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화려한 언변으로 하십니까, 복음과 성령에 의존하십니까?
선택, 거듭남, 복음과의 역학 관계 속에 놓인 전도
- 이경섭 목사 (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전도란, 강태공이 낚시를 던져 운 좋게 물고기가 걸리면 잡고 아니면 말듯이, 불특정 다수에게 감언이설(甘言利說)하다, 어쩌다 걸려들면 포획하는 마구잡이식의 수렵(狩獵)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위하여 죽은 자(롬 14:15), 곧 ‘구원에의 부름(calling to salvation)’을 받은 택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도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거듭남이 마련된 택자에게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말해줄 때 그가 그것을 믿으므로, “물과 성령으로 나는(요 3:5)” 거듭남의 현재화가 그에게서 일어난다.
그의 믿음이 거듭남의 원천인 2천 년 전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벧전 1:3)'에 그를 연결시켜 거듭남의 현재화를 구현한다(요 3:5).
물론 ‘거듭나서 믿는다’ 혹은 ‘믿고 거듭난다’라며 거듭남과 믿음의 순서를 따질 수도 있으나, 둘 다 일리가 있다. 전자가 “거듭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논리적 순서’를 쫓은 것이라면, 후자는 “믿음 이후에라야 거듭남의 현재화가 이루어진다”는 ‘경험적 순서’를 쫓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둘은 시간차 없이 동시에 일어나기에 순서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지론(至論)이다.
이처럼 전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엡 1:4)’, ‘거듭남(벧전 1:3)’, ‘복음에의 부르심(살후 2:14)’과의 역학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가 위하여 죽은 택자가 전도 대상자이고, 그를 복음으로 '구원에의 부름(calling to salvation)'을 부르도록 보내진 사자(使者)가 전도자이다(롬 10:15).
전도는 그리스도가 위하여 죽은 자에게 ‘그리스도가 당신 죄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고지(告知)해 주는, 곧 복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일 전도 대상자가 그리스도가 위해 죽은 택자 라면 ‘그리스도가 당신 죄를 위해 죽었다’는 복음을 듣는 순간, 쇠가 자석에게 끌리듯 성령으로 그리스도께로 이끌린다.
반대로 그리스도가 위하여 죽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무관하기에,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죽었다’는 복음을 들을 때 아무런 울림(a vibration)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전도자가 불특정 다수를 향해 끊임없이 ‘그리스도가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택정을 받은 자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전도란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을 구현하기 위한 ‘일반적 소명(general calling)’의 실현이다.
◈구원의 즉각성이 전도의 즉각성으로
흔히 생각하듯, 전도란 숙련을 담보로 하는 전문직 개념 같은 것도 아니고, 정교한 종교 훈련의 산물도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전도는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한 자에게 자연발생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물이다.
복음 신앙으로 구원받은 회심자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확신으로 무장되고, 사람이 구원을 받고 못 받고는 복음을 듣고 못 듣고에 달린 것임을 안다. 그러한 각성이 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갈망에 사로잡히게 한다.
반면 구원에는 인간의 선행이 필요하다고 믿으며, 현재 자신의 선행 정도로는 구원받을지 못 받을지가 미지수인 로마가톨릭 교도 같은 행위구원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누구에게 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특히 갓 입문하여 가톨릭 교범 준수도 익히지 못하고 스스로 덕적(德積)이 일천하다고 생각하는 초심자(初心者)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모든 자연 종교들도 다 유사하다. 대개 그것들은 입문자로 하여금 종교인 노릇을 하게 하려면, 일정 기간의 훈련과 숙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전까지는 오직 개인의 종교적 성장과 양육에만 올인케 한다. 이는 성장과 숙성을 필요로 하는 모든 자연 생명체의 속성과도 유사하다.
사람의 경우를 보더라도, 자립할 수 있으려면 출생해서 수 년간의 보호자의 양육과 돌봄을 필요로 한다. 그 전까지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즉각적인 구원(Instant Salvation)’에서 나오는 ‘즉각적인 전도’는, 숙성을 요구하는 자연종교나 자연법칙의 원리를 뛰어넘으며, 초자연적 복음 신앙의 속성을 웅변해 준다.
자연 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제 믿어 갓 중생한 초신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애숭이로 보일 뿐이지만, 믿은 즉시 자신이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복음 신앙인은 즉각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자가 된다. 이는 마치 태어나자 말자 뛰어다니는 송아지에 비할 만하다.
성경에는 이런 사례들로 넘쳐난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마리아 여인이다. 그녀는 우물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즉시 자기 동네에 달려가 전도했다(요 4:29).
요한의 전도로 믿은 안드레도(요 1:40) 즉시 형제 베드로를 전도했고(요 1:41-42), 예수님의 전도를 받은 빌립(요 1:43) 역시 즉시 나다나엘을 전도했다(요 1:45).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으로부터 열병을 치유받은 즉시 그를 수종들었고(마 8:15), 베드로(마 4:1-20)와 세리 마태는(마 9:9) 예수님을 믿고 즉시 그의 제자로 나섰다.
이런 ‘즉각적인 전도’는 ‘즉각적인 구원’의 완전성을 웅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각적인 구원’이 불가능하다면, ‘즉각적인 전도’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구원’의 완전성을 설명해 주는 상징적 사건이 가나 혼인자치에서 물이 즉시 맛난 포도주로 변화된 것이다. 수 개월 혹은 수 년을 숙성시킨 포도주보다 즉시 물에서 포도주로 바뀐 이적의 포도주가 훨씬 맛있었던 것은, ‘즉각적인 구원’의 완전성을 말해준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 것 역시 그러하다. 평생 한 번도 일어나 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실 자체도 놀랍지만, 수십 년 동안 쓰지 못해 화석화(化石化) 된 팔다리가 아무런 재활훈련도 없이 즉시 일어나 걷기도 뛰기도 한 것(행 3:7-8) 역시 놀랍다. 이는 ‘즉각적인 구원’의 완전성을 대변한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즉시 죄인에서 완전한 의인으로 바뀌는 ‘구원의 즉각성’은 그로 하여금 자기 구원에 대한 염려를 접게하고 바로 다른 사람의 영혼구원을 걱정하도록 만든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 때문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신앙을 다양한 등급으로 계급화(hierarchism)하여 등급에 따라 구원의 가·불가를 추정하는 로마 가톨릭 같은 행위구원론자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완전한 구원을 담보받을 수 없으니 구원의 확신 역시 불가능하다.
자기 코가 석자이니 언감생심 다른 사람의 영혼을 걱정하는 일은, 그들에게 사치이다. 그들에게는 감히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권면할 여유가 없다.
◈낙심, 게으름, 꾸밈없는 전도
‘선택, 거듭남, 복음’의 역학 관계 속에서 전도를 이해하는 하나님 주권적인 전도는 자기 임의로 목표치를 산정해 놓고 자기의 열심과 수단을 통해 불특정 다수를 공략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는다. 아니면 훅 던져 놓고 운 좋게 걸려들면 걸려들고 아니면 아니라는 식의 우연에 기대지도 않는다.
그들은 전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택정을 받은 자를, 복음을 통해 ‘구원에의 부름(calling to salvation)’을 부르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경륜에 의존해서 하는 하나님 주권적인 전도는 안정성과 지속성이 있다.
전도의 열매가 쉬 맺히지 않는다고 자기 능력을 한탄하거나,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구원 택정을 받지 못해 그럴 수도 있고, 아직 때가 안 돼 그렇다고 생각하며 낙심 않고 꾸준히 전도할 수 있게 한다.
또 ‘선택, 거듭남, 복음’의 역학 관계 속에서 전도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극단적 칼빈주의자들(Hyper-Calvinists)’처럼 과도한 하나님 주권 개념에 빠져, 구원 택정된 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며 전도에 소극적이 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전 1:21)”는 성경 말씀대로, 구원 택정 자에 대한 ’구원에의 부름‘은 반드시 복음으로 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이 아닌, 오직 성령의 가르침(고전 2:13)에 의존되어 있음을 알기에, 그들은 전도를 말의 기술이나 인위적인 기교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너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투박한 아들의 음성(요 5:25)을 들려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단순한 말에는 수사학, 언변의 화려함, 철학적인 세련미도 불필요 하다. ’나는 말을 잘못해서 전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이다.
말쟁이었던(babbler) 사도 바울이(행 17:18) 말주변이 시원찮은(contemptible) 사람으로 바뀌었던 것도(고후 10:10) 전도에는 화려한 언변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전도는 화려한 언변에 의존하는가, 복음과 성령에 의존하는가?
[출처] 크리스천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