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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華山論劍) 7부 신조협 양과후전 (전4권)
- 차례 -
번역을 마치고
작가 소개
제1장 떨어지는 꽃잎
제2장 협객행(俠客行)
제3장 거와회의(巨蛙會議)
제4장 사주상박(蛇蛛相拍)
제5장 취중에 한 결혼
제6장 홧김에 선택한 남편
제7장 흩어진 사랑
제8장 숲속의 혈투
번역을 마치고
이 작품은 홍콩의 문호 김용의 대하역사소설 《화산논검(華山論劍)》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
다. 원저자 김용은 본명이 사량용(査良鏞)으로 1924년 중국 절강성 해령에서 출생했다. 상해
에 있는 동오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으며 현재는 홍콩 최대의 일간신문 《명보(明報)》
의 주필이자 사장이다.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중국 문단의 기인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왔다. 중국 역사에 정통하고 방대한 유가(儒家)의 경서를 섭렵하고 노장 철학과
불경에 심취하여 학문적 영역을 넓혀 온 그는 이와 같은 해박한 지식을 밑거름으로 빨려 들
어가는 문장과 비할 데 없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불후의 명작들을 저술하였다.
그의 작품에 심취하여 그를 존경하는 애독자는 홍콩과 대만은 물론이고 한국과 구미 각국에
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고 그 수가 수억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근래 들어 중국 대륙에 휘몰
아친 김용의 열풍은 대단하여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는 중이며 등소평 역시 그의 작품을
즐겨 읽는다는 것이다.
김용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나름대로 개성이 있다. 그의 붓끝에서 창조되는 수
많은 인물들은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그리하여 독자를 작품 속
의 분위기에 끌어들여 몰아의 지경에 이르게 한다. 김용의 작품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영원불멸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학문을 '김학(金學)'이라고
부르며 1980년 대만에서 발간된 '김학연구총서'만 해도 무려 18권이나 된다.
김용은 《녹정기》를 끝으로 절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화산논검》은 《소설 영웅문》
의 전편(前篇)으로 최근에 발표되었으며 현재 김용이 집필하고 있는 중인 것을 발표되자마
자 긴급 입수하여 번역하였다.
이 작품 《화산논검》은 모두 6부 1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 제5부까지는 서독 구
양봉 전기에서 시작하여 동사 황약사, 홍칠공, 단지홍, 왕중양 등 다섯 기인의 일대기를 소
설로 그려 내었고, 제6부는 그 다섯 명의 절세 고수들이 화산에서 무예를 겨루는 장엄한 과
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하였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 다섯 사람은 《소설 영웅문》에 등장하
는 전대의 기인들이다. 《소설 영웅문》의 주인공인 대협 곽정이 등장하기 이전에 활약했던
다섯 선배 고수들끼리 얽히고설킨 은원관계를 흥미있게 소설로 꾸민 이 작품 《화산논검》
이 집필됨으로써 비로소 비로소 《소설 영웅문》은 시작과 끝이 어울려 수미일관(首尾一貫)
의 완결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화산논검》의 제1부는 서독 구양봉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구양봉을 중심으로 황약사,
단지홍, 홍칠공, 왕중양의 활약이 그려진다. 제1부는 구양봉이 합마공을 익혀 천하의 고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구양봉의 내면심리를 추적하면서 선악·남
녀·정사·생사·애증의 대립을 지양시켜 구양봉을 진정한 대악인으로 잘 표현해 냈다는 점
이다. 장을 넘기고 권을 더할수록 김용의 필력이 용트림하는 《화산논검》은 가히 대하역사
소설의 압권이다. 신필 김용의 재능에 대해 더 말하는 것부터가 사족이라고 믿으며 감히 일
독을 권한다.
1993년 12월
옮긴이
♧ 작가 소개 : 김용(金庸)
수십 년 동안 신필의 칭호를 들어온 김용은 원명이 사량용(査良鏞)으로 중국 절강성 해령에
서 1924년 출생하여 동오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으며 젊었을 때는 중국 대륙에서 발간
되는 대공보(大公報)의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홍콩 최대의 일간신문 명보(明報) 의 주필
겸 사장으로 있다. 방대한 유가의 경서에 심취하고 노자와 장자의 철학은 물론 불경을 두루
섭렵한 그는 해박한 지식과 신기한 상상력으로 스케일이 웅장하고 이야기 흐름이 양자강처
럼 힘찬 명작들을 발표하여 필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은 독자는 이미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어 애독자가 수억에 이른다는 사계의
통계이다.
그의 작품은 독자를 몰아의 경지로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을 뿐 아니라 영원불멸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그의 작품을 연구한 김학연구총서 가 이미 18권이나 발간되었다.
이 작품 화산논검 은 모두 10부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의 최대 걸작 가운데 하나이며,
구양봉, 황약사, 홍칠공, 단지홍, 왕중양, 양과(후반기), 곽양, 매초풍, 황상 등의 아홉기인들
의 활약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한 대하역사소설이다.
화산논검 으로 인하여 비로서 소설 영웅문 은 시작과 끝이 어우러진 수미일관의 미(美)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역자 박영창은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사고 현재 무협소설 작가, 번역가, 평론가로 활동중
이다.
역서에는 《동방불패》, 《녹정기》, 《천룡팔부》 등 다수가 있다.
군사쿠데타에 의해 집권한 전두환 시절 《무림파천황(武林破天荒)》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군사정권을 비판했다하여 구속되는 등 커다란 필화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제 무협소설계에서 명실공히 제1인자적 대가(大家)로서 무협소설을 문학의 한 장르로 자
리잡게 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제1장 떨어지는 꽃잎
바람 자고 꽃잎 지는
이 밤에 머리 빗는 그녀
만사가 여의치 않아
눈물 먼저 앞서네
강물 위에 봄빛은 무르익어
뱃놀이 좋다지만
아무리 큰 배라도
이 많은 수심 다 싣지는 못하리
미풍(微風)이 스칠 때마다 물 위엔 잔 물결이 일고 방원(方圓) 몇 리에 핀 연꽃들이 살랑거
린다. 한 여름이 시작되는 계절이라 이제 연꽃도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다. 사람을 취하게
할 듯한 그윽한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그때 연꽃밭 위에 떠 있는 작은 배에서 애련한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배 위에 있는 네 명의 여인네는 연꽃을 따며 계속 노래를 불
렀다. 그 노래는 바로 남송(南宋)의 유명한 여류 시인 이안거사(易安居士) 이청조(李淸照)가
지은 무릉춘(武陵春)이었다. 연꽃 따는 일과 그 노래는 별반 관계가 없지만, 그 애련한 정서
만은 배 위에 앉아 있는 중년 여인의 심정을 잘 말해주고 있는성 싶었다.
'무릉춘'은 쉰 살의 이청조가 금화(金華)에 은거할 때 지은 사(詞)의 제목이다. 첫째 수는
꽃잎이 지는 것을 보고 자기가 늙어감을 서글퍼하는 내용이고, 둘째 수는 강물 위의 봄빛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이 무거워 봄놀이가 내키지 않음을 표현하는 내용이다. 물론 마지막 두
행은 과장법을 쓴 것이리라. 후대의 '서상기(西廂記)'에도 '인간 제상의 번뇌가 가슴 속에
가득하거늘 크고 작은 저 수레들로 어찌 모두 담아낼 수 있으리'라는 시구가 있다. 이 시구
는 바로 이청조의 무릉춘을 본뜬 것이리라.
일찍이 이청조는 송나라와 금나라 사이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었다. 불행한 일생이 시 구절
마다 애상을 깃들게 했고 그러기에 그녀의 시는 애절한 정서로 뭇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세인들이 그녀의 시를 애송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때는 남송의 이종(理宗) 황제가 보위에 앉아 있던 시기였다. 그때의 강남 일대는 비교적 평
화스러웠다. 이곳은 바로 가흥(嘉興)의 남호(南湖)! 호숫가엔 푸른 수양버들이 그 가지를 물
위에 치렁치렁 드리우고는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 중 한 버드나무 아래 회색의 승복을 입
은 한 비구니가 홀로 서서 호수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구니의 나이는 마
흔살 가량 돼 보였으나 평소 얼굴에 꽤 신경을 쓴 탓인지 그 피부는 마치 서른살 이내의 처
녀 같이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따운 얼굴에 비해 그녀의 눈빛은 싸늘함과 날카
로움을 담고 있었다.
비구니는 호수 위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에 가볍게 한숨 짓고선 시를 읊조리듯 이렇게 말했
다.
"이번 길 한번 가면 즐거움도 허사여라. 그 즐거움이 아무리 많다 한들 내 그 누구와 나눌
손가."
그리고선 봇짐을 메는데 그 속에선 병장기들의 부딪치는 쇳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비구니 뒤편으로 이삼 장 떨어진 곳에는 구레나룻을 기른 한 건장한 사내가 서 있었다. 고
리눈에 짙은 눈썹부터 위풍당당하게 보이는 그 사내는 왼손에 낭아봉(狼牙棒)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낭아봉의 무게는 적어도 사오십 근은 돼 보였다. 그 무거운 병장기를 나뭇가지처
럼 아무렇지도 않게 쥐고 있다니 그것만 보아도 이 사내의 힘이 신력(神力)에 가까움을 충
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사내에겐 그저 그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천신(天神)
과 같은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비구니가 돌아보며 가볍게 손짓하자 그 사내는 곧
그녀를 따라나섰다. 비구니와 그녀의 노복인 듯한 그 사내는 눈 깜짝할 순간에 어디론가 사
라져버렸다.
작은 배 위에 앉아 있는 네 여인들 중 둘은 이팔 청춘의 소녀들로 보였는데, 그들은 깔깔대
며 웃고 재잘거리면서 연꽃을 따고 있었다. 한편 다른 두 여인은 모두 서른을 넘긴 중년에
가까운 나이인 듯했다. 그 중 한 여인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추녀였고 다른 한 여인은 경국
지색의 미인이었다. 그 노래는 바로 이 미인이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노래를 끝마친 미인은
가볍게 탄식섞인 소리를 냈다.
"벌써 20년이 흘러가다니……. 휴∼ 그이는 아직 살아 계실는지……."
그 말에 옆에 있던 추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씨,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 사람은 당시 경성(京城)에서도 그 이름이 자자한 풍류소왕
(風流小王)이 아닌가요? 그런 방탕한 사람을 어찌 아씨는 아직도……."
그리고선 그 추녀는 한숨을 크게 쉬는게 아닌가.
그 미인의 이름은 미랑(美娘), 바로 대금국(大金國) 왕공의 딸이었다. 나라가 망하자 그녀는
이렇게 몸종 추동(秋桐)만을 데리고 가흥 땅에 와서 이름을 바꾸고선 숨어 살고 있었던 것
이다. 그녀의 곁에 있는 그 추녀가 바로 추동이었다.
추동은 비록 얼굴은 박색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쭉 미랑과 함께 지내면서 미랑의 수족 노릇을
해왔고, 또 무예도 익혀서 미랑에게 치근덕거리는 음탕한 사내들을 여러번 혼찌검 낸 적도
있었다.
배 위에 있는 다른 두 소녀들은 미랑이 이곳에 숨어 들어 와서 구한 몸종 청아(靑兒)와 홍
아(紅兒)였다.
미랑과 추동이 이곳 남호에 있는 육가장(陸家莊)에 왔을 때 그들은 사고무친의 외로운 처지
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장원주인 육입정(陸立鼎) 부부가 도와줘서 그 덕분에 집을 짓고 이곳
에서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0여년 전에 육입정 일가는 마녀 적련선자(赤練仙
子) 이막추(李莫秋)의 마수에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그때 추동은 육입정을 도와 마녀 이막추
를 막으려고 달려 갔으나 도착할 무렵 이미 육입정 일가는 한 줌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연꽃이 배에 가득차자 청아가 물었다.
"이만하면 됐지요?"
미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기슭에 닿아 여인들이 막 내리려는데 추동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저기 좀 보세요."
그 소리에 시선을 돌린 미랑은 하마터면 '앗'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강 기슭 위 버드나무 아래에 한 사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얼굴에는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라나 있었지만 아주 영준하고 늠름하게 생긴 사내였다.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보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산전 수전을 다 겪은 노인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그 사내의 오른쪽 소
매가 가느다란 바람에도 나풀거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외팔이가 틀림없었다. 또 괴이하게도
그 사내는 허리에 목검(木劍)을 차고 있었고, 그 옆에는 사람 어깨만큼 될 듯한 커다란 새
한마리가 있었다. 그 새는 부리가 칼처럼 날카롭고 눈매가 창칼같이 매섭게 보였는데 날갯
죽지엔 깃털이 거의 다 빠져 왠지 메마른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날개로 과연 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아차리자 왼손으로 얼굴을 쓱하고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냉혹하게 변했다.
미랑은 크게 놀랐지만, 세상 물정에 밝은 추동은 미랑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씨, 놀라지 마세요. 분명히 저 사람은 사람 가죽으로 만든 가면을 쓴 것이 틀림없어요."
"그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난…… 난 저 사람의 얼굴이 어쩐지 꼭 꼭 어쩜 그렇게도
닮을 수 있을까."
춘동은 미랑의 말이 당치않게 들렸다.
"세상에 모습이 비슷한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요. 게다가 나이부터 맞지 않잖아요? 우리네
효비(曉非)보다 몇 살 더 많은 나이인 듯한데요."
추동의 말에 미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미랑은 감히 기슭을 올라 그 사나이의 곁
을 지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외팔이 사내의 이름은 바로 양과(楊過)였다.
그해 절정곡(絶情谷)의 절벽에는 소룡녀(小龍女)가 남겨놓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16년 후 여기서 만나요. 부부 간의 깊은 정을 잊지 말고 약속을 어기지 마세요. 소룡녀가
부군 양과님께 부탁하는 글이니 부디 잊지 마시고 꼭 만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때 소룡녀는 곽부(郭芙)의 독침에 중상을 입고 생명이 위중하게 되었다. 그녀는 절벽에 글
을 남기고선 홀연히 자취를 감춰 소식이 두절되었다. 황용(黃蓉)은 양과가 절망에 빠져 자살
이라도 할까봐 소룡녀는 매 16년 만에 중원 땅을 찾아온다는 남해신니(南海神尼)를 만났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양과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소룡녀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 말을 믿
기로 했다. 그때 양과는 고묘파(古墓派)의 옥녀심경(玉女心經)을 동문 사매인 육무쌍(陸無
雙)에게 전수해주고서는 정영(程英) 그리고 육무쌍과 함께 의형제를 맺었다. 그렇게 함으로
써 그는 자신을 따라 다니는 두 여인의 연정을 끊어 버린 후 어느 날 밤 훌쩍 떠나버렸던
것이다. 그후 검마(劍魔) 독고구패(獨孤求敗)가 한때 은거해 있던 곳에 아른 양과는 신조(神
雕) 독수리와 함께 검법을 수련했다. 신조 독수리는 그를 동해로 데리고 가서 거친 파도 속
에서 검법을 연마하게 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양과의 지팡이와 목검은 당년의 독고구
패를 능가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검술을 천하 그 누구가 이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독고구패는 자비심에 검을 궁곡(窮
谷)에 묻어 버렸을 것이라고 양과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닷가에서 검술을 익히던 양과는 지나가는 배가 있으면 뱃사람들에게 남해도의 남해신니를
보지 못했느냐고 그저 물어보았다. 그 몇 년간 물어 본 뱃사람만 해도 천 명은 더 되련만
남해신니를 보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소룡녀의 소식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양과는 16년이 되기 전에는 소룡녀를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비바람이 몰아쳤다. 양과는 급기야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 누더
기를 걸치고 허리에 목검을 찬 후 신조 독수리를 데리고 서쪽으로 떠났다. 가흥에 다달아
서호의 경치를 다시 보자 '산천은 의구하되 사람만은 달라졌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육가장에서 문전걸식하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폐허가 된 육입정의 집터를 바라보니 이곳
에서 곽정(郭靖)과 화용을 처음 만난 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오른팔을 끊어버린 곽부까지 생
각나자 감회가 새로웠다.
의매(義妹) 정영과 육무쌍의 어린 시절 모습도 떠올랐다. 철부지였던 그들은 커서 제각기 다
른 길로 나아갔다. 육무쌍은 적련선자 이막추를 따라갔고, 정영은 동사(東邪) 황약사(黃藥
師)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고 육무쌍과 정영은 양과에게 연
정을 느끼게 되지만 그때 이미 양과는 소룡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들의 연정을 받아
줄 수 없었다. 이 두 여동생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모두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을
까?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가슴 아파하는 양과는 지금 천하의 연인들이 영원히 잘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추동은 미랑이 무서워하는 것을 보고, 기슭에 서 있는 그 사람을 수상쩍게 여기면서 말했다.
"아씨, 그러면 저 멀리 가서 기슭으로 오르시는 것이 어떨까요?"
미랑은 그 신조 독수리를 데리고 있는 사람이 무섭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그에게 오래도
록 가슴 속에 간직해둔 뭔가를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단념하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하렴."
그런데 갑자기 방울소리가 가까이 들려오더니 말 한 필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그리고 말에
탄 사람이 외쳤다.
"어머니, 저예요. 제가 돌아왔어요."
양과가 멀리서 보기에도 그 사내의 기마술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정 정도
의 무공을 갖추고 있음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람처럼 달려오는 말 위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것도 그랬고 말이 뛰어오를 때마다 경공을 써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앉아 있는 솜씨도
그랬다. 도화도에 있을 때 양과는 언젠가 강남칠협(江南七俠)의 우두머리인 비천편복(飛天
) 가진악(柯鎭惡)에게서 마왕신(馬王神) 한보구(韓寶駒)의 기마술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마왕신의 기마술에 비하면 이 사내의 솜씨는 발끝에도 못미치리라.
말을 타고 달려온 사내는 미랑의 아들 양효비(楊曉非)였다.
사랑하는 아들이 신조 독수리를 데리고 있는 괴한 가까이로 다가가고 있는 것을 본 미랑은
괜히 그 괴한의 노여움을 살까봐 지레 겁이 나서 외쳤다.
"얘야, 그 괴한 가까이 가지 말아라!"
그 말에 양효비는 오히려 씨익하고 웃었다.
"괴한이라구요? 그렇다면 제가 한번 가 보죠. 도대체 뭐가 어쩌길래 괴한이지? 어라, 흉측하
게 큰 새도 한 마리 있네. 히히히, 이거 재미있는데."
그러면서 그 사내는 말을 달려 양과의 뒤쪽으로 바싹 다가갔다.
양과는 그들 모자가 자기를 괴한이라고 부르는 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옛날의 성질
같았으면 벌써 화를 내며 다가가 욕을 퍼부었든가 주먹다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몇년
동안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낼 고생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신조 독수리의 도움으로 수
년 간 수련해온 그였기에 이전의 난폭했던 성질이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게다가 대협 곽정
과 일등대사(一登大師)의 넓은 도량도 배워 인간사 수많은 일에 매우 담담한 태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10여년 후 사랑하는 아내와 다시 만날 일을 제외하고선 그의 관심을 끄는
일은 더 이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곁에 있는 신조 독수리는 그렇지 않았다. 짐승인 신조 독수리는 양과의 무심한 태도
와는 달리, 뒤쪽에서 나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려 날개를 확 펼치며 마주섰다. 지난
날 검마 독고구패를 따라다니며 심오한 무공을 배워 고수의 경지에 이른 신조 독수리! 그
무공은 보통의 무예 고수들이 따라갈 수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양과마저도 신조 독수리의 도
움으로 신공(神功)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신조 독수리는 천성적인 신력을 가지고 있었
다. 그리고 그 날개엔 고수들의 내공에 못지 않은 힘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니 그 힘을 어찌
말 따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신조 독수리가 칠팔보의 거리에서 날개를 한번 퍼덕거리자 거
센 광풍이 일었다. 놀란 양효비의 말은 뒤로 몇 걸음을 비틀거리며 물러나면서 울부짖었다.
말에 탄 양효비도 그 광풍에 얼굴이 따끔따끔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크'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양효비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이
렇게 신기한 짐승이 있다니? 그는 말에서 성큼 뛰어내려 신조 독수리 가까이로 가서 웃었
다.
"대단한 새로군. 어디 네게 무슨 재간이 더 있는지 보자구."
신조 독수리는 양효비를 매섭게 쏘아보며 낮은 소리로 몇 번 울었다. 그것은 마치 양효비에
게 발하는 경고 같았다. 그러나 양효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조 독수리의 날개를 잡으
려고 했다. 그러자 신조 독수리는 새된 소리를 내며 한쪽 날개로 양효비의 손을 내리쳤다.
양효비는 쇠몽둥이에 얻어맞은 듯 손이 저려서 자기도 모르게 급히 몇 발짝을 뒤로 물러섰
다.
"얘야, 어서 피해 어서!"
배 위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던 미랑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짐승과 싸우지 말고 어서 집으로 가요, 집으로 가."
추동도 소리쳤다.
추동은 양효비가 다섯 살 되던 해부터 무공을 가르쳐 왔다. 그러니 벌써 십오 년이 되는 셈
이다. 추동은 양효비의 스승이 틀림없지만 출신이 양씨가의 노복인지라 양효비에게 제자의
절을 결코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양효비는 추동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 들었다.
미랑의 독자로 자라면서 미랑과 추동의 사랑만을 받아온 양효비이기에 그 성미가 짓궂고 제
멋대로인지라 지금 어머니와 스승이 고함치는 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왕공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전란의 고초를 겪을대로 겪은 미랑은 '옥불탁 불성기(玉不琢
不咸器)'의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의 성미를 바로잡기 위해 매질이라도
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애틋한 생각이 들어 차마 손을 대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어
나이가 지긋한 유생을 모셔다가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 유생도 며칠 못가 손 들고 떠나 버렸
다. 미랑은 계속 선생을 물색해 보았지만 모두 가르치기도 전에 떠나가 버렸다.
추동은 무공이 출중한 스승을 모셔다가 양효비를 다스림이 어떻겠냐고 건의하기도 했지만
여인들만 있는 집에 남정네가 들어오면 불편한 것은 그만두더라도 만일 호색한이 들어오게
된다면 더 큰 일이 아닌가? 그래서 양효비를 밖으로 내보내 스승을 찾아가 공부하게 해볼까
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또 미랑은 어린 아들을 먼 곳으로 내보내는 것이 걱정되어 차마 떠
나보내지를 못했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에 양효비의 나이도 어느덧 스물이 되었던
것이다. 미랑과 추동은 여전히 짓궂고 장난만을 일삼는 이 아이를 가르칠 마땅한 방법을 찾
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양효비는 가흥성 안에 들어가 놀다 오는 길이었다. 아직 그 흥이 덜 가셨는데 사람 키
만한 독수리를 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는 다시 몸을 가누고선 신조 독수리에게 덤볐
다.
애초부터 신조 독수리는 날개로 막기만 할 뿐 전력을 다해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만하
면 상대방이 알아서 물러서리라고 생각했는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양효비
는 그 잘난 자신의 무공을 믿고 마냥 덤벼들었던 것이다. 신조 독수리도 화가 났는지 이번
에는 오성(五成)의 공력으로 양효비를 내려쳤다. 양효비는 그만 한 장이나 날아가 땅으로 곤
두박질치며 나뒹굴었다.
양효비의 눈 앞에 별들이 어른거렸다. 그제서야 신조 독수리가 보통 새가 아니라는 것을 알
았다. 양효비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 절뚝거리면서 신조 독수리가 아니라 양과에게
다가갔다.
그는 신조 독수리를 힐끔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 새를 제게 팔지 않겠어요? 돈은 달라는대로 드릴게요. 우리 집에 은자가 많다니까요."
미랑과 추동이 다급하게 부르고 있는데도 그는 신조 독수리만 보면서, 저 새를 사서 친구들
에게 자랑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양과는 이 무지한 청년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했으나 신조 독수리를 사겠다고 수
작을 부리자 슬그머니 화가 났다.
'백년에 한번 날까 말까한 신물(神物)인 이 독수리는 내게 사부와 같은 존재인데, 뭐 팔라
고?' 양과는 양효비를 노려보았다.
비단적삼에 옥대를 두르고 옥으로 된 패물까지 차고 있는 것을 보면 꽤나 부유한 집안임이
분명했다. 청년은 단순호치(丹脣晧齒 : 붉은 입술과 흰치아)의 영준한 모습이었지만 눈꼬리
엔 어딘지 모르게 경망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열여덟이나 아홉이 될까 말까한 녀석이 세도와 재산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다니, 경망스러
운 녀석!'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문전걸식하며 자란 양과는 세도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거만한 부
잣집 자식들이 제일 미웠다. 양효비네 모자가 자기한테 한 불쾌한 언사를 떠올린 양과는 이
녀석의 못된 버릇을 좀 고쳐주기로 마음먹었다.
양효비는 나름대로 양과가 독수리 값을 높이 불러 단단히 한목 잡으려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양과는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게 아닌가.
"여보세요. 당신은 왜 그렇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거요?"
그러면서 양과에게 눈길을 던지던 양효비는 깜짝 놀라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양과의
얼굴이 어느새 죽은 시체의 얼굴처럼 싸늘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자
기 어머니와 추동이 양과를 괴한이라고 부르던 말이 생각났다. 양과의 얼굴은 정말 괴이하
게 보였다.
양과의 모습에 놀란 양효비는 몇 걸음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은 것은 아니었
다. 다만 조금 전처럼 시건방지게 굴지는 못하고 실실거리며 아까 한 말을 되풀이할 따름이
었다.
"헤헤…… 헤헤, 여보세요. 내 말대로 할테요? 저 짐승을 내게 팔란 말이오."
양과는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말했다.
"그래 얼마에 살텐가?"
'이 괴한이 이제서야 한목 단단히 잡으려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한 양효비는 여유를 부리며
대답했다.
"글쎄, 그거야 흥정에 달려 있지. 얼마면 되겠소?"
'저 못난 새를 지가 받으면 얼마나 받겠어? 은자 천 냥이면 감지덕지하겠지.' 양효비는 이
렇게 생각했다.
양과는 더욱 화가나서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웠다. 몇 년 동안의 수련을 통해 성미가 무척
온순해진 양과였지만 천성을 그 몇 년에 완전히 고칠 수는 없었다. 오늘 이런 일을 당하니
또 옛날 그 성미가 머리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이 녀석의 못된 성질이 어쩌면 이렇게도 어렸을 때의 나와 비슷한 것일까? 그런데 이 녀석
은 너무 건방져.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군.' 하면서 마음 속으로 벼르고 있었다.
양과가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운 것을 본 양효비는 싱긋 웃었다.
"은자 열 냥을 달라구요? 그거야 어렵잖은 일이죠."
그리고는 품 속에서 스무냥짜리 은괴 하나를 꺼내어 양과에게 훽 던졌다.
"거스름 돈은 가지시오."
방금 독수리에게 당한 양효비는 보복을 할 셈으로 은괴를 던질 때 마치 암기(暗器)를 던질
때처럼 암암리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양과가 그것을 그렇게 손쉽게 받아낼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건 몇 냥 짜리지?"
양과가 물었다.
"스무 냥 짜리요. 당신이 요구한 값보다 배나 많은 셈이지."
"내가 부른 값이 얼마인지 알았느냐?"
"열 냥 아니었소? 그 잘난 짐승, 고작해야 은자 석 냥 값어치도 안 될 거요. 그만하면 장사
잘하는 셈이지."
그러자 양과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부른 값은 열 냥이 아니야."
"그럼, 백 냥?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이 사람 누구에게 사기를 치려고? 너 사람 잘못 본거다.'
양효비는 속으로 이렇게 빈정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또 양과가 고개를 가로젓는 게 아닌가.
"내가 부른 값은 10만 냥이야, 10만 냥!"
그 말에 양효비는 두 눈을 깜박거리다가 앙천대소했다.
"여보시오, 괴한! 10만 냥이면 육가장도 몽땅 살 수 있겠소. 그만 합시다. 난 당신과 이런 사
소한 일로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으니 독수리를 남겨두고 돈이나 챙겨 가도록 하시오. 그렇
지 않으면 성미 사나운 우리 형제들에게 된통 당할 것이오. 일 터지기 전에 어서 가시오."
그러나 양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부른 값은 10만 냥이니, 한푼도 빠져선 안된다. 그것도 현금으로 말이다. 어음 나부랭
이는 싫어."
그 말에 양효비는 배알이 꼴렸다. 이 인간이 주먹 맛을 한번 봐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것인
가. 그는 방금 전 가흥성의 도박장에서 딴 쉰 냥 짜리 은괴 두 개를 꺼내서 각각 양손에 쥐
었다. 그리고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로 독한 생각을 품었다. 이른바 소리장도(笑裏藏刀)의 계
책이었다.
"십만 냥이라면 십만 냥 주지. 자 그럼 은자를 받으시오."
그러면서 양효비는 두 손에 쥐고 있던 은괴를 힘껏 양과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양과는 양효비가 힘껏 던진 은괴를 보고선 아까 던진 은괴는 맞아봐야 기껏 멍이나 들겠지
만, 이번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녀석, 못된 짓을 하
다니.' 그러면서 양과는 오른쪽 소매를 휙하고 저어 은괴 둘을 소매 안으로 받아넣어버렸다.
양과의 옷소매가 한번 펄럭이는가 싶었는데 자기가 던진 은괴가 보이지 않자 양효비는 잠시
어안이벙벙해졌다. 그는 은괴가 양과를 지나쳐 수풀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하면서 추동과 어머니가 자신의 실수를 보았다면 어쩔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앞에 있는 괴한이 자기를 우습게 볼 것이라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 어릴 적부터 승부욕이 강했던 양효비인지라 참을 리 만무했다. 그는 냉큼 양과 쪽으
로 뛰어들며 왼손을 내밀자 마자 오른쪽 주먹으로 양과의 가슴을 내질렀다. 흑호도심의 초
식이었다. 이것은 추동에게 배운 것으로 고급초식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시정
잡배들과의 싸움에서는 한몫을 단단히 하는 주먹질이었다.
건방진 양효비였지만 머리는 총명해서 이 흑호도심의 초식이 상대방이 간파하기 어려운 것
임을 알고는 평소 열심히 익혀 두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제법 마음대로 휘두를 수가 있었다.
왼손은 속임수였다. 하지만 얼핏 보면 진짜 같아서 싸움질에 이골이 난 양과마저도 그 속임
수에 넘어갈 뻔했다.
물론 절세 무공을 지닌 양과가 양효비 따위를 안중에 둘 리가 없었다. 그는 양효비가 왼주
먹을 쓰자 북파권법의 충천포(沖天暑) 초식을 쓰는 것으로 알고 막으려 했는데 급기야 양효
비의 오른쪽 주먹이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던 것이다. 정요금(程 金)의 삼판부(三板斧)라
고나 할까. 보통 사람 같으면 십중팔구 양효비에게 속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양효비의 주먹이 양과의 가슴팍을 내 질렀으니 양효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엎어졌겠지' 하는 양효비의 생각과는 달리 양과는 얻어맞고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
니라 양효비의 주먹은 마치 솜뭉치를 내지른 것처럼 맥없이 쑥 들어갔다. 이상한 느낌이 든
양효비는 급히 주먹을 걷어들이려 했지만 그 주먹은 마치 쇠고리에 걸린 것 마냥 단단히 붙
잡혀 있었다. '큰일났다!' 다급해진 양효비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이고, 이 자식이 사악한 술수를 쓰는구나."
그러면서 양효비는 왼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그러나 그 주먹도 양과의 허벅지에 박혀 빼낼
수 없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술수냐? 어서 놓으란 말이다."
양효비는 또 오른발을 날렸다. 그러나 마치 돌기둥을 찬 것처럼 자기 발만 아팠다. 얼마나
아픈지 '아이쿠' 하는 비명소리만 내뱉을 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과는 왼손으로 뒷짐을 진 채 양효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신조 독수리는 양효
비의 우스꽝스런 꼴을 보고 비웃기나 하는 것처럼 꾹꾹하는 소리를 냈다.
"이 놈의 짐승마저 나를 비웃다니?"
그리고는 양과에게 욕지거리를 해댔다.
"어디서 굴러온 홀에미 자식이냐? 빨리 놔. 내가 추동을 시켜 네 놈의 정강이를 분질러 놓
아야 정신을 차릴래?"
그 말에 양과는 두 눈을 부라렸다. 아버지 없이 태어나서 일찍 어머니마저 여읜 양과는 남
들이 자기를 홀에미 자식이라고 욕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게다가 자기가 사부처럼 모시
는 신조 독수리에게마저 욕을 해대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양과는 배와 허벅
지를 밖으로 불쑥 내밀면서 내공을 뿜어냈다. 그 바람에 양효비는 석자나 튕겨나가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호수 속에 떨어져 버렸다.
그것을 본 미랑은 황급히 청아와 홍아를 시켜 배를 젓게 해 아들에게로 다가가 그를 배 위
로 건져올리게 했다. 배 위에 오른 그는 찔끔거리면서 추동에게 괴한을 혼내달라고 야단이
었다. 아들의 손등이 찐빵처럼 부은 것을 본 미랑은 가슴이 아팠다.
대협 곽정의 가르침을 받고 며칠 동안 연구해 본 양과는 전진교의 현문내공(玄門內功)이 천
하의 정통내공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거친 파도 속에서 검술을 연마하는 틈틈이 현문내
공도 열심이 익혔던 것이다. 원래 고묘파 내공의 바탕이 있었기에 그는 현문내공도 단시일
내에 습득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는 절정의 내공을 갖게 되어 방금 같은 술수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효비가 그 욕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그 정도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욕을 들은 양과는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난 양과는 공력을 좀더 실어 양
효비의 두 손을 퉁퉁 붓게 만들었던 것이다.
양과에게 당한 양효비는 양과가 틀림없이 무슨 사악한 술수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
다. 추동을 천하 제일 고수로 알고 있는 양효비는 추동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울며 매달렸다.
추동과 양효비는 사제지간이라는 정식 명분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사제지간이나
다름없었다. 자기의 제자가 얻어터졌으니 추동의 마음이 편할 리 있겠는가? 게다가 양효비
는 추동과 미랑이 함께 키운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양효비를 아들삼아 믿고 추동이 아
직 시집을 안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서 추동은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추동은
번쩍 뛰어올라 한 장 거리가 넘는 물 위를 날아 기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양과는 그녀의 몸놀림이 극히 가볍다고 할 수는 없으나 뛰어난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경공술은 어딘지 모르게 전진교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게 있다면 전진교의 경공술은 온건하고 실속이 있는 반면 추동의 경공
은 무언가가 빠져 있는 느낌을 주었다.
사실 추동의 무예는 태을교(太乙敎)의 한 무명 도장(道長)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 도장은
추동이 어렸을 때 그 추한 외모 때문에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석
달 동안 태을교의 입문 무공과 기타 장법(掌法)을 가르쳐주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추동
은 자존심이 강한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남보다 뛰어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매일 열심히 무공
을 연마했다. 그러나 자질이 부족해서 대성하지는 못했다.
북송의 도교는 본래 태을파밖에 없었다. 산서(山西) 용호산(龍虎山)의 장천사(張天師)가 그
수장이었다. 그러다가 금나라가 중원을 침범하자 송나라 황실은 강남으로 옮겨갔고, 강북의
도교는 전진교, 대도교, 태을교 이렇게 세 파로 갈렸다. 그 중 제일 세력이 강한 파가 전진
교였다. 전진교의 도사들은 의협심을 발휘해 여러차례 의로운 거사를 했다.
그 당시 강북은 금나라에 유린되고, 그 다음엔 또 몽고의 기마병에게 침략당했다. 그야말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는데, 송나라 조정의 북벌이 가망없게 되자 서민 백성들은 모두
전진교에 기대를 걸고 구세주로 여겼다.
당시에 이런 말이 있었다.
"중원은 외적에게 유린되고, 남송은 유약하여 맥을 못추니 천하의 호걸지사들은 어찌할 바
를 모르는데…… 중양종사(重陽宗師)와 장춘진인(長春眞人)이 만물의 사표가 되어 무위(無
爲)의 교의로써 유위(有爲)의 지사들을 모으고 맹주(盟主)를 기다린다."
그러나 태을교의 도사들은 그와는 달리 심산벽지에 남모르게 은거하면서 자기 일신만을 지
켰다. 그래서 세인들은 그들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추동의 무공은 태을교의 무공이다. 전진교와 태을교는 원래 한 집안으로 후에 갈린 것이니
그 두 파 사이의 무공에도 유사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과는 추동의 무공을
보고 전진교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었다.
당초 추동은 미랑의 집을 지키는 무사들과 겨루기를 해보았지만 그들은 모두 2, 3류의 무객
에 불과했기에 추동은 보통 반은 이기고 반은 지곤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추동은 아직 일류
무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양과의 무공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에 이런 귀신
같은 무공이 있다니?' 추동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추동은 강호인의 예에 따라 읍하며 말했다.
"호걸께서는 왜 우리 도련님의 손을 그렇게 상하게 하셨습니까?"
추동의 무공이 기본을 갖추고 있음을 파악한 양과는 그녀를 얕잡아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쌀쌀하게 대답했다.
"그 녀석이 너무 버릇없이 천방지축 날뛰기에 손 좀 봐준거요. 날 나무랄 생각이오?"
그때 양효비가 소리쳤다.
"네가 사악한 술수를 썼잖아? 추동, 어서 저 자를 혼내달라니까, 어쨌든 난 제자가 아닌가
말이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웃을 일이었다. 강호에서는 사제지간의 명분을 몹시 중요하게 여기는데
양효비가 이렇게 자기 스승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예법대로 하자면 큰 죄를 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과는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양과 역시 그와 비
슷한 처지였다. 소룡녀는 양과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양과의 아내가 되었던 것이
다. 그래서 양과는 사제지간의 명분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결국
은 커다란 풍파를 겪기도 했지만 말이다. 사제지간의 결혼은 세속의 예의를 무시하는 동사
황약사가 들어도 놀랄만한 것이었다.
추동은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우리 효비가 어리고 무지해서 무례하게 군 것은 잘못이에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저 애도 자기 어머니가 계시지 않겠어요. 저 애의 버릇은 그 어머니가 고쳐줄텐데
외인이 손을 대서야 되나요?"
"손을 대다니? 내가 손 대는 것을 봤소?"
양과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
추동은 그 말에 잠시 대답을 못했다. 이 괴한이 효비를 다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초식
이 얼마나 빠른지 양과가 손쓰는 것을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저런 녀석은 버릇을 고쳐놓지 못하면 앞으로 마을의 골칫덩어리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 두
시오."
그렇게 말하고 양과는 돌아서 가버리려고 했다.
추동은 이 괴한을 그대로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급히 소리쳤다.
"어딜 가요? 못 가요!"
그러자 양과는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못 가다니? 그래 나 같은 사내를 붙잡아서 뭐 하려고 그러시오? 그게 무슨 뜻이오?"
아버지 양강(楊康)을 닮아서 천성이 좀 방탕한 면이 있는 양과였다. 소룡녀를 아내로 맞아들
이고 나서부터는 그 버릇을 고치려고 했지만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
다. 지금도 그 말을 하고 나서 후회했다.
추동은 지금까지 그런 놀림을 당해 본 적이 없어서 분기탱천했다. 그녀는 일갈(一喝) 하면서
오른손으로 양과의 어깨를 향해 일장을 내뿜었다.
그러나 양과가 누군가? 양과는 훌쩍 몇 장 거리를 날아 앙천대소하며 버드나무 숲속으로 사
라져버렸다. 신조 독수리도 쏜살같이 양과를 따라 어디론가 없어졌다.
추동은 신속하게 추격했지만 그들의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그녀는 돌아왔
다.
그때 미랑은 양효비와 두 시녀 청아와 홍아를 데리고 기슭에 올라와 있었다. 양효비가 추동
에게 물었다.
"괴한을 붙잡았나요?"
추동은 몹시 화가난 탓인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대답을 못했다. 미랑은 상황을 짐작하고는
아들을 꾸짖었다.
"모두 너 때문이다. 너 때문에 추동도 수모를 당한 게야. 얘야,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라."
어머니의 꾸지람에 양효비는 아무말도 못했다.
대문에 막 들어선 홍아가 다급히 소리쳤다.
"마님, 마님! 저것…… 저것 좀 보세요."
"뭔데 그러니?웬 호들갑이니? 다 큰 계집애가 그렇게 경망스러워서 어떻게 하겠니?"
그러면서 미랑은 홍아가 가리키는 쪽을 보다가 대경실색했다. 담장의 흰 벽에 사발만한 크
기로 거미 다섯 마리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얼룩덜룩한 색깔의 거미였다.
"아니…… 이건. 왜 이런……?"
미랑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중얼거렸다.
"동네 개구쟁이가 한 일이겠지요. 홍아와 청아는 어서 지우지 않고 뭐하는 거니? 아씨가 놀
라시는 게 보기 좋아 가만히 있는 거니?"
추동은 미랑이 스무살이 된 아들이 있는 지금에도 옛날처럼 여전히 아씨라고 부르고 있었
다.
청아와 홍아는 걸레로 거미 그림을 지우고선 다시 흰 회로 덧칠을 했다.
그런데 집에 들어와 보니 양효비가 머리를 숙인 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게 아닌가? 미랑은 아들이 꾸지람 때문에 그러는 줄 알고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얘야, 이 에미가 너무했는지 모르겠구나. 다 그 괴한 때문에 생긴 일이지. 이젠 너를 그렇
게 호되게 나무라지 않으마. 왜 말이 없니? 말 좀 해 봐라. 에미 속 태우지 말고."
모자간의 대화를 들은 추동은 남몰래 탄식했다. '자식을 저렇게 키우다니? 저건 도리어 자
식을 망치는 일인거야. 그 괴한한테 혼난 것도 어찌 보면 잘된 일이야. 그래야 정신을 차릴
거 아냐?' 지금에 와선 추동도 양과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양효비를 애지중지
하는 것은 사실이다. 양효비가 잘 되는 일이라면 그녀는 어떤 고초도 달게 받을 각오가 돼
있었다. 그러나 양효비는 온갖 나쁜 짓만 하고 다니니 정말 큰일이었다.
아들이 마냥 말이 없자 미랑은 안타까워 눈물까지 흘렸다. 그녀는 아들의 부은 손에 약을
발라주며 달랬다.
"얘야, 다시는 안그러면 되잖니? 너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둘 게. 너만 기뻐하면 난 마음이 놓
인단다."
그 모습을 가만히 곁에서 지켜보던 추동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아니, 입이 붙었나? 어머니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왜 도통 말이 없는 거예요?"
그제서야 양호비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데 얼굴이 백짓장 같았다.
놀란 미랑은 아들을 끌어안고는 물었다.
"왜 그러니? 얘야, 왜 그러니?"
추동은 얼른 양효비의 맥을 짚어보았다. 그 괴한에게 내상(內傷)을 입지 않았나 해서다. 그
렇다면 큰일이었다. 양효비는 나이도 어리고 무공이 심후하지 못해서 내상을 입으면 지금까
지 배운 무공이 모두 없어질 뿐더러 생명까지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양효비는 몸을 떨면서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와 추동…… 원수진 사람이 누구죠? 없어요?"
미랑은 그 말에 놀라 흠칫했다.
"원수진 사람? 없단다. 육가장에서 우린 본분을 지키면서 지나가는 들개에게도 떡을 던져주
며 살아왔는데 누구하고 무슨 원수를 졌겠니?"
그 말에 양효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우리집 담벼락에 거미를 다섯 마리 그려 놓았을까요? 이상하죠?"
"추동이 말했잖니? 개구쟁이들이 장난친 것이라고."
"그럴리가 없어요. 우리가 외출할 땐 언제나 대문을 잠그고 다니잖아요. 담장도 높고 근처엔
나무도 없는데 어린애들이 무슨 수로 들어온단 말예요?"
미랑이 육가장에 왔을 때 무뢰한들이 찾아와 치근덕거리자 미랑은 담장을 높이 두르고 육중
한 대문까지 달았던 것이었다. 게다가 무뢰한들이 담장을 넘어올까봐 그 주위에 있는 나무
들까지 몽땅 베어버렸다. 지금 아들의 말을 듣고보니 그 거미 그림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
각이 들었다.
무공을 배워 세상 견식이 미랑보다 넓은 추동이 물었다.
"어디서 무슨 얘기라도 들었나요?"
양효비는 차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제 정신이 든 듯 대답했다.
"전 오늘 가흥성 안에 갔다가 무서운 얘길 들었어요."
"무서운 얘기라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미랑이 다그쳐 물었다. 그녀는 아들이 무슨 귀신 이야기라도 들은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가흥성에서 저는 임가네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셨어요."
사실 양효비는 가흥성에 들어가자마자 도박장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가 지금 말하려고 하
는 일은 어느 도박꾼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제 성 안에 있는 장씨 나으리집 식솔 열 두 사람이 갑자기
몽땅 죽었다는 게 아니겠어요. 게다가 집에 있던 전가지보(傳家之寶)인 미옥 하나도 없어졌
다는 거예요. 그 장가네 하인의 말에 따르면 그전에 예쁘장하게 생긴 비구니가 탁발하러 왔
다가 부처님께서 장가네 미옥을 마음에 들어하신다고 말했대요."
"그런 일이 있었남? 장씨 나으리는 갑부지만 지독한 구두쇠라 그 미옥을 내줄 리가 없지."
추동의 말이었다. 그러자 미랑은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비구니도 무례하구나. 어떻게 남의 집 보물을 그냥 달래지?"
"그래요. 장씨 나으리도 그 말을 듣고 대노해서 그 비구니를 쫓아버렸대요. 그런데 그 다음
날 장씨 나으리 집안 식솔 열둘이 몽땅 죽어 버렸대요. 그 미옥도 없어지구요."
양효비의 얘기에 미랑은 손을 내저었다.
"얘야, 됐다. 이젠 그런 끔찍한 소리 그만해라. 듣기만 해도 무섭고 불길하네."
"아니에요. 그 일은 우리 집과도 틀림없이 관계가 있어요."
"뭐라고?"
어머니의 말에 양효비는 한숨을 지었다.
"어머니, 장가네 식구들이 몰살당한 그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세요? 그 집 벽에 누군가
큰거미를 열 두 마리나 그려 놓았대요. 그 그림이 오늘 우리집 벽에 그려진 그림과 똑같단
말예요."
그 말에 미랑과 추동은 크게 놀랐다. 양효비가 계속 말을 이었다.
"거미 열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열두 사람이 죽었거든요. 우리집엔 다섯 마리를 그려
놓았는데, 보세요. 우리 식구가 다섯이잖아요? 안그래요?"
양효비는 말할 수록 겁이 나서 이빨이 부딪치도록 떨었다.
"아니, 그게 정말이니?"
어머니의 물음에 양효비는 답답하다는 듯이 발까지 굴렀다.
"그럼 생명에 관계된 일인데, 제가 어찌 허튼소리를 하겠어요? 사람들 말은 그 예쁜 비구니
가 흉수일 거래요. 그 비구니 별명이 독주여니(毒蛛女尼 : 독거미 비구니)래요."
"독주여니?"
추동과 미랑은 놀라서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강호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얘기를 내가 왜 못들었을까?"
추동은 눈을 깜빡이며 말하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양효비는 '강호사람들과 나만큼도
접촉이 없으면서 무슨 소리하는 거야' 하며 추동을 비웃었다. 물론 추동이 자신의 스승이라
는 점을 고려하여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어머니와 추동이 놀라는 것을 보면
독주여니란 이름을 처음 듣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집에 왜
그런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일까? 독주여니가 집을 잘못 안 것인가? 아니면 친구들이 장난
치느라고 그려놓은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양효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마을에 사
는 친구를 찾아가 혹시나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런 장난을 한 친구들은 없었다.
양효비가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날이 저물어 집집마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
다.
양효비는 어머니 그리고 추동과 함께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닭고기도 생선도 있었지만 도
무지 입맛이 없었다. 지금까지 기호를 그려놓고 사람을 죽였다는 흉문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들이라 그 심란함은 더 말할 여지가 없었다.
양효비네 식구들은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모두 손에 손에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평소
추동이 양효비에게 무예를 가르치느라 장만해 두었던 병장기들이었다.
온 집안 사람들이 등불을 둘러싸고 앉아 숨도 고르게 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들은 만약
독주여니가 오면 목숨을 걸고 싸울 준비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청아와 홍아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손에 있던 칼까지 떨어뜨렸다.
전란을 겪어본 미랑도 겁이 나 몸을 웅크렸으며 평소 육가장에서 우쭐거리던 양효비도 잔뜩
겁을 집어 먹었다.
'독주여니가 칼을 들고 나타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겁을 먹다니.' 추동은 가볍게 한숨을 쉬
었다.
그러나 사실 추동도 겁이 났다. 추돌은 강호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몸소 겪어보지도 못했
고 또 양효비가 들려준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 때문에 적이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침
착한체하며 뜰로 뛰쳐나가 외쳤다.
"누구요? 도대체 누구인지 이름을 대시오!"
그녀는 자신의 말이 과연 강호인의 그것과 비슷한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
자면 강호인들은 싸우기 전에 반드시 통성명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밖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시 태풍전야의 고요처럼 조용하다가 또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놈, 도적이면 냉큼 물러가라. 이 추모(某)가 목을 치기 전에."
추동의 호통소리에 양효비는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고선 등잔불을 훅 불어 껐다. 이것이야
말로 대담하고 주도면밀한 강호 협객의 행동이지. 양효비는 자기를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했
다.
대문 밖은 다시 잠잠했다.
그러다가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시오. 하룻밤만 묵고 갈 수 없겠소? 은자는 충분히 드리겠소. 제발 하룻밤만 묵도록 해
주시오."
그제서야 집안에 있던 다섯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청아야, 네가 나가보아라. 만일 나이 있든 사람이거든 절대 들여놓지 말아야 한다."
추동이 말했다. 그러나 청아는 겁에 질려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애군!"
추동은 그렇게 나무라며 등잔불을 켜들고 나갔다.
대문을 열려던 추동은 혹시 독주여니가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어 쪽문을 열고 밖을 비
추어 보았다. 추동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밖에 서 있는 사람은 비구니는 아니었지만 다름아닌 바로 낮에 보았던 외팔이 괴한이었다.
그 괴상한 새도 옆에 있었다.
추동은 쪽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우리집 공자를 다치게 하고선 무슨 염치로 온 거요? 뭐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낮에 잡히
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추동은 그렇게 말하곤 돌아서려고 했다.
문밖의 양과가 차디차게 웃었다.
"난 좋은 마음으로 왔는데, 이렇게 냉대하다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내가 가엾은 다섯 생
명을 위해 이렇게 아둥바둥할 필요가 없지."
"시끄러워요. 어서 썩 물러 가세요."
추동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양과는 눈썹을 찌푸리고 소맷바람을 일으키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누구냐?"
추동이 돌아오자 미랑이 물었다. 추동은 낮에 본 그 괴한이라 고 말했다.
"날벼락 맞을 놈, 감히 우리집을 또 찾아오다니? 내가 없애버리겠어."
양효비는 칼을 빼들고 뛰쳐나가려는데 미랑이 저지했다.
"넌 대갓집 공자인데 그 따위 괴한과 싸운다면 체면이 서겠니?"
그래서 모두들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양효비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예삿일이 아니야. 그 괴한은 필시 독주여니와 한패일 거라구. 아니면 그 괴한이 독주여니일
지도 모르지!"
"비구니라면 여자지 어떻게 남자일 수 있겠니? 그 괴한은 남자가 분명하잖니? 그 괴한이 독
주여니일 리가 있겠니?"
"어머닌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여자가 남장을 한다거나 남자가 여장을 하는 것은 강호에
서는 보통 일이라구요. 추동의 말도 못들었어요? 그 괴한도 무슨 가면을 썼다고 하던데 그
렇다면 비구니로 가장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추동도 갑자기 의심이 생겼다.
"글쎄, 제 말이 맞다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낮에 왜 우리에게 못된 짓을 했겠어요?"
양효비는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겼다. 그래도 미랑은 그 말이 미덥지 않았다.
"우리가 그 괴한을 만난 것은 낮인데, 언제 그가 거미 그림을 그려놓을 수 있겠니?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그려져 있었잖니. 그럼 그 괴한이 분신술이라도 썼단 말이니?"
"그 괴한의 신법(身法)이 번개같았어요. 예전의 제 사부님보다 빨랐던 것 같아요. 그러니 우
리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먼저 와서 그림을 그려놓을 수도 있죠."
추동의 말에 양효비도 흥분하며 말했다.
"그렇다니까요. 그 괴한의 무공이 얼마나 괴이한데요. 그따위 거미 그림은 단숨에 그려놓을
수도 있죠."
강호의 이인(異人)들을 흠모해온 양효비인지라 낮에 그렇게 혼이 나고도 양과의 무공에 대
해선 이렇게 환상적인 추측까지 하며 떠들어댔다. 바로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깔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미랑네 사람들이 위를 바라보자 그 웃음소리는 어느새 문밖에서 들려왔다.
그 짧은 순간에 그 사람은 지붕 위에서 문쪽으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검자루를 쥐고 있던
추동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는 피돌기마저 멈춘 듯 했다. 이번엔 창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
렸다.
양효비는 입김을 불어 등잔불을 꺼버렸다. 그와 동시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창호지가 뚫
렸다. 양효비의 입김에 꺼지려던 등잔불이 다시 살아났다.
깜짝 놀란 양효비는 다시 세차게 입김을 불었다. 그러나 등잔불은 흔들렸을 뿐 꺼지지 않았
다.
창 밖에서 또 깔깔깔 하고 웃는 여인의 소리가 들렸다.
"또 불어 봐라. 입김이 얼마나 센지 보자꾸나."
창 밖의 여인은 창호지 구멍을 통해 양효비의 입김과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양효비는 그
여인에게 지지 않으려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힘껏 입김을 불었다. 어쨌든 등잔불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니까.
그러나 그 순간 창밖의 여인도 입김을 불었다. 등잔불은 이번에도 꺼지지 않았다.
양효비는 열번이나 똑같이 해보았지만 결코 등잔불을 꺼뜨리지 못했다.
그 여인은 계속 섬뜩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시지."
그런데 양효비가 꾀를 썼다. 자신의 몸으로 창호지 구멍을 가로막은 채 입김을 불었던 것이
다. 그제서야 등잔불이 꺼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자 창 밖의 여인은 잠시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웃었다.
"꽤 약은 녀석이군. 제 애비…… 어쩌면 제 애비를 저렇게 닮았을까."
여인의 그 말에 양효비는 가슴이 섬뜩했다.
무슨 말이지? 저 계집이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알길래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어머니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는 사이 미랑은 양효비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집 가운덴 검을 들고 있는 추동의 그림자
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넌 도대체 누구냐? 영웅호걸이라면 정정당당히 나서야지 이게 무슨 덜 되먹은 수작이냐?"
추동의 말에 그 여인은 쌀쌀하게 대답했다.
"거미 그림을 보고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단 말이냐?"
"그럼 네가, 네가 바로 독주여니?"
집안의 다섯 사람은 모두 흠칫하고 놀라는데 미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흥, 이제야 알아보시는군. 그래, 미랑 그 동안 잘 지냈나?'
"날, 날 어떻게 알지?"
미랑이 물었다.
"내가 왜 널 모르겠는가. 난 널 알 뿐만 아니라 죽이러 왔다. 벽에 그린 거미를 보았겠지?
모두 다섯 마리. 이 집에 있는 다섯을 모두 죽이겠다는 말이야."
독주여니가 이렇게 말하자 추동이 외쳤다.
"이 추동이 있는 한 어림없다. 우리 아씨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우린 다섯이나 되는데
너 같은 중년 하나를 어쩌지 못하겠느냐?"
그러자 독주여니는 또 깔깔대며 웃었다.
"내가 혼자인 줄 알았더냐? 혁장군, 어디 있지?"
"여기 있소이다."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우람한 그림자 하나가 창가에 비쳤다. 그 우람한 사내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 것을 보고 추동은 가슴이 떨렸다.
"혁장군은 어서 들어가서 저 다섯을 단번에 해치우시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창살이 부서지면서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집안으로 냉큼 들어섰다.
추동은 재빨리 검을 내찔렀다.
그런데 무엇인가 둔탁하게 검을 내리치는 바람에 추동은 검마저 땅에 떨굴 뻔했다. 어깨가
뻐근해짐을 느끼며 추동이 급히 물러나며 살펴보니 그 사내의 손에는 거치른 낭아봉이 들려
있는 게 아닌가.
사내는 추동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등잔불을 붙이고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문가에 가서
섰다.
그곳으로 회색 승복을 입은 비구니가 들어서는데 자세히 훑어보니 아주 예쁘게 생긴 얼굴이
었다. 그리고 일거수 일투족이 대갓집 규수를 방불케 할 만큼 매우 우아했다.
이 두 남녀가 낮에 호숫가에 서 있던 바로 그들이었다.
독주여니는 등불 앞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미랑을 바라 보았다.
"날 모르겠어?"
"아니, 네가? 어쩌면 이럴 수가……"
미랑의 음성은 놀람 그 자체였고 열린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천성이 방탕한데다 홀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으로 버릇이 없는 양효비는 그 어린나이에 무수
히도 여자들을 품어 보았지만 독주여니를 보고는 그만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독주여니의 자색도 자색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사나이들의 넋을 빼앗는 그 무언가
가 있었다.
양효비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슬쩍 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여자 아는 사람이에요?"
미랑은 아들을 돌아다보지도 않고 독주여니만을 바라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완안방방(完顔芳芳)이란 여자다. 십년이 넘었는데도 기어이 찾아왔구나."
등불심지를 돋우며 독주여니가 말했다.
"미랑은 그 동안 잘 지냈겠지? 이 산 좋고 물 좋은 강남에서 말이야. 그래서 우리 대금국
황제도 이 강남땅을 차지하려고 눈이 빨갰었지."
독주여니의 눈에는 원망의 빛이 서렸다.
"넌 여기서 잘 살았겠지만, 그 동안 난 얼마나 고생을 한 줄 알아?"
완안방방은 벌떡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난 저 서쪽 끝에 가 불등(佛燈)을 외로이 벗삼아 매일 채소 나부랭이만 먹고는 목숨을 연
명했지. 그 고생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도 못할 것이야."
완안방방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내가 왜 그 고생을 참아 왔는지 알아? 바로 오늘을 위해서야!"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분한지 가슴을 들썩들썩거렸다.
양효비는 그녀의 들썩거리는 가슴을 보자 승복 안에 있을 탐스러운 젖무덤에 생각이 미쳤
다.
완안방방이 눈치를 챘는지 앞으로 나서며 양효비의 뺨을 두 번 슬쩍 후려쳤다. 양효비는 마
치 볼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림을 느꼈다.
제자리로 돌아간 완안방방이 코웃음을 쳤다.
"네 녀석 따위가, 하긴 그 경박하고 음탕함은 꼭 제 애비를 닮았구나. 그 못난 인간의 자식
임에 틀림없어."
어머니와 추동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자 양효비는 얼굴 둘데를 잃었다.
양씨네 모자 앞을 막고 있던 추동은 완안방방이 그렇게 쉽게 자기를 피해 양효비의 귀쌈을
갈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추동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저 비구니가 좀 더 힘을 줬더라면 양효비는 죽었을 거야. 저 독주여니의 무공은 나보다 훨
씬 고장한 것같군.'
추동도 그만 투지를 잃고 말았다.
아들을 애지중지하는 미랑은 스물이 다 된 양효비를 아직 갓난애 정도로 여기고 있었기 때
문에 아들의 호색(好色)은 상상도 못했다. 미랑은 완안방방을 꾸짖었다.
"행패를 부리려면 나한테 부려라. 철없는 애한테 왜 손을 대는 거냐? 죽이려면 날 죽여라."
"죽고싶다 이거냐? 그렇게 쉽게 죽일 것 같으냐? 그때 네년이 한 짓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
가 갈리는데, 내가 쉽게 널 죽이겠어?"
완안방방은 코웃음을 쳤다.
"어머니, 도대체 저 비구니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저 여자가 왜 우리를 죽이려 하죠?"
양효비가 의아스러운 듯 어머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밤 살아남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미랑은 그 일을 아들에게 말해주기로 마음을 정했다.
"네 아버지와 나는 죽마고우로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고 또 두 집의 지위도 비슷했기에
양가 부모님들의 뜻에 따라 정혼을 했단다. 그런데 저 행실 나쁜 완안방방이 네 아버지를
유혹하려고 했지. 네 아버지는 딱 잘라 거절하셨다. 저 완안방방은 화가 나서 집을 나간건데
그 분풀이를 지금 우리 모자에게 하려는 모양이다."
그 말에 완안방방은 대노하며 소리쳤다.
"허튼소리 집어치워. 천생연분은 바로 그 사람과 나였어. 네가 끼어들어 우리를 갈라놓았던
거야. 뻔뻔스러운 년. 네년은 염치도 없이 그 사람에게 달라붙어 저 못난 자식까지 낳았었
지. 흥! 내가 너희들을 살려둘 것 같으냐?"
그리고 사내를 돌아보며 명령했다.
"어서 저것들을 해치워라."
그 사내는 허리를 굽실거려 대답하고선 솥 뚜겅같은 손을 내밀어 미랑을 움켜쥐려고 했다.
"혁중달( 伸達)! 금나라 중신이셨던 우리 아버님이 네 목숨을 구해준 일을 잊었느냐? 그런
데도 우리를 죽이겠다는거냐?"
그 말에 혁중달은 내밀던 손을 움찔하고 멈췄다.
옛날에 혁중달은 일개 하급 장수였다. 그런데 어느날 술에 취해 군법을 어겼다. 금나라 황제
는 그를 참수하려 했으나 미랑의 아버지가 사정하여 구해줬던 일이 있었다. 혁중달은 그 은
혜를 생각하자 차마 미랑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혁장군! 우리 아버님께서 장군을 등용해서 이만큼 된걸 잊었단 말인가? 또 그 동안 내가
뒤를 봐준 은혜도 잊었단 말인가?"
완안방방이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완안방방의 눈매에는 사나이를 매혹시키는 그 무엇
이 있었다.
그러자 혁중달은 발을 굴러 내달으며 미랑을 잡으려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아씨를 건드리지마."
추동이 외치며 혁중달의 왼손목을 노리곤 검을 휘둘렀다.
혁중달은 오른손에 잡고 있던 낭아봉으로 추동의 검을 막았다.
미랑은 뻗쳐오는 혁중달의 손을 보고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아들을 끌어당기면서 그 자
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추동의 힘은 혁중달에 비할 것이 못되었다. 낭아봉에 검이 튕겨나는 바람에 어깻죽지가 다
저렸다. 그러나 아씨가 위급한데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추동은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태을
검법의 수도추화(數刀追花)라는 초식을 썼다. 검 끝이 섬광을 발하며 혁중달을 향했다.
혁중달은 기합을 지르면서 낭아봉으로 추동의 검을 후려쳤다.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추
동의 검은 두동강나고 그 힘에 밀려 추동은 벽 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추동은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다가 '욱' 하고 피를 한움큼 토해냈다.
혼비백산한 양효비였지만 무공을 조금이나마 배운 처지라 급한 김에 얼른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홍아를 끌어당겨 혁중달을 막았다. 혁중달은 홍아를 한손으로 움켜쥐더니 벽에다
패대기를 쳤다. 홍아의 머리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홍아는 비명도 못지르고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혁중달은 미랑과 양효비의 팔목을 왼손으로 모아쥐고 완안방방 앞으로 끌고갔다.
양효비는 반항하려 했으나 힘이 달려 꼼짝할 수 없었다.
완안방방은 그들 모자를 보고는 싸늘하게 웃더니만 품 속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장갑을 끼고 뚜껑을 열어 얼룩덜룩한 큰 거미를 잡아내서 미랑의 이마에 올려놓고선 깔깔거
렸다.
"네가 피하긴 어디로 피해? 어디 얼마나 오래 사는가 한번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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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독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