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연 / 이행자
마치 천둥치듯
그대 오신 지 십 년입니다
그 떨림!
참담하고 황량했던 그 봄
울며불며 영안실을 헤맬 때
당신의 지극한 사랑 없이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요.
그대
그리운 이여!
노을에 더욱 눈부신 억새처럼
당신은 늘 그렇게
내게 눈부십니다.
모스크바에서 온 엽서 한 장 / 이행자 시인
인간의냄새가난다는
모스크바거리에서
내게인간의정을빚지고산다는
여연스님께서
애매한가슴을
한장의엽서에담아보내왔습니다
섭섭함거두시라면서……
노동자승려교수사업가의얘기가
사뭇다른
그거리에
서보지못한나는
서울에서기차를타고
‘평양’을지나
그곳으로갈수있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씻김굿 / 이행자
날마다 흔들어 헹구면서도
못다 헹군 죄 많아
저리 아름다운 월미도 일몰 앞에서도
죄를 씻는다
그해 오월!
유인물 한 장
복사해 돌리지도 못하고
숨어서 시랍시고 끼적거린 그 치욕
1970년 11월 13일!
노동의 불꽃으로 부활한
전태일을 핑계 삼아
시인이 된 부끄러움
천지신명이시여!
내 영혼의 *거멀못을
어찌 씻김 하오리까?
*거멀못/나무, 그릇 따위에 터지거나 벌어진 곳
곡비 / 이행자
동해였다
애인의 부고
기다리며 사는 여자
황량한 겨울들판 걸어와
바다 향해 서 있다
나
곡비 찾아 예까지 온 거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으르렁대며
황토빛 눈물로
통곡해주고 있다
지천명에 비망록 / 이행자
흔히들 그저 들어넘기는
"병신 새끼"가 내게는 늘
"병신의 새끼"라는
비수로 꽂히곤 했다.
불혹이 지날 때까지
아이를 기르고픈 유혹에 시달리면서도
"병신 육갑한다" 소리에 자지러져
병신의 새끼 가르지 않았지만
[ 이행자 시인의 약력 ]
* 1942년 서울에서 독립운동가의 딸로 태어나
* 1990년 제3회 ‘전태일 문학상’의 시 부문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 시집 『들꽃 향기 같은 사람들』, 『그대, 핏줄 속 산불이 시로 빛날 때』, 『은빛 인연』, 『11월』 과
산문집 『흐르는 물만 보면 빨래를 하고 싶은 여자』, 『시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아, 사람아!』, 시화집 강민· 이행자 『꽃, 파도, 세월』, 시선집 『파랑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