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년, 개벽의 비망록
-원불교 서울 교화・만덕산 초선(初禪)・중앙총부 건설 100주년을 맞아-
갑(甲)은 하늘의 첫 번째를 뜻하고, 자(子)는 땅의 첫 번째를 가리킨다. 60년마다 돌아오는 새 시대를 상징한다. 그해는 갑자년이었다. 새로운 개벽이 시작하는 해였다. 묵은 세상의 어둠이 사방을 짙게 물들였고 새 세상의 새벽이 어슴푸레 밝아 왔다.
1916년 전남 영광의 외진 갯벌 마을에 홀연히 거듭난 사람이 나왔다. 소태산 박중빈이 바로 그였다. 망해 버린 나라의 지쳐 누운 사람들을 일으켜 수만 년 해묵은 갯벌을 막아 내더니 제자 아홉 명을 뽑아 하늘의 뜻을 땅 위에 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시야는 이미 변산, 익산, 전주, 서울을 쉴새 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1923년 8월이 되었다. 알뜰한 제자 서중안・정세월 부부가 변산 봉래정사를 찾아 소태산에게 하산을 간청했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넓은 곳에서 많은 사람을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스승은 감당할 수 있겠느냐 물었다. 뜻이 굳은 부부는 정성과 물질은 비록 부족하나 그리하겠노라 다짐했다.
새 갑자가 시작되는 1924년은 그가 깨달음을 이룬 지 9년이 되는 해였다. 자신의 경륜이 담긴 교리와 제도의 구상을 마친 소태산은 변산을 뒤로한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마음이 급했다. 다시 개벽으로 죽어가는 세상에 숨을 불어 넣어야 했다. 무수한 사람을 만나고 새 인연이 쌓였다. 몸을 일으켜야 할 시기가 점점 다가왔다.
3월 30일, 소태산과 일행은 이리역에서 경성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34세의 패기만만한 젊은 각자(覺者)는 거칠 것이 없었고, 달리는 증기기관차의 경적은 새 하늘이 열리는 나팔소리였다. 세간과 도량을 둘로 보지 않은 새 불법(佛法)으로 시대를 구해내겠다는 소태산의 의지가 여명의 조선반도를 서서히 빛으로 휘감기 시작했다.
경성역에 당도한 소태산에게 방죽을 파니 물고기 모이듯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당시 전북과 서울 지역의 사람들을 수백 명씩 스승에게 귀의시킨 최도화가 소태산이 법문할 때면 법열(法悅)에 취해 백발을 날리며 춤을 추었다는 박사시화를 데리고 왔고, 박사시화는 동생인 박공명선과 머리를 맞대어 지금은 현대 사옥이 있는 계동에 사는 조카딸 성성원의 집으로 생불(生佛)인 스승을 모시고 법문을 들었다. 이윽고 신실한 제자들이 사대문 한복판 당주동에 소태산의 거처를 마련했다. 한 달 겨우 남짓 동안 수많은 인연이 경성 땅에 당도한 소태산 곁에 모였다.
더는 머물 수 없어 5월 2일 아침 기차로 이리에 내려온 소태산은 다음날 전주까지 한달음으로 뛰어넘었다. 대각(大覺) 이후 가슴 속에 품었던 회상(會上) 창립의 역사를 현실로 엮어내야 했다. 5월 3일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옛 이름) 창립 발기인 모임이 열렸다. 창립총회 장소는 이리 부근 보광사라는 작은 절로 정했다.
6월 1일 창립총회를 열고 소태산을 총재, 서중안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회칙을 확정 지었고 재정 마련을 위해 회비를 모으기로 했다. 그리고 가을까지 자신들의 뜻을 펼칠 기지(基址)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창립총회 후 조합을 만들고 안정적으로 조직을 이끌어갈 제도를 정비했다. 마치 이렇게 일하기로 전생부터 약속이나 한 듯 착착 이루어졌다.
총회를 마친 6월 1일, 소태산 대종사는 급히 전북 진안 만덕산으로 들어간다. 김씨 문중 산제당(山祭堂)인 만덕암에서 자신이 구상한 정신개벽의 구체적인 수행 체계를 실제로 적용해야 했다. 이를 위해 열두 명의 제자가 모였다. 자신의 수제자로 법통을 이은 정산 송규도 그리고 그다음으로 교단을 이끈 대산 김대거도 11살의 소년으로 원불교 최초의 대중 선(禪) 수행에 함께했다.
9월 29일이 되었다. 갈대 속 숨겨진 마을을 의미하는 ‘솜리’라 불리던 이리(裡里) 변두리 신룡리에 지금의 원불교 중앙총부가 세워질 땅이 매입되고 사람들이 모여 공부할 회관 건설이 시작됐다. 날이 쌀쌀해진 11월 20일경 소태산은 다시 상경했다. 꼭 만날 사람이 있었다. 후일 자신의 법문을 가장 많이 기록해 법을 담는 주머니라는 의미의 ‘법낭(法囊)’이라 불렀다는 이공주를 제자로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12월이 되었다. 이번 갑자(甲子)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제자들이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이리 신룡리에 목조 초가 회관 두 동을 세웠다. 하도 도둑이 끓어 ‘도치(盜峙)’재라 불렸던 곳에 도가 우뚝 솟았다는 의미의 ‘도치원(道峙院)’이라는 건물 이름을 붙였다. 당시 불법연구회 회원은 남자 60여 명, 여자 70여 명으로 총 백수 십여 명이었다. 행상을 나서야 하는 힘든 환경에서도 한결같이 마음공부에 정진했다. 일제강점기의 고된 시절이었지만 조선은 곧 세계 도덕의 부모국이 되고 정신의 지도국이 될 것이라며 소태산은 제자들 다독였다.
불과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익산, 만덕산, 서울에서 생명을 건지고 세상을 고치겠다(濟生醫世)는 서원(誓願)의 험한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의 가르침은 원불교라는 한 종교의 울을 넘어, 인간이 지녀야 할 깊은 통찰과 결단, 평화와 실천의 메시지를 지금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다시 몇 갑자가 지나도 어김없이 전해지는 등불로 빛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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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24년은 내가 몸 담고 있는 원불교의 특별한 해입니다. '종교와 평화'의 요청으로 작은 소개 글을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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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성교무님 페이스북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