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리씨 임진 의병장 湖城君 寒村 先生 李 柱 將軍의 산소에 가다. 2014년 8월 31일 흐림
오늘은 서울에서 오 지영 씨와 나주의 이 진삼 박사가 방문하여 기뿐 마음으로 오후 4시경 임진 의병장 호성군 한촌 선생 이주 장군의 산소에 갔다. 위 사진은 오 지영 씨의 사진기로 이 진삼 박사가 찍은 임진 의병장 湖城君 寒村 先生 李柱 장군의 묘입니다.
풍수적으로 湖城君 寒村 先生 李柱 장군의 묘를 설명 하면 전북 완주군 高山邑 닭기봉의 頂穴로서 800년 군왕지지인 鬪鷄形의 소조산인 서래봉이 西來한 좌측 팔이 好過峽하고 다시 南來 하다가 轉身하여 서쪽으로 面을 한 산이 鳳棲山이다.
이 산에 있는 鳳棲寺는 조선의 최고 道僧 震黙大師가 오랜 세월 머물다가 입적한 산과 절로 유명하다. 西面한 봉서산이 우측 팔을 별렸다가 서쪽으로 낙맥하여 평강룡으로 十餘里를 기복하고 左로 右로 달리다가 行止山에서 복호형을 만드니 이 호랑이가 특이 하게도 夜虎다(밤호랑이).
밤호랑이는 눈은 보이지 않지만 청각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귀를 막는 청룡 혹은 백호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사격으로는 朝案山에 달을 의미하는 圓峰이 있어야 한다. 전주 서쪽은 전의 이 씨가 장파리 마을에 神眼 何姓不知의 소점으로 알려진 비천오공혈을 써서 잘되고 전주 북쪽은 전주 리 씨의 임진 의병장 湖城君 寒村 先生 李 柱 장군을 위 복호형에 모심으로써 잘 되었다 하여 전주의 兩大 家門으로 알려 젔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若無湖南이면 是無國家란(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말씀을 하셨는데 1. 호남이 곡창지대였다는 것과 2. 호남인의 호국 정신과 3. 3000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호성군 이주 장군이 스스로 선봉에서서 좌충우돌 대승함으로서 패전만 거듭하던 육전에서도 승전으로의 대 전환점을 만들고 대소 십여 전에도 대승하여 충무공 이순신 장군처럼 무패의 전승 장군이 되셨다. 수군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다면 육군에 호성군 이주 장군이 있다. 연속된 전투에 너무 기력이 쇠진하시여 수명이 단축 되어 31세에 기병하여 33세에 타계 하심으로서 정유재란에 참전치 못한 것이 우리의 한이라 하겠다.
유수한 호남의 의병장들의 규모와 호성군 이 주 장군의 의병 규모
김천일=56세(1537-1593) 나주에서 1592년 5월 16일 수백명 의병=경성으로 직행
고경명=60세(1533-1592) 담양에서 1592년 6월 11일 수백명 의병=경성으로 북진 중 금산에서 전사
양대박=49세(1544-1592) 좌부장 유팽로=39세(1554-1592) 우부장
이 주=31세(1562. 7. 17.-1594. 4. 12)
1592-4월 중하순 600명 모병 충주 직행 신립 장군의 패배로 600명 전사.
1592-7월 하순 400명 모병 의주용만 행재소로 직행
1592-9월 중순 2,000명 兩湖(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모병 의주용만으로 직행 평양성 탈환 自作 先鋒將이 됩니다.
패전만하던 육전에서 즉 수세에서 공세로의 대 전환점을 마련한 평양성 탈환전에서 자작 선봉으로 대승한 명장입니다. 그 공은 이여송이 가저갑니다.
*전국 경향간 의병장들은 거의가 국가의 녹을 먹은 벼슬아치 였으나 호성군 이주 장군은 벼슬을 하지 않은 백성 즉 白頭로서 私財로 3000명의 의병을 犒軍한 의병장입니다.
전주 문화원에서 흩어진 역사를 모아 호성군 이주 장군의 역사와 호국정신을 재조명 하고자 “호남 의병장 湖城君 李柱” 장군의 단행본을 2008년 12월 30일 초판 발행 했습니다. 이 책에 수록 된 은천 이귀홍의 글을 이어서 소개 하겠습니다.
첫댓글 간산기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추석명절 되십시오.
은천선생님의 간산기..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온정이 넘치는 화목한 추석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역시 멋진 간산기입니다.
선생님 가족들과 추석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