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일 오늘의 역사
2021년 러시아 해킹조직으로 추정되는 '레빌'(ReVil) 사상최대의 랜섬웨어 공격,
레빌은 미국 IT 보안관리 서비스 업체 '카세야'에 다크웹 등을 통해 몸값으로 5천만~7천만$ 요구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이사회 한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만장일치 지위 변경
2021년 ‘채나눔’의 건축가 이일훈 세상 떠남(67세)
2016년 홀로코스트 생존자·노벨평화상(1986) 수상
2016년 루마니아 출신 유대계 작가 엘리 위젤 세상 떠남(87세)
2012년 '민주화 운동 단골 변호사' 장기욱 전 의원 별세
충남 서산 출신인 장 전 의원은 경기고 재학 시절 '천재'로 유명했다. 고교를 자퇴하고 서울법대에 조기 입학, 18세의 나이로 사법·행정고시에 동시 합격했다. 서울·부산·대전지검 검사와 민추협 상임운영위원, 신민당 총재 법률담당특별보좌역 등을 거쳐 정계에 입문했다. 재야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변호 활동을 벌인 뒤 12대 총선에 출마, 서산·당진에서 민한당 후보로 당선됐고, 14대 총선에선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활동했다. 의원 시절 5·18 희생자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한 법안 작업을 추진하는 등 야당의 대표 법률가로 공인받았다. 정계를 떠난 뒤에도 12· 12 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법률 지원 활동을 벌이는 등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장 전 의원은 작년 초부터 심혈관 질환으로 서울대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해왔다.
2009년 중국 경극 배우 스페이푸 사망
1964년 당시 스무 살이던 프랑스 청년 부리스코는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 경리 직원으로 취직했다. 이어 그 해 크리스마스 파티 때 가냘픈 몸매에 여성적 느낌을 주는 중국인 남자 스를 알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스는 자신이 여자라는 충격적인 거짓 고백을 한다. 남자아이가 태어나길 바랐던 부모 때문에 남장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스를 좋아하고 있었던 부리스코는 곧 사랑에 빠진다. 둘의 관계를 알게 된 중국 당국은 스를 간첩으로 포섭한다. 부리스코는 스를 통해서 500여건의 기밀문서를 중국측에 넘겨주게 된다. 스는 1982년 파리로 가서 부리스코와 함께 살다가 이듬해 프랑스 당국에 간첩혐의로 체포됐다. 스는 조사 과정에서 ‘진짜 남자’임이 밝혀졌다. 이 소식을 들은 부리스코는 감옥에서 면도날을 목에 그어 자살을 기도했다. 부리스코는 스와의 성적 접촉이 항상 어둠 속에서 재빨리 일어났으며, 그 범위도 제한적이었다고 조사관에게 실토했다. 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가 여성이라는 환상에 빠졌다는 것이다.
부리스코와 스는 1986년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당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던 프랑수아 미테랑(Mitterrand) 대통령에 의해 다음해 사면됐다. 이후 둘은 파리에 거주해왔다.
2008년 잉그리드 베탕쿠르 전 콜롬비아 대선후보 FARC의 인질에서 6년만에 석방
2006년 우리나라 첫 프로바둑기사 조남철 9단 세상 떠남(84세)
2005년 아프리카 빈곤 문제 해결 촉구하는 ‘라이브 8’ 공연, 세계 10개 도시에서 개최
2005년7월6일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되는 G8(선진 8개국) 정상회담을 앞두고, 7월2일 런던·에든버러·필라델피아·파리·로마·베를린·배리·도쿄·모스크바·요하네스버그 등 세계 10개 도시에서 아프리카 빈곤 퇴치를 촉구하는 콘서트 ‘라이브 8’가 열렸다.
필라델피아 콘서트에는 제이 Z, 본 조비, 스티비 원더 등의 팝스타가 참석했고 약 100만명이 모였다
1985년 아프리카의 빈곤 퇴치를 호소하며 전 세계 팝스타들이‘위 아 더 월드’를 불렀던 ‘라이브 에이드(LiveAid)’ 콘서트가 20년 만에 ‘라이브 에이트(8)’로 재연된 것이다.
2001년 소설가 이문열, 시론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 조선일보에 기고
소설가 이문열씨가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한 시론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를 2001년 7월 2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네티즌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의견을 개진해 온 이씨가 인신공격 등 언어폭력에 견디다 못해 응답을 중단하자 `개인의 언론자유`에 대한 또 다른 침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씨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수천여개의 글에 이씨도 처음에는 13번이나 댓글을 붙이며 젊은층과 대화에 참여했다.
네티즌들의 글은 인신공격이 다수였다. 비록 인터넷 공간이고 대부분이 젊은층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 의식의 양분화를 확인하는 것 같아 고통스럽다"고 토로했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도 7월 5일 취중에 "이문열 같이 가당치 않은 놈이 ×같은 조선일보에 글을 써서… 뭐 대한민국의 4분의 1이 조선일보를 봐?`"라는 등 거친 욕설을 마구 퍼부어 비난을 샀다.
2000년 전국 144개 시-군지역번호를 16개 광역시-도 단위로 통합(광역화)
2000년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에 당선, 71년 만에 정권교체
제1야당인 국민행동당(PAN)의 비센테 후보가 전체 유효투표수의 43.4를 얻어 35.2%를 얻은 제도혁명당(PRI)의 프란시스코 라바스티다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며 71년만에 정권교체가 되었다.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에 따른 부패의 만연과 하버드대 출신으로 코카콜라 멕시코 지사장을 지낸 폭스 후보의 경제관리 능력에 대한 중산층의 신뢰가 폭스 후보의 승리로 연결됐다고 분석했다. 선거혁명으로 멕시코 정치사에 새장을 연 비센테 폭스(Vicent Fox) 후보는 1970년대 코카콜라의 멕시코-중미 지역 경영책임자로 일하면서 경영인 수업을 쌓은 뒤, 1980년 정계에 투신했다.
이어 1997년 대선출마를 선언하고 ‘폭스의 친구들(Friends of Fox)’이라는 전국적인 정치조직을 결성하면서 대권가도의 기틀을 닦았다. 키가 1m95가 넘는 거구와 함께 독특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대중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출생한 뒤 성장기는 과나후아토주의 대형농장에서 소와 타조들을 기르며 유복하게 보냈다. 아버지는 대농장주였고 어머니는 활달한 성격의 스페인계였다.
1999년 지하철 8호선 완전개통
지하철 8호선이 그동안 미개통구간이었던 잠실-암사구간(4.6km)을 포함 1999년 7월 2일 완전개통됐다. 서울시는 이날 오전 11시 강동구청 역에서 지하철 8호선 첫 열차를 출발시켜 천호역-암사역-천호역-몽촌토성역까지 시승식을 가진뒤 낮 12시30분부터 정상운행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경기도 성남시 모란역에서 서울 강동구 암사역을 연결하는 8호선 20㎞ 전구간이 착공 5년만에 완전 개통됐다.
8호선 모란-잠실 구간은 지난 1996년 11월 23일 개통돼 운행중이었다. 새로 잠실-암사구간이 개통됨에 따라 잠실역에서 2호선, 천호역에서 5호선으로 각각 갈아 탈 수 있게 됐다. 운행간격은 출퇴근 시간인 오전 7-9시와 오후 6-8시에는 5분, 평상시에는 6분이다. 이번에 개통된 구간에는 장애인과 노약자들의 편의를 위해 에스컬레이터와 휠체어 리프트가 다른 역의 2배 이상 많이 설치됐으며 전동차 안에는 휠체어와 유모차를 세워둘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8호선의 완전개통으로 성남 및 분당 신도시와 강동지역 주민들의 강남 및 도심진출이 한결 쉬워졌고 몽촌토성과 암사동 선사유적지 등 문화유적지도 편리하게 찾아갈 수 있게 됐다.
1999년 소설 `대부`작가 마리아 푸조 사망
푸조는 무학의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 2차 대전에 참전한 후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1955년 `어두운 투기장`을 첫 작품으로 데뷔, 1969년 67주 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출세작 `대부`를 출간했다. 이 책은 전세계에서 2천100만부 이상이 팔렸으며 이어 영화 `대부`와 `대부2`의 대본을 영화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공동으로 집필했다. `대부`(1972년)와 속편 `대부2`(1974년) 두 작품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으며 아카데미 최우수 각본상도 받았다.
푸조는 1958년 유방암으로 사망한 부인 에리카와의 사이에 5남매를 두었으며 에리카를 간호하던 캐롤 지나와 1979년이래 동반자관계를 유지해왔다.
1997년 미국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 심장마비 사망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절정기를 이룬 스튜어트는 7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버릇없는 재벌 상속녀(캐서린 헵번)와 사랑에 빠지는 기자 역을 해낸 1940년작 `필라델피아 이야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1939년) `멋진 인생`(1946년) `하비`(1950년) `살인 분석`(1959년)으로 4차례나 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41년 공군에 입대, 폭격기 조종사로 2차 대전에 참전한 그는 20여 차례의 출격 기록이 있으며 무공십자훈장을 받기도 한 예비역 공군준장이다
1994년 94월드컵서 자살골 기록했던 콜롬비아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선수 피살
월드컵 축구의 열기가 한창이던 1994년 7월 2일 콜롬비아 동북부 메델린시의 한 나이트클럽 밖 주차장에서 12발의 총성이 울렸다. "골, 골, 골"을 외치며 방아쇠를 당긴 괴한들의 구둣발 아래 한 축구스타가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졌다. 콜롬비아 축구대표팀 주전수비수인 안드레스 에스코바르(27)는 단지 미국 월드컵에서 자책실점을 기록했다는 이유만으로 고국에 돌아와 이렇게 총탄세례를 받았다.
에스코바르는 94년 미국월드컵 축구대회 미국과의 대결에서 팀의 1-2 패배를 부른 자책골을 허용했다. 그는 미국의 존 하크스가 콜롬비아 골문 앞으로 찔러 넣은 공을 걷어내려다 그만 공이 자기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이 일로 콜롬비아는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에스코바르의 죽음은 갈등과 반목, 폭력 등 축구의 부정적인 측면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콜롬비아뿐 아니라 전세계 축구팬들을 경악시켰다.
1994년 남북정상회담 실무절차 완전 타결
남북한이 1994년 7월 2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절차에 완전합의했다. 남북한은 이날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2차 실무대표 접촉을 갖고 전문과 14개항으로 구성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절차 합의서에 서명했다.
평양 정상회담의 체류일정은 2박3일간으로 하되 필요에 따라 연장할 수 있도록 했으며 회담형식은 단독회담으로 하기로 했다. 남북한은 대표단규모를 수행원 1백명, 기자단 80명으로 한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또한 TV 생중계가 가능하도록 필요한 설비와 인원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고 TV영상 송출을 위한 전송로 및 위성중계를 위한 편의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7월8일 김일성 북한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회담이 무산됐다.
1994년 독립운동가 서상호 옹 별세
1992년 알제리 국가최고평의회, 알리 카피를 국가원수로 선출
알제리 군부가 지배하고 있는 집권 국가최고평의회가 1992년 7월 2일 암살당한 모하메드 부디아프의 후임 의장에 알제리 독립전쟁 참전군인회 사무총장 알리 카피(64)를 선출했다.
알제리의 동부 엘 하루츠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한 카피는 어려서부터 독립운동에 투신, 16세 때에 이미 알제리 인민당에 입당했다. 그는 1954년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에 참여했다. 그 덕분에 알제리 독립 후에는 시리아, 레바논, 리비아, 튀니지, 이집트, 이라크, 이탈리아 등의 대사를 역임했으며, 1979년에는 FIN의 중앙위원이 됐다. 카피 의장은 이처럼 현실정치와 결부되어온 전력 때문에, 전임 부디아프가 누린 만큼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카피는 취임직후 성명을 통해 실업률이 25%에 달하는 알제리의 경제를 재건시킬 것을 다짐했다. 그는 또 취임직후 부디아프의 암살을 조사할 6인 위원회의 구성을 발표함으로써 암살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회교원리주의 세력인 이슬람 구국전선(FIS)의 잔여세력에 대한 소탕조치를 강화해 나갈 뜻을 강력히 시사했다.
1991년 전략무기 감축조약(START l) 조인
1989년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최장수 외무장관 사망
그로미코는 28년 동안 최장수 외무장관을 역임하면서 냉전시대의 소련 외교를 이끌어 왔으며 고르바초프 서기장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백러시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로미코는 1939년 몰로토프 외무장관 시절 외무부에 몸을 담았으며 1943년에는 주미대사로 부임, 그 이후 루스벨트를 비롯, 9명의 대통령과 14명의 국무장관을 상대로 소련의 대미 외교를 이끌어 왔다. 특히 1957년 외무장관이 된 후 지난 1985년 7월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에 선출될 때까지 세계각지에서 일어난 외교분쟁협상 가운데 그가 얼굴을 내밀지 않은 곳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흐루시초프는 그를 `외교의 백과사전`, 1976년 밴스 미국무장관은 그야말로 현대 세계에서 몇안되는 귀족 중의 한 사람이라고 각각 추켜 세웠다.
1988년 서울 영등포 작은 공장의 소년노동자 문송면(15세) 수은중독으로 세상 떠남
1984년 프랑스 공군, 최신예전투기 미라지2000 실전배치를 개시
1981년 신안해저유물조사단 유물 247점 인양
1979년 국내 증시에 전산시스템 도입
1977년 헝가리, 탈소련선언
1977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사망
프루스트, 조이스, 엘리엇 등과 함께 20세기 초 러시아 모더니즘의 유산을 계승하며 언어 실험을 다방면으로 보여준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자유주의 정치가였던 부친, 예술적 감성이 풍부했던 모친 밑에서 모국어 외에 영어와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나보코프 일가는 러시아 혁명이 터지자 볼셰비키 탄압을 피해 영국에 정착했다가 망명 러시아인들이 모여 사는 베를린으로 이주했지만 부친이 정적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나보코프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소설과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1953년 소설 `롤리타`를 출간, 폭발적 반응을 얻으면서 일약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40대 남자 험버트가 의붓딸로 인연을 맺은 10대 소녀 롤리타와 애정의 도피 행각을 벌이는 이 소설은 외설 시비를 일으켰다. 하지만 문단의 평가는 달랐다. 소설의 복합적 구조와 미학에 쏟아진 찬사가 더 많았다. 이 작품은 서정적 심리 묘사, 인간 운명에 대한 유머 감각, 다의적 언어 구사, 정교한 구성 등으로 1998년 미국 랜덤 하우스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영문 소설 중 4위를 차지했다. 나보코프 대표작으로는 이밖에 `영광` `창백한 불꽃` `세반스찬 나잇의 참 인생` 등이 있다.
1974년 부산 근해 간첩선 사건
1974년 정명훈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제 피아노부문 2위
1970년 전북 익산에서 백제 무왕의 왕궁 터 발견
1969년 북한에서 귀순한 이수근 이중간첩죄로 사형당함
1967년 한국, 미국, 일본, 자유중국 4개국 수뇌회담
1966년 프랑스 태평양 모르로아 섬에서 핵실험
1965년 정부, 첫전투부대 맹호사단 파월 결정
1964년 필리핀에 82년 만의 큰 태풍. 사망 40, 이재민 37만여명 발생
1964년 존슨 미 대통령, 신(新)공민권법에 서명
1964년 7월 2일 존슨 미 대통령이 흑백차별의 금지, 인종간의 평등 등을 강조한 신(新)공민권법에 서명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인권법안이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됐다. 이날 존슨 대통령은 TV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 법안은 사람들을 결속시키기 위한 것으로, 국민에게 정의와 희망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요청하는 바이다”라고 밝히며 법률 실현에의 협력을 호소했다.
신공민권법은 고용, 대중숙박시설, 공공시설, 노동조합 가입자격에 있어서 연방정부가 재정지원하고 각종 사업에 있어서도 인종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안은 전해 11월 22일 갑작스런 죽음을 맞은 고 케네디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과 강력한 로비활동을 전개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으로, 이날 존슨 대통령이 서명한 법안 또한 케네디 전 대통령이 제안했던 신공민권법이 거의 원문 그대로 적용되었다. 존슨 대통령은 이날 흑인의 기본권을 부정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고 인종차별의 원천을 봉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법 발효 후에도 백인과의 차별 금지를 요구하는 흑인의 대립은 계속됐다. 16일 뉴욕에서 경찰관이 10살 된 흑인 소년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 이로 시작된 폭동이 순식간에 뉴저지, 시카고, 필라델피아로 번져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참극을 빚기도 했다. 이는 인종차별 문제가 법률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임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1962년 샘 월튼, ‘월마트’ 1호점 개점
샘 월튼(1918~1992)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잡지를 팔거나 신문배달을 하는 장사꾼 기질을 보였다. 월튼은 1945년 9월 자신의 돈 5,000달러와 장인에게 빌린 돈 2만 달러를 투자해 아칸소주의 소도시 뉴포트에 있는 벤프랭클린 잡화점을 매입한 뒤 소매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벤프랭클린 잡화점은 프랜차이즈 상점이었는데도 월튼은 독자적으로 가격을 할인하는 영업 전략을 폈다. 직접 제조업자들을 만나 물건을 싸게 사들여 박리다매를 추구한 덕에 개업 5년이 될 무렵에는 아칸소주에서 최고 매출과 이익을 내는 소매상점이 되었다.
1950년 7월 셀프서비스 방식을 도입한 월튼스 염가판매점을 열어 바로 벤톤빌 상권을 장악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한 상점에서 돈을 벌면 그 돈으로 새로운 상점을 열었고, 가격을 낮추기 위해 상품을 직접 제조하기도 했다. 2인승 비행기를 구입해 직접 비행기를 몰고 새 상점 터를 물색하는 등의 적극적인 노력 덕에 1950년대 말에는 미국 최대의 잡화점 경영자가 되었다.
1962년 7월 2일 소득수준이 낮고 인구도 5,000명이 채 안되는 같은 아칸소주의 로저스에 문을 연 월마트 1호점이 월마트 신화의 신호탄이었다.
월튼이 일관되게 견지한 것은 ‘상시 최저가’ 정책이었다.
월튼은 IT시스템을 도입, 엄청난 비용을 들여 매장의 현금등록기에서 사무실의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전사적인 네트워크망을 구축하고 컴퓨터에 기반을 둔 판매시스템을 도입했다. 또한 자체 인공위성을 띄워 미 전역의 배송상태와 전 세계 산지 가격 동향을 체크했다. 월마트가 대도시에 입점했을 때, 월마트에는 이미 바코드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고 모든 매장의 거래 정보가 실시간으로 수집되고 있었다. 고객은 가격을 물어볼 필요가 없고, 본사는 모든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1961년 헤밍웨이 사망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겨울철 휴양지로 유명한 아이다호주 케첨에서 자살로 여겨지는 엽총사고로 1961년 7월 2일 사망했다. 그는 1899년 시카고교외의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고교졸업후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캔자스시티 스타`지의 기자가 됐다. 1923년 3편의 단편을 시작으로 작가로 등단한 그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1920년대의 파리와 스페인을 배경으로 전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메마른 허무감과 절망적 쾌락을 그린 것으로,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해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대표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헤밍웨이는 문체도 독특했다. 간결하고 힘찬 하드보일드풍의 문장으로 `무기여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등 6편의 장편과 `킬리만자로의 눈` 등 50여 단편을 남겼다. 그중 1952년에 발표한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 1953년에는 노벨상을 잇따라 수상해 작가로서의 최고절정에 올랐다.
정력적인 행동가였던 그는 스페인내전에 참전하는 등 유럽전역을 돌며 작품소재를 현장에서 몸으로 체득했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두번이나 비행기 사고로 중상을 입어 말년을 요양의 세월로 보냈다.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취임
1959년 소련, 2마리의 개와 1마리의 토끼를 태운 로케트 발사. 동물회수에도 성공
1957년 북이란에 지진. 4000여명 사망-행방불명
1954년 국회, 변영태 총리수반의 국무위원 신임안 부결
1950년 36개국서 대한군원(對韓軍援) 성명
1950년 호주공군, 한국전 출동 개시
1949년 서울특별자유시, 서울특별시로 승격
1949년 베트남 정부 수립
1946년 소련, 서울영사관 철수
1942년 소련 작가 예브게니 페트로프 사망
1941년 조선영화협회 창설
1937년 에어하트, 남태평양 비행중 실종
1937년 당시, 대서양ㆍ태평양 항로가 개설될 정도로 항공술이 발달했지만 적도 주변을 도는 긴 항로로 지구를 일주한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39세의 미국 여성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이 모험에 도전장을 냈다.
에어하트는 1932년 5월에 여성 최초로 대서양 무착륙 횡단비행에 성공하고, 하와이∼캘리포니아 간 태평양 상공도 처음으로 단독 논스톱 비행했던 당대 최고의 여장부였다. 미모까지 갖춰 `하늘의 퍼스트 레이디`로 불리며 미국내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37년 6월1일, 에어하트는 항법사 프레드 누넌과 함께 쌍발기 록히드 엘렉트라에 몸을 싣고 로스엔젤레스를 출발했다. 푸에르토 리코로 남하한 뒤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미∼아프리카∼중동∼인도를 경유해 6월28일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할 때 만해도 일정은 순조로워보였다.
그러나 뉴기니를 이륙해 4000km 떨어진 하우랜드섬으로 날아가던 7월2일 오전8시45분쯤 "동경 157도, 남위 33도7분 상공을 날아가고 있다"는 무선연락을 마지막으로 갑자기 모든 연락이 끊겼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1934년 신의주 비행장 완공
1931년 중국 완바오산에서 한·중 농민 충돌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 창춘 교외에 위치한 완바오산(萬寶山)에서 조선인 농민 200여명과 중국인 농민 500여명이 충돌했다.
가난이 싫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농민들이, 완바오산 근처의 미개간지를 중국으로부터 차지한 일본인에게서 10년 기한으로 다시 불하받아 관개용 수로공사를 하던 중 중국인 농민들이 이를 중단시키려 한 것이 발단이었다. 수로공사로 인해 땅이 갈리고 수해까지 예상한 중국인 농민들이 공사 중지를 요청한 것은 당연한 권리행사였지만 순박한 조선인 농민들은 공사 강행을 부추긴 일본인만을 믿다 이 같은 불상사를 맞았다.
그러나 무난히 해결될 수 있었던 이 사건이 한·중·일이 얽힌 복잡한 사건으로 비화한 것은 이 사실을 왜곡 전달한 일제의 발표를 믿고 국내 신문들이 "사망자가 나왔다"며 과장 보도하고 일본도 보복을 부채질하면서였다. 인천·평양·경성 등 각지에서 중국인에 대한 집단 보복사건이 일어나 142명의 화교가 죽고 546명이 부상했다. 결국 이 사건은 일제가 한·중 양 국민 간의 민족감정을 이간질하고 분열시키는 데 이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1928년 영국의회, 평등선거권법 가결(21세 이상 여성에게 남성처럼 선거권 부여)
1927년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최초 여성 등정
1925년 ‘오발탄’의 영화감독 유현목 출생
유현목은 1925년 7월 2일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나 휘문중학을 졸업하고 1946년 동국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영화에 관심이 생겨 1947년 임운학 감독의 16㎜ 무성영화 ‘홍차기의 일생’에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이후 정창화 감독의 ‘최후의 유혹’ 시나리오를 쓰고 조감독으로 활동했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 조감독으로도 참여하는 등 7년 동안 조감독 생활을 이어갔다.
1956년 1월 15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교차로’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 후 김기영, 신상옥 감독과 함께 1960~197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대표했다. 1995년 작 ‘엄마와 별과 말미잘’까지 43편의 극영화와 1편의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오발탄’을 비롯해 ‘잃어버린 청춘’(1957), ‘아낌없이 주련다’(1962), ‘김약국의 딸들’(1963), ‘잉여인간’(1964), ‘카인의 후예’(1964), ‘순교자’(1965), ‘장마’(1979), ‘사람의 아들’(1980) 등 영화학도들에겐 교과서와 같은 작품들을 다수 연출했다.
대종상 감독상을 9차례나 받고 다른 영화 관련 상도 수차례 수상했다. 1976년부터 1990년까지는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활동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1923년 서울 고무공장 여직공 동맹파업
1910년 모든 공문에 명치연호 사용 지시
1908년 미국 연방대법원 최초의 흑인 판사 마셜 출생
1903년 노르웨이의 왕(1957-91) 울라프 5세 출생
1900년 비행선의 선구자 체펠린(1838-1917) 제1호 비행선 완성
1898년 베트 레이더 유도 미사일을 개발한 미국의 물리학자 드라이든 출생
1896년 독립협회 결성
갑신정변의 주도자였던 서재필이 자유민주주의적 개혁사상을 민중에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비롯하여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 근대 사상과 개혁 사상을 지닌 진보적 지식인들이 지도부를 형성하고 학생, 노동자, 여성, 천민 등 광범위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으며 민중에 기반을 둔 사회단체로 발전되어 갔다.
그들의 첫 사업으로서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자주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는 등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 강연회와 토론회의 개최, 신문과 잡지의 발간 등을 통해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민중을 계도했다. 이러한 계몽운동으로 점차 국민의 근대적 정치 의식이 향상되고, 시민들의 호응과 참여도가 높아져 독립협회는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881년 제임스 가필드 미국 20대 대통령 피살
1877년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 출생
1865년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 구세군의 전신 `그리스드교 전도회` 창설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와 함께 1865년 7월 2일 영국 런던에서 구세군의 전신인 `그리스드교 전도회`를 창설했다.
전도회는 설립 초기 주로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방전도를 했으며, 그리스도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선도와 교육, 가난구제, 기타 자선 및 사회사업을 통해 전인적 구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878년 구세군으로 개칭한 후 군대식 제도를 모방하고 교회를 국제적인 단일조직으로 해 부스가 초대 대장이 되었다. 각 군국(軍國)에는 사령관이 있고 지역사령부에는 지역사령관이 있다. 또한 군국마다 각 지방을 관장하는 지방장관이 있으며, 각 지방에는 소속된 영(營)이 있어 담당 사관이 복음선교와 예배, 지역사회 봉사사업을 지도한다. 영문(營門)에는 병사가 있는데, 이들은 구세군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의 죄악과 싸울 것을 다짐하고 병사로서 동참하고 있다.
1843년 `동종요법` 치료체계를 확립한 독일의 의사 사무엘 하네만 사망
1778년 프랑스 사상가 루소 사망
1566년 르네상스 시대 최고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 사망
그는 1503년 프랑스 서남부 상레미에서 유태인 가문에 태어나, 그를 아끼던 외조부로부터 수학 천문학 점성술 약초제조법 고전문학 희랍어 등을 배웠다. 그의 어릴적 최대 관심은 별자리 연구였다고 전해진다.
노스트라다무스는 20세에 아비뇽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한 뒤, 몽펠리에 대학 의대를 졸업했다. 새로운 치료법을 창안해 기성 교수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전염병 퇴치에 능력을 보여 `신비의 의사`란 명성을 얻었던 그가, 31세에 결혼한 부인과 자녀 두명을 흑사병으로 잃은 것은 아이러니였다. 그후 6년간 이탈리아-프랑스 등지로 방랑길에 올랐다. 그는 재혼한 뒤 1554년 프랑스 살롱에 정착했으며, 이 무렵부터 신과 교감하는 예지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1555년, 1,000여편의 예언시를 수록한 예언 시집 12권을 출간했다. 이중 특히 논란이 된 것은 `99년 종말론`에 대한 해석 방식이다. 그의 4행시 중 `고독` `홀로` 같은 표현이 빈번한 것은 특정 교파에 의존한다는 비난을 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란 설명도 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64년 국왕 찰스 9세로부터 시의로 임명됐다. 임종 하루 전날 "내일 뵙겠습니다"란 제자들의 하직 인사를 받고, "해가 떠도 나는 깨지 않을 걸세"란 마지막 예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1434(조선 세종 16) 동활자 갑인자 제작
1337년 고려, 혜성 관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