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4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베네수엘라 공군 전투기, 새와 충돌해 추락…조종사 사망
2022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독립기념행사장 총기 난사 6명사망 31명 부상
2021년 필리핀 군용기 기상악화로 추락 30여명 사망
96명이 탑승한 필리핀 군 수송기가 4일(현지시간) 필리핀 남부에서 추락했다.
이날 오전 11시 30분 필리핀 군 소속 C-130H 수송기가 필리핀 남부 술루주(州) 홀로 섬에서 착륙을 시도하다 인근 산악지역에 추락했다
추락 수송기에 조종사 3명, 승무원 5명을 포함해 모두 96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50명이 구조되었고 수송기 잔해에서 시신 29구를 수습했다. 또한 사고 현장 부근에 있던 민간인 2명도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고는 "조종사가 활주로를 찾지 못했고 수송기를 통제하지 못해 추락했다"고 사고 원인을 설명했다. 추락한 수송기에 탑승한 군인들은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이슬람 반군이 활동하는 지역에 투입되기 위해 남부 민다나오섬 카가얀데오로시에서 출발한 것으로 확인됐다.
2018년 남북통일농구 15년 만에 평양 유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림
2018년 일본 서남부 폭우 200여명 사망, 한 달 치 비가 사흘 동안 쏟아짐,
2017년 북한 평북 방현에서 ICBM급 화성-14형 1발 발사
2015년 세계유산위원회 일본이 신청한 23개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최종 결정
조선인의 강제노역은 일본 정부 대표단의 발언록과 등재 결정문에 주석 형식으로 포함, 일본은 세계유산위원회에 후속 조치 경과보고서 2017년 12월까지 제출, 일본 외무상은 산업혁명 시설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된 직후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발언, 외교부의 초기 대응부실로 군함도가 일본 근대산업시설에 끼여 세계유산등재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 부여 익산 8개 유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우리나라 12번째) 등재
2015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소년, 호날두 지원 등에 힘입어 포르투갈 유소년팀 입단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에서 여섯 살 마르투니스는 실종 21일 만에 구조되었다. 당시 그는 포르투갈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11년이 지나 그가 포르투갈 프로축구팀 스포르팅 리스본의 유소년클럽에 입단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반다 아체에 살던 그는 축구하다가 쓰나미를 맞았다. 어머니와 두 형제를 잃었다. 생라면을 먹고 웅덩이 물을 마시며 3주를 버티다가 취재 기자에게 발견됐다. 그는 구조 직후 “쓰나미는 두렵지 않았다. 나중에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살고 싶었다”고 했다. 포르투갈 유니폼을 입고 역경을 이겨낸 아이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포르투갈축구협회가 마르투니스의 집을 다시 짓도록 4만유로(약 5000만원)를 지원했다. 소년의 영웅이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인도네시아까지 가서 직접 만나 교육비를 대주기로 약속했다 마르투니스는 호날두의 지원으로 고향 반다 아체에서 축구학교를 다녔다. 지난해 인도네시아 유소년 대표팀 선발에서 탈락하는 좌절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이달 초 포르투갈 명문 구단의 유소년팀에 합류하며 꿈에 한 발짝 다가가게 됐다. 그는 “행복하다. 포르투갈 프로리그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2015년 44년 5개월 최장기간 토크쇼 진행… 일본 만담가 가쓰라 기네스북 올라
일본 만담가 가쓰라 분시(桂文枝·71)가 매주 일요일 오후 ABC아사히에서 진행하는 쇼 프로그램 ‘신혼부부 어서 오세요!’가 ‘동일한 사회자에 의한 최장수 토크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이 프로그램은 매주 두 쌍의 신혼부부를 스튜디오에 초대해 이야기하는 토크쇼다. 기네스북에는 1979년 1월 첫 방송 이후 지난달 7일까지 44년 5개월치의 방송 기록이 등재됐다.
2011년 강화도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
2011년 7월4일 오전 11시 44분, 강화군 길상면 선두 4리에 있는 모 해병부대 김모(19) 상병이 생활관(내무반)에서 돌연 K-2 소총을 꺼내 들어 난사(亂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4명이 쓰러졌다.
이때 총소리를 듣고 생활관 입구 쪽으로 달려간 권혁(19) 이병은 김 상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발포로 달아오른 총신(銃身)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이 상태로 권 이병은 김 상병을 내무반 밖으로 밀쳐냈고, 안에서 문을 잠갔다. 오른쪽 허벅지 안쪽과 바깥쪽에 2발의 총알을 맞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목숨을 건 권 이병의 이 행동으로 당시 내무반에 있던 10여명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권 이병에게 저지당한 김 상병은 생활관 근처 격실로 갔다. 그는 이곳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해병대 총기 사건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김 상병의 해안 소초에서 구타와 가혹행위, ‘기수열외’(해병대식 집단따돌림) 등 여러 건의 병영 부조리 사례를 적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해병대 사령부 보통군사법원 심판부는 13일 김모(20) 상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또 김 상병과 함께 범행을 공모하고 상관 살해를 방조한 혐의로 기소된 정모(21) 이병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2005년 우주탐사선 딥 임팩트호 발사체, 혜성 ‘템펠1’과 충돌 실험 성공
무게 372㎏의 세탁기만한 충돌체가 24시간 동안 시속 3만7000㎞로 80만㎞를 날아가 폭 4.8㎞ 길이 14.5㎞의 혜성에 정확히 꽂혔다. 충돌체가 혜성에 충돌하는 순간, 밝은 섬광이 혜성의 아랫부분을 뒤덮었고, 지구에서 관측된 혜성은 충돌 전에 비해 두 배나 밝아졌다. 지난 1월 13일 미국 플로리다의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발사된 미국의 혜성 탐사선 딥 임팩트호가 발사한 충돌체가 4일 오후 2시52분 혜성 ‘템펠1’과 충돌했다
이번 혜성탐사선은 지구를 떠난 지 172일 11시간5분 동안 4억3100만㎞를 날아가 혜성에 충돌했다. 사람이 발사한 인공 충돌체를 우주 공간에서 혜성 표면과 충돌하게 한 것은 인류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2004년 한국 지휘자 정명훈-일본 나루히토 왕세자, ‘우정의 가교’ 음악회서 공동 연주
7월 4일 오후 6시30분 일본 도쿄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 대전시관에서 열린 ‘일한(日韓)우호 특별기념 음악회’에서 한국의 음악인 정명훈(鄭明勳)씨와 일본의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연주했다.
정명훈씨는 피아노, 나루히토 왕세자는 비올라를 연주했다. 세계적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도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인 아라이 에이지(바이올린)가 함께 참여, 넷이서 모차르트 ‘피아노 사중주 제1번’을 연주했다.
이 음악회는 2002년 정명훈씨가 제안해 성사됐다. 2000년부터 도쿄필하모닉 특별고문을 맡아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정명훈씨는 2002년 도쿄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을 지휘할 때 관람하러 온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함께 연주할 기회를 갖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2년 후 일본민예관측이 조선미술에 심취했던 예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를 기려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조공예와의 만남 90주년 특별전’을 기획하자 때맞춰 정명훈씨측이 나루히토 왕세자측에 2년 전에 제안한 대로 함께 연주할 것을 요청해 성사된 것이다. 이 특별음악회는 일본민예관의 운영기금을 마련하는 자선음악회로 열렸다.
이날 음악회서 정명훈씨와 나루히토 왕세자의 연주는 후반부에 있었다. 전반부에선 정명훈씨와 미샤 마이스키 등이 독주와 이중주를 펼쳤다.
2002년 중국 서기동수(西氣東輸) 대장정 착공
중국의 서기동수(西氣東輸 ·서부의 천연가스를 동부로 보내는 것) 사업이 2002년 7월 4일 전면 착공했다. 중국 서부 타림(塔里木)분지에서 동쪽 끝 상하이(上海)까지 장장 4천여km에 가스 파이프 라인을 건설하는 170억달러짜리 초대형 공사였다. 이날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 자회사인 중국석유공사와 더치 셸이 주도하는 국제 컨소시엄이 사업 기본협정을 체결했고,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국회의사당)에서 착공 기념식이 열렸다. 서부대개발의 핵심 사업 중 하나인 `서기동수`는 서부 천연가스 개발과 동부의 에너지난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린 것이다. 서부의 타림·차이다무(柴達木)·산간(陝甘)·촨위(川兪) 분지의 대형 가스전(田)이 개발되고 가스 파이프 공사가 완공되면, 중국의 천연가스 생산량은 50%까지 증가한다. 2005년 완공 이후 매년 120억㎥의 천연가스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려갈 예정이다. 지름 1m의 가스 파이프는 도중에 황하강을 3차례 넘나들며 장강과 화이허(淮河)강 등 대형 하천을 대부분 통과한다.
2001년 프랑스 문화재국, 3만년 전 동굴암각화 발견 발표
기원전 약 2만8000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사시대의 암각화가 프랑스 서부 도르도뉴 지방의 퀴삭 동굴에서 발견됐다
동굴 내 암벽에는 수m에 걸쳐 말, 들소, 코뿔소 등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여성의 모습 등 사람을 표현한 그림도 다수 새겨져 있다.
문화재국의 수석 고고학자인 다니 바로는 “이 암각화는 기원전 1만6000년쯤에 그려진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동굴 벽화만큼 높은 고고학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동굴 내에서는 사람의 뼈가 묻힌 무덤도 7곳 발견됐다. 이 동굴은 작년 9월 아마추어 탐험가에 의해 발견됐으나, 4일 처음 발표됐다.
2000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국무회의에서 의결
2000년 7월 4일 정부종합청사에서 김대중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안을 의결했다.
이 시행령은 1969년 8월 7일(3선 개헌안 발의일) 이후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다가 희생된 피해자와 유족에 대해 명예회복과 보상을 할 수 있는 방안을 규정하고 있다.
시행령의 핵심은 `민주화운동`의 뜻을 더욱 폭넓게 해석했다는 점이다. `직접 국가권력에 항거한 경우`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이 학교, 언론, 노동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사용자 또는 고용주가 행한 폭력 등에 저항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권력의 통치에 항거한 사례까지 포함했다. 이에 따라 유신철폐나 대통령직선제 개헌투쟁처럼 직접 국가권력을 상대로 민주화운동을 벌인 사람은 물론, 민주화운동을 하다 해직된 교사, 교수와 언론인, 학사징계를 받은 대학생, 해고 근로자까지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포함되게 됐다. 정부는 이들의 수가 1만7000명 정도 될 것으로 추산했다.
2000년 국어 로마자 표기법 16년 만에 개정
부산, 대구의 로마자 표기방식이 각각 PUSAN, TAEGU에서 BUSAN, DAEGU로 변경됐다.또 김포국제공항의 표기도 KIMPO에서 GIMPO로 바뀌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초성 ㄱ, ㄷ, ㅂ, ㅈ의 로마자 표기 방식을 종전 k, t, b, ch에서 g, d, b, j로 바꾸고, 모음 ㅓ와 ㅡ,자음 ㅋ, ㅌ, ㅍ, ㅊ을 표기하는 데 사용하던 특수부호 반달표와 어깻점을 없애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국어 로마자 표기법 개정안을 확정 발표했다.
이에따라 어두에 오던 무성음 ㄱ, ㄷ, ㅂ, ㅈ은 우리 언어감정에 맞게 유성자음으로 바뀌어 표기되며, 특수부호가 사라짐에 따라 모음 ㅓ와 ㅡ의 표기방식은 eo와 eu로, 자음 ㅋ, ㅌ, ㅍ, ㅊ은 k, t, p, ch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동안 써 온 인명과 회사명, 단체명은 종전대로 쓸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었으며, 인명의 성씨 부분은 추후 표기방식을 별도로 정하기로 했다.
이번 로마자 표기법 개정은 1984년 1월 13일 현행 표기법이 고시된 이후 16년 만이다. 새 표기법이 확정됨에 따라 2005년 12월 말까지 순차적으로 바꿔었다.
2000년 조덕송 조선일보 전 논설주간 별세
1947년 기자생활에 입문, 1997년 전남일보 논설고문을 끝으로 물러날 때까지 50년 간 언론계에 몸담았던 평생 기자였다.
전남 순천 태생인 그는 일본 교토 리쓰메이칸 대학을 중퇴, 1947년 조선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제주 4·3사건 관련자 총살 집행과정을 신랄하게 비판, 체포 대상에 오르기도 했으며, 그 후 다시 문학가동맹에 가입,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6·25전쟁으로 풀려난 그는 국제신문·자유신문에서 일하다가 1960년 송지영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에 의해 조선일보 문화부장으로 발탁됐다. 그는 기획부장·사회부장·논설위원을 거쳐 1989년 3월 통한문제연구소장으로 조선일보를 떠날 때까지 소년조선일보 속간, 주간조선 창간(1968년) 등의 굵직한 일을 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때는 수석자문위원으로 평양을 수차례 다녀왔다. 언론 생활 반세기를 증언한 자서전 ‘대하드라마 - 머나먼 여로’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98년 일본 관동지방 무더위(40.3℃) 사망 5명
1998년 일본, 무인 화성탐사선 `플래닛-b` 발사
1998년 러시아 정부, 조성우 주러 참사관 추방, 한국정부 보복조치로 올레그 주한 참사관 맞추방
1997년 미국 패스파인더호 화성탐사 성공
미국의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호가 1997년 7월 4일 화성 착륙에 성공, 탐사에 들어갔다. 탐사의 주된 목적은 화성의 생명체 존재 유무를 가리는 것이다. 1996년 12월 4일 미국 케이프 커내버럴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패스파인더는 7개월동안 1억9천1백만km 거리를 날아 광할한 아레스 밸리스 평원에 도착했다. 패스파인더는 무인우주선으로는 사상 처음 직경 1m 가량의 풍선 24개에 의존해 착륙했다.
패스파인더의 작업에는 첨단기술이 동원됐다. 탐사선은 모선 `프로브`와 탐사로봇 `소저너`로 나뉘어 있다. 프로브는 착륙지점에 정착해 소저너를 풀어준 뒤 대기를 분석, 자료들을 지구에 전송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흑인노예 폐지론자 소저너 트루소의 이름을 딴 소저너는 초속 1cm 정도의 거북이 걸음으로 축구장만한 크기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질 탐사활동을 벌였다
1996년 아랍계로 위장한 남파간첩 정수일(무하마드 깐수) 구속
국가안전기획부는 그동안 필리핀계 아랍인으로 위장-행세했던 남파간첩 정수일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96년 7월 4일 구속했다. 안기부는 정수일이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필리핀인, 중국인, 아랍인 등으로 3차례 국적변조 과정을 통해 교묘히 신분을 위장 10여년간 국내에서 암약해온 남파간첩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정수일은 북한에서 출생한 한국인이지만 모습이 중동인과 흡사한데다 콧수염을 길렀고 아랍어과 영어,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알아 사람들이 그의 출신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난 1984년 4월 “말레이시아 대학교수로 근무하다 자료수집차 방문했다”며 입국,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단국대 사학과 박사과정을 밟아 1988년 학위를 취득한 뒤 단국대 사학과 교수와 외국어대 대학원 아랍어과 강사로 활동해 왔다.
그는 단국대에서 사학과 교수로 ‘동서교류사’를 강의하면서 1992년 6월엔 ‘신라-서역 교류사’를 한국어로 펴냈고 1995년 7월엔 ‘세계속의 동과서’ 등 고대 한국과 아랍과의 관계에 대한 책을 내 이 분야의 권위자로 알려지게 됐고, 신문기고와 방송 출연이 잦아지면서 일약 유명인사로 부각됐다.
그러나 이처럼 감쪽같은 그의 위장술은 7월 3일 서울 중구 소공동 p호텔에서 ‘한-미 국방부국장급 미사일 회담’에 관한 군사관련 정보를 북한 공작원에게 팩시밀리로 보내다 적발되면서 전모가 드러나게 됐다. 대법원은 1심과 2심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된 뒤 대법원으로 환송된 정수일 피고에게 1997년 12월 26일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그는 복역 중이던 2000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대전교도소에서 석방돼 저술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1996년 김수한 국회의장 피선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한국과학기술대학(KIT) 통합
1987년 프랑스 법정, ‘리용의 백정’ 클라우스 바비에게 종신형 선고
제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44년에 프랑스 남부 리용에서 나치스의 게슈타포(나치스 독일의 비밀경찰) 대장으로 있으면서 유태인 7천5백여명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 4천3백여명을 살해한 혐의로 프랑스 법정에 회부된 ‘리용의 백정’ 클라우스 바비에게 1987년 7월 4일 법정최고형인 종신금고형이 선고됐다.
바비는 독일 패전하자 남미 볼리비아로 도망가 숨어 살았으나 나치전범 추적자 비트 클라스펠트가 10여 년에 걸친 추적 끝에 1971년 소재지가 드러나고 말았다.
프랑스 정부는 10여년에 걸쳐 볼리비아와 송환협상을 벌인 끝에 1983년 미테랑 대통령 시절에 바비를 프랑스로 데려왔다. 이같이 송환이 늦어진 것은 2차대전 종전후 미육군방첩대(CIA)가 바비를 체포해 정보원으로 이용한 뒤 볼리비아로 빼돌리는 등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바비는 2차대전때 자신이 학살을 자행했던 리용감옥에 수감됐으며 이날 선고된 종신금고형으로 복역중이다가 1991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1982년 멕시코 새대통령에 미겔 데 라 마드리드 당선
1981년 한국, 소련에 직접교역 제의
1981년 전두환대통령, 프렘 태국수상 정상회담
1981년 쿠바 아바나 국제의회연맹(IPU) 총회에 한국 초청
1980년 첫 국산 남제주 화력발전소 준공
1976년 이스라엘 특공대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전격 인질구출작전 성공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남북간의 긴장완화와 통일문제에 관해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발표한 성명으로 미국과 중공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종래의 대미의존적인 안보정책에서 탈피하고자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한 결실이 7.4남북공동성명이다.
성명이 나오기까지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이 각기 상대방을 방문(서울방문시에는 박성철 제2부수상이 대신 방문)해 회담을 진행했다.
그 내용은
1.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 해결
2.돌발적 군사사고 방지, 상호간의 신속한 업무처리를 위한 서울과 평양간의 상설 직통전화 가설
3.남북적십자회담에 대한 적극 협조
4.상대방에 대한 중상비방, 무장도발 포기
5.남북간 다방면의 교류
6.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이다.
1952년 경찰 포위 속 발췌개헌안 국회통과(제1차 개헌)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을 목적으로 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부결되고 오히려 그와 대립하고 있던 국회가 1952년 4월 내각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별도로 제출하면서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 시작됐다. 국회 내 교섭단체 ‘신라회’가 혼란한 틈을 타 제3의 개헌안을 제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승만과 국회의 개헌안을 적당히 버무려 발췌한 개헌안이라 해서 ‘발췌개헌안’으로 불린 이 개헌안은 국회안을 일부 수용했다지만 야당의원들에게 명분을 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할 뿐 직선제와 양원제를 그대로 살린 사실상 이승만의 개헌안이나 다름없었다.
이승만은 개헌안 통과를 위해 다양한 카드를 동원했다. 구속된 야당의원 10명을 석방해 협조를 유도했는가 하면 경찰들을 의원들의 자택으로 보내 참석을 종용했다.
7월 4일 밤, 의사당의 문이 봉쇄되고 군경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발췌개헌안이 기립표결로 통과됐다. 163명이 찬성하고 3명이 기권했다. 이로써 극도의 불안과 긴장을 조성했던 정치파동도 일단락됐지만 이승만에게는 재선과 장기집권의 길이 열렸다
1950년 미국군과 북한군, 오산서 첫 접전
1946년 필리핀, 미국으로부터 독립
1946년 7월 4일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이 독립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기간까지 포함하면 425년 만이었다.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어 마누엘 록사스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대통령 취임식은 비가 오는 가운데 진행됐다. 취임식에 참석한 수십만 군중 앞에 선 록사스 대통령이 `필리핀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식장에 게양된 성조기가 내려지고 그 자리에 필리핀공화국기인 `태양과 별의 기`가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게양됐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필리핀 제도를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미국은 필리핀을 영구적으로 식민지화 할 생각이 없고 다만 필리핀이 민주적 자치능력이 생길때까지만 지배하겠다고 했지만 이 기간이 36년간이나 지속됐다. 필리핀은 1934년 미 연방의회로부터 자치권을 승인받아 1935년에 발족한 필리핀 연방의 대통령에 케손을 선출한 바 있다
1945년 미국 육군, 탄도요격미사일 개발 건의
1934년 퀴리 부인 사망
사인은 라듐에 의한 중독이었다. 의사들은 일생동안 방사능을 과도하게 쪼인 그녀의 모든 생채기관들이 서서히 파괴돼 죽음에 이르렀다고 소견을 밝혔다.
퀴리는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출생했다. 1891년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조국을 떠나 파리의 소르본대학에 입학한 퀴리는 1893년 학사시험을 수석으로 패스하고 공업진흥회의 위촉으로 강철의 자기 특성을 연구하다 남편을 만났다. 방사능을 찾기 위한 마리의 연구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녀는 1896년 앙리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광(鑛)에서 발생하는 신비한 광선을 토대로 연구를 시작했다.
1898년 퀴리부부는 마침내 방사능을 방출하는 두개의 새로운 원소를 찾아냈다. 마리는 두고온 조국 폴란드를 위해 첫번째 원소 이름을 폴로늄이라고 짓고 다른 하나는 라듐이라고 불렀다. 퀴리는 1903년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방사능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남편이 사망한 뒤인 1911년에는 라듐의 발견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1925년 을축(乙丑)대홍수. 사망 6백70명
1925년 7월 4일부터 `을축년 대홍수`라 일컫는 홍수가 시작됐다. 이날부터 9월까지 네차례에 걸쳐 전국을 휩쓸어 6백70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재산피해는 가옥침수 및 붕괴 7만여호, 논밭 유실 약10만단보 등 1억3백만원을 기록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서울이었다. 1차 (7월9~12일) 와 2차 (7월15~19일) 두 차례 9일간에 걸쳐 서울에 내린 강우량은 무려 7백48.9㎜였다. 한강 수위는 뚝섬 13.59m, 인도교 11.66m, 구(舊)용산 12.74m로 사상최고를 기록했다. 서울은 온통 물바다였고 영등포와 용산은 한강 제방이 유실돼 3만여정보가 진흙밭이 됐다. 용산 철도관사들은 1층 천장까지 물이 들어찼으며, 용산역도 침수됐다. 뚝섬은 거의 모든 집들이 지붕까지 침수됐다. 청량리에선 역(驛)으로부터 용두교까지 나룻배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진풍경을 빚기도 했다
1918년 소련, 소비에트공화국 헌법 채택
1917년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단체 조직·후원 위해 무역회사 동제사 창립
1916년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1910년 제2차 러일협약 조인
1900년 재즈 음악인 루이 암스트롱 출생
1872년 미국의 제30대 대통령 쿨리지 출생
1861년 인도 체라푼지 지방 큰비, 7월 한 달 동안 9,300mm 강우(세계최고기록)
1831년 제임스 먼로 미국 대통령 사망
1826년 미국 작곡가 포스터 출생
1826년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사망
1807년 이탈리아 통일운동가 주제페 가리발디 출생
1804년 `주홍글씨`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호손 출생
1776년 미국, 독립선언
1776년 7월 4일 본국 영국과 갈등을 빚어온 북미 식민지 대표들이 본국에 대해 독립을 선언했다. 대표들은 필라델피아 식민정부 회의실에서 3차 대륙회의를 갖고 영국의 가혹한 지배에 반대해 식민지의 독립국임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대표들은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일제히 환호하며 눈물을 흘렸다. 종교적 자유를 찾거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혹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북미로 온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위해 영국과의 충돌도 감수한채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독립선언은 본국과 계속적으로 투쟁을 벌여온 식민지 주민들의 의지가 모아진 것이다.
1388(고려 우왕 14)년 위화도 회군한 이성계 9일 만에 개경 도착(음력 6월 1일) 최영 고양으로 귀양 보내고 우왕 강화도로 쫓아냄
1187년 이슬람 살라딘, 하틴전투 승리
유대교ㆍ이슬람교ㆍ그리스도교 모두가 성지로 여겨온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 수중으로 넘어간 것은 이슬람군이 1차 십자군 전쟁에서 패한 뒤인 1099년 7월이었다.
이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의 영토가 된 것은 불세출의 영웅 살라딘이 등장하고 부터였다. 쿠르드족이었던 살라딘은 종족과 종파로 뿔뿔이 갈라진 아랍을 하나로 묶은 위대한 군주였다. 그에게 예루살렘은 늘 눈엣가시였다.
1187년 7월4일, 1만5000명의 그리스도교군과 1만8000명의 이슬람군이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 중간에 위치한 하틴에서 맞붙었다.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초전, 그리스도교군은 참패했다. 살라딘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팔레스타인 해안가에 위치한 유럽인들의 영토로 쳐들어가 10월2일, 88년간 유럽인들의 왕국이었던 예루살렘을 마침내 굴복시켰다. 살라딘은 이때도 관대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 예루살렘의 왕을 풀어줬고 성안에서 결혼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공격을 하루 늦출 정도였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760여년간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1999년에 미 타임지는 ‘지난 1000년 세기의 인물’을 선정하면서 살라딘을 12세기의 인물로 당당히 올렸다.
943(고려 태조 26) 고려 세운 왕건 세상 떠남(음력 5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