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서울 지하철 9호선(서해선) 개통
2018년 서해북방한계선(NLL) 핫라인 국제상선공통망 10년 만에 정상화
2018년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 세상 떠남(101세)
2018년 주52시간 근무제 종업원 300인 이상의 사업장과 공공기관에서 시행
2017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조선업 불황과 일감 부족으로 가동 중단, 노동자 5천여 명 일자리 잃고 협력사 56곳 문 닫음
2017년 소설가 박상륭(77세) 세상 떠남
2016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인근 음식점에서 이슬람국가(IS) 소행으로 보이는 인질극 민간인 20명 살해, 10시간 만에 진압, 무장괴한 9명 중 3명 사망 방글라데시 경찰 2명 사망
2015년 ‘영국판 쉰들러 리스트’ 니컬러스 윈턴 경 별세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나치의 눈을 피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 어린이 669명을 영국으로 탈출시킨 ‘영국판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이다
그는 1909년 영국에서 부유한 독일계 유대인 가정의 자녀로 태어났다. 독일·프랑스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주식 중개인을 했다. 1938년 12월 친구의 부탁으로 난민 수용소를 찾아간 그는 나치의 잔혹성에 경악했다.
그는 재산을 털어 아이들을 영국으로 데려올 기차 등 교통편과 위탁 가정을 찾을 때 필요한 입양 서류를 마련했다. 총 8차례에 걸쳐 아이들을 기차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탈출시켰다. 영국까지 무사히 건너온 아이들은 신문 광고 등을 통해 입양 가정을 알선해 줬다.이렇게 669명을 구출한 뒤, 윈턴 경은 50년간 자신이 한 일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윈턴 경의 이야기는 아내에 의해 영국 BBC 등에 소개됐고, 곧 세계 각지에서 그가 구출한 아이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영화감독 카렐 라이츠, 영국 노동당 의원 앨프리드 덥스, 미국 대학 석좌 교수 등 유명인과 사회 지도층도 여럿 있었다. 669명의 아이들이 낳은 자녀와 손주까지 합하면 그에게서 직·간접적 도움을 받은 일명 ‘니키의 아이들’은 5700명에 이른다. 윈턴 경은 2002년 ‘니키의 아이들’ 5000여명과 감동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는 2003년 영국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작년엔 체코 정부가 주는 국가 최고 훈장을 받았다. 윈턴 경이 사망한 1일은 8차례의 대탈주 중 가장 많은 인원(241명)이 영국에 도착한 날이었다.
2013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난민법 시행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17번째 광역자치단체로 공식출범
2009년 러시아 국민가수 류드밀라 지키나 사망
북한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와 인연이 깊었던 러시아의 '국민가수' 류드밀라 지키나(Zykina·여·80)가 2009년 7월 1일 오전 심장마비로 사망아여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묻혔다
1947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지키나는 43년간 '볼가강은 흐른다'를 비롯해 250여곡의 히트곡을 남겼다. 80회 생일이던 지난 6월 10일에는 "동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서쪽의 모스크바까지 2개월에 걸쳐 마지막 러시아 전국 순회공연을 하겠다"고 의욕을 보였었다. 지키나는 생전에 김일성 부자의 초청으로 평양에서 여섯 차례 공연을 했다.
2008년 몽골 울란바타르에서 대규모 시위, 몽골 사상 첫 계엄령
2006년 하시모토 류타로 전 일본 총리 사망
하시모토 료고(橋本龍伍) 전 후생상의 장남이라는 집안 배경과 정책 수립 능력을 겸비한 하시모토 전 총리는 1963년 국회의원 당선이후 작년 정계 은퇴까지 14회 연속 국회의원 당선, 후생상, 대장상, 자민당 정조회장, 간사장 등 일본 정계의 요직을 섭렵했다.
1부(府)22성(省)의 정부 조직을 1부12성으로 줄인 것도 하시모토의 작품이었다.
하시모토는 소비세를 인상해 경기에 찬물을 끼얹는 바람에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 총리직을 2년 6개월 만에 마감했다.
2004년 카시니-호이겐스호, 발사 7년 만에 토성 궤도 진입
미국과 유럽(EU)의 공동 토성 탐사선 ‘카시니-호이겐스’가 지구를 떠난 지 7년 만인 2004년 7월 1일, 가스와 먼지 입자로 이뤄진 토성의 고리를 무사히 통과, 예정된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밝혔다.
카시니호의 토성 궤도 진입 과정은 ‘손에 땀을 쥐는 초긴장의 연속’이었다. 카시니호는 얼음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고리 사이를 무려 15만8000km나 헤치고 나아갔으며, 이 과정에서 안테나가 우주선 본체를 보호하는 방패 구실을 했다.
‘카시니’란 이름은 17~18세기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지오바니 카시니에서, ‘호이겐스’는 17세기 네덜란드 출신 과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에서 각각 따온 것.
카시니호는 1997년 발사된 뒤 약 7년간 35억km의 우주를 날아갔으며, 앞으로 4년간 토성 궤도를 76바퀴 돌면서 토성과 그 위성들을 관찰하게 된다. 태양계에서 여섯 번째 행성이자 목성 다음으로 큰 토성은 가스와 먼지 고리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 태양계 초기 모습과 유사해 태양계 생성 과정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됐다. 토성의 고리 사이에 있는 검은 줄무늬는 카시니에 의해 처음 발견돼, ‘카시니의 틈’으로 명명됐다.
2004년 영화 ‘대부’ 명연기 말론 브랜도 타계
1924년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난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가 퇴학당한 뒤 뉴욕으로 가 19세 때인 1943년 연극 배우로 데뷔했고, 4년 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을 맡아 돌풍을 일으켰다. 은막에는 1950년 ‘더 맨’의 하반신 불수가 된 군인 역할로 데뷔했다. 그는 당시 실감나는 연기를 하려고 퇴역 군인의 병실에서 한 달 가까이 보내기도 했다.
1952년 ‘혁명아 사파타’로 칸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1954년 ‘워터프론트’의 부두노동자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72년 ‘대부’에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연기를 보여 두 번째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나, 미국원주민 정책에 항의하며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와일드 원’, ‘지옥의 묵시록’,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등 수많은 영화에서 강렬한 연기로 영화팬을 사로잡았다.
2004년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첫 재판 개최
2004년7월1일 재판을 받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30분의 재판 동안 피고인이 아닌 통치자 같았다고 했다. 후세인은 “전(前) 대통령이냐”는 질문에 “현직이다. 이는 국민의 뜻”이라고 강변했고, 변호인을 구해줄 수 있다는 판사 발언에는 “미국은 내가 스위스 은행에 수백만달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라고 농담했다. 재판 뒤 호송하려는 교도관들에겐 “천천히 하쇼, 나는 늙은이오”라고 말했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첫 재판을 TV를 통해 지켜본 이라크인들은 분노와 동정 등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후세인이 1988년 5000명의 쿠르드족을 학살한 북부 할라브자의 주민들은 한목소리로 ‘복수’를 부르짖었다. 후세인의 사촌 알리가 지시한 공격으로 자녀 6명을 잃었다는 사람은 “희생자들 앞에서 재판하라”고 주장했다.
후세인의 지지세력인 수니파 국민들은 “후세인은 이라크를 해치려는 사람들만 공격했다”고 항변하며 동정했다. 그의 고향인 티크리트의 한 식당 종업원은 TV를 보고 눈시울을 붉히며 “후세인이 저런 꼴을 당하는 걸 보느니 죽는 게 나았다”고 말했다. 수니파가 다수 거주하는 라마디 주민도 “최소한 후세인 시절엔 안전했다”며 “사담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고 비판했다.
후세인 재판은 아랍권 전체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청계 고가 철거 시작
2003년 7월 1일, 1976년 완공돼 서울 근대화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던 청계고가도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늘에는 ‘경축 청계천 복원공사’라는 애드벌룬이 떴고, 청계고가도로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는 시민들이 오후부터 몰려들었다.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시민들도 많았다. 기공식 행사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은 “회색빛 콘크리트가 상징하는 반생명의 그늘을 과감히 걷어내고 서울을 살아 숨쉬는 도시로, 보다 안락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쾌적한 삶의 쉼터로 만들자”고 말했다.
서울시는 태평로에서 신답철교 간 5.8km 구간을 3개 공구로 나눠 오는 2005년 9월까지 청계고가와 삼일고가, 청계천 복개도로 구조물을 철거하고 청계천을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한편, 청계고가도로가 폐쇄된 첫날인 이날 서울시내 주요도로는 당초 예상을 깨고 일부 병목구간을 제외하고는 큰 혼잡은 없었다. 그러나 출근시간대에는 서울 강동지역과 동·북부 지역 차량들이 몰리는 도로에서 극심한 정체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시민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했기 때문인지 시내 대부분의 도로가 평소와 비슷한 교통흐름을 보였다.
2002년 김병현 선수, 미국 진출 4년 만에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올스타 첫 선발
김병현은 1일 발표된 2002 메이저리그 올스타 명단에 내셔널리그팀 투수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지난 99년 메이저리그 데뷔후 4년만에 첫 올스타 입성이자, 한국인으로는 지난해 박찬호(당시 LA 다저스)가 내셔널리그 올스타로 뽑힌데 이어 두번째. 김병현은 팬투표로 뽑는 포지션별 야수 베스트 8명 외에 내셔널리그 올스타팀 사령탑인 애리조나 봅 브렌리 감독이 직접 선정하는 투수 명단에 들어 영광을 안았다.
이로써 김병현은 오는 10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밀러파크에서 벌어지는 제73회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서 내로라하는 메이저리그의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김병현의 올스타 입성은 사실 전반기 내내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그러나 올스타 발표 직전인 지난달 26, 28일 휴스턴전에서 끝내기 만루홈런 포함 홈런 3방을 맞으며 7실점 하는 바람에 막판에는 당선 여부가 안개속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선발권자인 봅 브렌리 감독은 “BK의 올스타 자격은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휴스턴에서는 부진했지만 그건 극히 일부분이고, 전반기의 나머지 투구는 나무랄데가 없지 않았느냐”고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
2001년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씨 타계
오 변호사는 1950년대 수많은 간첩·대공 사건을 수사해 `반공 검사` `사상 검사`로 유명했으며, 그후 반공연맹 이사 등 사회활동을 벌이며 반공 이념을 펼치는 외길을 걸어왔다. 오 변호사는 1917년 평남 안주에서 출생해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46년 서울지검 검사로 임관했다. 검사 시절 김삼룡·이주하 사건 등 수많은 간첩·대공사건을 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활동상은 1960~70년대 TV, 라디오, 소설 등의 단골메뉴였다. 이승만 정부 시절 야당탄압에 맞서 집권층과 맞싸우다 수감된 뒤 이 전 대통령이 모함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오 검사 내가 잘못했소"라고 사과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4·19혁명 직후 국회에서 `오제도 검사 파면 동의안`이 상정됐다가 부결되자 검찰을 떠났다. 5·16 쿠데타 이후에는 검찰총장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 반혁명 1호로 수감되기도 했다. 유신과 5공시절 국회의원으로 잠시 정치권에 몸담기도 했다. 1997년 `불순세력` 발언으로 법정에 선 박홍 전 서강대 총장 등 보수우익 인사들에 대한 활발한 변론 활동을 폈다. 1998년에는 망명한 전 북한노동당 비서 황장엽씨와 의형제를 맺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장, 한국반공연맹이사, 북한탈출동포돕기운동본부 회장, 무궁화회 회장, 월간 `사상 21세기` 회장을 지냈다.
2000년 직장의료보험-지역의료보험 통합
1999년 전교조 합법화 10년 만에 비합법 노조 마감, 14년만인 2013.9.24 다시 비합법화
1999년 제1회 코리아 인터넷 서바이벌 게임
100시간 동안 외부와 격리된 채 인터넷을 통해 주문한 생활용품만으로 살아가면서 일상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제1회 코리아 인터넷 서바이벌 게임’이 1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역삼동 삼성애니텔(오피스텔)에서 시작됐다.
외국어대 박성래(60) 교수, 쎈서테크 김석완(51) 사장, 신한은행 황정국(35) 대리, 주부 박정연(27)씨, 광운대 대학원생 윤소라(25)씨, 조선일보 황순현(32) 기자 등 6명의 참가자는 이날 오전 8시 30분 행사장에 모여 간단한 건강진단을 마친 뒤 수저 1벌과 가운 1벌, 생수 2통, 두루마리 화장지 2개만을 지급받은 채 인터넷 서바이벌 게임에 들어갔다. 참가자들은 행사기간에 의-식생활을 해결하면서 ‘호적등본 신청해 행사장으로 배달 받기’, ‘미국 대학의 과학사 커리큘럼 조사하기’, ‘개인 홈페이지를 가진 여성 네티즌 20명에게 이메일 보내 답장받기’ 등 각각 10개의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또 이날 행사장 옆에 마련된 인터넷 서바이벌 체험장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로커스 김형순 사장, 탤런트 추상미씨, 프로야구선수 이승엽씨 등 유명인사도 찾아와 1∼2시간 동안 인터넷 서바이벌 게임 참가자와 똑같은 상황에서 각기 인터넷 활용수준에 맞는 과제를 풀면서 인터넷을 체험하고 돌아갔다.
1997년 미국 영화배우 로버트 미첨 사망
1950∼60년대의 대표적 미국배우 중 하나로 1백80cm의 키에 다부진 체격, 무뚝뚝한 이미지로 `남성적`이라는 평을 받았던 미첨은 `돌아오지 않는 강` 외에도 `라이언의 딸` `십자포화` `엘도라도` `케이프 피어`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1945년 `GI 조 이야기`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로 딱 한번 올랐을 뿐, 끝내 아카데미상은 수상하지 못했다.
미첨은 1917년 8월 미국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에서 출생, 2살 때 열차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영국군 소령이었던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4살 때 가출, 폭력조직 가담혐의로 6개월 간 복역하기도 했으며 1937년 캘리포니아에서 아마추어 연극배우로 처음 무대에 서기전까지 광부, 선원, 권투선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1942년 `레더 버너즈`로 영화에 입문해, 1945년 `GI 조 이야기`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미첨의 트레이드 마크인 졸리는 듯한 눈은 만성적인 불면증과 무명 권투선수 시절 입은 상처로 눈이 나빴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7년 홍콩 주권, 중국에 귀속
1백50년 만에 걸친 영국의 홍콩 통치가 막을 내렸다. 강택민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는 1997년 7월 1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38분간 거행된 주권 교체식을 통해 아편전쟁으로 빼앗긴 홍콩의 주권을 되찾았다고 연설했다.
중국의 홍콩 통일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흡수했다는 역사성과 향후 대만을 포함한 대중화경제권의 본격 가동이라는 점에서 시선을 모았다. 영국의 아시아 경영도 이로써 마감됐다.
본격적인 경축행사는 이날 저녁 시작됐다. 오후 6시30분 홍콩 콜로세움에서는 해방군 밴드의 중국 국가연주속에 오성홍기가 게양됐다. 특히 한국의 소프라노 신영옥, 첼리스트 장한나양 등이 중국계 미국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함께 출연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1996년 실업급여제도 실시
1996년 7월 1일부터 실업급여제도가 실시됐다. 30인 이상 종업원을 가진 사업장의 근로자는 1995년 7월부터 월급에서 고용보험료가 매달 1만원 안팎씩 원천징수되었는데 이를 12개월 이상 낸 사람이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무조건 회사를 떠났다고해서 다 받는 것은 아니다. 본인 잘못으로 해고됐거나 정당한 사유없이 스스로 떠나면 해당되지 않는다. 예들 들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아 쫓겨났거나 고의적인 기물 파손, 공금유용·착복·횡령, 허위서류 작성, 기밀누설 등 회사에 손해를 끼쳐 해고되면 받지 못한다.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경우는 건강이나 가정사정, 근로·고용조건상 불가피할 때다. 채용 당시 약속한 보수 등 근로조건이 실제와 다를 때, 임금체불, 가정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먼 직장으로 전근받아 그만두는 경우 등이 해당된다. 신기술 등이 도입돼 적응하기 어렵거나 체력이나 신체기능이 떨어져도 인정된다.
실업급여는 기본급여와 취직촉진수당으로 나뉘는데 기본급여는 짧으면 1개월 길게는 7개월까지 받는데 이는 나이와 보험료 납부기간에 따라 다르다. 취업촉진수당은 재취직을 위한 활동비인 것이다.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실직 즉시 가까운 지방노동관서의 직업안정과에 가서 실직을 신고하고 구직신청을 한 뒤 고용보험과로 가서 실업급여 신청서를 써내야 한다. 2주일이 지나도 직장을 얻지 못했으면 다시 고용보험과로 가서 실업인정일을 지정받는다. 그 뒤 2주마다 열심히 구직활동을 벌였지만 재취업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면 실업인정일로부터 2주 단위로 개인통장으로 실업급여가 온라인 지급된다.
1996년 KBS, 위성시험방송 실시
1996년 7월 1일 오전 10시 KBS가 위성시험방송의 첫 전파를 발사, 우리나라도 위성방송 시대에 진입했다. 케이블TV에 이은 또 하나의 뉴미디어가 실용화되고, 본격 디지털시대를 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벤트였다.
KBS는 이날부터 인도네시아 상공에 떠있는 무궁화위성을 이용, 위성채널 2개로 시청자들에게 위성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위성방송 개시일인 7월 1일 오후 2시10분엔 야구선수 박찬호가 소속된 LA 다저스와 콜로라도 록키스의 경기를 1채널로 위성중계했다. 시청자가 KBS 위성방송으로 직접 느끼는 가장 큰 차이는 LD수준의 고화질과 CD수준의 고음질, 16:9의 광폭화면이 디지털 위성방송의 3대 특징이었다. KBS 위성방송은 기존 홍콩 스타TV나 일본 NHK 위성방송과는 달리 첨단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데 큰 차이가 있다. 디지털 위성방송은 미국 디렉TV, 일본 퍼펙트TV에 이어 KBS가 세계 세번째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통신위성이 아닌 방송위성을 이용한 디지털 위성방송으로는 세계 최초였다.
1995년 로만 헤르초크 제7대 독일연방 대통령에 취임
1995년 부동산실명제 실시
1995년 34년만의 완전한 지방자치 시작
1992년 한국-우크라이나 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
1991년 수입상품 원산지 표시제 도입
1991년 `초원의 집`의 배우 마이클 랜든 사망
뉴욕 태생으로 본명이 유진 오로위츠인 랜든은 1957년 영화계에 데뷔한 뒤 TV 조역 등을 주로 맡아왔다. 그러다 1960년대 87개국에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TV장기연속극 `보난자`에서 `리틀 조`역을 맡으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는 1973년 마지막회가 나가기까지 14년 간 계속됐으며, 미국에서는 7년 동안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그는 이 드라마에 출연하던 중 로라 잉걸스 원작의 `초원의 집`을 극화, 대부분을 직접 감독하고 자신이 주인공을 맡아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이미지를 굳혔다.
또 죽은 사람이 천사로 환생,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줄거리의 `천사의 미소`를 집필, 제작하고 출연했다. 그는 보난자 등 시리즈물에 출연하면서 "대스타가 되겠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1주일에 120알의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평양에서 개막(~8일)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1989년 7월 1일 개막됐다. `반제연대성및 평화와 친선`이라는 구호아래 평양에서 개최된 이 행사에는 전대협 대표 임수경을 비롯,179개국 2만여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남한의 88서울올림픽 개최에 대응, 북한이 유치한 평양축전은 1947년 2월 체코의 프라하에서 첫 대회가 열린 후 동양에서는 최초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행사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5만명의 군중을 수용한 `5월 1일 경기장`의 개막식에 이어 2일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평양축전행사는 정치,문화예술,체육행사 등으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이 가운데 정치행사 프로그램이 83%, 문화행사가 17%정도를 차지했다
1987년 전국 전화 완전자동화
1983년 경남도청 창원 이전
1983년 금융실명거래제 실시
1983년 국제전화 자동화
1983년 중국, 모택동 격하. 등소평 추앙운동
1981년 전두환대통령 아세안 방문에서 이광요 싱가폴수상과 회담
1981년 대구,인천시 직할시로 승격 (10개시 광명, 정주, 나원, 송탄, 태백, 영천, 김해, 동두천, 금성, 서귀포 신설)
1980년 김포국제공항관리공단 발족
1979년 한-미 공동선언(박정희-카터) 발표.
남북한-미국 3자회담 제안/남북 당국간회담 희망/한반도 평화통일은 남북대화로/북한 주요동맹국들이 한국과 관계 확대하면 미국은 북한에 상응한 조치/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79년 소니 워크맨 등장
미일 경제역전이 고정된 1970년대, 일본 수출품의 특징이 집약된 제품이 소니의 워크맨이었다. 단일회사 품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가전제품이라는 워크맨은 소니 창립자 이부카의 “미국 출장가는 비행기속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는 한마디로 태어났다.
이부카는 귀국 뒤 제품에 만족했고, 시장에 팔 물건으로 고치기 시작했다. 개발기간은 불과 4개월, 가격은 창립 33주년을 기념해 3만3000엔으로 책정됐다. 이름은 당시 유행하던 수퍼맨과,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란 상품컨셉을 감안해 만들어졌다.“워크맨은 영어가 아니다”란 비판이 나와 수출 초기 미국 ‘사운드 어바우트’, 영국 ‘스토어웨이’(=밀항자), 스웨덴 ‘프리 스타일’ 등 3가지 이름으로 팔렸다. 그러나 이미 일본을 방문했던 여행객들이 대거 구매한 뒤여서 이내 워크맨이란 이름을 회복한다.
그 이름은 판매 2년 만인 1981년 프랑스 사전 ‘푸치 라 루스’에, 1986년엔 영국의 대표적 사전 ‘옥스포드 잉글리시 딕셔너리’에 실렸다. 워크맨 1호기 ‘TPS-L2’가 나온 뒤 테이프, CD, MD용 등 600여 기종이 선보였고, 1999년 11월 현재 2억대 가까이 팔렸다.
1977년 부가가치세제 실시
부가가치세가 1977년 7월 1일부터 전국적으로 시행에 들어갔다. 이는 전해 12월 22일의 부가세법 공포에 따른 것이었다. 부가세 도입은 복잡한 간접세 체계를 간소화하며 근거과세를 원칙으로 하고 수출상품에 대한 간접세의 완전 면세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한편 간접세의 부담을 덜어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정부는 부가세 제도 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영수증 주고받기를 생활화 하기로 하고 물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7백95가지 공산품과 56종의 서비스 요금의 구 간접세 부담률을 조사, 적정원가와 적정마진 사정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관련사업자들의 세금계산서 작성방법과 확정신고요령 등을 계몽했다. 또 실행세율을 기본세율 13%보다 3%포인트 낮게 조정했다.
1977년 미국상원 중성자탄 개발 허용
1977년 북한 2백 해리 경제수역 선포,
1977년 의료보험제도 실시
의료보험제가 1977년 7월 1일 국내에서 처음 실시됐다. 실시 첫 해인 1977년에는 상용 근로자 5백인 이상을 고용한 전국 5백2개 기업체와 20개 공업단지 등 모두 5백22개소의 근로자와 부양가족 3백50만명을 대상으로 했다.
의료보험조합은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1종 조합과 지역 주민 대상의 2종 조합으로 구분했으며 5백인 미만의 사업장도 근로자 3분의 2가 동의하고 보사부 장관의 인가를 받으면 조합을 설립할 수 있고 일반 지역 주민도 발기인 30인 이상의 서명을 얻어 5백인 이상이 가입하면 2종 조합을 설립할 수 있게 했다. 의료보험조합에 가입한 근로자(피보험자)들의 보험료는 월보수의 3~8% 범위내에서 조합정관에 따라 정하도록 하되 보험료의 절반을 피보험자가, 나머지 절반은 사용자가 부담토록 했다. 2종 조합은 보험가입자와 부양가족을 기준, 조합정관에 따라 일정액을 매달 내게 했다.
1976년 한국수출입은행 발족
1976년 방송윤리위원회 TV 광고방송에 대한 사전검열제 실시
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수립
1974년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 사망
1973년 제주도 한들굴서 신석기시대 동물 뼈와 무문토기 발견
1973년 전자 키보드 발명자 해먼드 사망
1970년 우편번호제 실시
1970년 300년 전 진주성도(촉석진도) 발견
1969년 신세계백화점, 국내 첫 백화점카드 발급
1968년 핵확산방지조약(NPT)에 62개국이 조인
핵보유국의 증가를 방지할 목적으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1968년 7월 1일 5대 강국을 비롯, 62개국이 조인했다.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핵보유국은 핵무기와 이와 관련된 것을 비핵국의 핵제조에 어떠한 원조도 할 수 없으며, 비핵국은 핵무기와 관련된 어떠한 것도 스스로 제조할 수 없고, 비핵국은 원자력 이용을 평화적 목적에 한정하고 원자력의 군사적 목적으로서의 전용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 원자력기구의 보장조치를 수락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1970년 3월 5일 국제적으로 발효됐으며 한국은 1975년 3월 19일 국회동의를 거쳐 1975년 4월 23일부터 발효됐다. 1999년 6월 현재 세계 187개국이 가입했다.
1967년 유럽공동체(EC) 결성
1967년 박정희 제6대 대통령 취임
1966년 프랑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서 탈퇴
1964년 경주 석굴암 복원공사 준공식
1963년 국산 기계식 교환기 개통
1962년 르완다-브룬디, 벨기에로부터 독립
1961년 한국전력 발족
1961년 가나-말리-기니 아프리카제국연합 결성
1961년 국제방송국(HLSA) 개국
1960년 소말리아, 영국-이탈리아로부터 독립
1960년 가나, 영국연방내 공화국으로 독립
1957년 유엔군 사령부,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
미국정부가 1957년 7월 1일자로 일본 동경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를 해체하고 극동군사령부와 함께 있던 유엔군사령부를 서울로 이전했다. 또한 유엔군사령관이 주한 미8군사령관을 겸임토록 했다.
유엔군사령부의 서울 이전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對韓 신 무기배치방침표명 (5.22)에 뒤이어 신형 F100제트기단 한국배치(6.27), 미 제1기갑사단 한국이동(8.1) 등으로 구체화된 극동미군사력의 전진배치 정책과 월남전 개입 움직임과 맥을 같이 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7월 28일 판문점 정전위원회에서 휴전협정 군사조항 폐기를 요구했고 유엔군측은 북한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휴전선 일대에 긴장이 고조됐다. 이날 서울 용산 미8군사령부 연병장에서 열린 유엔군사령부 서울이전 및 신임 사령관 취임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부통령 등 한국의 3부요인과 한·미 군수뇌부가 모두 참석했다.
1955년 미국 FOA를 ICA(국제협조처)로 개편
1955년 대천 해수욕장 첫 개장
1954년 일본 자위대 창설
1954년 7월 1일 일본 자위대가 창설됐다. 전쟁에서 패한 후 헌법에 의해 무장이 금지된 일본이 재무장을 하게 된 계기는 공교롭게도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일본 주둔 7개사단 병력의 대부분을 한국전선에 긴급 출동시키는 바람에 일본 전국이 치안공백 상태와 안보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되자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는 1950년 7월 요시다 당시 일본 총리에게 경찰력과 해상경비력의 강화를 지시했다. 이를 근거로 1950년 8월 24일 창설된 것이 `경찰 예비대`이고, 이는 오늘날의 자위대 모체가 됐다.
경찰예비대는 1952년 8월 보안청 산하 경비대(육군)와 보안대(해군)로 분리되면서 표면상 경찰조직에서 군대성격으로 발전했고, 1954년 7월 1일부터는 정식 군제로 바뀌면서 항공부대가 창설돼 비로소 육ㆍ해ㆍ공군을 갖춘 자위대가 됐다. 자위대는 정원이 7만5천명에서 11만명으로 불어나면서 사단조직에 해당하는 `관구대`, 야전군에 해당하는 `방면대`를 창설, 명실상부한 군대조직을 갖추게 됐다.
2년 후인 1956년 7월에는 일본 정부에 국방회의란 것이 설치돼 방위력을 계획적으로 증강하기 시작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국방의 기본방침` 제3항에는 `국력과 국정에 상응하는 자위에 필요한 한도 내에서 효율적인 방위력을 점진적으로 정비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어, 일본은 이를 근거로 1958년부터 3∼6년 단위의 중ㆍ단기 방위력 증강사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1953년 유럽 12개국, 유럽원자력연구회의(ENRO) 설립
1953년 서민호 의원 군사재판서 사형 언도 받음
1951년 콜롬보계획(동남아경제개발협력) 성립
1951년 한국전쟁 중 김일성-팽덕회 유엔 측의 휴전제의 동의
1950년 미국 지상군 처음 한국 도착
6ㆍ25가 발발하자 미국은 소련의 의도파악에 부심한다. 다행히 소련이 전면전을 위한 전초전을 벌이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자 참전을 결정하고 도쿄에 주둔하고 있는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를 전황파악차 한국으로 파견한다.
6월29일 수원에서 한ㆍ미 지휘관들과 회의를 주재하던 맥아더는 그를 호위해 온 F-51기와 북한군의 야크-9기가 자신의 눈 앞에서 공중전을 벌일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깨닫고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낸다.
6월30일 트루먼이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자 맥아더는 먼저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제24사단 21연대를 파견한다. 대대장의 이름을 따 스미스부대로 불린 제21연대 제1대대가 군용기를 이용, 부산에 도착한 것은 7월1일 오전8시45분이었다. 최초의 미 지상군 부대였고 본격적인 참전의 시작이었다.
대전을 거쳐 북상한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처음 맞딱드린 것은 7월5일 오산 부근 죽미령에서였다. 하지만 첫 전투는 북한군을 과소평가한 탓에 완벽한 패배를 맛봐야 했다. 540여명의 부대원 중 150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했다. 3년의 전쟁기간 중 3만3870여명이나 되는 미국의 젊은이가 먼 이국 땅에서 이렇게 죽어갔다.
1950년 캐나다함대 한국출동
1948년 국회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
7월 1일 제22차 제헌국회에서 재석의원 188명 중 163명이 찬성한 대한민국(大韓民國)이 국호로 결정되었다.
해방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각 정치세력들은 자기 세력의 이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국호 결정 과정에서도 각 정치세력들은 저마다 국호를 내걸었다.
해공 신익희는 ‘한국’, 유진오는 ‘조선민주공화국’, 김규식·여운형은 ‘고려공화국’을 주장했다. 제헌국회에 앞서 열린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표결 끝에 대한민국이 17표, 고려공화국이 7표, 조선공화국이 2표, 한국이 1표를 얻었다.
국호 '대한민국'은 1919년 상해에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어디에서 왔을까?
일제강점기에 독립지사들이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명명한데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것은 임시정부 교통총장을 지낸 신석우 선생이 처음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해에 이동녕,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 29명이 모여 망명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국회)를 구성하고, 이동녕 의장 주재로 열린 첫 회의에서 국호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일본 유학생 출신인 26살의 신석우가 먼저 "대한(大韓)이 어떠냐"고 발의하자, 이에 대해 여운형이 "대한은 조선왕조 말에 잠시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자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 이름이므로 반드시 되찾아야한다."고 반박했다.
더불어 공화제에 해당하는 '민국(民國)'을 덧붙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의정원 의원 다수가 신석우의 제안에 공감하면서 임시정부의 국호는 비로소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제헌국회가 제정하여 7월 17일 공포된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영어로는 The Republic of Korea, 프랑스어로는 Republique de Coree, 독일어로는 die Republik Korea 라고 표기합니다.
1946년 미국, 비키니에서 최초의 공개 핵실험
1946년 7월 1일 미국이 남태평양 마샬군도 비키니섬에서 행해진 핵실험을 기자들에게 처음 공개했다.
`크로스 로드`작전으로 명명된 이 실험은 제1회 유엔원자력위원회 회의에서 미국이 제안한 원자력의 국제관리안을 소련이 반대해 채택하지 못하게 된 직후라는 점에서 소련에 대한 미국의 시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B29로부터 투하된 원자폭탄은 아름답던 바다를 한순간에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이보다 앞서 동서 35km, 남북 28km의 환초에 미국의 항공모함, 일본과 독일의 군함 75척을 모아놓고 이 무기들을 핵실험의 표적으로 삼게 했다. 이중 17척이 침몰,대파됐고 나머지도 모두 일부씩 파괴됐다. 원폭이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실험용 동물들도 군함에 태워놓은 상태였다.
1946년 인도 봄베이서 힌두-회교도간 대충돌 폭동화
1944년 미국 브레튼우즈서 연합국 44개국이 참가 UN국제통화금융회의 개막
1940년 드골장군, 영국서 자유프랑스정부 수립
1933년 서울~동경간 직통전화 개설(7.15부터 전화통화 시작)
1926년 장개석, 군벌타도를 위한 북벌 개시
1925년 광동에 국민정부 성립
1921년 중국 공산당 결성
중국 공산당 제1기 전국대표대회가 1921년 7월 1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여자기숙사학교에서 열려 중국 공산당이 창당됐다. 당원이라고 해야 중국 전역에서 57명 뿐이었고, 창당대회도 동필무, 모택동, 장국도, 주불해, 진담추 등 12명 뿐이었다. 그나마 대회 도중 경찰의 습격을 받아 회의장소를 옮겨 작은 배 위에서 창당선언을 끝내야 했다.
대회에서는 진촉수를 당서기로, 장국도와 이달을 중앙위원으로, 주불해와 이한준, 유인정을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했다. 창당될 때만해도 오늘과 같은 거대한 집권당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당 이후 지금까지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파란만장의 길을 걸어왔다. 10만여명의 공산당원들이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쫒겨 겨우 8천여명만 살아남은 대장정, 교조적인 사회주의 정책 추진으로 3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민공사와 대약진운동,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 1980년대의 천안문사태 등등 실로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중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
1921년 보츠아나의 초대 대통령(1966-80) 카마 출생
1912년 순수 서정시인 백석 출생
순수 서정시인 백석이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백기행으로 오산학교를 다녔고 1930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후 돌아와 1934년에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1936년 33편의 시가 실린 시집 `사슴`을 자비로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면서 순수 서정시인으로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한정판인 탓에 당시 문학지망생들이 시집을 필사하는 것이 유행일 정도로 그의 시는 인기가 높았다. 이 시집으로 그는 1930년대 후반기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으로 단숨에 한국 문학사에 떠올랐다.
그의 시는 향토적이고 서정적이었지만 모더니즘풍의 세련된 언어감각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주책없는 향토주의`와는 구별됐다. 함흥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다 만주로 가 방랑생활을 하면서 어둡고 긴 식민지 역사의 터널을 빠져 나오고자 했다. 일제시대의 주눅들고 피폐해진 삶을 남도와 만주 등을 유랑하면서 이겨내고자 했고 그것을 빛나는 시적 감수성으로 포착해 낼 수 있었다.
광복후에는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가 북한 체제에 남게됐다. 북한에서는 그의 시가 순수 서정적인 탓에 시인으로서의 삶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이념적 성향이 희석될 수 있는 번역과 동화시 창작에 주력했다. 결국 북한의 문예정책과 상충될 수 밖에 없었던 백석은 1960년대 초 숙청당했다. 1963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1911년 제2차 모로코사건 발발
1911년 비타민 발견
1909년 영국, 석탄갱부의 8시간 노동제 허락
1906년 경인-경부철도, 일제통감부의 관리하에 들어감
1905년 고고학자 도유호 출생
1905년 독일-프랑스 협정 성립 (모로코의 영토보전 협약)
1905년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한국중앙은행으로 발족
1902년 군악교사 에케르트 한국어 찬송가 출판
1901년 노벨상 창설 (12월 10일 첫 시상)
스웨덴의 발명자인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유언에 따라 창설된 권위있는 국제적인 상이다. 노벨이 기부한 3100만 크로나를 기금으로 노벨재단을 설립하고 그 이자로 상금을 충당한다.
1901년부터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 문학, 평화의 다섯부문에 걸쳐 수여됐으며 1969년부터 경제학상이 새로 추가되었다. 물리, 화학, 경제는 스웨덴학술원, 의학은 스웨덴 칼로린스카 연구소, 문학은 스웨덴 예술원에서 선정하나 평화상은 노르웨이의 노벨위원회가 선정한다. 세계대전으로 1918년, 1939~43년 등 여섯차례 시상을 하지 못했다.
1898(조선 고종 35) 독립신문(76호) 일간으로 바꿈
1896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저술한 미국의 작가·스토 사망
1890년 영국 독일 협약 (동서아프리카 접경 결정. 독일 에리고랜드 획득)
1883년 인천항 개항
1876년 러시아의 작가,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사망
1875년 국제우편조약 발표 (만국우편연합 기념일로)
1871년 이탈리아, 로마를 수도로 정함
1867년 캐나다연방 성립
1863년 게티즈버그 전투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1861년부터 계속된 남북전쟁에서 불패를 자랑했지만 언제나 조급하고 불안했다. 인구와 경제력 모두 북군에 뒤져 시간이 지날수록 남군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863년 6월 3일, 리 장군은 남북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결정적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북군의 근거지인 펜실베이니아주의 주도 해리스버그를 향해 북상했다.
7월 1일, 남군 7만5000명과 북군 8만3000명이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맞붙었다. 3일간의 대혈투 끝에 승리는 북군에게 돌아갔지만, 5만1000여명이나 되는 사상자가 나왔다. 지난 4년간의 200여회 전투에서 61만명의 사상자를 낸 것과 비교해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었는가를 짐작케 해주는 숫자였다.
이 전투는 짧게는 북군의 승리였지만 길게는 분열을 막아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진입시킨 발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개월 뒤인 11월 19일, 이곳의 전몰자 국립묘지를 방문한 링컨은 저 유명한 연설로 미국이 지향해야 할 참가치를 역설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땅에서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1860년 미국 발명가 구드이어 (고무 실용화) 사망
1858년 찰스 다윈 ‘자연도태설’ 발표
1798년 나폴레옹,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점령
1393년 조선, 일식 발생
673년 신라, 김유신(金庾信) 사망
273년 고구려, 일식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