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르포] 북한의 국경을 가다(하)
■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
압록강변에 있는 북한 공장
북한의 만포시와 서로 교통로를 잇고 있는 통화시에서 서울 한복판에서도 쉽사리 구입해 먹는 천지물인 ‘백산수’를 생산하는 백산시를 지나 이곳으로 들어오기까지 냄새와 모습, 풍경이 모두 달라졌다. 광활한 만주벌판의 풍족했던 색체는 형형색색의 고층빌딩으로 바뀌고 황해에서 불어오는 바다내음까지 코를 간지럽힌다. 압록 국경을 따라 펼쳐진 북녘의 황량함은 강 건너편으로 쭉 이어졌다. 단동시에서 중국이 새로이 만든 동북공정의 산물인 호산산성을 거쳐 압록의 하중류 지점인 호산장성(虎山長城) 나루터에서 압록강 유람선을 탔다. 단동시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곳의 장성은 1992년부터 1km 정도가 복원되어 현재,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이 호산장성 위에 서면 북한 땅과 국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압록강에서 만나다
![]() 압록강변의 가을걷이 풍경
유람선에서 본 압록강변의 늦가을 풍경은 두만강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여유자적한 분위기이다. 한두 명의 북한주민이 강에서 낚시하는 풍경은 큰물피해로 고통을 겪던 두만강의 대조적인 모습과 참 묘하게 겹쳐(overlap)보였다. 또 압록의 하중도 지역에 속하는 구리도(九里島)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초록색 페인트를 입힌 북측 초소 곁에 누런 황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가을걷이하는 농민들의 모습도 보였다. 겨울채비로 작물을 거두고 땅 속에 묻는 듯이 가족 4명이 온힘을 쏟고 있다. 이 섬은 1388년 요동정벌에 나섰던 고려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가 회군하여 조선 개국을 열었던 위화도, 갈대로 종이를 생산하는 비단섬(薪島)과 최근 개발 열풍이 불었던 황금평 등 몇 개의 섬들과 함께 압록강의 삼각주를 이룬다. 이외에도 관마도, 다사도(多獅島), 벌등도, 어적도, 유초도, 임도, 막사도 등 여러 섬들이 모두 북한의 땅이다.
선미에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단 유람선은 붉은색 깃발을 펄럭이며 중국강변에서 북한과 경계를 이루는 넓고 흐릿한 압록강 물길로 나아갔다. 40여 명의 중국 승객들 틈 사이에서 나무한그루 없는 민둥산을 배경으로 초소와 집들을 사진 찍었다. 북측 군인들을 찍지 말라는 안내방송에 좀 움츠러들었지만 그래도 몰래몰래 그들을 찍기에 바빴다. 압록강의 수심이 깊은 곳은 공유수역이기에 중국인 선장이 유람선을 북측 강변 가까운 쪽으로 붙이지자 청회색이던 그 땅은 황갈색으로 다가왔다. 강기슭 철조망 구간사이에서 경비대원이 갈대꽃에 숨은 듯이 보였다. 경비 시간을 마친 북측 군인은 낚싯대를 잡고 물목이 좋은 곳으로 걸어가고, 강을 경비하는 경비정 포구에는 두툼한 겨울복장의 여군이 총검 없이 맨몸으로 나와 늦가을의 사색을 즐기고 있었다.
![]() 압록강의 중국유람선
유람할 수 있는 강물 끝에서 회귀하는 유람선은 조류를 타지 않고 유턴하여 잠시 정박하였다. 이때 북측 어민으로 오해할 수 있는 중국어민이 배를 타고와 승객들에게 호객을 하였다. 배가 멈춰서면서 북쪽 강변에 있는 거대한 녹슨 공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허물어질 듯한 건물들과 음산한 굴뚝 더미들이 공장가동을 오래전에 멈춘 느낌이다. 유람선이 중국 측 강변으로 움직이자 위태로운 공장 모습은 점차 멀어져갔고, 헐벗은 북한의 민둥산은 쪽빛 하늘의 여울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지며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압록강은 조강이다
압록강(鴨綠江)은 한민족 태초의 강이다. 단군왕검이 태백산 신당수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면서 내어놓은 젖줄과도 같다. 대륙을 향해서는 장자, 적손(嫡孫)을 뜻하는 왼쪽 날개이다. 반도를 위해 모든 쓰임새를 다 내주는 오른팔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태초의 젖줄인 압록강은 백두산 장군봉(2750m)에서 대간(大幹)을 처음 이루면서 마천령 줄기의 서쪽 산기슭의 작은 계곡에서 만들어지는 첫 물줄기가 발원지다. 북측 땅인 장군봉에서 발원된 압록강은 황해로 이르기까지 길이가 2000리(803km)이다. 북한의 혜산시(장백현)와 중간진(임강시)을 거쳐 만포시(집안시), 수풍댐(관전 만족滿族자치현)에서 다시 신의주시(단동시) 압록강대교를 지나 황금평,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에 이르러서 황해로 흘러간다.
백두산을 지탱하는 한쪽 날개인 두만강은 총길이가 1300리(521km)이다. 무지개봉과 6호 경계비 사이 동북쪽의 산기슭 중턱에서 작은 계곡들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두만강의 발원지로 중국 측에서는 원지(元池)라고 한다. 이곳은 만족(滿族) 시원의 전설이 깃든 처녀 욕궁지이기도 하다. 함경도 무산시, 회령을 지나 남양시(도문시)를 바로 지나면서 온성군 풍서면에서 중국측 훈춘시를 경유하여 조로철교를 지나 나진시 위쪽지역에서 동해로 흘러간다. 한반도와 대륙을 나누는 두 강의 발원지는 공식적으로 위와 같지만, 사실상 천지의 물이 모두 지하를 통해 흐르고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의 으뜸 강(朝母)인 압록강은 고구려 때부터 ‘압록곡(鴨綠谷)’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도 우리 겨레가 이 물줄기를 압록이라고 칭한 것은 2천년 가까이에 이른다. 1712년에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후에 두만강과 더불어 조선과 청나라 양국의 국경이 되었다. 압록강의 지명은 1060년에 편찬된 중국 당(唐)나라 정사(正史)인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물빛이 오리 머리의 색과 같아 압록수라 불린다.”(色若鴨頭 號鴨淥水)"는 기록으로 유래되었다. 당나라 초기의 지리지로 복왕태(濮王泰) 등이 편찬한 『괄지지(括地志)』에 의하면, "마자수는 고려에서는 엄수라고도 하며 지금 이름은 압록수다. 그 나라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이르기를, '물줄기는 동북녁 말갈국 백산에서 비롯되어 나온다. 빛깔이 오리 대가리를 닮았고, 때문에 흔히 압록수라 부른다’고 하였다.” 중국 측에서는 압록(鴨綠)을 ‘얄루(yalu)’ 강이라 부른다. 이것은 만주어로 경계를 뜻하는 '얄루'를 한자로 음차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한자를 찾다가 끼워 맞춘 가능성이 짙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물빛 오리는 집오리보다는 겨울철새인 청둥오리일 것이다. 압록의 푸른 색깔은 수풍댐의 위쪽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안(集安 또는 輯安))에서 보면 더 잘 증명될 수 있다. 그 색깔이 정말 푸르다 못해 빛나는 푸른빛을 띤다고 한다. 지안시는 북한의 만포시와 압록강을 통해 맞닿아 있는데,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이 땅이 고구려의 중심일 때는 동명성왕 주몽의 후예들이 빛나는 활솜씨로 얼마나 많은 오리들을 사지로 몰았을 까만은 지금도 청둥오리들은 여전히 그 강을 터전으로 삼고 있다.
압록강은 흐른다
![]() 압록강 국경수비대 여군이 보인다.
천지의 물로부터 시작된 압록수는 북한의 혜산시에 이르러서 큰 강의 위용을 갖는다. 더욱이 중강진(中江鎭)을 지나는 압록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지역(最寒極)이라는 명칭도 만들었다. 1933년 1월 12일에는 영하 -43.6℃라는 관측상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 삼수갑산이 매서운 날씨라면, 중강진의 날씨는 혹독한 기온 그 자체이다. 그 지명이 ‘압록강의 중류지역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한 중강진은 조선시대 임금이 사는 한양의 광화문에서 볼 때 가장 북쪽이다. 최동단은 정동진, 남쪽은 전남 장흥군 관산읍 신동리이다. 과거 일본 영사관이 있던 중국의 린장(臨江)시와 맞닿아 있는 중강진은 침엽수림지대의 벌목과 벌류의 근거지로 목재의 집산지였다. 중강진의 임업은 지금도 북한의 중요한 수출 경제자원이다. 그 역사는 조선 초기까지 여진의 땅이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사군(四郡)의 설치로 함길도(咸吉道) 갑산군(甲山郡)에 속하게 되면서 조선의 땅이 되었다.
중강진과 중국 지안에서 몇 갈래의 강물을 더 붙여 몸집을 키운 압록강은 북한 최대의 수력발전소가 있는 수풍댐에 의해서 호수가 되었다. ‘물과 바람을 이용한다’는 의미로 이름 붙여진 수풍댐은 평북 삭주군의 압록강에다 중일전쟁 발발 3개월 후인 1937년 10월 시작해 4년의 건설공사로 1941년 8월 5일에 완공한 한반도 최대의 댐이다. 댐 높이가 106.4m, 길이 900m로 당시로선 동양 최대의 규모인데, 수풍 호수는 저수량 116억톤에 수면 면적 3458km², 호수 둘레 1074.4km에 달한다. 당시 조선압록강수력발전 1호기의 하루 발전용량은 10만kW로 단일기로는 세계 최대의 발전량이었다. 첫 전기는 만주국으로 보내졌고 조선에 대한 송전은 그해 9월에 이뤄졌다. 이어서 2∼6호기가 추가로 건설됐고 1943년 11월부터는 모두 60만kW를 발전하기 시작했다.
![]() 일본이 세운 만주국에 대한 원활한 전력 공급을 통해 대륙 침략을 가속화하는 속셈으로 댐이 건설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북한지역의 전력사정이 남한보다 훨씬 좋았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댐인 수풍댐은 6·25전쟁 때 유엔군의 폭격으로 70%에 이르는 발전소 설비가 파괴됐다. 그 후 북한이 옛 소련의 지원을 받아 복구했고 1958년부터는 원래 수준인 70만kW를 발전하게 되었지만, 경제난 등으로 인해 지금은 원래의 30∼40% 정도만 낙후된 발전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중국과 공동관리를 하고 있지만 발전량을 절반씩 나누지 못하고 90%의 전기를 중국이 가져간다고 한다.
수풍댐의 중국 쪽의 행정구역은 관전이다. 관전 만족자치현은 고대 만족(滿族)과 한민족이 섞여 살던 곳으로 청나라 때는 봉금정책으로 인해 수풍댐과 연결한 곳에는 유조변(버드나무 울타리)을 설치해 한족(漢族)의 출입을 봉쇄했다고 한다.
압록강은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묘사되었다. 조선 전기에 명나라로 보내는 사신인 조천사(朝天使)와 달리 청나라의 도읍 연경(燕京, 지금의 北京)에 보낸 조선 후기의 사신을 총칭하는 연행사(燕行使) 길에 비장한 각오로 압록강을 건너면서, “왼쪽 주머니엔 벼루 넣고 오른쪽 주머니엔 종이·붓 넣어 … ”라고 기록했다.
비록 연암이 필기구를 가지고 사신행차인 연행(燕行)을 떠났지만, 그에게 청나라를 여행하는데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무기였을 것이다. 그 때 연암의 모습은 『열하일기』에 고스란히 묘사되었다. “마부인 창대는 앞에서 말을 몰고, 하인 장복은 봇짐을 메고 뒤따른다. 말안장 양쪽에는 주머니를 하나씩 달았는데,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개, 조그만 공책 네 권 그리고 각 지역의 방향과 거리를 적은 좌표를 넣었다.”고 기록되었다. 국경도시 의주의 용만관(龍灣館)에 머물렀다. 이곳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별궁이다. 용만관 북쪽에는 ‘선조가 압록강을 바라보며 통곡했다’는 통군정(統軍亭)이 있다. 이곳에서, 오지도 않을 배를 기다리던 연암은 문득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비운의 자객인 형가(荊軻)를 떠올렸을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위나라에 살던 검객인 형가를 통해 “형가는 비수를 품고 국경을 넘었지만, 나는 지필묵(紙筆墨)을 품고 압록강을 넘는다”고 자신을 비유했다. 칼을 든 형가가 아니라 각종 정보를 기록할 지필묵을 가지고 상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청(淸)나라 건륭제(고종)의 칠순연(七旬宴)에 참석차 떠난 것이었다. 1780년(정조4) 6월 24일을 지나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에 압록강과 마주하고 있었다. 장마로 불어난 강물은 나무와 돌이 뒤섞여 검푸른 흙탕물을 이룬 압록강의 굉음과 그 발원지인 백두산을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 당시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겨울에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여름철의 도강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공식 사절단의 일원이라면 그 사정은 달랐겠지만, 마부·가마꾼·하인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 북한에서 나오는 이들의 상황도 이와 다를지 않을 것 같다.
암흑 속의 신의주를 보다
![]() 압록강대교를 건너는 북한 관광버스
강 건너 신의주는 초저녁부터 스모그인지 밤안개인지는 몰라도 압록강물 위로 암흑의 커튼 장막이 드리워져 사람의 그림자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직 시베리아로 갈 때도 아닌데 압록강의 오리는 한 마리도 날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이 밝으면 신의주는 현재의 북한이 가지고 있는 가장 확실한 육로 길(陸門)을 연다. 생명줄과 같은 이 길을 통해 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묘향산여행사’ 버스를 타고 북측으로 들어가고 있다. 단동(丹東) 세관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북한 1일 관광’은 당일 8시~17시까지 진행되는데, 연 5만 명을 넘는 중국인들이 신의주 관광을 즐기고 있다. 이외에도 신의주는 북한과 중국의 물산(物産)이 모두 교역되는 중심지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김정은 시대에도 신의주는 역시 유일한 교역로이다. 단둥시 정부가 지난 2010년 2월 착공해 4년만인 2013년 10월 완공한 ‘신압록강대교’(정식 명칭은 중조신압록강대교)는 위화도, 황금평 등 2개의 섬 개발을 위해 ’1교(橋)2도(島)’ 개발사업이었다. 왕복 4차로의 사장교인 이 대교는 중국 정부가 건설비 3,500여억 원 전액을 부담하여 완공하였으나 실제 개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로는 이 대교의 북한쪽 끝에 있는 평양–신의주를 잇는 국도 1호선과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 연결공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국경 검문소나 세관–통신시설 등 기반시설조차 건설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투자를 주저하는 중국자본을 위한 북한의 적극적인 노력과 함께 중국기업들이 위화도와 황금평 개발 프로젝트가 매력적이라고 여기면서도 홍수 등 황금평에 대한 리스크가 확인 부각되면서 ‘사실상 물 건너간 것 같다’는 평가가 과거 북한에 투자했다가 돈을 떼인 경험이 있는 중국 업체들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한다.
단동역 앞에 있는 마오쩌뚱 동상
신의주 건너편은 중국 땅 단동이다. 옛 이름은 안동(安東)으로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동쪽이 편안해졌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1964년에 마오쩌둥(毛澤東)이 “아침 해가 뜨는 붉은 도시”란 뜻으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인문학자는 단동을 “김일성의 지원으로 모택동 군대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는 의미로 동쪽에서 붉은 기가 솟아올랐다는 의미로 단동”이라 한다. 북한에서 오는 기차가 정차하는 단동역은 국제기차역이다. 여기에서 중국과 시베리아 등 러시아로 출발하게 된다. 역의 광장에 서 있는 마오쩌둥 주석의 동상은 단동역 출입구를 향해 손을 들고 있는 형상인데, 그 이유가 ‘김일성을 환영하기 위해서라’는 소문도 있다. 보통은 역의 동상들은 광장을 향해 있지만, 이 동상은 역을 향해 손을 들어 벌리고 있는 형상이기에 생겨난 일화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앞으로 북한의 살림살이도 압록강 철교를 통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철교와 대교는 일제에 의해 1943년 건설되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군 B-29폭격기의 폭격을 받아 2개의 다리 중 하나는 절반이 파괴되었다. 파괴된 것이 현재의 압록강단교(端橋)이다. 교각만이 남아있는 철교는 끊어진 곳까지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폭격을 피해 온전한 1개의 다리는 신의주와 단동시를 연결하는 946m인데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열차와 자동차가 운행이 되고 있으나 일반인들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새와 물은 경계도 없이 오고가고 흐르고 있다.
전쟁이후, 지금까지 혈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과 중국관계의 새로운 복원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신경준이 우리나라의 산천 경계는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물을 가로막지 못한다”고 했듯이 막힘과 갈등보다는 산과 물이 함께 어우러져 함께 사는 공존의 세상을 상징한다. 지금, 썰렁하고 암흑의 세계로 있는 신의주가 앞으로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밤이 되어도 불야성을 이루는 희망의 땅, 통일의 세상이 되기를 기원해 보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