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숙의 노래 https://g.co/kgs/Kowxsm
半世紀도 훨씬 더 지나버린
1960년도에 있었던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우리나라가 무척 가난하고 어려웠던 그시절,
그녀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기에
국민학교도 마치지 못한채, 서울로 올라와
구로동에 있던 구로공단 가발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공장에서 받은 월급은 최소한의 자기 생활비만 남기고 동생들 학비와 家事에 보탬이 되라고 시골 부모님에게 모두 내려 보냈다.
그러기를 십여년이 지나면서, 찌들게 가난했던 시골집 생활이 그녀의 송금으로 조금씩 나아졌다.
그리고
문득 자신을 돌아 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서른이 가까운 노처녀 나이가 되어 있었고 지나간 세월이 너무도 아쉬웠다.
이제라도 자신을 위해 投資 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검정고시 준비를 한다.
그녀는 대학에 들어가 글을 쓰는
국어 선생님이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종로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고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래서 중학교졸업 자격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그러든 그녀에게 변화가 생긴다.
다니던 학원의 총각 선생을 思慕하게 된 것이다.
착하고 순진한 동숙은 총각 선생 자취방까지 찾아가 선생 밥도 해주고 옷을 빨아 주며 자기 나름대로 혼자만의 행복을 느끼게 된다.
두 남녀는 장래를 약속하면서 그녀는 몸과 마음을, 그리고 가지고 있었던 금전까지도 모두 그에게 바치게 된다.
그런데 가발공장은 세월이 지나면서 전자산업에 밀려서 그녀가 다니던 가발공장도 減員과 不渡로
인하여 결국 직장을 잃은 그녀는 학원비 때문에
학원도 나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할 수 없이 동숙은 부모님 도움을 얻으려고 시골에 내려와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부모님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부모님은
"야 아~, 여자가 공부는 무신공부냐? 여기 있다가 시집이나 가그라"며 冷待 했다.
10년 동안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동숙은 너무나 서운했다.
그녀는 부모님을 원망하며 울면서 서울로 다시 올라온다.
동숙이가 만난 학원에 같이 다녔던 친구들은 모두가
"너가 사귀던 박선생 그분은 알고보니 약혼자도 있고 이번에 결혼한다더라. 너를 등처먹은 거나 다름없는기라,
가시나야!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라고 힐난했다.
하지만, 동숙은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고
그를 만나서 확인을 하고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미 마음이 싸늘했고
"너와 난 학생과 제자 사이 아니냐. 내가 어떻게 너를 내 아내로......
그리고 니가 좋아서 날 따라 다녔지 내가 좋아한 것은 아니니 그냥 고등학교 검정고시나 잘 보라구......."
"알았씸더 샌님예~........."
더 이상 긴 이야기가 필요 없었다.
이미 농락 당한 여자임을 알게된 동숙은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동생들과 부모님에게 희생만 당하고
그리고 또 한 남자에게 배신 당하고 그렇게 살아 온 동숙은 과연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어차피 내인생은 이런거야" 하며 동숙은 처절하게 비관을 한다.
그녀는 동대문 시장에서 匕首를 하나 구입해서
가슴에 품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수업시간,
그 선생이 칠판에 필기를 마악 쓰고 돌아 서려는 찰나 원한에 찬 동숙은 선생 가슴에 복수의 비수를 꼽았다.
"야, 이놈아! 짐승보다 못한 나쁜놈아~"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비명 소리에 남자는 쓰러 졌고 동숙은 경찰조사를 받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남자 어떻게 되었어요? 제가 잘못 했어요. 형사님! 제발 그 선생님만 살아나게 해 주세요"라고 울부짓는다.
자신을 탓하면서 사랑했던 남자의
안부를 더 걱정하는 여지였지만 결국 동숙은 살인 미수죄로 복역을 하게 된다.
가난 때문에,
자신을 전혀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오직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그녀가 뒤늦게 얻은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殺人未遂者라는 비극으로 마무리한 "사랑의 생활수기"가 그 당시 某 여성 주간지에 실려서 그때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 그녀를 모델로 하여 영화도 만들어졌고
그 이름도 유명한 ''동숙의 노래''도 만들어 졌다.
한산도가 이 동숙의 사연을 노랫말로,
백영호가 작곡을 하여 曲을 붙인 후 1966년 10대를 벗어나지 않은 앳된 소녀였던 허스키 보이스의 문주란이 '동숙의 노래'로 신인가수로 일약 가수 데뷰를 하였다.
그때 문주란의 나이는 10대를 벗어나지 않은
앳된 소녀였기에 "10대를 벗어나지 않은
앳된 소녀가 가수로 데뷰하였다"고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 떠들썩했었다.
결국 이 사연은 대힛트를 치면서 덩달아 '동숙의 노래'도 대힛트를 치게 되어서 문주란은 가수의 길로 들어섰고 연이어 '낙조, 타인들, 돌지않는 풍차등'의
힛트곡을 내는 신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문주란이 부른
<동숙의 노래> 가사를 보면,
1절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마음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죄 저질러 놓고 흐느끼면서 울어도 때~는 늦어리
때는 늦어리~''
2절
''님을 따라 가고픈 마음이건만 그대 따라 못가는 서러운 마음
저주 받은 운명에 끝나는 순간
님의 품에 안기운 짧은 행복에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
뜨거운 눈물~.'
지금 MZ세대, 아니 40,50살 정도의 청장년 세대들도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을 배고품의 서름이 뼈속까지 사무치는 '눈물 젖은 보리고개'를 이기고 넘어가야 했을 정도로 찟어지게 가난했든 우리의 1960년대,
그 당시 우리의 많은 10대 여공들은 돈없어 배우지 못한 서러움과 냉대속에 동숙이와 같은 가슴 아프고 슬푼 삶을 살아야만 했든 숙명의 시대었다.
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동숙의 일생이 잘 표현된 이 노래를 다시 한번 더 듣고 또 다시 들어 보시라.
우리나라의 60~80년대 그때의 남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독일 광부로,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월남전 파견과 열사의 나라 중동 건설 현장에서 밤을 낮삼아 일한 피땀의 댓가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여자들은 독일간호사 파견과 전국의 각종공단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여 번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식들이나 동생들 공부시켜가며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공헌해 왔던것이 사실이다.
위 '동숙의 노래와 같은 수 많은 안타까운 사연을 보아오면서 느꼈던 점은,
' 이 세상 어디에도 공짜로 얻이지는 건 없다'는 점이다.
70년대 중반,
고시(지금의 사법시험)공부를 하다가 중앙청에 고시된 결과를 본 후 내려오면서 재미삼아 본 대우실업입사시험에 최상위 성적으로 붙었지만 고시준비생이라 다닐 생각이 없었는데 당시 김우중 회장의 권유로 입사 후 첫 발령지가 봉제가공공장인 부산5공장이였는데 당시 28,000명의 앳된 여공이 일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월 26000윈쯤 받았는데,
저기 동숙이처럼 시골에 돈을 더 보내기 위해서 서로 잔업을 부탁하면서 자원할 정도로 아주 힘들었든 시기 끝에 소위 한강의 기적을 낳아서 오늘의 한국이 되었는데도, 나라부국에는 전혀 기여도 없는 오직 헐뜯기만 했던 일부 정치인들과 전교조의 잘못된 교육을 받은 지금의 젊은이들은 이를 모른체 폄훼하면서 일은 하지 않고 정부로 부티 온갖 공짜돈을 챙기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현실이 딱하기도 하다.
지금 민노총의 전신인 도시산업선교회(소위 도산)가 들어온 공장은 이들의 강성투쟁으로 하나같이 망했는데, 우리 구로동 공장에도 들어와서 내가 가서 설득하고 지켰지만 결국 문을 닫아 당시 약 2600명의 여공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나중 이들이 찾아와서 "잘못 했으니 제발 다시 가동해 달라"고 울고불고 하소연 했지만 이미 공장은 가전공장으로 넘어갔기에 내가 할수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동숙의 노래 가삿말 이야기'를 적으면서 보니 그 당시가 생각난다.
그 당시 부추킨 都産놈들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호위호식하고 있는데 반해서 아무것도 모른체 무지해서 도산놈들 말에 속아서 부화뇌동했었던 그 순진한 여공들은 그 후 셋방살이로 근근히 연명하는 것을 참으로 많이 보았고 하도 딱해서 알게 모르게 도와준 적도 많다.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아보인다.
온깆 감언이설로 부추키면서 뒷 구멍으론 코인투기나 해서 부를 챙기는 썩어빠진 인간들을 보시라.
이렇게 피땀흘러서 묵묵히 일한 이분들은 지금 70대, 80대, 90대 노년, 피땀흘리며 일하고 벌어서 일제 강점기와 6.25라는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겪으며 세계 最貧國이였기에 草根木皮로 근근히 목숨을 延命하며 살아가던 헐벗고 먹고 살기 힘들었던 우리나라를 세계10대 경제대국으로 만든 동력들인데도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피땀 흘려 일하기 보다는 정부에서 나눠주는 몇푼의 공짜 돈에 현혹되어 거지처럼 눈이 멀어있다는 말이 부디 風說
이기를 믿고 싶을 뿐이다.
또한 지금, 우리나라 경제발전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양 착각을 하면서 이들 경제 개발세대를 가르켜 "꼴통, 들딱"이라 하며 폄훼하는 현실이 정말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따라서 그 당시 허리띠 졸라 매면서 피땀 흘러 일했던 경제개발 주역들이 제발 제대로 평가받는 교육과 인식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