 당한다. 낱낱의 “나”들로 이루어진 “우리”라는 감정은 ‘난파’를 공유함으로써 시대적 보편성에 동참하게 된다. 그것은 “사장되고”, “목격되고/ 싶고”, “들키고/ 싶고”, “숨겨진”, “좌초된” ̄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동적이며, “여기에 데려다 놓고”, “불러다 놓고”, “모래사장이 묻어두고”, “파도가 다가와 가만히 가져”가고, “바깥이 우리를 안에 가둬두고 문을 잠가버”리는 ̄에서와 같이 행위의 주체가 되지도 못한다. ‘문어단지’로 한 번 유연하게 미끄러져 들어간 문어가 배 위로 끌어 올려져 다시는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 역시 감정이라는 ‘문어단지’ 속에서 저항하거나 빠져나갈 수 없게 “좌초된” 현존재가 아닌가. ‘난파’당한 현장에서부터 “가장 먼 바깥을 향해” “사라지”는 일부를 따라가지 않고, ‘너’는 ‘우리’라는 보편과 함께 ‘여기’라는 ‘좌초’된 삶의 현장에 남았다. 여기가 하수종말처리장이라고, 감정의 전선에서 ‘너’는 그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죽음의 전선
조지아와 함께 묘지를 걸었다
밤이고
여름이었다
죽은 사람들은 다정해
자기 몸을 내어 주잖아
깊은 곳에서
조지아는 내 귀를 끌어당겼다
가만히 속삭였다
어둠 속에서 나는
부드럽게 귀가 녹아내렸다
조지아는 천천히 흘러가
비석을 끌어안았다
이곳에서 사랑받고 있어
묘지 속 사람들은
홀로 걷는 한 사람을 사랑해
홀로 우는 한 사람을 바라봐
둥그렇게 모여서
영원한 현재가 되어가는 중이지
그의 노동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 삶의 노동은 아름답다
조지아는 그런 문장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비석을 닦고
잡풀을 뽑고
까마귀의 추락을 지켜보고
비석 밑에 녹아 있는 내 무늬들을
쓸어 담고
알 수 없는
모든 것은
깊고
부드럽고
―이영주, 「묘지기」 전문(《웹진 같이 가는 기분》 2023년 여름호)
이 여름밤에 다정하고 우아하게 산 자와 죽은 자가 “묘지를” 거닌다. ‘묘지기’인 “조지아”와 “죽은 사람들” 중 한 명인 “나”가 그들이다. 살아 있는 자들은 조지아와 친구가 아니며, 죽은 자들은 이제 산 자들과 무관해졌다. 누구도 묘지기에게 “다정”하지 않으며, 나란히 걸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홀로 걷”고 “홀로 우는” 조지아는 죽은 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그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이번 삶의 노동은 아름답다”라는 문장은 죽은 자들에게 이해받고 죽은 자들을 위무한다. 또한 누구도 죽은 ‘나’를 위해 “귀를 끌어당”겨 “가만히 속삭”이거나, “비석을 끌어안”거나, “비석 밑에 녹아 있는 내 무늬들을/ 쓸어 담”지 않는다. 아무리 서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추모일이나 기념일에 잠깐 다니러 와 “비석을 닦고/ 잡풀을 뽑”을 수는 있을지언정 죽은 자와 함께 밤의 묘지를 거닐지는 않는다. 산 자들은 “까마귀의 추락을 지켜”볼 정도로 시간이 많지도 않다.
죽음 이후 “영원한 현재”는 오롯이 죽은 자만의 몫이 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란 문맥의 엄중함은 생과 사의 갈림길이 엄연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유명을 달리했다’라거나, ‘별세하다’의 의미 역시 산 자로부터의 떠남에 관한 것이다. 애도와 장례를 끝으로 죽은 자는 죽은 자들만을 위해 고안된 장소에 매장된다. 고인이 짧거나 긴 생을 보냈거나, 사랑하는 자들이 아직 살아가는 집 부근, 동네 야산이 아니라 대체로 도시를 지나고 농로와 산길을 한참 거슬러 올라간 곳에 지정된 공동묘지로 간다. 필연적으로 누구나 다 죽을 것이고, ‘산 자’는 ‘아직 죽지 않은 자’와 동의어지만,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죽음을 종말하수처리장처럼 가장 멀리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라는 보편적 인간의 의식이다. “이곳에서 사랑받고 있어”라고 말하는 ‘묘지기’는 산 자보다 죽은 자에 가까이 있으므로, 산 자들에게 선망되거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
비석마다 새겨진 고인의 행적이나 생몰연대를 거의 외우고 있을 ‘조지아’는 죽은 자들의 친구다. 조문객들이 없는 밤이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죽은 자의 이름을 하나, 하나 호명해서 긴긴 이야기를 나누며 더불어 걸을 것이다. 그 다정하고 고독한 독백을 듣는 ‘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전선까지 나아간 ‘너’에 다름 아닐 테고.
‘너’는 ‘우리’라는 보편이 가 닿지 못하는 곳/것을 향해 나아가거나, 혹은 ‘우리’라는 보편이 ‘난파’당한 곳/것에 함께 머문다. 함축적 시인(김준오)이라고도 할 수 있는 ‘너’는 시인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곳까지 도달하여 편지를 쓴다. 그래서 그 편지는 그 시를 쓴 시인조차 “알 수 없”고, “알 수 없는/ 모든 것은/ 깊고/ 부드럽고”.
―《시와세계》 202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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