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불 / 이강산
가을이라 꽃핀다고
한 송이 활짝 피어서야 꽃이겠는가
이제 막 벙그는 꽃대궁들이
바람에 흔들리다
낮은 키 못난 대로 서리맞을 때
저 혼자 살아서야 산 목숨이겠는가
우리 돌아가는 변두리의 밤
길가에 코스모스 산길에 망초꽃
꽃불 놓고
저렇게 무더기무더기 피어서 아름답지
우리 혼자 일어나
언제 힘깨나 쓴단 말 들었던가
허기진 날 많아도
하나 둘 스며들어 모여살 듯
한없이 약한 저 꽃들이
새벽 출근길의 시내버스 창가에
떼지어 서서
봄이나 가을이나
꽃 한 송이 잘 피어서 소용없다고
저 혼자 우뚝해야 볼품없다고
송사리 떼 - 역류 / 이강산
아는지 몰라
송사리 떼가
물살을 거슬러 머리를 두는 이치를
그 연약한 몸짓들을 오래 보면
마치 시위를 떠나는
광장의 사람들 같은걸
우리나라 냇물 어디를 보아도
물이 흘러온 세월만큼
제 삶의 방식을 지켜온 역류의 몸부림
저 끈질긴 생명력을
눈여겨보았는지 몰라
때때로 물살 따라 떠 있을 때의
끝없는 운동성을 보면
그게 어디
물살에 쓸리지 않기 위한
얄팍한 생존의 수단뿐이랴 싶어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냇물을 거슬러 산에 오르는 사람들,
정상 턱밑의 계곡물에까지
송사리 떼가 살아가는 이치를
아는지 몰라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다 / 이강산
골목의 그늘이 깊다
햇볕이 아직 남아 있다는 이야기다
늘 어두워야 돌아오는 사람들
가슴에 노을 한번 안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골목의 그늘이
어둠보다 낯선 마을이 많다
오늘 다녀가는 사북이 그렇다
사람들 돌아올 시간은 멀고
골목 저 끝에서
햇볕 몇 조각이 힘겹게
사람을 기다리다
사람을 기다리다
저희들끼리 퍽퍽 가슴을 두드린다
이 마을이 낯설다는 이야기다
아직 어둠이 멀었다는 이야기다
황지 1박 / 이강산
하룻밤 묵어가는 어디서든 그렇지 않더냐
그리움 없으면 이 밤은 밤도 아니다
겨울과 여름, 다시 겨울
거리거리 여행의 걸음이 깊어가듯
폐광되어 떠날 사람들 슬픔은 쌓이고
눈발은 눈발대로 막장처럼 깊어가고
하룻밤 묵어가는 어디서든 그렇지 않더냐
가난한 사람들 밤길에 만나
술에 취하듯 노래에 취하듯
그리움 없으면 이 밤은 밤도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 / 이강산
희망이라는 것
말복 더위로 지친 트럭운전수 아버지의 목덜미에 어린 딸아이가 땀 흘리며 부채질하는 것
슬픔이라는 것
남편 몰래 아이 몰래 찔끔 찍어내는 어머니의 눈물, 그 너머 이리저리 흔들리는 세상 같은 것
더디 해는 지고
한밤이 되어서도 뒤척이는 아이의 땀띠 위로 부채질하며 아내 머리맡에서 밤새우는 것
사랑이라는 것
아름다움이라는 것
일기 / 이강산
순대집 좌판의 소주병들도
제 스스로 술에 취해 쓰러지는 밤
구겨진 종이돈 세는 일만 바쁜 하루였다 쓴다
난전의 보기 흉한 쓰레기조차
주섬주섬 잠자리를 펴들 때
돌아가야 난전의 좌판 같은 집
찬밥이 있고 찬밥처럼 누워 있는 식구들의 방
자정 늦게 구겨진 돈을 펴
글줄깨나 익힌 아들이
잔술에 취해 문득 시라고 부르기도
하는 밤이라 쓴다
[ 이 강 산 시인 약력 ]
- 1959년 충청남도 금산 출생.
- 한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 1989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
- 시집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1996), 『물속의 발자국』(2005), 『모항』(2014), 『하모니카를 찾아서』(2020) 등이 있음.
- 대전 · 충남 민족문학인협의회 사무국장
- 대전 신탄진중학교 · 새일고등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