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선생 문현록 2권/이형남(李亨男)
자는 가중(嘉仲),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문순공(文純公)의 삼종손(三從孫)이다. 가정(嘉靖) 병진년(1556, 명종 11)에 태어나서 구로동(九老洞)에 살았다.
일찍 퇴도(退陶)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고, 만년에 서애(西厓), 월천(月川), 인재(忍齋) 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강학하고 질정하여 가슴에 새기고 뜻을 가다듬어 공부를 독실히 하여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21)에 모두 사마시 양과(兩科)에 합격하였다. 뜰에 반송(盤松)을 심고 편액을 ‘대취헌(對翠軒)’이라 하고, 청풍자(清風子) 정윤목(鄭允穆)이 그 편액에 사실대로 썼다.
임진년(1592)에 의병을 일으켜 격문(檄文)을 지어 향군을 모집하였다. 경자년(1600, 선조33)에 조정에서 천거하여 경릉 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을사년(1605)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이 수해로 무너져 중건하기로 의논하였는데, 사림에서 공을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일을 추진할 때 백암(栢巖) 김륵(金玏) 선생이 안동((安東)의 수재(守宰)로 있었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물러나 집에서 쉴 때였으므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옛터를 물어서 정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5) 모월 모일(某日某日)에 병으로 죽었으니, 향년 72세였다. 모산 모좌(某山某坐) 언덕 뒤에 장사 지냈고, 작산사(鵲山祠)에 부향(祔享)하였다. 남겨 놓은 문집이 있다.
〇 선생에게 올린 편지
서원의 터를 정하는 일은 세심하게 해야 합니다. 강 연안 일대 회곡(檜谷)은 지세가 좁고 뒤에 여러 무덤이 있으며, 망천(輞川)은 또 회곡 등지의 나루터이며, 서쪽은 비스듬하여 형세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반복하여 생각해보아도 결국 여강(廬江) 만한 곳이 없습니다. 새로 정한 터는 시원스럽게 트여 완전하니 여러 곳보다 훌륭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우러러 여쭈오니 삼가 재결해 주십시오.
〇 선생을 애도한 만사
근래에 현인을 남겨두지 않음을 탄식하여 歎息年來不慭賢
구름 헤치고 푸른 하늘에 물어보고 싶네 抉雲吾欲問蒼天
당시 태산 북두가 없어 유림이 통곡하고 時無山斗儒林痛
나라는 시초와 거북을 잃어 지사가 가련쿠나 國失著龜志士憐
대궐을 그리는 일편단심 북극성에 걸려 있고 戀闕丹心懸北極
시국을 근심하는 외로운 회포 황천에 닫혔네 憂時孤抱閉重泉
성긴 대 이슬 젖은 국화로 가을 집 차가우니 疎篁露菊秋堂冷
제자들은 무슨 마음으로 옥연정사를 지날까 小子何心過玉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