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난은 고려 민중들의 반외세 반정부 투쟁이었다
삼별초는 야별초(좌별초+우별초)에 신의군이 더해져 만들어진 부대다. 모두 최씨 정권에서 만들어진 부대다. 야별초는 최이 집권기 때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힘과 용기가 뛰어난 자들을 선발해서 만들었고, 신의군은 최항 집권기 때 몽골로부터 도망쳐 온 자들을 모아서 만들었다.
삼별초는 주로 고려 국내의 불안한 상태에 대비하여 최씨 정권을 지키는 일이 목적이었다. 즉, 삼별초는 최씨 정권에 충성하면서 무신정권을 지탱해준 무력이었다.
그러나 삼별초는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 일에도 참여했다. 김준이 최씨 정권을 무너뜨릴 때 삼별초가 동원되었고, 임연이 김준 정권을 타도할 때도 삼별초가 동원되었다. 또한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임유무를 제거할 때도 역시 삼별초가 동원되었다. 어째서 그들은 무신정권에 번번이 반기를 들었을까?
삼별초 군사들은 무신정권이 교체되는 중에도 결코 해소되지 않는 근본적인 불만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경제적인 처우였다. 삼별초 군사들은 최씨 정권 말기부터 더욱 격화되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몰렸다. 실제로 최항 정권 말기, 몽골군은 강화도의 고려 조정을 경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고려의 조세가 배에 실려 강화도로 운반되는 길목인 서남부(지금의 전라남도 서부 해안)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 결과, 강화도에 피신을 간 고려 조정의 관리들은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정권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최항 정권의 사병들까지도 구휼미를 받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삼별초 군사들의 처지 역시 굶주리다시피 했다.
이런 경제적 처우에 대해 삼별초 군사들의 불만은 최씨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결코 해소되지 않았다. 정권 타도에 기여한 대가로 죄인의 빼앗긴 재산이 나눠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것도 일시적인 시혜였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삼별초 군사들에게 후한 녹봉을 주었다는 역사 기록도 있는데, 그것은 삼별초의 지휘관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집권 무인과 밀착된 지휘관들은 경제적 특혜와 정치적 출세를 보장받은 특권층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삼별초의 말단 병사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씨 정권이 붕괴된 이후 김준 정권이 최씨 가문의 재산을 빼앗아 나눠주기도 했지만, 이러한 일시적 시혜 조치 정도로는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완전히 해결될 수 없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고려의 전통 군역제도에서 시행되었던 군인전을 부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 전반적인 체제가 재정비되지 않는 한 거의 시행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삼별초 군사들의 처우에 대한 불만은 무신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삼별초 군사들은 무신들의 정권 쟁탈에 동원되어 이용당하기만 했다. 어쩌면 삼별초의 말단 병사들은 진정으로 그 누구보다도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왕정복고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왕조의 명실상부한 상비군으로 거듭나는 것만이 자신들이 살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준이 최의를 제거할 때, 그리고 임유무를 제거할 때도 왕정복고나 종묘사직을 수호한다는 대의를 내세워 삼별초를 설득했고, 삼별초는 그것에 부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집권 무신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삼별초의 정치적 성격은 최씨 정권이 붕괴된 이후부터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수혜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강화도에서 삼별초 군사들이 봉기한 데는 그런 배경이 작용하고 있었다.
삼별초는 고려 국왕 원종이 내린 개경으로 돌아오라는 명령(1270년 5월 23일)에 반발하면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이 국가의 창고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삼별초가 국가의 창고를 마음대로 열어젖힌 것은 자신들의 공로(무신정권을 무너뜨린)에 대한 보상을 기대했는데 그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것은 바로 삼별초의 군사들이 경제적 처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삼별초가 개경환도에 반발했던 것은 애초부터 계획된 행동이 아니라, 종묘사직을 위해 일어선 자신들의 대의가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삼별초 봉기는 주동자도 없었고 규모도 크지 않아 대단한 군사적 변란도 아니었다. 단순한 소요나 동요 정도의 가벼운 것이었으나 이어지는 삼별초에 대한 고려 조정의 대응 조치가 봉기를 더욱 확대시키고 만다.
삼별초 군사들은 원종을 호위하고 개경으로 돌아가서 사직호위라는 대의명분을 얻기를 바랬다. 그런데 원종은 삼별초의 호위를 거부하고, 원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는 원종이 삼별초를 무시하고, 그들의 적인 원나라와 손을 잡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어서 삼별초 군사들로부터 큰 실망을 샀다.
원종의 행동에 실망한 삼별초 군사들의 동요가 더욱 커지자, 놀란 개경의 고려 조정은 5월 29일 장군 김지저를 강화도로 보내 삼별초를 혁파하는 조치를 한다. 회유나 설득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정도에 이르면 이제 단순한 동요가 아니라 확실한 봉기 수준으로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의 혁파란 곧 해산을 의미했다. 이것은 삼별초 군사들에게 정면으로 배신감을 안겨준 행위였다. 삼별초가 해산된다면 그들이 사직을 지킨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무신정권을 타도한 일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못 받게 되고, 나라나 왕실을 위한 군대로 거듭날 기회도 빼앗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개경 조정이 삼별초를 해산하면서 그들의 명부(삼별초 병사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를 빼앗았다. 그 목적은 바로 삼별초 병사들을 장차 있을 일본 원정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개경 조정이 삼별초 군사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배신감을 안겨주고 그들을 결정적으로 분노하게 만들었다. 사직 호위에 대한 보상은 고사하고 장차 일본 원정에 동원되어 먼 외국 땅에서 죽어갈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삼별초의 봉기를 확대시켰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삼별초의 해산 명령과 그 명부 탈취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삼별초 군사들은 고려 정부에 정면도전하였다. 이것이 반 개경 정부의 기치를 내걸 수밖에 없었던 삼별초 봉기의 두 번째 성격이다. 또한 이것이 전체 삼별초의 난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6월 1일, 삼별초의 봉기는 확실하게 반란으로 발전한다. 반란으로 발전하려면 주동자가 있어야 하는데, 주동자는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 지휘관 노영희였다. 이들은 반란을 선동하면서 강화도의 각 관아에 있던 도서와 문서를 불태웠다. 태워버린 문서들은 토지나 노비 문서와 같은 강화도 조정의 통치자료였는데, 이는 하층민들을 봉기에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삼별초의 봉기는 군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이나 하층민들까지 포함된 민중 봉기의 성격도 띄게 되었다. 이것이 삼별초 봉기의 세 번째 성격이다.
실제로 삼별초 세력에는 노비들이 많이 가담하고 있었다. 이승휴 문집에는 삼별초가 봉기하고 개경환도가 이루어질 때, 불령한 무리들이 까마귀 떼처럼 강화도로 몰려갔다는 기록이 있다. 까마귀 떼라고 표현한 불령한 무리들, 이들이 바로 노비나 하층민들이 아니었을까.
무신집권기 동안의 기득권 세력들은 모두 강화도를 탈출하여 개경으로 갔지만, 하층민이나 노비들은 삼별초 세력과 합류하기 위해 거꾸로 강화도로 몰려갔다. 이것은 삼별초의 봉기가 민중 봉기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삼별초의 반 개경 정부 성향을 뒷받침해준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우선 1270년 12월 원나라에서 돌아온 태자는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칸(원 세조)이 준 조서를 가져왔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 조서 이후 삼별초 정부를 벗어나 생업에 복귀한 자는 과거의 잘못을 모두 용서할 것이다. 주인을 배반하고 삼별초에 가담한 노비들도 돌아오면 백성으로 편안히 살게 할 것이고, 옛 주인이 다시 노비로 만드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삼별초 정부에 합류한 자들이 항복하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 용서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노비에 대한 언급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별초에는 주인을 배신하고 가담한 노비들이 매우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 내륙에서는 삼별초의 난에 호응하려는 노비나 하층민들 및 하급 관리들과 백성들의 봉기가 계속 일어났다. 1271년 밀성(경남 밀양)과 청도(경북 청도) 및 일선(경북 구미) 등 영남 내륙에서는 진도의 삼별초 정부에 호응하고자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을 주도한 사람은 박경순을 비롯한 밀성의 토착 세력과 지방의 백성들이었다. 박경순은 실직이 아닌 허직에 있던 일종의 예비 관리였다. 이들 예비 관리들은 무신집권기 동안 관료사회에서 소외되어 불만이 많은 계층이었다.
반란은 밀성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밀성의 주동자들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진도의 삼별초 정부에 호응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밀성 부사를 죽였다. 이때 반란에 가담한 무리가 수천 명이 넘었고 열성 주동자만도 백여 명이나 되었다. 박경순은 개국병마사를 자칭하며 인근의 군현에 격문을 보내 삼별초 정부에 호응할 것을 권유했다.
이런 과정에서 호응하지 않는 지방관들을 모두 살해했는데, 청도의 감무(임시 지방관)는 그렇게 희생되었다. 이어서 진주, 상주, 일선 등의 지역에도 격문을 보내 호응하도록 했다. 이때 각 지방에서 반란에 호응하는 자들이 마치 바람에 따라 쓸려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거의 영남 지역 전체가 삼별초 정부에 호응하려는 무리들로 뒤흔들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선 현령 조천은 밀성 출신으로 처음에 호응했다가 배반하는데, 박경순의 반란이 진압된 것은 그의 배반이 치명적인 요인이었다. 조천은 경상도 안찰사와 금주 방어사 등과 모의하여 밀성을 치고 들어갔다. 여기서 반란의 주동자가 제거되면서 난은 평정되고 만다. 그러나 조천은 나중에 반란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들통나 파직당하게 된다.
밀성의 반란에서 주목할 것은 이 지역이 무신집권기 농민반란의 중심지였던 운문산과 가까운 곳이라는 점이다. 주동자 박경순이 개국병마사를 자칭했다는 것도 무신집권기의 농민반란에서 자주 등장하는 정국병마사를 연상시킨다. 개국이나 정국 모두 국가를 바로 잡겠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삼별초 정부에 호응했던 밀성 지역의 반란이 무신집권기 농민반란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삼별초의 항쟁도 지방의 소외된 백성들에게 기반을 두고 농민반란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밀성 지역의 반란은 삼별초 정부가 내세운 반 개경 정부의 기치에 고무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런가 하면 개경에서도 삼별초 정부에 호응하는 반란이 있었다. 밀성이 반란이 진압된 지 1주일 후였다. 밀성에서 삼별초에 호응하려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관청의 노비로 있던 숭겸과 공덕이 주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숭겸과 공덕은 노비들을 모아 원나라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진도로 들어가려는 모의를 했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바로 주모자가 잡히고 말았는데, 숭겸과 공덕 등 주모자 4명은 이틀 만에 저자에서 참수당하고 나머지 무리는 방면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노비들은 거리마다 몰려다니며 소요를 일으키고 관청으로 쳐들어갈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개경 정부는 이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고, 원의 다루가치가 나서서 노비들을 심문하고 그 결과를 원에 보고할 정도였다. 이러한 것을 보면 노비들의 동요가 매우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개경 노비들의 반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271년 2월 초, 대부도에서도 개경 노비들의 반란에 부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삼별초가 휩쓸고 지나간 후 강화 해협을 지키던 원나라 군사들이 대부도에 들어가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에 분노한 대부도 주민들이 반란을 꾀한 것이었다.
대부도에서는 개경에서 노비들을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원의 군사들을 죽이고 반란을 기도하였다. 반란의 주모자는 당성(경기 남양)의 토착 세력인 홍택이었다. 결국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나 홍택은 참수당하고 나머지는 역리로 충당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황제의 명을 받은 다루가치가 직접 심문할 정도로 무시하지 못할 큰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