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신전집 1 . 3. 4 권>> 일월서각 竹內好(다케우치 요시히데)역주 한무희옮김 일월서각
1권은 김정화 옮김이고, 3권과 4권은 한무희 옮김이다. 몇 자 적어보려고 책을 뒤지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1권 표지에 2002년 5월 22일 구입이라고 내가 적은 메모가 있었다. 그런데 3권의 1쇄는 출판은 1987년 5월 10일이고, 2쇄는 2006년 12월 10일이다. 분명 3권의 구입날짜는 2006년 12월 이후가 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 전집은 띄엄띄엄 출판되었다. 나는 2002년 1권을 구입하고 3권은 나중에 구매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1권은 1985년 5월 25일 1쇄가 발행되고, 2쇄는 1992년 11월 23일 인쇄되었다. 이상한 점은 4권은 1986년 12월 30일을 펴낸날이라고 쓰여 있다. 각 권마다 옮김이가 다르고 책 출판 날짜가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책은 일본인 다케우치 요시히데의 역주로 일본에서 출판되었고, 그후 한국의 일월서각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한꺼번에 번역 출판되지 않고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간격을 두고 출판되었다. 노신은 중국인인데 중국어에서 바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되는데, 굳이 일본이라는 통로를 통해 번역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지금이야 사정이 나아졌지만 당시는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세계적인 냉전의 영향도 있었고, 당시에는 중국을 공산주의라 배척하였기에 ‘직수입’은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한중수교는 1991년에 수립되었다고 한다. 한중수교 이전에 중국은 ‘빨갱이들이 사는 나라’였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추측인데, 이 책 1권이 번역된 1985년은 전두환 독재시절이었다. 노신은 단지 문학이나 소설로서 읽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노신은 한국에서는 ‘반체제 인사’이다. 노신을 편하게 출판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으리라. 당시에 책꽂이에 노신이 발견되었다면 좀 어려움을 격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싶다. 또 당시는 지금처럼 교류가 활발한 시대가 아니었기에 일괄 출판에 어려움이 있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도 있다. 하나의 세계가 아니 한 명의 인물이 일상 속으로 들어오기까지는 이렇듯 많은 우여곡절이 있는 듯하다. 세상에는 공짜도 없고, 편한 길만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3권 마지막 페이지에는 꽤나 흥미로운 첨가문이 수록되어 있다. 313쪽에는 역자인 다케이치 요시히데의 /해설을 대신하여/ 글이 5쪽 실려 있고, 다음으론 그의 부인의 /한국어판 노신문집에 붙여/라는 짤막한 글이 실려 있다. 다케이치 요시히데의 글은 77년 1 월말로 기록되어 있고, 그의 아내 다케이치 테루코의 글은 1985년 9 월로 표기되어 있다. 이 간격은 역자가 그동안 사망하였음을 시사한다. 이 책의 간략한 내력은 다케이치 데루코의 글에 소개되어 있다.
/노신문집(전6권)은 남편의 마지막 업적이다. 10년 이상 자료를 준비해서,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하여 1977년에 병사하기까지 남편은 거의 모든 정력을 이 작품의 번역과 역주를 붙이는 작업에 기울였다./ 노신의 여러 글 혹은 여기저기 흩어진 글들을 모아 하나의 체계를 만들고 번역을 하고 주석을 붙이는데 자료 준비부터 완성까지 거의 15년이 걸린 셈이다.
다케이치 요시히데가 이렇게까지 노력과 정성을 들인 이유를 그의 아내가 회상하는 요시히데의 말을 인용해 보면 이렇다. /노신 속에는 예상치 못했던 ‘미래성’이 감추어져 있어서, 많은 발굴 작업이 행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노신 속에는 서양이 만들어 낸 근대를 절대시하는 사고방식-일본에서는 매우 뿌리깊게 남아 있습니다-을 부정하는 그 무엇이 확실히 존재하며 “그 유효성을 시험하거나 혹은 거기에서부터 일반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장래의 과제로서 제3세계가 담당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노신은 여러 필명 중 대표적인 명이고, 그의 이름은 주수인이다. 1881년에 절강성 소흥에서 출생하여, 1904년 일본 센다이 의학 전문대에 입학한다. 노신은 몰려오는 서양의 ‘근대’를 보며 서양의 힘은 의학과 생물학(과학)에 있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1906년 의학과를 중퇴하고 ‘문학’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진화의 계기는 강의 시간에 청일전쟁 중 일본인이 중국인을 참수하는 슬라이드를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을 구하고 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대에 진학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중국인 개인들의 신체가 아니라 정신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어렵다고 보았다고 한다. 1918년 광일일기를 게재 후 노신이란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다. 1921년에 아큐정전을 연재하는 등 중국의 대표적 ‘문인’으로 활동한다. 1936년 10월 사망한다. 한국으로 치면 구한말에 출생하여 일제 시대를 산 셈이다. 조선이 1910년에 일본에 합방되었고, 중국은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그후 제국주의 침략, 간섭 ,영토 할양, 군부의 끊임없는 쿠테타, 군벌들의 내전, 장개석의 쿠테타,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 국공합작, 공산당의 대장전 등을 거쳐 1949년 중국 혁명의 승리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조선은 1945년 ‘해방’ 비슷한 궤적을 보인다. 이는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 같이 휩쓸렸기에 그러할 것이다. 한 민족이나 국가도 이럴진대 한 개인의 삶도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흘러가기 마련일 때가 있다. 조선의 역사나 한국의 근현대사도 파란만장하지만, 중국이라는 이 거대 제국의 멸망과 재정립까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파란만장함이 있었다고 한다. 양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조선이나 한국의 근현대사에 비해 파장도 충격도 사건도 비중도 비교가 불가했으리라. 노신은 이 시대의 중심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역자는 노신에게서 ‘미래성’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오래 전 ‘문학자’이지만, 나는 내내 읽으면서 2024년의 미래성을 읽을 수 있었고, 그 후의 ‘미래성’도 노신에게서 읽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처음 계획은 3권 딱 한 책만 읽을 예정이었지만, 더 읽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는 오래되고 무거운 일인용 의자를 버리고 그 자리에 학생들이 앉는 나무의자를 한 개 가져다 놓았고, 겨울에 쓰던 몇 가지를 정리하고 나니 집이 훨씬 간소해졌다. 어제는 오랜만에 청소를 하였다. 그리고 카페에서 차를 한 잔하고, 숲속을 걷기도 하고, 공원 의자에 앉아 졸기도 하고 저녁에 맘에 맞는 음식과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자기 위로’ 혹은 ‘나를 위한 선물’일까? 모르겠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내 자신을 위로한단 말인가? 그리고 지나간 삶을 되돌아 보면-현재도- 나는 셀프 위로가 아니라, 여기저기 사과를 하고 반성할 일만 많다. 즉 셀프 위로든 뭐든 위로 보다는 반성하고 사죄할 일뿐이다. 그리고 무슨 위로를 받을 만큼 내가 피해나 희생을 하였을까? 살기 위해서 아니면 이런저런 핑계로 피해를 준 일이 더 많고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훨씬 많았지 않았는가? 더군다나 위로는 피해자나 약자들이 받는 것이지 않을까? 나는 가해자에 가깝고 ‘주인’이고 싶은 열망이 있다. 일테면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였는데 내가 나에게 무슨 위로 따위를 하겠는가? 나의 삶의 ‘주인’은 나다. ‘자기 위로’의 유행은 사실 지금의 우리는 나약하고 자유롭지 못한고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감옥에 갇혔을 때 부당함에 대해 항의하고 감옥을 파옥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부당한 상황이나 감옥 안에서 스스로 위로를 하면서 제 자신을 달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 감옥에서 탈출할 수 없더라고 문이라도 두드려서 간수의 잠을 방해라도 하여 간수가 우리를 ‘위로’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위로’는 간수에게는 그 어떤 쇠사슬보다 더 견고한 감옥이 아닐까. 그것도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방식의 효율적 ‘파놉티콘’이다. 한국인들의 독서량이 발표되었는데 절망적이라고 한다. 골프 인구가 줄어들었다고 호들갑 떨 필요가 없듯이 독서 인구가 줄었다고 실망할 필요가 있을가 싶기도 하다. 대신 유튜브나 구글 텔레비전 등의 매체가 수없이 많이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순전히 내 개인적으로 약간 걱정되는 것은 읽히는 책 중 상당량이 ‘자기에게 위로’를 주는 류의 책이라는 발표다. 그 발표 중 하나는 ‘부자’들은 인문학 책을 선호하고 독서량도 상당한데, ‘보통사람’들은 태반이 자기 계발이나 자기 위로 책을 선호한다고 한다. ‘부자’들은 위에서 내려다 보기를 원하고, 아닌 사람들은 아래에서 위도 아니고 아래만을 보기를 원해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위에서 새로운 광맥를 탐색하고 우리는 폐광만 열심히 파고 또 파고 있지 않는가도 싶다. 노신을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를 읽기 위해서는 당대의 중국과 현재를 같이 읽어내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리고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를 떠나서도 읽을 수 없지 않을까? 역자의 말대로 그는 언제나 ‘미래성’이고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작가이자 위인이다. 초고를 쓰고 여러 날에 걸쳐 다시 쓰고 고치고 하며 다듬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내가 워낙 천박하고 게으르고 조급하여 여의치 않다. 언제쯤 정말 즐기는 독자가 될 수 있을지 답답하다.
첫댓글 /부자’들은 인문학 책을 선호하고 독서량도 상당한데, ‘보통사람’들은 태반이 자기 계발이나 자기 위로 책을 선호한다고 한다.
ㆍㆍㆍ
부자는 위에서 새로운 광맥를 탐색하고 우리는 폐광만 열심히 파고 또 파고 있지 않는가도 싶다/
멋진 표현력에 감탄합니다..
/자기 위로’의 유행은 사실 지금의 우리는 나약하고 자유롭지 못한고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주체적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