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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의 고난을 이겨 낸 요셉 같은 기적의 인생 드라마
1949년 당시 12세인 임종덕은 만주의 간도 소재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해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 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미처 피난도 못 간 채 고아가 된다. 임종덕은 고아가 된 그날의 불행을 6-25전쟁이 61년이나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뻘 되는 청년이 그에게 서울중학교 한 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그때 서울중학교에는 인민군이 주둔해 있었고, 이곳에 억류된 청년 수십 명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터에 나가도록 돼 있었는데,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고 지시한 것이다. 평소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 가서 교실 옆 목조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 자신의 집으로 도망갔다. 집에 도착한 그는 집 뜰에 있는 큰 나무에 올라가 그 속에 숨었다. 잠시 후 인민군 지프차가 집 앞에 도착, 인민군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침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이 있는 곳을 대라고 위협했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면서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조금 뒤 부모님은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들은 부모님이 반동분자이기 때문에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형식적 재판이 끝나자 총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미리 준비해온 장작더미 위에 시신을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이 끔찍한 만행을 나무 위에서 두 눈으로 목격한 임종덕은 그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없이 걸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다시 9-28 서울 수복 때 어떤 미군 대위를 만나는데, 그 대위는 임종덕 소년을 친동생처럼 보살펴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그를 데리고 간 미군 대위가 전사하자 그는 다시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한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구걸생활을 했고, 그러다가 그는 자기보다 어린 다른 고아들을 모아 당시 서울 불광동에 있던 <희망원>이란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열다섯 살이었지만 그는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던 어느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 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고, 임종덕도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해서 고아원을 뛰쳐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 하면서 스물아홉 명이 따라오고 있질 않는가. 그는 깜짝 놀라 그들에게 돌멩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소리질렀다. “나 혼자 얻어먹기도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 하면서 계속 돌멩이를 던지며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고불며 그를 따라왔다. 저녁 무렵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돌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구걸하러 나갔다. 두 시간 후 이들이 얻어온 갖가지 음식을 다 모아서 비빔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지만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잠잘 곳이라도 찾았기에 그는 행복했다. 즉,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나니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를 구분했고 엄격한 규칙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 거지로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중요한 규칙 몇 가지를 교육받기도 했다.
1. 밥을 얻으러 가서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어서 담을 깡통이나 그릇을 꼭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 번 가지 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마라.
한편 날이 갈수록 고아들은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된다. 임종덕은 고아 동생들을 살리기 위해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한다. 사정인즉슨, 그렇게 많은 아이들은 제대로 못 먹고 질병으로 그 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기도 하고. 약 사먹을 돈이 없어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결심을 한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그 해가 1952년.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또 약 값에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뿐 아니라 부잣집 담넘기를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디오 같은 걸 훔친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온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좀 돈있어 보이는 손님을 찾으려고 엿보던 그는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가 미군 전용주차장에 도착하는 걸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그를 환송하려고 대기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 트렁크가 약간 열린 걸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자기를 돌봐주며 데리고 다니다 전사한 미군 대위의 부대에 있을 때 배운 서툰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그가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죽는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이 광경을 유심히 보고 있다 자초지종 보고를 받은 장군은 절도죄로 임종덕을 파출소로 연행하려는 헌병들에게 그를 조선호텔로, 즉,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자리를 사양하면서, “내가 없으면 100여 명 되는 고아들이 당장 굶어 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 명 고아들의 생활 실정을 확인해 그게 사실이면 그 고아들 모두 미공군이 운영하던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그리고 임종덕의 심성과 리더십을 갸륵히 여겨 그를 자신의 하우스보이로 일하게끔 해주라고 명령했다. 그가 바로 미5공군 사령관 스티브 토머스 화이트 중장.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었지만 작전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중 전사했다.
그런 가운데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간 유심히 지켜본 어느날 그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다” 라며 양자로 입적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쌩큐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그는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날 그는 사령관을 따라 수원 미공군기지를 찾았는데,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난다. 같은 하우스보이로 이곳 공군기지에서 일하는 김장환이라는 소년. 그는 후일 수원중앙교회 원로목사가 되었다.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냐”라며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하는 이곳 하우스보이 자리를 임종덕이 차지하러 왔다고 의심한 것. 그러나 잠시 후 오해를 푼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보이가 되었냐, 누구 빽이냐”며 너무 궁금하다면서 계속 캐물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듣고 난 김장환은 그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히 말했다. 즉,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 형무소 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는 미군들이 먹고 남긴 각종 음식이 많이 있어서 김장환은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먹었다. 다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가 몇 켤레가 있는 걸 보고 “저것도 가지고 가 시장에 팔면 돈이 될 거다” 하며 가지고 가자고 했다. 허나 김장환은 절대 반대했다. “음식은 남은 거니까 다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는 갖고 가다 들키면 도둑놈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극구 만류했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 후에도 혼자 흙투성이 군화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 가지런히 놓아두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는데, 바로 미군이었다. 김장환은 이날의 인연으로 나무지게꾼 소년에서 하루아침 당장 수원의 미공군부대 하우스보이가 된 것이다. 김장환의 얘기를 듣고 난 임종덕은 마음속으로 우리는 다 절도와 관련된 운명으로 하우스보이가 되었구나 하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다. 김장환도 일요일이면 여중생들과 항상 모임이 있는데 임종덕을 보고 꼭 놀러오라고 했다. 그 후 임종덕은 일요일만 되면 초컬릿과 온갖 과자를 가방에 가득 넣고 김장환을 찾아갔다. 그를 찾아가는 첫째 목적은 여학생들을 사귀보고 싶은 것. 이렇게 둘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김장환은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임종덕의 신앙과 교육을 위한 양아버지의 원대한 계획
1953년 어느 일요일,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던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그 자리에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맨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 등 외국 고관들이 앉아 있었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 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 자유당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면전에서 새파란 20대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속으로 “저 목사님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 대통령은 설교단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모두 다 목사님 설교를 깊이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아가십시오” 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 군목은, 특히 공군 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당이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 쓰는데 하루빨리 우리 공군도 자체 교회를 갖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위치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금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목사인 임동선 목사다.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 졸업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처음엔 미국행을 몹시 주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게 당한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반드시 공산당을 타도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아들을 설득했다. 한편 임종덕도 생각해 보니 지금 아버지께서 미본토로 근무지가 바뀌어 곧 출국하는데, 만일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또 다시 고아신세처럼 된다는 건 뻔한 일이었다.
1953년 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사령관으로 발령돼 본국으로 귀환한다.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오랜 역사와 전통의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에 만족하면서 하루 영어 단어 100개를 외우는데, 만일 하루에 100개를 못 외우면 그날 저녁 식사를 굶으면서 밤새워 단어를 외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임종덕은 하버드 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면서 그의 향학열은 더욱 불타오른다. 1957년 하버드대 2학년 여름방학, 다른 학우들은 모두 여행을 떠났지만 임종덕은 기숙사에서 방학숙제와 리포트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앞으로 인류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테마로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실로 40년 이상 앞을 내다본 이 논문이 하버드대 학생저널에 게재되자 미국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 외교안보 보좌관이던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에다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 “중국이 앞으로 문화중심이 될 수도 있다”라고 썼는데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몇 년 뒤 임종덕은 “2차대전후 Buy American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논문으로 하버드대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임종덕의 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한 그의 양부모는 감격을 억제 못해 눈물을 흘렸다. 소매치기와 절도로 전락한 전쟁고아를 자신에게 맡겨 오늘의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화이트 장군은 계속 감사기도를 드렸다. 특히 이날 학위식에는 화이트 장군의 가까운 동료 장성들이 대거 참석해 임종덕 박사를 자신의 아들처럼 껴안고 뜨겁게 축하해 주었는데, 하버드 개교이래 그야말로 최고의 “별들의 잔치”였다.
그 후 임종덕은 25세 나이에 군 입대를 해 4년간 장교로 복무하는데, 특히 낙하산 훈련과 특공대 훈련에서 1등으로 수료한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대사관 무관. 미국 정부는 임종덕을 아마 외교관으로 키울 계획이었지만, 그는 6개월 만에 월남전에 자원해 특수부대로 갔다. 그의 임무는 미군포로 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 어느날 임종덕 대위가 작전을 마치고 지프차로 귀대중 매복중인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숫적으로 불리함을 판단,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그들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하고 대신 자신은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임종덕을 지켜준 건 하나님. 임종덕은 먼저 포켓 성경을 꺼내 급히 손에 잡히는 대로 몇장 찢어 몸속에 감추고 성경을 풀 속에 던졌다. 이 포켓 성경은 지난날 장교 훈련소에서 함께 지낸 동료가 준 선물이었다. 이때만 해도 임종덕은 확고한 신앙이 없었기에 그 동료는 임종덕을 항상 안타깝게 여기고 “너는 키도 작고 연약한 몸이니까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너를 꼭 지켜주실 거다. 그러니 이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고 했다. 임종덕은 그 친구의 강력한 권고로 성경을 꼭 세 번 읽고 난 후부터 성경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걸 하나님께 의지했다”고 했다. 그 때 장교시절 자신을 확고한 신앙으로 인도해준 그 동료는 지금 뉴욕에서 거대한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앞서 포로가 되기 직전 성경에서 몇 장 찢어 늘 간직한 것은 시편 1장에서 3장까지였는데, 특히 3장의 내용이 그에게 항상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는 수용소에서 “하나님께선 왜 저를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까”라며 짜증 섞인 기도를 자주 했다. 그러던 어느날 기도 속에 탈출이라는 말이 자주 튀어나왔다. 급기야 그는 절박함 속에 간절한 기도를 끝내고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한다.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왔다. 단신체구인 그는 단 한군데도 부상 없이 월맹군 부대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찾아왔고, 부대는 함성으로 뒤덮였다. 특히 월맹군 지역의 포로수용소 위치와 주요 부대의 배치 내용도 알고 왔다. 한편 임종덕은 이때 국방부로부터 정식 그린베레 대원으로 임명받는다. 그의 활약은 주야간 쉴 새 없이 강행되었다. 적진의 주요 시설파괴, 적군의 고위 지휘자 납치, 그리고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두 번째 포로가 된다. 첫 번 포로에서 탈출한지 3개월만이다. 임종덕은 그 때 처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날 장교 시절 룸메이트였던 친구의 말이 또 문득 생각났다. “하나님은 너를 쓰시려고 이 고된 훈련을 시키신다. 지금 우리가 훈련을 잘 받아내야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너를 도와줄 것이다”라던 말이 이제 와 그에게 큰 용기와 희망이 되었다.
임종덕은 다시 탈출 기회를 노리는데 어느날 특별한 심문을 받는 날이 온다. 즉, 북한군 몇 사람이 임종덕을 유심히 보더니 “이 놈은 틀림없는 남조선 군인이다” 하면서 한국말로 심문하는데, 그는 그들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며 영어를 사용했다. 즉, 자신은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은 그를 엎드리게 해놓고 야구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그야말로 개패듯 내려쳤다. 임종덕은 기절직전까지 갔다. 그들이 바라는 건 그의 입에서 “아이구 죽겠네! 아이구!”라는 말이 단 한마디만 튀어나오면 그를 한국군으로 인정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종덕은 고통과 신음속에 “오마이갓”이란 비명만 계속 질렀다. 북한군은 자기들끼리 조용한 목소리로 “이놈이 진짜 남조선 놈은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계속 의심을 하며 수용소를 나갔다.
2번째 포로가 된 임종덕을 다시 찾아온 하나님
그 뒤 임종덕은 월맹군 최북단 수용소로 이송된다. 이곳은 당시 소련, 중국, 북한으로 쉽게 보낼 수 있는 포로들의 집합소였다. 그런데 여기서 임종덕은 기막힌 현장을 목격한다. 어느 날 그는 수용소 사무실로 불려나갔다. 월맹군 장교 4명과 경호원 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6발이 장전되는 소련제 권총의 탄창 칸의 어느 한 칸에만 실탄 1발을 장전하고는 탄창을 몇 바퀴 돌린 다음 권총을 그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그리곤 이 권총을 임종덕 자신의 머리에다 대고 발사하라고 했다. 권총 방아쇠를 당길 때 탄창칸에 다행히 실탄이 없으면 살고 만일 있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다. 그러니까 죽을 확률은 1/6. 소위 “러시안 룰렛”이란 살인 놀음판이다. 그때 책상에는 승자가 가질 판돈이 놓여 있었다. 즉, 임종덕이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 각자가 택한 것에 돈을 걸어놓고 놀음판을 벌이는, 그야말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었다. 임종덕은 이 순간 하나님께 마음속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여기서 이 악독한 무리들에게 생명을 빼앗긴다는 건 너무나 억울합니다 …….” 드디어 경호원의 명령으로 임종덕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히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긴 팀의 군인은 책상 위의 돈을 자신의 포켓에 다 넣었다.
수용소의 고위 관리자들이 하루하루 일과가 너무 심심해 이 러시안 룰렛 놀음판을 매일 한 번씩 하는데, 어떤 날 권총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시신은 바로 옆에 있는 강으로 던져져 악어가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 임종덕은 이 무서운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자나 깨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에 매달렸다. 그리고 탈출 계획을 세운다. 다시 러시안 룰렛 놀음판에 불려 나가면 지난번과 같은 상황에서 4초 안에 현장에서 그들을 무력화시키고 도망친다는 대범한 계획이었다. 즉, 4초란 것은 1초에 한 명씩 박살하고 100미터 정도 떨어진 메콩강에 뛰어드는 것. 그런데,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놀음판에 불려가던 것이 순서였는데 한 달이 되었는데도 임종덕을 부르지 않았다. 그는 날로 초조했다. 곧 월맹을 떠나 북한이나 중국으로 끌려가리라 생각했다. 그는 “4초 탈출”이란 작전을 세워 마치 운동연습을 한다는 듯이 흉내를 내면서 4초 탈출의 연속된 동작훈련을 한달 동안 계속했다. 그는 후일 “그때 한달 동안 그들이 나를 부르지 않은 건 바로 하나님께서 나의 탈출을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한 충분한 훈련시간을 주시려고 했기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한 달이 지난 어느날 드디어 임종덕이 그들에게 불려나갔다. 4명이 권총을 차고 서로 2명씩 마주 보고 앉았다. 이날 따라 여자 경호원은 총을 옆에다 세워놓고 그냥 서 있었고, 임종덕은 경호원 옆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힘차게 불렀다. “하나님 한달 동안 훈련시켜 주신 4초 탈출의 성패가 지금 하나님 손에 달렸습니다. 우선 권총 탄환이 탄창의 첫 번째 칸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상대방 한 명이라도 사살할 수 있습니다 …….” 이윽고 장교 한 명이 자기들끼리 서로 보는 앞에서 권총에 탄환 한 발을 장전, 탄창을 두루룩 돌린 후 임종덕에게 건넸다. 권총을 받자 그는 순간 용기가 생겼다. 조금 전 그토록 불안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틀림없이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한 달간 연마한 4초 탈출 작전을 개시했다. 그는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는 척 하다가 가장 경계하는 표정의 상대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꼬꾸라지자 임종덕은 평소 닦은 그린베레의 무술로 다른 상대방들이 권총을 꺼내들기도 전에 4초 만에 그들을 격파하고 강을 향해 뛰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순간, 강물로 뛰어든 그는 지난날 특수전훈련 때 배운 대로 뛰어든 물속 바로 그 위치에서 10분을 잠수해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월맹군들이 강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잠깐씩 숨을 몰아쉬려고 순간 순간 수면에 올라와보니 월맹군들은 멀리 2백 미터쯤 떨어진 강물에다 사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사이 임종덕이 2백 미터 이상 도망갔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대형 물뱀과 악어들 속에서 살아나다.
임종덕이 뛰어든 강은 메콩강 지류라서 악어와 5미터 이상 되는 물뱀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그는 강물을 헤엄쳐 떠내려가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저 악어들과 물뱀들이 저를 보지 못하게 저 동물들의 눈을 가려주옵소서” 라고 계속 이 기도만 했다. 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난 그는 밀림 속으로 숨어들었다. 매일 같이 큰 개구리를 잡아먹었으며, 어떤 날은 4미터 넘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나무 위에 걸쳐 말리면서 1주일간 먹었다. 그는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 쪽이 남쪽이라고 판단, 계속 밀림 속을 걸었다. 어느날 미군 헬리콥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순간 그는 자신을 알리려고 강가의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리콥터를 향해 미친 듯 펄쩍 펄쩍 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리콥터는 베트콩 복장을 한 임종덕을 발견하고 그가 베트콩이라 오인해 오히려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그는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단 한 군데 부상도 없이 밀림속에 다시 숨었지만 엄청난 절망감으로 쓰러져 누웠다. 헌데, 의식이 몽롱해진 그에게 또 그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제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그는 무조건 강가 백사장으로 다시 뛰어나가 헬기를 향해 필사적으로 두 손을 흔들어댔다. 그 때 헬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한다. 비록 베트콩 군복을 입었지만 저 사람은 분명 월남군의 패잔병이야 라고 판단하고 그를 구출하고자 백사장에 비상착륙을 감행했다. 천신만고, 임종덕은 헬기에 타자마자 실신, 공군병원으로 이송된다. 병원에 도착, 의식이 회복되자 그는 자기가 미군 그린베레임을 밝혔다. 즉시 신원을 확인한 미군 수사관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겠다고 연락처를 대라고 했다. 임종덕은 공군참모총장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연락을 취해 달라고 하자 수사관은 임종덕을 조금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임종덕은 즉시 메모지에 아버지 이름을 정확히 써 주었다. “미합중국 공군참모총장 스티브 토머스 화이트 공군 대장.”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계십니다”
정글 속에서 헬리콥터에 극적으로 구출된 임종덕은 사이공의 공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화이트 대장과 전화통화가 되었다. 화이트 장군은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탈출해 사이공에 와 있다는 그의 육성을 자신의 두 귀로 듣고 “이게 혹시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네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네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 라며 감격해 했다. 당시 월남전에서 미군 8명이 포로수용소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 중 임종덕 대위가 제1호 탈출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물론 미국내 참전군인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화이트 대장은 “아들아 내가 너를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구나. 그래 어디 부상당한 데는 없냐”라며 계속 울먹이며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울먹이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그가 항상 아버지께 한 말을 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계신다고 늘 제가 얘기 드렸잖아요.” 임종덕은 1주일간 공군 병원에서 요양하는 동안 3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특히 그 생사의 갈림길마다, 끝까지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내내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째, 임종덕 대위는 와싱턴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는다. “존슨 대통령께서 귀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십시오 …….” 임종덕은 즉시 아버지에게 이 내용을 알렸더니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다면서 그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그에겐 은성무공훈장(Silver Star)와 1계급 특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키가 팔대장 같은 거구인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으면서 감격했다. 그리고 대위가 되면 최소 6년 후에나 소령이 되는데 임종덕은 그 자리에서 바로 소령특진을 받았다. 특히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것은 부하 3명을 살리려고 자신이 몸소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한다. 훈장수여가 끝나자 존슨 대통령은 임종덕을 신기하다는 듯이 아래위 살피며 미소지었다. 키가 1m 64cm인 이 작은 체구에 어떻게 그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공군참모총장에게 “장군은 어떻게 이런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 하고 물었다. 대통령의 질문에 아버지가 금방 답변을 못하자 임종덕이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존슨 대통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심에 다시 한 번 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편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은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미노, 주연 배우에 로버트 더니로우를 비롯한 좐 케세일, 좐 새비지 등이 출연해 전 세계를 감동시킨 영화가 바로 “디어헌터” (The Deer Hunter)였다.
그 후의 남은 이야기
이렇게 임종덕 대위는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처음으로 백악관에 가서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특진했다. 존슨 대통령이 화이트 장군에게 어떻게 이런 훌륭한 아들을 두었냐고 하자 장군도 아들이 대통령에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5년 후 임종덕은 닉슨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두 번째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 안보비서관 임명을 받고 키신저 외교안보보좌관을 도와 정계활동을 한다. 미국-중국의 핑퐁외교 극비합의 성공 이전엔 두 나라는 서로 적성국가로서 외교가 단절된 상태였다.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어떤 외국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탁구경기만 중국정부와 국민의 거부반응이 없어서 임종덕 비서관은 미국 탁구선수단을 이끌고 베이징 샹하이 광저우 등지로 순방하면서 탁구를 통한 양국 스포츠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켰다. 그는 중국 총리 주은래를 여러번 만났는데, 주은래는 그에게 동생 대하듯이 호의를 베풀면서 임종래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그는 모택동도 다섯 번이나 만났다.
임종덕은 36세 때 박정희 대통령의 소개로 결혼을 한다.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키신저가 귀국하는 길에 인접한 일본에도 알려야겠다고 할 때, 임종덕이 한국에도 알려야 한다고 하자 “한국은 당신이 가서 알리시오” 해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박 대통령은 너무나 좋아하면서, 일하느라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은 내가 서겠다고 하며 육영수 여사에게 당부해 독립지사의 가문인 민씨 일가의 규수를 소개받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과 임종덕 비서관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졌다. 한 번은 임종덕이 한국방문시 박 대통령에게 아들 지만이를 미국유학 시키면 어떻겠냐고 하면서, 학비일체를 자신이 부담하겠다는 제의도 했다. 이 말을 듣고 난 대통령은 얼굴이 상기되면서 버럭 화를 내듯 말했다. “내가 내 아들을 유학 보내면 지금 장관 차관 그리고 국영기업체 사장들이 내 눈치만 보고 있는데, 자기 자식들도 전부 다 유학을 보낼 거요. 공장의 여직공들이 피눈물로 벌어들이고 있는 외화가 장관 차관 자식들의 학비로 사라진다면 이 나라가 언제 자립하고 언제 자주국방을 하겠나? 지만이는 육사 졸업후 다행히 중령까지 가서 예편한다면 그 연금으로 살 수가 있다. 그러니 자네 앞으로 지만이 유학 얘기 같은 건 절대 입 밖에도 내지 말게!”
노벨평화상 감이 된 탁구공
1971년 키신저의 중국 극비 방문에서 합의한 대로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해 양국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불과 2.5g인 작은 탁구공이 미-중 외교를 성사시킨 1등 공신으로 노벨평화상감으로 선정돼 세계를 흥분시켰다.
한편 이 무렵 이민 동포를 위한 LA <동양선교교회> 설립에 임종덕이 기여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어느날 임종덕 안보비서관은 LA 출장중 한국에서 온 어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그날 설교한 그 목사를 옛날에 본 기억이 났다. 그가 15세 때 이승만 대통령과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이 참석하는 서울 여의도 미공군교회의 예배에 따라가 한국 공군군종감 임동선 군목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었는데 바로 그 목사였다. 그래서 임종덕 비서관은 임동선 목사에게 70년대에는 한국에서 이민을 많이 올 텐데 이민자들이 서로 위로받을 이민교회를 세우자고 했었고, 1970년 <동양선교교회>가 창립돼 재미동포 8,000명이 모인 가장 큰 한인교회가 되었다. 그 뒤 1975년 임종덕 비서관은 장로로 추대됐으나 자신이 장로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장로학>과 <장로>라는 책 두 권을 숙독하고 자기는 아무래도 자격이 부족하다면서 장로추대를 사양했다.
미국 대통령 3대에 걸친 안보 비서관
임종덕이 함께 일한 키신저가 국무장관이 되어 미-중 외교에 전념해 외교가 순조롭게 진행될 즈음 1974년, 미 합참의장까지 역임한 아버지 화이트 장군은 83세로 서거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미공군사관학교와 아들 임종덕을 훌륭하게 교육한 하버드 대학교에 기증했다. 한편 임종덕은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안보비서관직을 수행했다. 중국과 친선경기로 시작한 핑퐁외교로 1979년 미-중 국교가 정식수립되었다. 그런데 임종덕이 주한미군철수를 고집하는 카터 대통령의 비서관을 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4, 5년 사이 완전 철수시키겠다고 하자 주한미군사령부 참모장 싱글로브 소장이 철군반대를 주장했다. 이틀 뒤 5월 19일 카터 대통령은 싱글로브 장군을 소환해 참모장 직에서 해임했다. 카터 대통령은 임종덕 비서관에게 “한국이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 나의 철군 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 보시오”라고 묻기에 그는 “현재 4만여 주한미군이 억지하여 북한이 도발을 못하며, 한국은 경제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카터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한 병사들을 전부 사면해 주겠다는 방침을 내놓는데, 이 때 아무도 이에 대해 말을 안 했다. 그때 임종덕은, 자신의 장군진급심사를 두 달 앞두고도, 그리고 싱글로브 장군처럼 불이익을 받을 줄 알면서도, “전투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이 사면하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임종덕은 자신의 대통령 비서관 직책이 대통령의 정책수립에 걸림돌이 되어 결례가 된다고 생각해 자진해서 자리를 옮기겠다고 건의하곤 백악관을 떠난다. 떠나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도 그의 발길은 교회를 향하고 있었다. 텅 빈 교회당에 들어가 모처럼 하나님께 긴 시간의 감사기도를 올리고, 1986년 미육군 대령에서 전역하면서 LA <동양선교교회> 장로장립을 받았다.
미국 육사의 교과서 주인공
6∙25 전란 통에 밥을 얻어먹지 못해 물배를 채우려고 서울 종로구 내자동 우물가를 찾아가 허기에 지쳐 힘없이 누워 있던 임종덕 아이를 <타임즈> 6∙25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 훌브라이트 종군기자상을 수상한 그 유명한 “우물가의 소년”이다. 그리고 임종덕이 월남정글의 초극한 상황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며 세운 영웅적 무훈담을 다룬 영화제작사는 임종덕 소령에게 기막힌 영화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15만 달러를 제공했다.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이 포로수용소를 탈출, 15일간의 정글 도피생활에서 끝내 생존해 살아 돌아온 과정을 <정글 탈출기>라는 책으로 펴내 사관생도를 위한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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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맨 마지막 박대통령말씀 ㅡ 지만이는 육사 졸업후 다행히 중령까지 가서 예편한다면 그 연금으로 살 수가 있다. 그러니 자네 앞으로 지만이 유학 얘기 같은 건 절대 입 밖에도 내지 말게!”ㅡ 눈물이 앞을 가림니다.
아들의 장래를 중령까지만 생각하셧구려, 凡人같으면 대장도 시원찬타고 생각했을텐데 ............. 기가맥힘니다.
@무거 몰랐던 이야기입니다
감동합니다^^😢
한 번은 임종덕이 한국방문시 박 대통령에게 아들 지만이를 미국유학 시키면 어떻겠냐고 하면서, 학비일체를 자신이 부담하겠다는 제의도 했다. 이 말을 듣고 난 대통령은 얼굴이 상기되면서 버럭 화를 내듯 말했다. “내가 내 아들을 유학 보내면 지금 장관 차관 그리고 국영기업체 사장들이 내 눈치만 보고 있는데, 자기 자식들도 전부 다 유학을 보낼 거요. 공장의 여직공들이 피눈물로 벌어들이고 있는 외화가 장관 차관 자식들의 학비로 사라진다면 이 나라가 언제 자립하고 언제 자주국방을 .....................
하나님 섭리의 덕인지 임종덕의 사주팔자인지는 모르겟으나 위대한 인간승리.....임종덕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것은 잘햇다 할수없으나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는데 기여한 박대통령을
존경합니다 삼대영웅 박정희대통령 이순신장군 이승만대통령을 나는 좋아합니다
동~~~~~~~~~~~~~~감 입니다..
@기선 기선형님 예까지 왕림하셔서 귀한격려 감사함니다.
@기선 나와 생각이같은 그래서 선배님이 나는 좋타....ㅎㅎ
건송이가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한번했네요.
와~ 약속이 있어 빨리 나가야 하는데
감동이 커져서 단숨에 내려 읽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지기님 감동시켜 드릴랴고 불철주야 혼신의힘을 다하는 무거 부방장 종신제로 함 어떨까요 ㅎㅎㅎ
@무거 남들은 100세를 산다고 만보걷기다 대학원석사다 하는판에 걷기방 부방장으로 끝넬라꼬
청화대에서 전화올날을 위하여 열심히 걷고 체력이나 단디 보전하고 기다리소 마.....ㅎㅎ
모르고 살았습니다
감동적인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
아니 이럴수가..
LA동양선교교회는 여기 알라스카 동양선교교회의 모교회입니다.
미주 전역에 여러 교회가 있고 심지어 브라질 상파울루 에도 있지요.
임 동선목사님은 이곳에도 여러번 다녀가셔서 잘 알지만 그 임 장로님이야긴 금시초문입니다.
대단하신분이 우리 동양선교교회 장로님이실줄이야...
등잔밑이 어둡고, 같이사는 시어머니 姓 모른다는 옛날 이야기 있읍니다
먼, 알라스카에서 읽어주시니 감사함니다.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 스토리가 감명 입니다 선배님 감사 합니다
저도 이 기사를 보고 천운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 생각하면 간절히 주님께 의탁한 곳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