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1일 [연중 11주간 금요일]
마태오 6,19-23
다른 것은 속여도 이것은 절대 속일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는 곳에 나도 머물게 됩니다.
돈은 썩어서 흙이 될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자신도 흙이 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로 떨어지는 얼음 위에 붙은 양의 사체를 먹겠다고 하다가 얼음에 들러붙어 죽는
독수리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과 같습니다.
밑으로 가는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는 능력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바라고 믿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의 것을 사랑하면 이 지상의 것과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바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늘의 것을 바라는지, 지상의 것을 바라는지는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눈빛으로 알 수 있습니다.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여기에서 밝고 어둠은 하늘과 땅을 의미합니다. 눈빛이 맑으면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탁하면 지상의 것을 욕망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건 다 속여도 눈빛은 못 속입니다.
마음을 바로 들여다볼 수 있는 육체의 유일한 문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솔직한 여자TV: 키 작은 중국 재벌이 가난한 척하고 소개팅 나갔더니’란 중국 소개팅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냥 예상한 것 그대로였습니다.
여자는 돈과 외모를 밝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자는 돈만 바라보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 제작팀에게 자기 재산과 직업을 숨겨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여자 측에서는 키도 작고 옷 입는 감각도 없는
남자를 대놓고 싫어하고 무시합니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빨리 가서 쉬고 싶다는 귀찮은 눈빛이었습니다.
그래도 남자는 끝까지 친절하려고 노력합니다.
여자가 하도 남자를 무시하니 제작진은 남자 몰래 그 사람이 호텔을 아버지로부터 인수하는 중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자 여자가 갑자기 돌변합니다. 눈이 빛납니다.
남자는 짙은 화장의 여자는 싫다고 했고 여자는 바로 립스틱을 지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종처럼 부려 먹던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려고 합니다.
허술한 남자는 이제 자기에게 호감을 느낀 것이라며 좋아합니다.
그러나 제작진은 솔직하게 돈 많은 사람임을 밝혔다고 말해줍니다.
어쩔 수 없이 여자의 마음을 알기 위해 따로 제작진이 말을 하고 이것을 남자가 듣게 했습니다.
만약 남자가 돈이 없었어도 선택했을 것이냐고 하자 여자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남자는 돌아서 가버립니다.
만약 남자가 돈 이야기할 때 눈이 반짝이는 사람과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요?
돈을 못 벌어다 주면 끊임없이 구박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돈을 사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아도 자신과 똑같이 돈만 욕망하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자녀 대부분은 엄마를 그대로 닮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각자가 생각하는 자기 수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준은 목숨과도 같습니다.
사람을 사귈 때 자신과 비슷하거나 나은 수준의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는 나의 수준이 곧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뱀과의 대화에서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되었는데도 그녀와 함께해서 멸망했습니다.
사람은 말이나 행동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빛은 절대 못 속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챌 수 있어야 함께 땅으로 곤두박질치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1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마태오 6,19-23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거짓말 같겠지만 매일 차곡차곡, 그리고 조용히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많은 분들이 은행 잔고 불리고, 부동산 가격 상승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재물의 탑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있지요.
이런 물질만능주의 세상 속에서, 틈만 나면 어려운 이웃들과 신음하는 세상과 공동선을 위해 수시로 몸과 마음과 금고를 비우는 분들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의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오 복음 6장 19~20절)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 앞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는 쥐뿔도 없는 사람이라서 하늘에 보물을 쌓고 뭐고 할 능력이 없습니다.
뭐라도 있어야, 하늘에 보물을 쌓고 말고 할텐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물이 반드시 현세적 재물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보물은 여러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깊은 슬픔을 붙들고 있는 이웃들에게 다가가 그 슬픔 함께 붙들어주는 것은
아주 훌륭한 방법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세상 쓸쓸히 홀로 걷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함께 길을 걸어주는 것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은 좋은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과 대자연, 생태계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데 앞장서는 마음으로 쓰레기 배출을 최소화한다든지, 어떻게든 단순하고 소박하며 청빈하게 살아가는 것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길입니다.
사회 정의의 실천은 투사나 정치인들의 몫이려니 하는 생각을 떨치고 불의한 현실 앞에서 올바른 소리를 내며,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기꺼이 연대하고 참여하는 일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참된 노력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강론>
(2024. 6. 21. 금)(마태 6,19-23)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나중’이 아니라 ‘지금부터’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19-23)”
1) 여기서 ‘자신을 위하여’는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여”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내세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현세의 인생만을 위하여”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이 연상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7-9).”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는다는 말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허무한 것들’은 모두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 생명을 받으려고 주님의 뒤를 따르면서 살아갑니다.>
2)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는 “현세의 인생에 대해서 집착하지 마라.”입니다.
또는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욕심내지 말고,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입니다.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는 “지상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허무하게 사라진다.”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입니다.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은 완전하고 영원하다.”입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입니다.
허무한 것만 찾는 사람은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인생을 살 것이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안 믿는 세속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즉 주님 뜻에 합당한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나중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되어서 ‘그날’에(종말의 날에)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그날 완성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지금 시작된 그 생명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는 “주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의 인생은 ‘복음의 빛’으로 환하게 빛나고”입니다.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는
“복음을 외면하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만 찾는 사람의 인생은 멸망을 향해서 간다.”입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는 “구원의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사람의 인생은 남들보다 더 짙은 어둠 속에 빠진다.”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멸망을 향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콜로 3,1-4.9ㄴ-10ㄱ).”
신앙인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땅에 속한 것과 낡은 것은 죽이고, ‘새 생명’을 얻어서 ‘새 인간’으로 태어났고, ‘위’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4)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세상에서 온 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세속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든 세상에서 온 것은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온 것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