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제목 : 97현대문학상수상소설집 수상작 : 이순원 은비령 출판사 : 현대문학 출판일 : 1997. 책가격 : 7,000원 페이지 : 430쪽
추천인 : 은결, 조현미. 한줄평 : 첫사랑과 첫눈을 떠오르게 하는 문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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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
이제서야 만났다. 은비령... 사랑하는 친구가 이순원 작가의 은비령을 생각하면 한계령이 떠오르고 대관령이 떠오르고 허균 허난설헌 강릉 그리고 내가 떠오른단다.. 이순원의 책들 중 내겐 최고인 듯 하다.. 수상한 작가들의 이름이 낯익어서 정답다.
잔잔하게 강릉, 속초, 양양, 한계령, 대관령을 이야기하는 이순원의 문체가 옆에서 속삭이듯 간지럽다. 정다운 말투도, 풍경묘사도 교통방송이 나오는 부분에서의 유머까지도 이순원 작가의 글에서 느끼지 못했던 감성이 이 책에서 느껴진다.
부인과의 삐걱거리는 결혼생활을 하고있는 주인공은 한계령 고개의 특정지역 즉 자신이 공부했던 고개를 중심으로 은비령이라 이름 붙이고 가슴에 품고산다. 시험을 포기하고 내려와 생활하던 중. 은비령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를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만나게 되고 친구의 부인으로 소개된 그녀를 만난다.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그녀가 '바람꽃'임을 기억해 낸다. 그녀는 그가 군 생활을 하던 시절 후배의 여자친구 였다. '바람꽃'이라는 꽃을 가르쳐준 후배는 죽었지만, 그의 기억속에 '바람꽃'을 기억하게 하는 그녀는 기억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른 후, 친구회사의 사내문예지의 심사를 맡게 되어 친구회사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그리고 은비령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까지도.................
죽은 친구를 찾아 격포로 향하던 중.. 교통방송 라디오에서 대관령에 눈이 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차를 돌려 은비령으로 향한다. 그녀와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뒤로한 채 은비령으로 향하는 그의 마음속,, 그리고 엔야의 노래............... 예전에 생활했던 노 부부의 집을 찾아 숙식하고.. 차정비를 위해 속초로 향하던 중 그녀의 차와 다시 만난다. 둘은 함께, 은비령에서 별을 관측하게 되고,, 2천 5백만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책소개>
1997 제4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인 『은비령』에는 수상작인 이순원의 「은비령」, 수상작가 자선작인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 그리고 수상후보작들과 역대 현대문학상 수상자들의 신작들이 실려 있다. 「은비령」은 죽은 친구의 아내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여리고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지고 있는 작품으로서, 혜성과 별, 눈(雪)과 산(山)의 품 속에서 인간다움의 의미와 인연의 소중함을 묻고 있다. 읽을수록 가슴 깊이 전달돼 오는 감응 속에서 우리는 숨어 있는(隱) 비밀(秘) 같은 삶을 조금씩 깨닫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상후보작인 이윤기의 「뱃놀이」는 단편소설의 전형적 구조를 보여주며, 이혜경의 「떠나가는 배」는 가족의 의미와 그 그늘을 살피고 있다. 한편 전경린의 「고통」은 사랑이 남긴 상처의 의미를 무섭도록 처절하게 묻고 있으며, 김인숙의 「풍경」은 가눌 수 없는 마음의 방황을 단아한 풍경(風景) 속에 풍경(風磬) 소리로 드리우고 있다. 그 외의 수상후보작 공선옥의 「그 여자 난주」, 김병언의 「금색 크레용」, 서하진의 「타인의 시간」 등도 나무랄 데 없는 가작(佳作)들로서 참다운 소설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줄거리> 은비령
주인공 나는 소설가로 아내와는 이혼 상태와 다름없는 별거 중이다. 내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 마음의 소금짐이 더해지는 그 여자와의 사랑으로, 나는 그 소금짐을 덜어내기 위해 길을 떠난다. 격포로 예정된 길이 은비령으로 바뀌고 급기야는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여행길이었다.
여자는 내가 소설로 방향을 바꾸기 전, 은비령에서 고시공부를 함께 하던 친구의 아내였다.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이었던 친구의 행복한 아내였던 여자를 보고 나는 바람꽃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연히 과부가 된 그녀를 만난다. 우연한 만남이 사랑으로 이어지고 나는 그녀와의 결합을 마음먹고 친구가 죽은 장소인 격포로 가려 했다가 눈소식을 듣고 은비령으로 향한다.
눈길에서 차가 고장나고 다음날 뒤쫓아 달려온 그녀를 만나게 된다. 둘은 부부로 오인한 옛 하숙집의 노인네들 때문에 한 방을 쓰게 된다. 어색한 잠자리를 피하기 위해 밤산책을 나온 둘은 밤늦게 별자리를 관측하는 남자로부터 은하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2천 5백만년을 주기로 다시 되풀이되는 사람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여자는 2천 5백만년 후를 기약하고 혼자 떠난다.
이 소설은 남녀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불꽃 튀는 청춘남녀의 뜨거운 사랑이 아니고 여자는 과부로, 남자는 별거 중인 상태로 있는 중년의 사랑이다. 그들 사이에는 죽은 친구에 대한 심적 부담이 가로막고 있다. 남자는 심적인 부담을 벗어버리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은비령에서 영원한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이다.
작가는 서해 페리호 전복사건과 때아닌 눈이 내리는 이상기후를 모티브로 삼고 있으며 교통방송 진행자의 멘트를 상당부분 인용하여 사실적인 배경을 짙게 하고 있다. 은비령은 한계령의 어느 부분을 지칭하고 있다고 하나 현실적인 공간은 아니다. 주인공의 차가 은비령의 경계에 들어서자 시계가 멈추어 버린 것이 암시하듯 그곳은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꿈꾸기에 적합한 상상의 세계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책속으로 > 은비령
처음. p25.
왜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천 5백 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 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 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중간 p35.
다시 여자가 내게 인사를 했다. 그 표정이 그냥 낯익은 정도가 아니라 어떤 깊은 인상으로 뇌리에 스치는데도 생각이 날 듯 날 듯하면서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인사를 하고 난 다음 여자가 한 손으로 핸드백을 고쳐 메며 휙하고 머리를 뒤로 젖힐 때 비로소 여자의 이름이 아닌 한 들꽃의 이름이 생각났다.
그래, 바람꽃.....
하마터면 나는 여자가 아니라 내 앞에 양복을 입고 한쪽 손에 가방을 들고 있는 친구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뻔했다. 10년 전 향로봉 아래에서 마지막 군생활을 하며 하루하루 시간을 세던 대 내게 그 들꽃의 이름을 가르쳐주던 일병이 있었다. 학교에서 식물학을 공부하던 중에 입대한 졸병이었다. 남쪽에선 개나리가 피고 질 때 그곳엔 아직 눈이 내렸다가 녹고, 녹다가 다시 내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이른 아침, 그와 함께 교통호를 따라 매일 같은 코스로 경계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아직 다 녹지 않은 눈 얼음 사이를 뚫고 올라와 핀 이름 모를 한 들꽃을 보았다. 저게 어떻게 얼음을 뚫고 올라왔을까 싶을 만큼 고사리보다 가늘고 연약한 꽃대였다.
"아, 바람꽃이다. 바람꽃..... 여기 와서 바람꽃을 보다니....."
다시중간. pp106-107.
"오늘 두 분이 이곳에 온 인연에 대해 답례로 두 분이 모르는 천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조금 전 혜성의 궤도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까 예기한 영원의 시간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지만 인간에겐 또 인간의 시간이라는 게 있습니다. 대부분의 행성이 자기가 지나간 자리를 다시 돌아오는 공전 주기를 가지고 있듯 우리가 사는 세상일도 그런 질서와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이란 일은 모두 2천 5백만 년을 주기로 되출이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2천 5백만 년이 될 때마다 다시 원상의 주기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2천 5백만 년이 지나면 그때 우리는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다 다시 지금과 똑같이 이렇게 여기에 모여 우리 곁으로 온 별을 쳐다보며 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길에서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을 다 다시 만나게 되고, 겪었던 일을 다 다시 겪게 되고, 또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을 다시 겪게 되는 거죠"
끝. p116.
그날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 5백만 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속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북쪽으로 부리를 벼리러 스비스조드로 날아갈 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는 여자가 잠든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러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
<작가소개> 이순원
상고를 1,2등으로 졸업하면 한국은행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1972년에 강릉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왼손잡이라 다른 아이들만큼 능숙하게 주판을 놓을 수가 없어서 이순원은 은행원이 되는 대신 고랭지 농사를 지어 돈을 벌기로 결심한다.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대관령으로 올라가 농군이 되지만 고된 농사일을 체력이 감당하지 못해 2년 뒤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그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눈부셨던 시절로 남아 있다. 앞으로도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한다.
1978년에 나온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도 소설에는 소설적인 문장이 따로 있는 줄로만 생각했던 그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통해 간명하고 정확한 단문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설 문장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순원은 데뷔 이후 왕성한 필력으로 문단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순원 문학은 작가가 비관주의자임을 명료하게 드러내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실현하는 것에 대한 비관이다. 이러한 비관주의는 부정적인 대상물을 찾아 극단적으로 부정적 요소를 과장하고 도드라지게 형상화하거나 역으로 작고 연약하고 위태로운 가치나 존재들에 대한 관심으로 형상화된다.
이순원의 작품세계는 「수색」연작들을 전후로 하여 성격을 달리하는데, 「압구정동」시리즈를 비롯한 「수색」연작 전의 작품들이 현실에 대한 발언의 수위가 높은 작품이고, 연작 이후의 작품들에선 구체적 삶의 체험과 내면세계가 밀도 높게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순원의 후기 작품들이 작가의 사적 체험을 소재로 하면서도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 가치의 차원으로 확대시킨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