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편 -
" ……."
갑작스런 진우의 발언으로 인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진우는 내 손목을 휙 잡더니 가까운 공원으로 데리고 간다. 호텔 옆에는 호수 딸린 공원이었고 가족 단위로 많이들 오는 곳이라 그렇게 위험한 곳도 아니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았고 나는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결국 10분이 지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던 녀석은 내 손목을 다시 잡는다.
" 야박하게 군다. 진짜. 이은하"
" 10분이라며"
" 네 싸가지에 졌다"
" 잘 들어가라"
" 휴"
발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말,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칠 법한데, 오늘따라 이 녀석을 무시할 수 없었다.
털썩-
"?"
고개를 살짝 비틀어 내가 앉는 걸 보고 예쁘게 웃는 하진우.
뭔가 기쁜 지 실실 웃는 모습에 왠지 괜히 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의 꼬임에 넘어가버렸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손바닥에 주먹을 살짝 내리치더니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는다. 도대체 이 녀석의 머리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 영화 볼래?"
" 뭐?"
" 영화"
" 뭐?"
" 영화 보자고"
이 자식이 왜 이러지?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에 내가 그 녀석을 노려보자, 또 웃는다. 왠지 이 녀석에게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놀리고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자리에서 벌떡 하고 일어났다. 진우는 집으로 향하려는 내 손을 잡는다. 손이 많이 찼다. 날씨가 추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손이 차질정도로 추운 건 아니었다. 그저 밖은 선선할 뿐이었다. 아님, 이 녀석의 손은 원래 찼던 걸까?
점점 이 녀석에 대해 알아가는 게 많아지고 있다. 굳이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아도 진우는 내 생활에 한 부분처럼 조금씩 녹아들고 있었다. 누군가 내 생활에 비집고 들어오는 걸 극구 거부했던 내가 조금씩이지만 이 녀석에게 어느 순간 신경 쓰고 있었다.
" 이은하, 영화보자"
너무나도 애절하게 말하는 이 녀석에게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거부하지 못하고 영화관에 와버렸다. 그 녀석이 소개한 곳은 허름하고 오래된 영화관이었다. 누구도 찾지 않을 것 같지만 간간히 찾아오는 사람들 덕분에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늙은 노부부가 일하고 있는 곳이라며 자신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번에 그 영화관에는 왜 간 거지? 이 영화관에 왔다면 들킬 일도 없었을 텐데..
" 할아버지"
" 어이구, 진우 왔어?"
" 오늘은 뭐해요?"
" 로미오와 줄리엣, 우리 할매가 보고 싶다고 해서, 근데 이 처잔?"
" 아, 안녕하세요."
내가 궁금하다는 듯 묻는 할아버지의 시선에 나는 꾸벅 인사하고 친구라고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하진우의 여자친구냐며 너무나도 호탕하게 웃으신다. 아니라고 계속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좋을 때라며 내 등을 토닥거린다. 하진우 이 자식은 부인하지도 않고, 웃기만 한다. 내가 쿡쿡 찌르며 아니라고 말하라고 했지만, 그냥 무시해버린다.
" 영화 좋아해?"
그냥 어색한 공기 때문에 아무 뜻 없이 물어본 말이었다.
" 응"
" ....."
역시 혼자서 영화관에 가서 볼 정도면 좋아하지 않고는 혼자 볼 수 없겠지.
" 진짜, 정말로, 엄청"
곧 시작되었다. 어두컴컴한 곳에 환하게 비추어지는 영상화면에 눈이 부셔 눈을 찌푸리다가 점점 적응되자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관 내에는 사람들이 몇 명 없었고 쥐죽은 듯 조용했다. 영화는 올리비아핫세가 줄리엣 역할을 한 1968년도에 나온 영화였다. 사람들이 괜히 그녀의 얼굴을 들먹이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우아했고 너무나도 예뻤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중에 한 명이었고 분명 이 영화배우는 세계적인 사람이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내 나이또래에는 별로 없었지만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이 녀석처럼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여러 장르를 보다보니 옛날 영화도 보게 되었고 요즘 영화보다 더 꽤 매력이 있었다.
줄리엣이 죽고 로미오가 따라 죽으려고 할 때, 잠깐 그 녀석의 얼굴을 보았다. 어느 때보다 진지해보였고 어느 때보다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 녀석 정말로 영화라는 것에 푹 빠졌구나, 이 녀석 정말로 영화를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말이다.
그렇게 넋 놓고 영화를 본지 2시간 정도가 지났고 영화관에 불이 켜졌다. 하진우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는 출구 쪽으로 향했다. 덩달아 나도 인사를 하고 그 뒤를 따랐다. 뒤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중에 오면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틀어주겠단다. 고마운 마음에 다시 한 번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인사를 하고 나왔다.
" 난 이만"
" ....."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려고 길가에 서서 택시가 지나가는 지를 살폈다.
" 여기 택시 잘 안 잡혀, 큰 도로에 가야지 잡히지"
그러면서 내 손목을 털썩 잡고는 이끈다. 골목 사이사이가 어두컴컴해서 무서웠지만 왠지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녀석 때문에 안심되었다. 무서워서 떼어낼 수도 없는 처지라 잠자코 있었는데 이 녀석은 뭐가 웃긴지 키득거리며 웃는다.
“ 왜 웃어”
“ 아, 하하하 응?”
“ 왜 웃냐고!”
" 천하의 이은하가 무서워 할 줄도 알아서. 무서운 거 없을 줄 알았거든"
무섭지 않은 척, 떨지 않는 척 했지만 쉽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덜덜 떨리는 입을 꼬옥 닫고는 얼른 밝은 곳으로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 환하게 밝히는 가로등이 멀리서 보이자,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내 손목을 잡고 있는 하진우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내 움직임에 나를 보고는 천천히 내려놓는다.
" 됐어. 이젠"
머리를 긁적이는 녀석, 그리고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는 나를 본다. 나는 그 녀석을 무시하고 얼른 가로등이 보이는 곳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곧 큰 도로가 보였다.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고 곧 택시가 잡혔다. 나를 태워 보내면서 아저씨의 신상정보를 확인하고는 잘 가라며 인사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 오늘 고맙다. 이은하"
그리고 택시는 출발해버렸다. 멀리서 도로 난간에 털썩 주저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녀석이 보였다. 담배도 필줄 안다. 아저씨처럼 내 앞에서는 피지 않는 녀석, 왜 자꾸 저 녀석의 그림자가 아저씨와 자꾸 닮아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아저씨와는 전혀 다른데, 저 녀석을 볼 때면 아저씨가 떠오른다.
시간을 보니 많이 늦었다. 집에 영미언니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다가 떡볶이라도 사가서 입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들어가자마자, 이것저것 물을 게 뻔 하니깐.
할머니네 떡볶이 집 가까이에서 내렸다. 멀리서 할머니가 떡볶이에 어묵 국물을 넣고는 휘젓고 계신다. 반갑게 인사하며 할머니에게 다가가자, 할머니는 늦은 시간에 여자가 나돌아 다니면 안 된다며 꾸짖는다.
" 떡볶이 2인분, 순대 2인분, 오뎅 2인분 싸주세요."
" 집에 누구 온겨?"
" 히히, 네! 할머니, 참! 할머니 저 그 대학에 붙었어요. 그러니깐 많이 주셔야 되요!"
예전, 수시를 넣고 불안해하고 있을 때 할머니께 이런 저런 말을 했었다. 묵묵히 들어주시며, 내게 힘을 주셨다. 누구보다도 할머니께 먼저 말해드리고 싶었다. 할머니! 대학에 붙었다고, 그럼 할머니께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하다’라는 말을 하는 할머니를 떠올렸었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원하던 것을 해주시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내게 축하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 아이고! 축하하네! 많이 줘야지! 그럼!"
할머니는 이것저것 많이 싸주신다. 너무 많이 싸주시는 바람에 두 손이 무겁다. 이렇게 많이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신다. 할머니께 많이 팔라고 인사하고는 몸을 돌리는데, 지애가 서 있었다.
" 오지 말랬지"
" ....."
"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거야?!"
지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친다. 부르르 떨며 나에게 점점 다가오는 지애는 잔뜩 화가 나있다. 그 모습을 지나쳐 가려는데, 내 손목을 거칠게 잡고선 날 잡아 끈다. 할머니는 뭔가 심상치 않은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 할머니 앞에서 이러지마"
뭔가 불안한지 지애의 이름을 부르며 지애의 손을 잡는 할머니다. 그 모습이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 무슨 상관이야? 내가 오지 말라면 오지 말아야 할 것 아니야! 내 말이 그렇게 우스워?"
" 내가 오지 못할 곳이라도 온 거야?"
" 오지 마"
" 싫어"
쫙-
세차게 내 볼을 스치는 매서운 손이 지나갔고 내 고개도 돌아가 버렸다. 꼭 물고 있던 입술에 피가 난다.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놀라셨는지 나에게 다가와 입가의 피를 닦아주신다. 그리고는 지애를 한 손으로 때리기 시작하신다.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담겨져 있다. 더 이상 건들지 말아야겠다. 할머니는 착하기만 한 손녀딸의 모습에 놀란 듯, 눈가에 눈물을 담고 지애를 말리는 것이 힘겨워 보이셨다.
" 난 언제든 올 거야."
" 다음부턴 안 봐줘"
" 기대할게"
그리고 빠르게 걸어 아파트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거울로 본 내 입술이 살짝 찢어졌다. 넘어졌다고 하면 믿지 않겠지? 찢어진 입술에 빨갛게 부은 얼굴, 집 밖에서 기다렸다가 가기에는 갈 곳도 없었고 어두운 아파트 주변이 싫었다.
" 다녀왔어요!"
문이 열리고는 빠르게 영미언니에게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쥐어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영미언니가 뒤 따라 들어오려다가 내가 잠가버린 문 밖에서 뭐라고 떠든다.
" 옷 갈아입고 씻고 나갈게요. 떡볶이 먹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 찬물로 부은 볼을 식혔다. 잠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거실에는 아저씨와 영미언니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맛있게 먹고 있는 영미언니가 나에게 달려와서는 지금까지 뭐했냐고 묻기 시작했다. 별거 안했다고 했는데도 자세히 말하란다.
" 왜 뭐 했는데? 응응?"
“ 그냥, 아무 것도 안했어요.”
언니는 먹던 떡볶이도 제처 두고 날 뚫어지게 쳐다보며 짓궂게 묻는다.
“ 언니, 다음부터 그러면 언니라도 화낼 거예요!”
“ 아, 그래도 친해지면 좋은 놈이었단 말이야! 왜 뭐했는데?”
사실 3시간 넘게 같이 있었으니, 거기다가 12시가 다 되어갔다. 그 동안 아무 것도 안했다고 한다면 정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지만, 영화 봤다고 솔직히 말하면 언니는 다른 식으로 해석할게 뻔했다. 차라리 이렇게 시치미를 뚝 떼는 게 좋은 방법 같았다.
" 야? 근데 너?"
" 네?"
" 너 입술"
터진 입술을 매 만지며 너무 어색하게 변명하는 꼴 때문에 들키게 생겼다. 아저씨가 심각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와서는 입술을 본다. 그리고는 식탁에 앉히고는 연고를 들고 와 입술에 발라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묻는다. 그리고 내가 말 안하고 있자, 조금씩 다그쳤다.
" 누구야?"
" ....."
" 말 안 해?"
" 야! 하진우! 너 우리 은하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입술이 엉망진창이 되서 왔다고! 이 새끼가! 정말! 생사람? 네가 우리 은하를!"
휴-
빠르시기도 하지. 아무 말 하고 있지 않자, 영미언니는 내가 진우 녀석에게 맞기라도 했을 줄 알았나보다. 둘이 친하다고 하지 않았나?
" 언니. 아니에요. 끊어요."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을 수습하려 언니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언니는 한 손으로 나를 저지하고는 전화를 지속했다. 하진우가 뭐라고 하는 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그 녀석은 영미언니의 말만을 듣고만 있을 것이다.
" 뭐? 바꿔? 무슨 수작 부릴라고? 못 바꿔! 누구냐고! 네가 안 그랬으면 누군데!"
" 언니!"
" 이 새끼가! 너! 죽었어! 만나기만 해봐! 너 볼기짝을 백만 대 때려줄 줄 알아!"
" 바꿔주세요."
내가 언니에게 손을 내밀자, ‘하진우 죽었어.’를 외치며 나에게 건넨다. 아직도 분에 못 이겼는지 씩씩되면서 거실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나를 살핀다. 아저씨는 내 앞에 앉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 응"
[ 누구야]
" 미안"
[ 휴, 적당히 좀 하라고]
" 뭐가"
[ 너 괴롭히던 년들이냐?]
" ……."
[ 이은하. 너..]
" 미안, 내일 봐. 끊는다."
무슨 말을 할지 알기 때문에 끊어버렸다. 왜 맞고만 있냐고 따지고 싶은 거다. 이 녀석은.
처음에는 귀찮았을 뿐이다. 시끄럽게 싸우고 떠들고 하면 더더욱 내가 피곤해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시시해져버려서 그만 두겠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참으려고 했던 게 아니다. 그저 조용한 생활을 원했던 거였다. 그리고 지애가 날 괴롭힐 때면, 날 괴롭히는 것으로 인해서 지애의 상처가 조금씩 없어지길 바랐다.
" 이은하"
아저씨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끊은 전화기를 들고 아저씨의 눈을 본다. 불안한 듯 떨리는 아저씨의 눈동자에 내가 비춰졌다. 아저씨는 두려운가보다.
" 친구랑 싸웠어요. 좀 맞긴 했는데, 괜찮아."
" 친구?"
" 응. 친구"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를 톡톡 친다. 그래도 맞고 다니지 말라는 아저씨는 내 손에 약을 쥐어주고는 늦었다며 얼른 자란다. 아저씨는 스스로 별거 아니니깐 걱정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이젠 너무나도 애처로워 보였다. 항상 궁금했다. 왜 이렇게까지 내 주변을 신경 쓰는지. 묻고 싶었다. 아저씬 도대체 나의 무엇을 보고 슬퍼하는 건지.
언니는 내 옆에 와서는 어떤 친구냐며, 자신이 내가 맞은 배로 더 때려주고 오겠단다.
휴. 친구일까? 김지애와 난 친구인가?
* * *
“ 너 이대로 괜찮겠어?”
“ 뭐가”
양주를 가지고 나와 유리잔에 가득 따랐다. 그리고 얼음도 넣지 않은 채, 한 숨에 마셔버렸다.
“ 꽤 불안해하고 있잖아”
“ 상관 마”
내가 다시 잔에 술잔을 채우려 하자, 영미가 빼앗아 들어 자신이 잔에 술을 따른다. 고동빛 색깔이 진하게 느껴진다. 이유 없는 불안감과 이유 없는 짜증으로 기분이 나쁘다.
“ 나한테까지 이러기야?”
벌컥 화를 내는 녀석은 ‘씩씩’거리며 콧바람까지 내고 있다. 그런 녀석을 보며 피식하고 웃음만 나올 뿐이다.
“ 이젠 솔직해져도 되지 않겠어?”
조심스럽게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 은하는..”
“ 그만”
위험하다. 지금 녀석의 말을 듣게 되면 당장이라도 은하에게 다가가 그 놈을 만나지 말라고 다그칠 것 같다. 그리고 절대 말 할 수 없는 말을 짓거릴 것만 같았다.
“ 참~ 나, 도대체 뭐가 문제야?”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로 앞에 놓인 술을 벌컥벌컥 마신다. 꽤 주량이 쌘 이 녀석이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뭔가를 찾는다.
“ 와 독해!”
“ 하진우는 어떻지?”
“ 진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의 표시를 의미하는 것을 이 녀석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미는 냉장고에서 과일을 이거저거 꺼내다가 내가 갑작스레 묻는 질문에 고개를 돌린다.
“ 좋은 녀석이지, 진취적이고 추진력이 강한 녀석이야. 처음 친해지기 힘들어서 그렇지 꽤 붙임성도 좋은 녀석이고, 은하 친구로는 딱 이지.”
그래, 은하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하는 친구일 수 있겠지만 하진우의 얼굴은 은하를 친구로만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다.
아. 내가 왜 이렇게 신경 쓰는 건가?
은하만 좋다면 연인이든, 친구이든 상관없지 않은가?
내가 가지지 못할 바에는 다른 놈에게도 안 된다, 이런 심보인가?
내 마음은 결국 은하를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은하를 이해하고 생각한다고 하지만 결국 내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은하를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 정말 이대로 괜찮아?”
비어 있는 내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묻는 영미의 시선에, 술잔을 나도 모르게 꽉 쥔다.
“ 아니, 괜찮지 않을 것 같아.”
* * *
" 은하야!"
빨간 뿔테에 머리를 예쁘게 말아 올린 진아가 나를 부른다.
" 반장이 오늘 방과 후에 회의 있다고 남으래."
" 응"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 반 반장은 일주일 남은 행사로 바쁜가 보다. 고 3인데 공부해야 하지 않나? 아 참, 반장도 대학에 붙었다고 했지? 유일하게 반장과 내가 보충수업과 자율수업을 빠지고 있었다. 반장은 행사 준비로 인해 요즘 이곳저곳에서 불려 다녀 볼 수가 없었지만.
3교시쯤에 진우가 왔다. 요즘 바쁘지 않나보다. 학교에 꼬박 꼬박 오는 거 보면 말이다. 만날 지각해서 문제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녀석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 왜"
" 입술"
" 뭐"
내 입을 오른손으로 가리며 말하자, 키득하고 웃으며 두 손을 주머니에 놓고는 의자에 길게 기댄다. 쭉 뻗은 다리가 앞에 앉은 사람의 의자에 닿는다.
" 섹시하네."
갑작스런 말에 얼굴이 붉게 물들고 말았다. 동요하면 안 되는데 동요되고 말았다. 고개를 휙 돌려 집중하지도 못할 책을 계속해서 보고 있다. 그 녀석이 책상에 엎드려 내 얼굴을 배꼼 쳐다보더니 주위에서 들릴 만큼 웃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웃자, 과학 선생님이 하진우를 혼내며 밖에 나가라고 하신다.
" 내 짝꿍이랑 떠들었어요."
" 둘 다 나가!"
째지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교실 전체에 울렸다. 곧 주위에서는 우리를 쳐다본다. 한 번도 딴 짓하지 않았던 내가 나가는 게 신기해하는 거 일수도 있고, 아님 하진우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쳐다보는 거 일수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쳐다보는 눈길이 기분 나쁘다. 선생님께 변명하기도 싫었고 난 주위에서 날 원숭이 보듯 쳐다보는 눈길에서 대도록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교실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계속해서 힐끔힐끔 나를 볼 테니깐. 그렇게 우리 둘은 복도에 서 있었다. 키득거리며 계속해서 웃는 녀석을 흘기자, 그 녀석은 알았다며 웃음을 참는 듯 하다가 다시 웃는다.
" 야"
" 아, 알았어. 근데 웃겨서"
" 야"
" 아~ 이은하의 빨개진 얼굴이라, 상상 밖이었어."
" 야"
" 아아! 알겠다고.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지 말라고"
두 손을 들어 항복한다는 표시를 보이며 벽에 기대서 몸을 편하게 한다.
" 함부로 그렇게 다루면 시집 못 간다."
" 무슨 상관"
"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주위에 너 걱정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적당히 하라고"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 나 네가 마음에 드는데"
뭐야, 갑자기
" 이은하. 친구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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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좀 더 시간을 내서 올릴려고 했는데,
밤에 잠이 안와서...하하.
9편은 정말 시간이 걸릴 거예요. 사정이 있어서....
얼마 안되지만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글로 인해 행복해 하는 누군가가 있길 빌며
- 특별한 낙원 팸원 비야 올림.
첫댓글 이뻐라..ㅋㅋ
누가 예쁜가요? ㅋㅋ 진우? 지환? 아님 은하? 하하하, 댓글 너무 감사합니다!! 힘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