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체류기 (2016-08-20~2016-09-14)
이번 도우미의 상황은 시작부터 긴장을 요했다. 남편의 고희 축하 여행으로 독일 거주 아들네랑 미국 거주 딸네가 독일에서 모여 덴막과 놀웨이 연안을 따라가며 5개의 항구에서 정박했던 크루즈 여행을 마친 후 가족이 뿔뿔이 헤어진 토요일로부터 시작되었다. 남편과 아들네는 각자 집으로, 큰 손녀가 혼자 외삼촌 집에 열흘 먼저 와서 놀았기 때문에 그 애와 나는 시카고 직항 비행기를 탔다. 딸네 다른 식구들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애틀란트에서 딸은 학회 참석차 필라델피아 행으로, 사위와 작은 손녀는 시카고 행으로 갈아탄다고 했다. 그리고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토요일, 9시간의 비행은 순조로웠다. 갈 때 혼자였던 손녀는 만화영화 보는 법이 이미 익숙하여 쉬지 않고 볼 기세였다. 눈이 나빠 안경을 끼면 수영할 때 스키탈 때 얼마나 불편한지 너 아니? 어릴 때부터 눈을 보호하여 건강하게 간직해야 돼. 조금 보고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손녀는 내 말을 잘 따랐다. 실은 나한테 한 얘기였다. 영화 보다 꼴딱 새면 도착 후 초긴장 상태의 생활에 지장이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독일 출발이라 그런지 자막 없는 독어 영화가 많았고 몇 안 되는 최신 영화도 구미가 안 당겼다. 목록을 훑다 보니 읽어주는 이북이 있었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나의 자장가. 눈을 감고 안대를 하고 영어를 들으면 집중 몇 분만에 수면 속으로 빠트리는 직방의 묘약. 덕분에 다른 여행 때보다 많이 잔 듯, 공중에 떠 있는 느낌도 없고 눈도 안 아팠다.
손녀는 미국 여권이라서 나는 무비자 입국 경력이 있어서 외국인 줄에 서지 않고 내국인 절차를 밟아 비교적 빨리 세관을 통과해 나왔다. 유난히 좁은 오헤어 공항 터미널 5의 마중 공간을 둘러 보니 우리가 먼저 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보다 도착이 30분 늦는 예정인데다 터미널이 다르니 시간이 걸릴 것이 뻔했다. 새우잠을 잔 손녀가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자고 싶다고 했다. 의자에 자리잡고 앉아 무릎에 손녀의 머리를 얹혀 놓고 무작정 기다리기로 마음 먹었다. 백인은 드물고 인도인, 중국인으로 꽉 찬 느낌이었다. 생김으로 보아 그랬다. 백인도 흑인도 아시아인도 아닌 인도인 같지만 파키스탄인지 스리랑카인지 사실 모른다. 중국인도 마찬가지이다. 말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쉽지 않았다. 어쨌든 와글거리는 공항은 백인의 나라 미국도 아니고 흑인이 많다는 시카고도 아니었다.
착륙한 지 2시간 남짓 되었을까 같은 비행기를 탔던 한국인이 출구에 나타났다. 이제야 나오다니! 사람 좀 써서 빨리 빨리 진행 좀 시키지! 답답한 선진국, 미국이다. 못 만나는 경우가 떠올라 확신이 흔들리고 조바심이 나긴 했어도 의자에 앉아 기다린 내 처지가 낫다고 위로하였다. 밤늦게까지 못 만나는 경우를 대비해 택시를 타고 가는 대응책을 세워 놓은 터라 느긋한 기다림이었던 것 같다. 잠시 후, 사위가 손녀 이름을 부르며 나타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딸네가 7월 초 이사를 해서 집의 위치도 구조도 모두 생소했다. 피곤하지만 저녁을 때워야 했다. 사위가 애들 입맛에 맞춰 라면을 연하게 끓여주어 먹고 잤다.
일요일, 모두가 지쳐 푹 자고 일어났으나 여전히 피곤했다. 그런데 사위는 애들을 데리고 교회에 간단다. 신앙심이 있나 보다. 예배 후 큰 손녀를 어린이 예배에 데려다 놓은 사위는 그 시간을 이용하여 나와 같이 슈퍼로 가서 장을 보았다. 큰 손녀를 되찾은 우리는 다시 외곽 한인 슈퍼에서 점심을 사먹고 장을 더 보았다. 민첩치 않던 사위가 둘째 딸 기저귀도 갈고 목욕도 시키고 고양이 배설물도 버리고 그 동안 살림도 아빠 노릇도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카레를 한 냄비 만들어 놓고 시범을 다 보인 양 월요일 텍사스로 떠났다. 그떄부터 이민 할미의 막중한 임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월요일, 새로운 동네에서 새로운 아파트에서 부모 없는 7살과 2살짜리 여아들과 우선 이틀 반 동안 사건 없이 살아야 했다. 하루 종일 집안에 있던 애들에게 바람도 쏘일 겸, 시차로 인한 졸음도 쫓을 겸, 여기 식대로 강렬한 햇볕이 사그라든 오후 4시쯤 산책에 나섰다. 유모차를 몰고 들락날락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제 아침, 집 앞에서 정차 중인 사위한테 가려고 집을 나섰는데 승강기를 못 찾아 층계로 내려갔었다. 이번에는 큰 손녀를 앞장 세웠다. 승강기는 복도를 두 번 꺾은 후 마지막 출구 문을 밀고 나가니 있었다. 세상에 승강기가 복도 밖에 있다니. 직선이 아닌 어두컴컴한 복도는 여기 저기 “출구”와 “층계” 표시등 만이 헷갈리게 커져 있었다. 카펫 덕인지 발소리가 울리지 않으니 금방이라도 총잡이 서부의 사나이가 나타날 분위기였다. 무지 낯설었다. 무척이나 오래된 건물인가 보다.
작년과 달리 손녀의 사물 인지도는 든든한 조수 급이었다. 지도를 보니 가까운 공원이 세 블록 지나 있었다. 아주 작은 녹지였다. 애들 놀기에 적당한 크기였다. 그런데 애를 데리고 나온 산책객은 없고 모두 날씬한 도시녀, 도시남이었다. 도착 즉시 풀어 용변을 해결하게 하는 견공의 지킴이들이었다. 도저히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자리를 뜨기로 결심하고 손녀의 동의를 구했다. 동생이 달리다 자꾸 개의 배설물 위에 넘어지니 더럽다. 집에 가자. 다음엔 전에 살던 동네 놀이터로 가자. 토 달지 않고 따라 나섰다. 큰 손녀와 이성적 대화가 통하니 신신했다.
이사는 완전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었다. 재계약만을 생각하고 있던 딸이 소유주의 급작스런 매매 계획을 통보받고 얼마나 황당해 했는지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입덧 중이었던 만큼 난민에 못지 않는 세입자 설움이었을 것이다. 큰 손녀 학교를 벗어나지 않는 동네, 직장도 유아원도 가까운 동네를 수소문하고 집 보러 다니고 이사를 하면서 딸이 혼자서 감내했던 고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멀다고 속수무책인 채로 있지 말고 뛰어갔어야 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나의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면을 재확인한 기회였다.
음식은 애들이 좋아한다는 것만 해주고 편식을 해도 적게 먹어도 안달 안 하기로 했다. 배 고프면 다음 끼니때 많이 먹을 것이고 모자란 성분은 스스로 챙겨 먹는 신비한 생체의 자율성이 있지 않은가. 카레, 볶음밥, 찐 채소, 떡국, 연어구이, 햄버거, 치즈, 낫또를 좋아했다.
화요일, 수요일은 하루 종일 집에서 보냈다. 장난감을 몰랐던 우리 때와는 달리 딸네는 장난감이 가게처럼 진열되어 있다. 각가지 사람 동물 인형은 물론, 누르면 도레미파솔, 에이비씨, 동물 울음소리가 나오는 장난감, 탈 수 있는 기구, 크고 작은 레고, 퍼즐 등. 둘째가 한 번씩 만져도 삼일 안에 다 놀아보지 못했다. 둘째는 하나씩 꺼내 놀았다. 그리고 크린엎 하면 제자리에 놓을 줄 알았다. 몬테소리 유아원 교육이란다. 타는 기구들보다는 만지작거리는 장난감을 선호하는 듯 했다. 두꺼운 마분지 동물을 틀에 끼어 맞추기, 삼각형, 마름모, 원 등의 도형을 구멍 난 프라스틱 공에 끼어 맞추기 등등 지루한 줄 모르고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십 분이 넘지 않는 집중이었고 장난감 서너 개를 거친 후는 무료해 했다. “안아쥐”하며 안기려 들었다. 가능한 한 원하는 바를 제꺼덕 해 주는 보모의 역할을 잊지 않고 실천했다. 품에 안기는 그 맛,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부드럽고 포근하고 달콤한 맛, 그 맛 때문에 기꺼이 할미 노릇을 하나 보다. 학회참석을 끝내고 수요일 밤에 딸이 오니 그제서야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감이 왔다.
목요일은 출근하는 딸을 따라 나왔다. 딸의 학교 근처 놀이터로 갔다. 미끄럼, 그네 등을 타고 1시간 가량 보낸 다음 유모차에 작은 애를 태우고 큰 애는 옆에 거닐고 근처에 있는 시립 도서관에 갔다. 2층은 어린이 전용이었다. 서가, 의자, 책상이 딱 큰 애에 맞는 크기였다. 얼마나 쾌적하고 조용한지! 큰 애는 들어서자 마자 어떤 서가로 달려가 책을 뽑아 들고 의자에 앉아 1시간 가량 몰두해 있었다. 주로 그림이 있는 책을 골라 그림을 더 열심히 본다고 했다. 작년 더듬더듬 읽기가 1년동안에 완전 본토 발음에 빠른 속도가 되어 있었다. 모르는 단어는 쓱 넘어가는 듯 했다. 우리 어릴 적에 저런 환경이었더라면 독서를 많이 했을까? 부모 나름 애 나름이겠지. 미국에 그렇게 환경 좋은 도서관이 많다지만 전 국민이 다 독서광은 아니지 않는가! 작은 애는 낯 설은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초입에 카펫이 깔려 있는 유아를 위한 공간이 있었다. 벽돌장 크기의 레고, 짜맞추기는 물론 그림책이 유아 손 높이에 있었다. 모든 어린이들이 어려서부터 이런 환경에 익숙하면 범죄 없는 사회가 될까?
금요일은 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연구실 근처 키 큰 나무들과 넓은 잔디밭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람쥐들이 보였다. 도토리를 갉아 먹던 다람쥐는 우리가 다가가면 나무를 쭈르르 타고 사라졌다. 애들은 다람쥐를 쫓거나 도토리를 줍느라 신이 났다. 시멘트 인도 위로 탁 떨어지는 열매가 있었다. 운 나쁘게 머리에 맞을까 봐 조심스러웠다. 낙하한 열매에서 큰 밤이 툭 튀어나왔다. 튕겨 나온 밤톨의 겉껍데기는 밋밋하고 딱딱했다. 날카로운 가시가 무성한 밤송이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본 마로니에 밤이었다. 그런데 좁은 잎도 매끈한 껍질이 전혀 마로니에 같지 않았다. 프랑스 마로니에는 가시의 퇴화 잔재 같은 몽통한 못들이 두둘두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정보에 의하면 프랑스산과 다른 북미 마로니에였다. 밤은 먹을 수 있는 반면 마로니에는 독성분이 있어 약으로 쓴다 했다. 밤을 모른다는 손녀에게 느닷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밤 사진을 보여주며, 뾰족한 가시에 찔리면 무지 아프다. 밤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아? 한국에 오면 사줄게. 마로니에는 독이 있어 사람이 먹으면 안 된대. 이 사진 좀 봐. 밤보다 알맹이가 크지. 그런데 껍데기를 봐. 프랑스 마로니에는 두둘두둘 하고 시카고 미로니에는 밋밋해. 그게 다른 점이야. 너와 애리처럼 같은 엄마 아빠지만 다르게 생겼잖니. 밤에 있는 가시가 마로니에는 없지? 밤이 독이 없고 맛 있어서 좋아하는 경쟁자가 많은가 봐. 가시로 아무나 못 먹게 하나 보다. 독 있는 마로니에는 모든 동물이 쉽게 먹으라고 부드러운 겉껍질이 되었나 보다. 독일 재인 기억나지? 너와 재인이처럼 밤과 마로니에는 사촌이야. 즉흥 현장학습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재미있었다. 손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식물과 인간을 연계하여 통찰력과 논리의 폭을 넓히고 있다는 자부심이 만족한 미소를 짖게 했다.
강한 자외선 햇살이 나뭇잎 사이사이 그늘을 살짝살짝 뚫고 쏟아지는 녹색의 공원에서 한가히 흰 구름이 평화롭게 떠 있는 청명하고 파란 하늘을 훔쳐 보며 온 몸에 스며드는 바람을 솔솔 느끼며 멍하니 1시간을 즐길 수 있었던 행운은 보모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 이런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만끽하다니!
그러나 그 날, 금요일 저녁에 온 식구가 모두 터져버렸다. 학회 다녀온 딸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말하는데 지치고 애들은 새 보모 눈치 보느라고 긴장했었나 보다. 작년 경험과 한 살 더 먹은 늙음의 지혜로 애 다루는 원칙을 총체적 시야로 정하고 되뇌고 있었는데 그만 일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지금 조금 먹으면 다음에 많이 먹고 지금 많이 자면 다음엔 조금 잔다는 생체 순리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 다음에는 반드시 소리 지르고 우는 시간이 온다는 심리 법칙은 예상하지 못한 총체적 시야였다.
토요일은 딸이 최근 조성된 시내 어린이 공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애들은 흔들거리는 다리 위도 지나가 보고 인공 언덕도 오르내리고 자그마한 분수에서 뿜는 물에 흠뻑 젖기도 하며 신나게 놀았다. 나는 그늘에서 그들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노인 중 하나가 되어 시간아 가라 하고 골 빈 상태로 다른 애들과 부모들을 구경했다. 엄마들이 우리나라처럼 전형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나이와 몸매와 옷차림으로써 가늠이 불가능했다. 엄마랑 온 것인지 할머니랑 온 것인지 단정하기 어려웠다. 뚱뚱해서 인지 전반적으로 나이 들고 늙어 보였다. 애들 국적도 미심쩍었다. 손녀들처럼 이민자의 아이들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딱 적합한 놀이기구지만 몇 년 후 훌쩍 커진 손녀들에게는 무관한 어린이 놀이공원이 되겠지. 그렇지만 여전히 새로운 어린 애들이 와서 즐기겠지. 끊기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내 아이 때 하지 못한 애들 위주의 생활을 나이 70에 하다니 내 인생 빗나갔다고 슬퍼할까 아님 늦게라도 경험하니 행운이라 할까? 씁쓰름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 날 저녁, 딸이 야경이 끝내주는 옥상에 가보자고 권유했다. 캔맥주를 들려주며 아파트 5층 꼭대기로 안내했다. 곳곳에 에어컨 공기 구멍에서 끊임없이 후끈한 바람과 소란한 소음이 들려와서 실망을 하려던 차에 저 편 공간에 한 단 높은 마루바닥 위에 쇠로 된 큰 상과 의자가 주민들의 휴식을 위하여 놓여 있었다. 한적한 도로, 죽죽 벋은 건물들의 네온, 통 유리에 반사된 화려한 황혼, 탁 트인 하늘에 채색된 일몰, 시원한 바람, 그런 아름다운 공간에서 맥주 몇 모금 마시니 곧바로 행복에 에워싸인 느낌이었다. 문득 50년 전 대학 일년 때, 20년 연상의 부산 사는 사촌 오빠의 초대로 그 당시 명소였던 장충동 앰배서더 호텔 꼭대기에서 마신 맥주가 떠올랐다. 호텔도 처음인 범생이 그것도 꼭대기 층에서 거기다 제일 좋아하는 오빠가 사랑이 넘치는 미소로 허락한 난생 처음 맛본 맥주였다. 그 당시 맥주는 술이고 여자는 술을 마시면 안 되던 때에 양반 장손 오빠를 설득하여 금기를 깬 기쁨에 겨워 마신 맥주였다. 어려운 첫 주의 임무수행을 무난하게 마친 뿌듯함이 솟구는 행복감이 그 때 저녁을 연상시켰나 보다. 프루스트의 마들렌느 과자처럼 나도 맥주로 인하여 50년 전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냥 단상에 끝치고 말았다. 물론 소설에서처럼 쪼글쪼글한 노인이 되었지만 온갖 경험의 반세기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2차원에서 4차원으로 확대되고 깊어진 생애의 사고가 손녀들의 앞날 길잡이에 유용하지 않을까!
일요일 딸네 식구들이 교회에 가니 나는 절로 휴가를 얻은 것이 되었다. 가족에게 부대끼지 않고 혼자 있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모름지기 6일 일하고 마땅히 1일은 휴식을 취하는 삶이어야 한다. 휴일은 신선한 탈출, 보충제. 생활의 필수조건이다.
다음 주도 비슷한 양상의 나날을 집안에서 놀이터에서 공원에서 도서관에서 보냈다. 작은 애 비위 맞추며 놀아주랴 틈틈이 큰 애 말도 들어주랴 잡았다 당겼다 씨름하는 하루 하루가 고되지만 무료할 틈 없이 잘 지나갔다. 서울에서 문제였던 소화도 잘 되고 반드시 중간에 깨는 잠도 다시 곤하게 아침까지 잤다. 이런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쫓기는 딸한테 도움이 많이 되는 줄 알면서도 마음은 벌써부터 카운트 다운하고 있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내 이기적 생활 70년에 희생적 생활 석주 반이 일찌감치 버거웠다.
3주 차 되던 화요일은 유아원과 초등학교가 개학한 날이었다. 별안간 일이 없어진 나의 하루가 즐겁게 지루하기도 했지만 둘째의 막무가내 떼쓰는 진면목이 완전 들통난 날이기도 했다. 딸은 지리적 관계로 작은 애를 먼저 찾은 다음 큰 애를 데리러 갔다. 작은 애가 그만 언니네 학교 놀이터를 본 것이었다. 참새가 방앗간 들려야 하듯 꼭 놀다 가야 한단다. 저녁 먹고 목욕하고 자려면 한시가 급한데 완전 마이동풍 바이 하면서 천방지축 무슨 배짱인지 제멋대로 반대 방향으로 가니 이런 진퇴양난이 있나. 5분 있다 가는 거야 일방통행 제의는 완전 묵살되었다. 놀릴 수도 군중 앞에서 혼낼 수도 묘안도 없는 난처한 처지를 견디지 못하여 애를 들어 안고 차 쪽으로 가다 멈추고 말았다. 최대 벌린 입, 우렁찬 울음, 힘찬 발버둥이 막무가내 감당이 안 되었다. 힘이 좋고 무게 나가는 애가 떼를 쓰니 온 주위가 혼비백산 되는 듯했다. 배불은 에미가 허리에 끼고 차에 태워 떠날 때까지 들입다 울어 제켰다. 아, 이 나이에 저런 애는 정말 아니옵니다.
큰 애는 무엇이나 동생과 똑같이 하고 싶어했다. “나는” “나두”가 입에 배어 있었다. 동생의 출현으로 불안해진 자기 존재의 인증을 받으려는 확인 작업이겠지만 매번 집요한 요구에 완전 질려버렸다. 설명이 전혀 먹혀 들지 않는 작은 애는 “마인”, “애리 꺼”하며 언니 것을 뺏으려고 또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단 소리를 지르거나 울어버렸다. 개학 후 피곤한 학교생활 때문인지 두 아이가 붙는 횟수가 잦아드니 나의 원칙, 총체적 시야가 점점 마비되고 말았다.
자매의 맞불 다툼은 인간의 원초적 독점 소유욕의 육화였다. 죽음을 앞둔 이 나이도 속으로 내 것 챙기기 전념하는데 저 애들이야 당연지사지! 큰 애를 보면 양보는 어불성설이었다. 절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동생 때문에 세상만사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엄청 슬픈 사실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필히 경험할 보상 없는 양보나 포기를 대비하는 훈련, 말하자면 타협할 줄 아는 사회성을 기르는 훈련을 시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절대 하기 싫은 양보를 하게끔 설득하자니 입이 혀가 반복 설명을 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될 때도 있었다. 참을성 많은 듯 논리적 전개를 펴던 할미가 어느 순간 신경질적 높은 소리로 윽박지르는 노파로 변신되어 있었다. 아, 교육이 쉽지 않더이다!
자매가 항상 경쟁적은 물론 아니었다. 위급한 상황에 있을 때 언니는 동생을 지켜주었다. 밀어내는 동생의 뽀뽀를 얻어내려고 구슬릴 때도 있었다. 장난 삼아 발음 공부도 시켰다. 한창 말하고 싶고 배우는 나이인지 언니의 발음을 따라 하는 작은 애의 정확치 않은 발음은 너무나 귀엽고 신기하고 재미있어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또한 만화영화를 보게 한다면 동생과 놀아 주었다. 공놀이도 할미와 셋이서 하면 잘 했다. 장난감 음악에 맞춰 둘이서 신나게 즐겁게 춤을 추며 보낸 시간도 있었다. 이럴 땐 하나 애보다 잘 노는 자매가 훨씬 쉽고 든든하고 좋았다.
작은 애는 또한 에이비씨디 알파벳 노래, 반짝반짝 작은 별, 주먹 쥐고 손을 펴서, 등의 노래를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불렀다. 그럴 듯한 엉성한 발음과 입모양은 간장을 녹였다. 박수 치며 칭찬하는 엄마와 할미에게 샘이 난 언니가 때로는 같이 불러 제키며 나두 잘하지 물었다. 시끄럽고 우습고 기가 찼다. 저렇게 자신이 없구나. 거의 8년 동안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해서 당연히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니다. 같은 식으로 우리도 남편의 사랑이, 아내의 믿음이, 자식들의 능력이 의심스럽고 미덥지 않은 것이다. 말이든 행동으로든 사랑을 믿음을 능력의 인증을 알게 모르게 수시로 전달하는 노력을 해야겠다.
이번 체류 중 예상치 않은 즐거움은 10일만에 온 사위의 번개 제안으로 미시간 호 쪽에서 보이는 시내 야경을 구경 간 것이었다. 온갖 색과 형태로 번쩍번쩍 밝혀진 시카고 스카이라인은 아름다운 외계 도시였다. 어떻게 저렇게 높이 지을 수 있는지 야광을 만들 수 있는지 사람의 상상력과 실천력이 그저 감탄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근처 놀이공원이 조성 백 년을 기념하여 최근 새롭게 단장했다는 뉴스를 들었다고 구경가자 했다. 그 곳( Navy Pier )에는 여러 개의 놀이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커다란 바퀴에 설치된 곤돌라를 탔다. 총3회 회전했다. 매 회 9시, 꼭대기 정오, 3시 위치에서 멈추었다. 그 머무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내려다 보이는 야경이 밤을 새어 보라 유혹을 했으나 번개 외출이라 안 돼 하며 내렸다. 아쉬운 마음이 딸에게도 있었는지 옆에 있는 회전 그네를 타 보라 했다. 사양하다 큰 손녀랑 탔다. 그네는 회전할수록 속도가 빨라지고 높아졌다. 그 옛날 용인 자연공원의 바이킹에서 겪었던 목이 달아나는 느낌과 구토증상을 아주 잠깐 느꼈다. 흔들림과 속도감이 감당되지 않아 다시는 안 타기로 한 결심을 몇 십 년 만에 깨고 다음에 오면 또 탈거야 하니 딸이 박장대소하며 70 할머니 맞아 했다. 순간적 고통이 오히려 짜릿해서 더 체험하고 싶었다. 나이에 도전하는 오기인지도 모른다.
이튿날 토요일도 감사 행사 일정이 잡혀있었다. 이번 체류에서 사위가 나를 보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그가 애들을 온 종일 맡는 동안 우리 모녀는 오전에 장을 본 후 오후에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하는 것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딸과 단둘의 외출이었다. 남은 식구가 걸려 한편 구석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따가운 햇볕에 이왕지사 즐기자 하니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니 완전 딴 세상이 펼쳐졌다. 시카고 모든 시민이 마지막 여름을 즐기러 다 모인 듯 서울처럼 바글바글 발에 채였다. 내가 선택한 영화는 메릴 스트립 주연의 “플로렌스”(Florence Foster Jenkins)였다. 원래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던 메릴의 오페라 아리아 실력과 연기가 무척 궁금했다. 극장은 식당처럼 음식을 주문하여 먹을 수 있다고 했다. 크고 선명한 티브이 화면과 음향장치를 갖춘 홈시어터가 영화관 관객을 줄일 것 같더니 이런 차별화 작전으로 손님을 끄나 보다. 한 번에 하나 하기 원칙을 내세우며 관람에 집중하자고 해놓고는 팝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쁜 평판에도 불구하고 팝콘과 콜라는 기꺼이 영화 감상의 필수 수반이었다. 의자 수가 넉넉한 중형 영화관이었다. 적당히 눕힌 등받이에 다리를 죽 뻗고 두 시간 가량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안 아프고 집보다 훨씬 편했다. 특히 앞뒤 좌우 좌석 간 공간이 넓어 앞 자리 객과 상관 없이 시야가 탁 트였고 옆 사람의 동향 감지가 전혀 전달되지 않아 혼자 보는 것 같았다. 너무나 마음에 든 극장이었다.
상속으로 갑부인 주인공 플로렌스는 실제 인물(1868-1944)로 음반도 낸 오페라 아리아 가수였다. 음정과 박자가 맞지 않는 음치였으나 매니저 남편과 반주자 피아니스트는 그 사실을 감추고 지인들 위주의 소 연주회를 여러 차례 갖도록 했었다. 토스카니니의 카네기홀 연주도 수 차례 돕고 카네기 재단에 기부도 많이 한 플로렌스가 카네기홀 공연을 원하면서 아부의 거짓말은 들통나게 되었다. 가당찮다는 모두의 의견은 전달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올바른 소리는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하기 쉽지 않다. 하물며 수혜자 입장에서야. 번복시킬 수 없었던 남편(휴 그랜트)은 다른 연주회 때와 같은 수단으로 청중을 돈을 주고 모집하여 홀을 가득 메우는데 성공했다. 플로렌스는76세에 카네기홀 무대에 서는 영광을 가졌지만 혹독한 평을 뉴욕 타임스에서 읽어야만 했다. 스스로를 괜찮은 가수로 착각한 무지의 대가는 심장마비로 인해 1달만에 죽는 결과로 끝났다.
이 영화는 돈의 위력을 역사적 사실로써 증명해 주었다. 알게 모르게 혜택을 받은 사람은 선한 독지가 플로렌스 면전에서 아부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생 동안 개인 수업을 받고 유능한 반주자가 반주를 해 주어도 플로렌스는 수준 높은 오페라 가수가 될 수 없었다. 돈의 위력은 타고나는 재주와 능력을 이길 수 없었다. 둘째로 추구하고자 하는 일을 무리를 해서라도 실현함으로써 만족을 얻었지만 자신을 모른 대가로 플로렌스는 후세까지 씁쓸한 웃음거리가 되었다. 남의 조언을 기대한다는 것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스스로를 잘 알아야 되는데, 얼마나 그런 사람이 없으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까? .
식당까지 시간이 넉넉하여 걷기로 했다. 전화기에 뜬 길도우미(navigation)의 안내를 따라 시내 북쪽의 맛집을 찾아 갔다. 어딜 가나 길 잃을 염려 없는 좋은 세상이다. 들끓는 번화가를 벗어나니 곧바로 한산한 길이었다. 따가운 햇볕과 찬 바람이 문 앞에서 서성대는 가을의 잠입이 임박함을 경고했다. 미국 식당은 아기자기하거나 특별한 외부 장식으로 눈을 끌지 않아 지나치기 안성맞춤이다. 길도우미 덕에 실수 없이 찾았다.
이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카운터는 보이지 않고 넓은 공간 벽 쪽 의자에 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잘못 들어왔나 의심이 들 정도로 식당 같지 않았다. 바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나가면서나 눈에 뜨인 술병과 잔이 죽 놓여있는 카운터가 입구 바로 옆에 또 있었다. 우리가 안내되어 앉은 자리는 식당 한가운데 끝 좌석이었다. 내 뒤로 반 층 높인 지면 위 식탁에 벌써 식사 중인 모임이 있었다. 낮은 보호 철책이 본 층과 구분 짓고 있었다. 앞면 왼편 층계 끝 2층에도 식탁이 놓여 있었다. 한 줄 식탁은 2층 가로 면으로 계속되었다. 그 밑은 주방이었다. 내 시선의 맞은 편은 화장실 벽으로 막혀 있었다. 벽을 따라 조금 여유 있는 공간에서 종업원들이 분주히 왕래하였다. 멀리 오른편 입구 쪽 바는 2층까지 뚫려 있고 작은 공룡 등뼈 같은 원목이 천정을 장식하고 있었다. 따지다 보니 노천극장이 생각났다. 원이 아닌 직사각형 공간에 삼면이 층층 계단의 인상을 주는 구조가 같았다. 단일 평면보다 손님을 더 많이 수용하겠다. 그 때 뭔가 편치 않고 붕 뜬 느낌이 들어 말문이 열리지 않던 이유가 이제야 밝혀지는 듯 하다. 모두의 시선이 쏟아질 수 있는 한 가운데 위치가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주 인접해 있는 옆 식탁 손님이 선 제압하고 있는 듯 하여 미리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이 나이에도 타고난 튀기 싫은 기질은 바뀌지 않는다.
팝콘 덕에 더부룩한 위의 부담을 줄이고자 주요리는 빼고 수프와 전채만 먹기로 했다. 미국 식문화는 요리 주문에 앞서 꼭 음료수 주문을 받았다. 허긴 낯선 분위기의 긴장도 풀어 주고 입맛도 돋우는 아페리티프를 마시는 것이 외식을 즐기는 순서겠다. 우리 습관과 달라 매번 느끼던 거부반응을 누르고 딸의 권고로 포도주 한 잔을 시켰다. 금방 알딸딸하는 느낌이 들었다. 차례로 등장하는 다양한 전채 4가지는 정갈하고 정교하고 깔끔하고 감칠맛이 났다. 포만감과 함께 늘어진 행복감이 잦아들었다. 어느 순간 시끄럽던 바 공간의 사람들이 우루루 식탁에 와 앉았다. 무슨 대단한 파티처럼 참석자들 모두 모일 때까지 서서 칵테일을 마시며 담소 하다 착석하는 그림이 나쁘지 않았다. 아주 젊은이들은 안 보이고 직장 동료나 가족 모임 같아 보였다. 문득 회식하는 직장 모임이 부러웠다. 서열이 명백한 팀의 일원이 되어 부대껴도 보고 회식도 하는 빡센 조직 생활에 대한 향수가 일었지만 치열한 암투의 현장에 뛰어들 건강도 나이도 아닌 사실을 상기하며 생각을 접었다. 은퇴 후 쫓기는 일 없이 자유로운 내 처지를 젊은이들은 부러워하지 않는가! 앞 자리에 우리보다 늦게 온 노년의 남녀가 마주 앉아 소리 없이 먹고는 떠났다. 아마도 부부였으리라. 우리 모녀도 거의 같은 수준으로 잠잠히 있었다. 초장에 메릴 스트립을 위한 영화였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모를 수 있을까 등 단평으로 영화감상을 대신한 후 요리가 나올 때마다 한 마디씩 한 간단한 품평 말고는 긴히 할 이야기가 없었다. 몇 해째 계속 보아 온 관계로 충고도 불평도 더 하면 딸이 싫어하는 잔소리가 되었다. 그리고 40분 동안 걸어서 귀가했다. 통행이 드물고 환한 가로등이 밝히는 밤길은 언제나 끝없이 무작정 걷기를 충동한다. 미시간강 다리를 건너면서 상현달도 보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카코 바이 나잇이었다. 이런 계획을 생각한 딸과 실행케 한 사위가 고마웠다.
떠나기 전날 점심에 딸이 또 초대해 주었다. 사려 깊은 딸이 일부러 시간을 낸 것이다. 사양하다 받기로 했다. 직장 가까이 있는 멕시코 식당에서 만났다. 전 번 식당보다 크고 대중적이었다. 이번에는 데킬라에 맥주를 섞은 칵테일을 마셨다. 빈 속에 한 모금에 갔다. 기분이 금방 최고조가 되었다. 뜻밖의 외식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심신이 약해진데다 애 둘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무척 힘겨웠던 딸이 드디어 더 있어 달라는 회유작전을 포기하고 현 상황을 인정하고 혼자 감당할 각오를 했다는 의미와 함께 고마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민은 벌써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석 달을 못 채우고 임산부 딸의 어려운 사정을 몰라라 하고 떠나는 마음이 몹시 괴로워 눈물을 흘리던 어느 아침 모친의 임종 직전 눈물이 별안간 이해되었다. 더 머물고 싶지만 떠나야만 하는 여건에 굴복하는 무기력의 눈물, 절망의 눈물이었다. 영원한 이별도 하는데 이 정도야 나는 딸에게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라고 말하며 체념하기를 촉구했었다. 더 많이 도와 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니 딸은 엄마 말대로 잇몸으로 잘 살 수 있어 잘 살 거야 하며 환하게 웃으며 염려 말라 했다. 안심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제일 가까운 우리 모녀도 각자의 삶은 각자의 몫, 딸의 인생을 내가 살아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절대 고독을 느꼈을 딸을 생각하니 부처님 말씀대로 인생이 고행이고 슬프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내년 1월에, 3개월 반만 지나면, 육아도우미로 다시 만날 희망으로 우리는 웃는 얼굴로 헤어졌다.
첫댓글 아유 ~ 너무 너무 재미나게 읽었네 ~ 채팅하러 가야해서 막 급히 읽었어. 나중에 다시 와서 도 읽을거야 ~
찬찬히 잘 읽었어. 경위야 ~ 참 잘 썼네 ~ ㅎㅎ 감동하며 읽었어 ~
무수리 하러 간다더니 대접도 잘 받고 왔네 ~
친구들이 답글에 썼네요 ~~~ ㅎㅎ
경위야~ 어찌 그리 구구절절 마음을 표현하실수 있는지? 부럽다~~
마지막 문단에 엄마와 할미로서 자식사랑하는 마음~ 감동이다.
사랑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각자가 져야만하는 삶.
여운이 남네요~~
난 너무 바빠 이 글 읽을 시간 조차 없어.. 그러나. 경위 글 덕에.. 댓글 쓰지 않던 경숙이와 인원이가 한 페이지 쓴걸
보면 역시 경위..
정말 단편 소설 정도 되는거 같아.. 몇일 후에 읽을수 있을듯..
점점 길이도 길어지고 생각도 많아지고 보는 눈도 더 커져 가는거 같아..엄지 척..
와.~~대단한 칭찬이다. 제임스죠이스의 글을 읽은 느낌이라는 .....
나는 지금도 그의 글을 읽으려면 졸립기 부터 하는데.ㅋㅋㅋ
경위글은 결코 졸립지 않아요. 박차를 가해서 정진 하시길~~
지금 다 읽었어.. 나도 네 맘이 이해되고 부럽기도하고 같은 마음이 되어 같이 울자고하네..
유리나 애리나 이담 커서도 할머니 얼굴은 기억이 가물 해지더라도 할머니가 저이들을 이해 시키던
대화나 말들은 어딘가에 남아 있어 할머니를 그리워 할거 같아..
나도 손주가 있음 저렇게 잘 할수 있을가 아님 그렇게 할텐데.. 하는 생각이 들고..
이 글도 다 읽고 이해 되게 한국어도 배우면 좋을거 같아..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자유롭게 살게해서 이렇게 지금 내가 힘 들어하는거란 생각이 들어.
내가 사느라고도 힘들어 그랬을지는 몰라도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라 달게 감내하는중..이지만..
능력이 되면 한글도 배우는 한글 학교도 다니게하면 좋을거 같단 생각이 들었어..
한글은 단어의 뜻을 배우는게 어렵지만 사실 글자나 발음을 하는건 아주 과학적이라 그자리에서 배울만큼
좋은 글이지..
어휴 경위야...하도 길어서 오늘에야 다 읽었네...ㅎㅎ 며칠 드나들면서 ...책 한권 읽은 기분....
너무 재미 있게 잘 읽었어.... 다음에는 조금 나누어서....연재 식으로 써도 좋을 거 같아...
나이드니까 긴글 한꺼번에 읽는 것도 쉽지가 않네....ㅎㅎㅎ 미안....
그리고 글씨도 좀 크게 써주면 좋겠고...
네 글 좋아하기 때문에 다음에 더 잘 읽을 수 있게 부탁하는거야...
글자는 크게...문단은 짧게....전체...길이는 한 두 페이지 정도....연재 회수는 무제한....
아마 나이스한 다른 친구들도내 제안에 공감하지 않을가....ㅎㅎ 착각은 자유...
정말 같은 나이 친구 글이라 공감하며 잘 읽었어...좋은 글 고마워...
역시!!!! 경위
"우리들의수다"방에서 이 방으로 들어와
주~~욱 . 어쩜 이렇게 잘 쓰는지.
이렇게 잘 쓴 글 여기에서 우리만 읽는게
아까워.
옛날에 올렸든 기행문과 모두 모아
책 만들면 그 때 또 다시 열심히 감동하며
읽을것 같애.
아 그대는 정말 멋진엄마, 멋진할머니!!!
멋진 교수님의 전력도 있지요?
이런 멋진 친구가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맞아.. 나도 그 생각했어.. 내가 한 생각이니 경위도 물론 생각했을거야..
며칠전부터 읽으려다가 읽기에 시간좀걸릴것같아 아껴두었던것 지금 새벽 맑은 정신으로 읽었오.
이 긴글이 단숨에 숨도 못고르게 빨리 읽혀지더니만 끝판에는 웬 일로 눈가까지 축축하게 적셔지는 느낌.
순간 순간을 그림보듯 느껴지게하는 사실적 묘사와 그 순간 이어지는 사유의 세계까지 ...모두가 그대의 작가적 재능을 아낌없이 나타내주고 있어요 ~~~
경위야, 감탄!!!
고맙고 고마워요 친구들!
우리 동기들 글도 무척 감동스럽던데... 하루 빨리 받아 읽으시길!!
경위야. 어쩜 그리 real 하게 표현을 잘 했는지? 감동이다! 난 아직 복무 중이라 격하게 공감이 돼~ 나 복무 끝나 서울 가면 off line에서 할 이야기가 많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