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1827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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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생명의 화관을 씌워주실 것이고, 흰옷을 입혀주실 것입니다!>
야구 좋아하시는 분들 다들 잘 알고 계시는 것 처럼, 9명의 선수들이 모두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포지션은, 광속구로 상대팀 타자들을 윽박지를 수 있는 선발 투수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홈런이나 안타로 타점을 낼 수 있는 강타자입니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스코어 상태로 이기고 있는 9회말에 등장해서, 경기를 끝낼 마무리 투수 역시, 그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의 마무리 투수는 바로 요한 묵시록입니다. 그런데 묵시록 하면, 우선 떠오르는 느낌은, 뭔가 감춰지고 신비로운 책, 조금은 어렵고 두려운 책이란 느낌입니다.
그러나 사실 요한 묵시록은 우리 인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과, 강렬한 구원의지가 담기져 있는 사랑과 위로와 희망의 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봉독할 때, 두렵고 부담스런 마음을 내려놓고, 감사와 찬양의 마음으로 읽어야겠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신비롭고 어려운 책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독특한 표현과 평범치 않은 상징들로 인해 다양한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이나 이단들의 그릇된 해석으로 인해 많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사이비 종말론자들에 의해 애용되었습니다.
물론 요한 묵시록이 이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 관한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회개와 새생활을 촉구하는 동시에, 세상의 온갖 시련 속에서도 굳건하게 살아가도록 자극하며,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따라서 때로 강도 높은 높은 표현, 때로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표현을 접하더라도 너무 겁먹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묵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시지만 위로하십니다. 충격을 주시지만 동시에 희망도 주십니다. 고통도 주시지만 동시에 구원도 주십니다. 결국 그 모든 강력한 표현들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극진한 사랑의 표현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가 눈물로 외치듯이, 주님께서는 요한 묵시록을 통해 우리를 얼르고 타이르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결국 요한 묵시록은 고통 받고 있는 우리 교회를 위한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 바로 그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 편지를 보냅니다. 때로 인내와 항구함, 굳센 믿음과 봉사, 말씀에 대한 충실에 대해서는 극구 칭찬합니다.
반대로 배은망덕과 나태함, 이단과 거짓예언자,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함에 대해서는 아주 강하게 경고를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성령의 음성에 깨어있으며, 자신의 신앙을 굳게 지켜나가라고, 격려하십니다.
그렇게 노력할 때, 주님께서는 생명의 화관을 씌워주실 것이고, 흰옷을 입혀주실 것이며,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될 것이며, 그리스도와 한 식탁에 앉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하십니다.
기쁘고 설레는 마음, 감사와 희망의 마음으로 요한 묵시록을 봉독해야겠습니다.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요한 묵시록 2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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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복하지 않은 이유>
인간 아기와 침팬지를 같이 키우면 침팬지가 인간을 닮을까요, 인간이 침팬지를 닮을까요? 1927년 심리학자 윈스럽 켈로그는 아내를 설득하여 자신의 아들 도널드 켈로그를 구아라는 이름의 침팬지와 함께 키웠습니다.
이 실험은 아기가 태어나기 3년 전부터 계획되었습니다. 윈스럽 켈로그는 인도에서 늑대에게 자란 아마라와 카마라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아기로 이 실험을 해 보려 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환경에 영향을 더 받는지, 아니면 유전자적으로 스스로 성장할 수는 없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실험을 통해 ‘침팬지가 아이처럼 자라는 게 아니라, 아이가 침팬지처럼 자란다.’는 결과만 얻게 되었습니다. 19개월이나 된 도널드는 침팬지와 자란 덕분에 사용할 줄 아는 단어가 3개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더 이상 자신의 아기를 침팬지와 키워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실험은 끝났습니다.
도널드는 제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부모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믿음이 생겨야 할 아주 중요한 시기에 행복을 침팬지에게서 찾게 된 것입니다.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이 행복이라는 믿음이 생겨야 할 시기에 스마트폰만 쥐어준다면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은 뻔합니다. 행복에 대한 잘못된 기준이 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침팬지 구아는 본래 어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인간에게 길들여졌기에 부모와 함께 있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죽고 맙니다.
도널드는 언어능력이 빠르게 향상되었습니다. 나중에 하버드 대학 의대에 진학해 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모가 죽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는 심한 완벽주의자였으며 그로 인해 우울증을 겪어왔다고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실험에 이용된 도널드는 자신의 존재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충분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자신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려 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자신을 완벽주의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단지 실험도구로 사용하려 했던 아버지가 그를 인정해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그는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우울해 했고 더 이상 자신을 인정해 줄 부모가 사라지자 살아야 할 이유도 잃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잘못된 행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늑대에게 키워진 아이는 사람에게 발견이 되었을 때 다시 정글 속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늑대와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한 그에게 사람으로 살아가는 행복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사랑받을 존재라는 것을 믿게 해 주어야만 아이에게 행복은 곧 사랑임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해야 칭찬해준다면 그 아이는 세상 것들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또 다른 괴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도 참 행복이 아닌 다른 것을 행복으로 믿게 만드는 원숭이가 한 마리 있습니다. 원숭이는 바나나를 먹고 아무데나 똥을 싸는 게 행복입니다. 인간으로 만들려면 먼저 아기에게 원숭이로부터 배운 행복관을 바꿔줘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바나나가 행복이라고 느끼면 다른 무엇이 다 채워져도 언제나 배고프게 돼 있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계속 행복할까요?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행복감이 극도로 상승됩니다. 그러나 두 달만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이는 연구에서 다 증명된 것입니다.
결혼을 해도 그렇고 승진을 해도 그렇습니다. 분명 그런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믿었는데 왜 생각처럼 그 행복이 지속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스마트폰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 것들로는 행복할 수 없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음식만 먹어서는 그 갈증이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도 여전히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믿고 돈과 명예와 쾌락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그 욕구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 받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믿지 말아야합니다.
자기에게 심겨진 것들이 거짓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아닌 모든 행복은 거짓입니다. 아예 생각을 끊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만 있으면 행복할 거라 믿는 눈먼 거지에게 세상 사람들은 그냥 조용하고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어. 돈도 있어야하고, 아이들도 잘 돼야 하고, 큰일을 이뤄야 행복하지!’라고 말하는 군중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고 그리고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우리 자신 때문이라고 돌을 들고 서 있는 바리사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면 그 소리는 무시해야합니다. 인간은 숨만 쉬고 있어도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죽어주실 만큼 존귀합니다. 그렇게 사랑하시고 천국의 자리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아기가 부모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느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하느님만이 행복이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거지는 그저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눈을 떠봐야 세상에서는 여전히 천대 받는 거지입니다. 하지만 눈이 보여야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받고 있다는 믿음 하나로 가난하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큰 것이 아닌 그저 굶지 않고 이슬 맞지 않는 삶을 살 수만 있어도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행복할 수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외적으로 오는 행복은 순간적입니다. 그리고 오랜 고통을 줍니다. 주님 외에 행복이 있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주님을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에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는 이들에겐 종말이 참 기쁨입니다. 하지만 세상 것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주님이 오시는 것이 재앙입니다. 종말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우리의 죽음, 바로 이 종말이 참으로 행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참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참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눈을 뜨게 된 소경처럼 주님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이 순간 숨만 쉬고 있어도 행복할 수 있어야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보장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커다란 상을 받게 된다면 오늘 조금 힘들어도 기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이 기쁘지 못한 이유는 내 안의 원숭이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랑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아가 말하는 행복관을 믿지 맙시다. 행복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행복입니다. 사랑합시다. 그리고 행복합시다. 사랑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였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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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8,35-43
: 주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애원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고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과 권위로써만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듯 예수님께 나아간다.
누가 지나가느냐고 눈먼 사람이 묻자,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절)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38절).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 그들은 눈먼 거지가 시끄럽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다시 믿게 하시려고 빛이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 매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의 선물을 받게 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이렇게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이 구원을 주었고, 그 다음에 시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권위로 말씀하셨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절) 이 말씀은 인간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 누가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가? 주님은 하느님께 기적의 능력을 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셨다. “다시 보아라!” 이 한마디가 눈먼 이에게는 그대로 빛이었다. 참 빛이신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절)고 한다. 그는 이중으로 눈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의 눈먼 상태 뿐 아니라, 마음의 눈먼 상태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그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군중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가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 그러기에 우리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이제 주님의 참 모습을 바라보며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주님께 은총을, 그러한 기적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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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요한 묵시록은 박해받는 교회 안에서 세상의 악과 싸워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에페소 교회가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에 휩쓸렸어도 노고와 인내를 잃지 않고 난관을 이겨 내기는 하였지만, 교회의 신앙을 지키다 보니 복음의 핵심인 사랑과 기쁨을 잃었다고 책망을 받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새겨들어야 할 하느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예수님께서 예리코의 눈먼 이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 회심과 치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 줍니다. 눈먼 이는 예수님을 단순히 치유 능력을 가진 위대한 분으로 보고 자기 병을 고쳐 달라고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 곧 ‘메시아’로 먼저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볼 수 없게 된 처지가 자기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겸손하게 청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에게서, 메시아를 갈망하는 한 나약한 인간이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가 모두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와 나누신 대화는 한 인간이 치유를 얻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는 살면서 진정 내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올바른 청원과 믿음의 태도, 그리고 보면서도 참된 것을 못 보는 우리의 믿음의 자리를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국장/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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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기현 요한세례자 신부님]
<첫 마음을 회복합시다.>
오늘 독서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이 말씀을 듣고 ‘나는 어떤 첫 마음을 잃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지금 첫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잃은 모습이 있을까...’ 하는 약간은 교만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복음을 묵상하기 위한 초기 작업에 예전 같은 사랑이 없어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복음 묵상을 할 때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 정말 무식하게 복음 내용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고 모임이 많을 때는 mp3에 녹음을 해서 듣고 다니며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복음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날 그 날의 복음을 자연스럽게 외울 정도 까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외우는 것 까지는 무리다. 100번 정도만 읽고 다음 작업을 하자...’ 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100번을 다 읽기 전에 메시지가 보이는 경우가 있어도, 100번을 다 읽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메시지가 보이면 그 메시지를 잡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글을 쓰는 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에 대한 사랑과 열정보다는 묵상글이라는 결과물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으로 느끼고 깨닫기 보다는 머리가 자극을 받아야 만족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저번에 장 신부님이 견진 강의를 하셨을 때,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았으면 좋겠다...’ 하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저에게 딱 맞는 말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을 읽을 때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마음의 감동을 느끼는 단순한 작업을 그동안 많이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첫 마음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이 오늘 들려주시는 말씀을 천천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음미하고 느끼고 되새기며 읽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졌던 첫 마음을 잘 기억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지녔던 그 열정과 순수함,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을 잃어버리시지는 않으셨나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인생의 목표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다른 목표들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소홀해졌다면, 다시 첫 마음을 회복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한 작은 노력들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하던 일들... 곧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미사를 봉헌하고, 공동체 안에서 친교를 나누는 그 일들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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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십계명을 잘 지키고,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8,20-22) 그런데 그 부자는 슬퍼하면서 그냥 떠났습니다.(마르 10,22)
복음서 저자들은 그가 그렇게 떠난 것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는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도, ‘영원한 생명’보다는 ‘재물’ 쪽에 마음이 더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그냥 떠났습니다. 그 부자와는 대조적으로, 예리코의 눈먼 이는 예수님 덕분에 눈을 고치고 다시 보게 된 후에 “나를 따라라.”라는 예수님 말씀이 없었는데도 스스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그 눈먼 이는 거지여서 재물이 없었고, 그래서 아주 쉽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이 없다고 욕심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더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나 적게 가진 사람에게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유한 사람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한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슬퍼하면서 그냥 떠나버린 부자는 희망하기만 하고 노력은 안 한 사람이고, 예리코의 눈먼 거지는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 18,35-39)
‘눈먼 이’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마르 10,46). 이 이야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을, 또는 먹고사는 것만을 신경 쓰면서 살아야 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가르쳐 주었는데, 바르티매오는 곧바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즉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자신의 인생을 비추어 주는 빛.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는 어두운 인생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해 줄 빛.)
거지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몇 푼의 돈을 달라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도 그렇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바르티매오를 꾸짖은 것은, 지금은 구걸을 하면서 예수님을 방해할 때가 아니라는 뜻일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당시에는 공공연하게 사용할 수 없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의 입장에서는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회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40-43)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는데, 이것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달라고 청한 것과 같습니다. “다시 보아라.”라는 말씀은, 그의 눈을 고쳐 주시는 ‘치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사람들의 병과 장애를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바르티매오의 믿음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말씀으로, 즉 그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치유의 은총을 주셨다는 말씀으로 해석하면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입니다. 여기서는 그의 ‘믿음’이 아니라 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제부터는 ‘믿음으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다시 보게 된 후에 새로운 직업을 찾아서 떠났다면, 그래서 거지로 살 때보다는 좀 더 잘 살게 되는 인생을 살기를 희망했다면, 이 이야기는 따로 기록할 필요가 없는, 단순한 치유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르티매오가 원한 ‘새 인생’은 물질적으로 좀 더 편안한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신앙인의 인생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뒤를 그대로 따라가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바르티매오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거의 같은 수준으로 믿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이 없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의 은총을 얻은 사람이 곧바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바르티매오가 응답한 이야기로, 즉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서 새롭게 눈을 뜬 사람들이고, 눈을 뜬 다음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새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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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님]
<자신에 대한 인식>
수도원을 찾아오는 많은 신자분들이 면담을 통해 자신의 문제나 어려움들을 토로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아픔들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합니다.
또 어떤 경우,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다 스스로 실타래처럼 얽힌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곤 합니다. 저로선 아무것도 한 일이 없지만 참으로 보람과 기쁨이 느껴지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식할 때에 구원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실망하며 마냥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다면 진실한 기도가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 즉 자기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을 통감하며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고백할 수 있을 때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기 시작합니다.
참된 신앙이 싹트는 순간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내 스스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오래된 착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지요.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원하는 예리코 소경의 바람을 예수님이 모르셨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은 소경이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식하고, 눈을 뜨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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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마진우 요셉 신부님]
<깨어 있으십시오>.
처음에는 약간의 이기성과 게으름으로 시작했다가 그것이 해야 할 일에 대한 회피로 드러나게 되고 나아가 그것이 누적되기 시작하면 인간의 내면 안에 '악'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렇게 간단한 도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로 인해서 악이 야기된다는 것, 그리고 그 의지의 변화는 아주 사소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정말 못되고 악한 사람은 전면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설픈 악인들이 자신을 극명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정말 못된 사람은 자신은 선한 가면을 쓰고 남을 설득하여 악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남을 죄짓게 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지금 세상의 대립구도를 잘 살펴보면 그 안에는 가장 근본적으로 그 움직임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는 본당 안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어느 공동체에나 그러합니다. 막상 서로 부딪혀 싸우는 사람들은 도대체 자신들이 왜 그러고 있는지 핵심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선을 퍼뜨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선을 배워 알고 실천하고 다른 이를 선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악을 식별하고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악은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여러분에게 '선'의 얼굴을 드러냅니다. 술 포장지가 아무리 이쁜 여배우로 장식되어 있다고 해도 절제없이 들이킬 때 결국 우리에게 방탕을 가져오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악으로 이끌 수 있는 요소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대낮에 걸어가는 사람처럼 깨어 있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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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눈을 뜨는 사람>
지금은 책 제목도 생각나지 않지만 옛날 어느 목사님이 쓴 자서전적 소설에서 실명하여 세상 것들은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덕분에 영적인 눈이 뜨여 하느님을 보게 되고, 그래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마침내는 목사님이 된다는 내용을 감동적으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읽은 것이 너무 오래 되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양곡은 그 반대로 장님이었던 소녀가 눈을 뜨게 되지만 오히려 더 불행해진다는 내용입니다.
볼 수 없었을 때 목사의 사랑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보지만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인간 사회의 탐욕과 부조리를 보게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 눈을 뜨건, 눈이 멀건 희망, 구원, 행복은 영적인 눈이 하느님을 바라보고 영적인 감수성이 하느님의 사랑을 현현(顯現)하는 것들 안에서 현재적으로 볼 때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눈 먼 이는 눈을 뜸과 동시에 영적인 눈도 뜬 구원 받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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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석찬귀 스테파노 신부님]
<내 혼에 불을 지르는 일을>
지난 주간에는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더니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나뭇잎들이 눈을 감듯이 조용히 지고 있었습니다.
그 날 저는 겨울을 앞두고 나뭇잎이 시들고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때가 되면 제 몸도 시들고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말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제 욕심을 버리는 일을 소흘히 하다가는 제 마지막 날에는 제 영혼이 갈 곳을 찾지 못해 영영 방황할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리코는 너무 따스해서 옛날부터 휴양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쉬는 곳이었고, 거기엔 순례자들의 도움을 구하려는 거지들이 득실거렸다고 합니다.
예수님 일행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다가 잠시 에리코에 쉬었다가 떠날 무렵, 한 소동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맹인이며 거지였던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멸시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바르티매오는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열어준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분의 따스한 손길이 자기에게도 닿게 되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그 뜨거운 희망이 바로 눈앞에서 이뤄질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니 그가 예수님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건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위 사람들은 온갖 장애물을 만들어 방해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구애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바르티매오를 자비로운 손길로 잡아주면서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은 우리 영혼이 참으로 머물만한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들어있는 눈 먼 아집과 위선,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훌훌 태워버리는 일에 마음을 모으라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울로 사도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인간이 있는데, 하나는 겉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속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겉 사람은 우리 안에서 시들어 버리고 없어져 버릴 몸을 말합니다. 러나 속사람은 겉 사람이 사라지고 힘이 없어질수록 더 새로워지면서 힘을 발휘하는 주님의 생명을 말합니다(2 코린 4,7-12)
사실 우리 인간은 우리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자랄 때만 누구도 줄 수 없고, 무엇도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16-18).
그리스도인은 순간순간마다 자기를 비워내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학생들과 공동기도를 바치려고 하니까 힘들 때가 너무 많고, 새벽에 기상 벨 소리가 들리면 또 죽었구나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실 성당에 갈 때마다 저는 또 죽으려 가는구나 싶습니다. 흔히 세상에서는 돈 벌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돈을 내고 쓰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 세상에서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정신없이 뛰어다닙니다. 그러나 성당에 오면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시간을 소비합니다.
또 세상에서는 제 잘난 맛에 살고 저마다 자기주장을 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면 나 죽었다는 맘으로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 안에서 겉 사람이 죽으면 죽을수록 우리 안에서는 예수님의 생명이 쑥쑥 자라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제아무리 주님께 자녀를 바치고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한다 해도 우리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자라지 않으면 그것은 겉치장에 불과합니다.
또 우리가 제아무리 선교를 많이 하고 봉사활동을 한다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이 주님의 생명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을 일종의 허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나뭇잎이 지고 있는 이 늦가을에 우리가 정말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어두운 겉치장들을 훌훌 태워 버리는 것이라고 외치는 듯 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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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다시 일어나라...>
하느님의 은총은...믿음으로 내 마음 안에 영적인 것을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 영적인 것을 통하여 육적으로 바라는 소망을 다시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다시, 다시, 다시 일어나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그토록 놀라운 기적과 하느님나라를 전하는 말씀으로 백성들에게 다가섰지만,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백성들의 믿음 부족 때문입니다. 믿음은 나의 확신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느님을 신뢰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기네...믿음이 이기네...믿음으로 일어나서 그분께 함께 갑시다.”
구약에 아가서 2장을 보면...하느님께서 고운님들에게 속삭이며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오늘 복음을 보면...예수님께서는 예리코의 어떤 눈먼 이를 다시 보게 해주셨습니다. 이 눈먼 이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웠으면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좀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께 청을 합니다. 그가 이렇게 예수님께 청하고 또 간절히 울부짖으며 청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만이 자기를 고쳐주실 수 있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고는 그가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혹시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 부족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그 사랑의 길에서 숨소리도 못 내고, 그냥 힘겨워서 벗어나서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키워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사랑의 길을 벗어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십자가의 길, 이 사랑의 길에서만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굳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고운님들 마음속에 함께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주님의 말씀 안에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은총이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라. 네 믿음이 너의 삶을 구원하였다.” 이제 우리 믿음의 삶이... 모든 이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고, 고운님 자신들에게는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은총 가득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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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루에 보통 몇 번의 식사를 하십니까? 아마 대부분이 세 끼 식사를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한 끼 식사에 세 끼의 양을 한꺼번에 먹어치운다면 어떨까요? 어차피 먹는 양은 똑같으니까 상관없을까요?
이번 주에는 무척 바쁠 테니, 하루에 몰아서 7일치를 먹고 나면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상관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하게 먹었어도 식사 때가 되면 또다시 시장함이 찾아올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식사 때가 되면 배고프냐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다른 이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멍청한 짓 좀 하지 마.”
우리 신앙인들도 이런 어리석음을 자주 간직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형제님께서 어려움에 빠져서 아주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난생처럼 9일 기도도 바치고, 매일 미사도 빠지지 않고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열심히 기도한 자신을 외면하셨다면서 너무나도 원망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세요?”라고 묻자, “들어주시지도 않는데 무슨 신앙생활을 합니까? 지금은 그냥 힘들게 지낼 뿐이지요.”라고 대답하십니다. 한 끼의 풍족한 식사로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되지 않는 것처럼, 얼마간의 기간 동안 집중했던 기도만으로 자신의 바람이 채워질 수 없습니다. 하루 몰아서 집중적으로 바치는 기도보다 더욱 더 필요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코의 소경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외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변에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어도 더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칩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르느냐?”라고 묻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또 지향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곧바로 주님께 매달릴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십니다.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 얼마나 매달렸을까요? 오랫동안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포기하지 않았던 믿음이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또한 도저히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장애물에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결국은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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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수원에 있으면서 강의를 듣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제가 모르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기쁨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수 있음을 아는 것도 기쁨입니다. 강의에서 ‘잠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잠심을 ‘내가 아는 것이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신수련 23항의 중용(불편심)과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고, 건강한 것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 있고, 부유한 것보다 가난한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잠심은 나의 욕망, 나의 분노, 나의 시기와 질투를 내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나의 감정을 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비워진 나의 마음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원뿔은 3차원의 도형입니다. 이것을 정면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보이고, 위에서 보면 원으로 보입니다. 정면에서 보는 사람은 위에서 보는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위에서 보는 사람도 정면에서 보는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나의 자리를 버리고 상대방의 자리에서 보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버리고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전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에 안주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을 오히려 박해하고, 공동체에서 쫓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세상,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 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곁으로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치, 용서, 믿음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일치란 타협과 수용으로만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타협과 수용은 결국 쉽고 편한 길로 가기 마련입니다. 일치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의 편으로 향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현하는 것이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상대방의 입장과 상대방의 처지에서 나 자신을 맞추는 것이 일치의 시작입니다. 신앙 안에서 일치란 대상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것은 일치가 아니라 강요입니다.
용서란 잊어버리거나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그 사건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잠심의 개념과 비슷합니다. 알되 그 앎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주사위는 내가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처럼 용서도 그렇습니다. 용서했다고 하지만 내 안에 원망이 남습니다. 결국, 용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대하면서 사건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으면서 믿는 사람이 있고, 믿고 싶으면서 믿는 사람이 있고, 믿고 싶지 않으면서 믿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절벽에서 나무를 잡고 있는 사람이 기도 중에 나무에서 손을 놓으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의 생각과 판단이 중심이 된다면 나무에서 손을 놓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 안의 주인은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상이 내 안의 주인이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의 주인이 되고 있지 못합니다. 내 생각이 나의 주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예수님이 내 안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승강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눈을 뜬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자비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경은 주님께 간절하게 외칩니다. ‘주님 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질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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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날로 자유롭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
사람 누구나의 소망이 자유롭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과연 이런 삶에 이른자 몇이나 될까요? 개안의 여정을 통해 주님과의 일치와 우정이 깊어가면서 주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자유롭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제가 요즘 몇 년간 참 많이 강론 주제로 삼았던 것이 바로 무지입니다. 마음의 병중에 가장 치명적인 병이 무지의 병입니다. 하여 무지는 병이자 악이자 죄라고도 합니다. 모든 불행의 뿌리에는 무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무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눈이 멀었다', '눈이 가려졌다'는 뜻은 바로 무지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육안은 멀쩡해도 눈의 시력은 좋아도 영안이나 심안은 형편없이 약할 수 있습니다. 하여 눈뜬 장님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글을 모르는 경우 문맹이라 하고 색을 구분 못하는 경우 색맹이란 말을 쓰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이 참 심오합니다. 미니복음서라 할만큼 복음서의 압축같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인간’이 상징하는 바 무지의 눈 먼 비참한 인간을 상징합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몇이나 될런지요. 길에서 길이신 주님을 갈망하는 무지의 인간입니다. 눈 먼 무지중에도 좌절이나 절망함이 없이 길목에서 참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며 찾았던 갈망의 사람이 바로 예리코의 눈 먼 걸인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갈망의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갈망의 믿음 없어 절망으로 자포자기하여 찾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은 그냥 스쳐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평생 눈 먼 무지의 사람으로 인생 마쳤을 것입니다. 평생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눈 먼 무지의 사람으로 살다가 인생 마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무하겠는지요. 사실 이런 경우 얼마나 많겠는지요.
하여 절망이 대죄임을 깨닫습니다. 눈 먼 걸인은 결코 절망하지 않았고 눈 먼 무지중에도 갈망의 믿음으로 영혼은 깨어 있어 주님을 기다렸고 찾았음이 분명합니다. 간절히, 절실히 기다릴 때,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눈 먼 걸인과 주님의 만남이 참으로 극적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르짖는 눈 먼 걸인입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대로 미사시작되면서 우리가 바치는 자비송 기도입니다. 예수님 일행들은 잠자코 있으라 꾸짖었지만 그 누가 갈망의 외침을 막을 수 있겠는지요. 좌절할 줄 모르는 눈 먼 걸인의 믿음의 탄력이 놀랍습니다. 누르면 곧장 튀어나오는 용수철 같은 믿음의 탄력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복음의 눈 먼 걸인은 두 번 자비송을 바치지만 우리는 미사중 세 번을 바칩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응답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은 복음의 가난한 눈 먼 걸인뿐 아니라 미사에 참석한 눈 먼 걸인들인 우리 모두를 향해 묻습니다. 이 물음보다 또 이 물음에 대한 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평생화두로 삼아야 할 물음이자 답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물음도 단순명료했고 답도 또한 단순명료하기가 불교 선사들의 문답같습니다. 예 사막 수도승을 찾았던 구도자와의 문답같습니다. 참으로 간절하면 군더더기 말은 생략되고 본질적인 내용만 남기 마련입니다. 사실 제대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여 한자에도 견해見解, 견성見性, 관상觀想, 각자覺者 등 ‘볼 견見’자가 들어가는 말도 꽤 많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시니 그는 즉시 다시 보게 됩니다. 말 그대로 눈이 열리니 불교 용어로 개안開眼입니다. 한 두 번 개안이 아니라 평생 매일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 눈을 뜨는, 눈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개안의 여정은 바로 주님과 만남의 여정, 믿음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위치도 의미심장합니다. 앞서 어떤 부자는 재물이 많아서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했습니다. 부자는 탐욕이 눈이 멀었고 눈이 열릴 개안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어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들었던 제자들은 무지에 눈이 멀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눈 먼 걸인은 주님을 만나는 데 성공했고 눈이 열렸습니다. 무지의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눈 먼 걸인은 눈이 열리자 하느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따라 여정에 오릅니다. 찬미와 감사로 주님을 따르는 삶, 이보다 아름다운 삶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리니 주님은 그대로 그의 운명이자 사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개안의 여정, 믿음의 여정에 오른 눈 뜬 사람입니다. 주님을 보라 있는 눈이요 주님을 따르라 있는 다리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행복기도내용은 그대로 오늘 복음의 눈 뜬 자의 행복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주님/눈이 열리니/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여정 중에/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당신은/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저의 사랑/저의 기쁨/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감동이요/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시작하는/당신을 따르는/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날마다 평생 주님을 따르는 개안의 여정, 믿음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중에 깊어가는 주님과의 우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주님을 가까이 닮아감으로 우리를 아름답게 하고, 주님을 알아감으로 무지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하니 주님은 바로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의 에페소 교회의 문제가 어디 있는지 확연히 드러납니다. 개안의 여정, 믿음의 여정에 소홀했던 바 초발심의 열정이, 사랑이 식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하여라.”
날로 밝아져야 할 사랑의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열정에 불을 붙여 초발심의 자세로 바로 열정의 사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육신은 노쇠해 가고 육안의 시력은 약해지더라도 사랑의 심안의 시력은 날로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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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시력이 6.0 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내세의 세계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 더욱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 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 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났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습니다.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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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양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눈 먼 이가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그냥 “길가에 앉아”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 39)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습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 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 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곧 진정 청해야 할 바를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도록 우리의 진정한 원의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께 대한 신뢰와 의탁을 원하십니다.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 41)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다시 보는 눈이요 새로운 눈이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그런데 눈이 멀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물론,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혹은 주위에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눈을 감고 있는 것일까? 왜 눈을 뜨지 않을까?
그것은 사실, 눈을 감고 있는 것은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보지 못할 것입니다. 곧 눈을 뜨고 싶어 하지도, 눈을 뜨려고도 하지 않기에,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어둠 속에 갇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 42).
그러니 이제는 보려고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곧 사랑을 보는 일, 빛을 보는 일입니다.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이처럼,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말해줍니다. 그는 이제는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섭니다. 육적인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입어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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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나무랄데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어느것 하나 흠잡을데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심판날이 와도 두렵지 않겠죠ㆍ
'나는 잘못한 게 없고 깨끗하다' 하는 순간 자신의 더러움을 보게 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교만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겸손으로 자신의 모습을 닦을테니까요.
다시 볼 수 있게, 다시 걸을 수 있게 ..
다시 먹을 수 있게, 다시 살 수 있게 ‥
다시 사랑하게, 다시 시작하게 ‥
내 안에 '다시'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자존심과 체면은 내다 버리고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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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 41)
소통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치유입니다.
치유를 바라는
우리들입니다.
저마다 가장
절박한 곳에서
주님을 만나게됩니다.
우리의 가난함이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가난함을 통해
만나게되는 자비는
새로운 길을
열어줍니다.
눈 먼 우리 자신을
인정하게 됩니다.
주님의 손에
눈 먼 우리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아팠던 시간만큼
소통을 절실히
원합니다.
눈이 열려
하늘과 땅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다시 보아라."(루카 18, 42)
진정한 주님의 자비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제대로 다시 보며
사랑하게 합니다.
제대로 볼 때
제대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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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정리/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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