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과 장독대
후원은 외간 남자들이 감히 범할 수 없는 여성들의 개인적인 공간이다. 대문, 중문을 들어서서도 안뜰을 지나야 하고, 또 한 구비를 내실 뒤로 끼고 돌아야만 층층이 담장에 감싸인 양지바른 후원이 오붓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화강석을 다듬어 층층이 단지어 놓은 돈대 사이로 댓돌들을 밟고 타박타박 올라가면, 담장 밑에는 동남편이 트인 조용한 별당 한 채 처마귀에서는 풍경 소리가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데, 후원은 솔바람 소리에 먼 숲속처럼 잠잠해 간다. 이렇게 돈대를 놓고 또 동산 위에 조촐한 별당 한 채를 세우는 한국 후원의 수수한 꾸밈새는 자연의 섭리에 순수하게 따르려는 담담한 마음의 자세라고 할까
여기에 별다른 잔재주도 궁리도 없이 자연에 손을 댄 인간들이 가장 자랑스러운 손길이 다만 후원 언덕에 꽃을 심기에 요기한 몇 단 층대를 모았고, 지형이 생긴 대로 높고 낮게 층하지어 담장을 둘러 쌓았을 뿐이다.
내실 대청에서 후원을 바라보면, 때로는 돈대 밑에 옥수져서 넘치는 맑은 샘터에 이끼가 푸르고 돈대 층단에는 영산홍이나 모란꽃 그루들, 그리고 궁궁이 풀이나 곰치포기 같은 것들이 굴뚝들과 괴석 사이에 다복다복 자리 잡고 있어서 마치 한 장면의 복된 파노라마처럼 밝고도 은근하다.
후원도 그 집안에 지체나 가도에 따라 그 규모가 다르지만 남원 기생 월매의 집 후원을 [춘향전]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중문, 대문 다 지내어 후원으로 들어가니, 연구한 별초당에 등롱을 밝혔는데, 버들가지 늘어져 불빛을 가린 모양 구슬발이 갈공이에 걸린 듯하고, 우편에 벽오동은 맑은 이슬이 뚝뚝 떨어져 학의 꿈을 놀래는 듯, 좌편에 섰는 반송 청풍이 건듯 불면 노룡이 굽이는 듯 창전에 심은 파초, 익난초, 봉미장은 속잎이 빼어나고, 수심여주 어린 연꽃 물 밖에 겨우 떠서 옥로를 받쳐 있고, 대접 같은 금붕어는 어변성룡하랴 하고 때때마다 물결쳐서 출렁 틈벙 굼실 놀 때마다 조롱하고, 새로 나는 연잎은 받들 듯이 바라지고 급연산봉 석가산은 층층이 쌓였는데 계하의 학두루이 사람을 보고 놀래어 두 쭉지를 떡 벌리고 긴 다리로 징검징검 끼룩 뚜루룩 소리하며, 개화 밑에 삽살개 짓는구나. 그 중에 반가울사 못 가운데 쌍오리는 손님 오시노라 두둥실 떠서 기다리는 모양이오, 처마에 다다르니 그제야 모친 영을 디디어서 사창을 반개하고 나오는데 모양을 살펴보니 뚜렷한 일륜명월 구름밖에 솟아난 듯 황홀한 저 모양은 측량키 어렵도다. 부끄러이 당에 내려 천연히 섰는 거동은 사람의 간장을 다 녹인다. 도련님 반만 웃고 춘향이더러 묻는 말이......"
밤과 낮을 가릴 것 없이 후원의 정서가 이처럼 요염한 것은 비단 월매의 집 후원만이 아니다. 어느 대갓집 후원에 지금 봄볕이 짙어서 꽃가지가 어우러졌는데 미닫이가 꼭 닫힌 한낮의 별당은 밤중처럼 고요하고, 그 댓돌 위에는 고운 갓신 한 켤레와 큼직한 사나이의 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진 정경은 에로틱하고도 은근한 후원 정취로서 옛날 풍속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장면이기도 했다.
나이찬 규수가 갇혀진 젊음을 남몰래 호소하던 곳, 그리고 때로는 화사한 젊은 주부가 마음놓고 몸매무새를 고치던 곳 후원해도 가을, 봄, 또 겨울이 찾아와 들면 흰눈이 그림처럼 마른 꽃가지와 괴석들을 덮고 따스한 별당 아랫목의 창가에는 한밤내 밝은 촛불이 너울거리는 것이다.
한국의 후원도 이젠 모두 주인을 잃었다. 후원 높은 담장 안에 갇혀서 먼 하늘을 바라봐야만 했던 인형들은 이제 활개를 치고 담장을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한국 후원이 숨긴 연연한 긴 이야기들과 독특한 정취를 발산하던 신기롭고도 순수한 조원미는 그 높은 단장 안에 갇혀진 채 지금 무지한 눈길이 마구 난도질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이 후원들에는 왜식인 이발한 침엽수들이 침투해서 모란이나 작약, 석류, 아가위, 감나무 같은 전통적인 우리 정원수들을 몰아내고 있다. 가는 곳마다 잘생긴 괴석들은 후원에서 학대를 받아 무리하게 자리를 옮기고, 듬직한 장대석 계단들은 천박한 양회로 화장되어 가는 것이다. 지금 몇 개 안 남은 우리 후원의 아름다움도, 우리 정원숲의 전통도 이제 아마 명맥이 위태로워진 것을 생각하면 진정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래로 우리나라 정원에는 작고 큰 괴목들과 활엽수들이 자리를 잡아서 봄이면 변화있는 실록과 꽃, 여름이면 풍성한 녹음과 열매를 맺고 가을이면 다시 홍엽, 그 뒤를 이어 겨울이면 빈 가지의 소산한 숲의 아름다움 속에 설경을 즐겼던 것이다.
분별없는 무단 눈과 분별 없는 무딘 손들이 조상들의 명원을 송두리째 뒤덮고 유치한 왜식의 손길이 이것을 함부로 더럽히는 것을 날마다 바라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불행한 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좋은 안목을 지닌 사색하는 눈들이 우리의 명원들을 건사하고, 좋은 손을 가진 원정(園丁)들이 흥겨워서 우리 정원의 혼탁한 때를 벗겨줄 때가 되면, 아마 우리 후원 별당에 겨울 한밤내 다시 촛불이 밝혀질 것인가.
뒤뜰 안 정갈하고 양지 바른 곳에 자리 잡은 장독대, 그리고 그 위에 줄지어 앉은 독개그릇들의 차림새나 그 언저리에서 풍기는 장내음만 가지고도 그 주부의 살림 솜씨나 그 집안 가도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들 한다. 말하자면 장독대는 마치 뒤뜰 안에 자리잡은 그 집안 가도를 보이는 보임새 같은 것이기도 해서 예전부터 한국의 주부들은 이 장독치레를 자랑삼아 왔다. 따라서 무의식중에 잘생긴 한국의 독개그릇들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이에 대한 심미안이 스스로 길러졌던 것이다.
봄 가을 시루고사 때면 주부는 으레 장독대 앞에 손을 싹싹 빌면서 "터줏대감님 시월 상달에 상곡식 끗죄겨 검은 시루 앞다리 선각에, 뒷다리 후각에, 태산같이 감시하고 아모쪼록 최씨가중에 말끝마다 향내나고 웃음마다 꽃이 피고 낮이면 물을 맑히고 밤이면은 불을 밝혀 앉아서 삼천리 서서 구만리를 돌봐주소서. 동서남북에 팔도강산을 다녀도 최씨대주 실수없이 해주시고 남대감은 져드리고, 여대감은 여드려서 불어나고 늘어나게 해주소서" 하고 글 외듯하는 무당의 고삿말을 마음속으로 새겨보기도 하고, 괴로움이나 절절한 소원이 있을 때면 정한수 한 그릇 장독대에 받쳐놓고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우러르던 곳도 바로 이 장독대들이었다. 뜰이 넓은 집이면 이 장독대 둘레에는 으레 봉선화나 양귀비꽃 같은 키 작은 풀꽃들을 가꾸고, 아침마다 한 번씩은 물걸레질을 해야만 마음이 개운해질 만큼 장떡들은 아낙네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장독들은 해묵은 놈일수록 은근하고 점잖아 보이고, 행주질을 많이 받은 놈일수록 길이 들어서, 독은 야릇한 윤기를 더하고 소리없는 즐거움을 주인에게 히죽이 표시한다. 그러나 장독들은 때로는 시무룩하고 때로는 허전해하며 또 슬퍼할 줄도 안다. 말하자면 장독은 주인의 심정을 반영하는 거울의 구실도 하는 것이다. 슬플 때 바라보는 장독들은 일그러진 주인의 얼굴을 가슴 위에 비춘 채 초근히 젖어 보이고, 기쁠때 바라보는 장독들은 마음이 부풀어서 아낙네들의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는 것이다.
서리 찬 한밤내 달빛에 비추이는 장독대 서정, 그리고 그 검은 그림자들의 화음은 소리없는 한 막의 시극이라고도 할까.
서정주씨의 시 <기도>에 "저는 시방 꼭 탱 빈 항아리 같기도 하고, 꼭 텡 비인 들녘 같기도 하옵니다. 주여(저는 이렇게 밖에 당신을 부를 길이 없습니다.) 한동안 더 모진 강풍을 제 안에 주시든지, 나라는 몇 마리의 나비를 주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자기와 같이 하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시방 재 속은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어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하는 구절은 허전한 항아리의 심성과 사랑의 고운 마음씨가 엇갈려서 내가 항아리인지, 항아리가 나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어진다. 이러한 한국을 바라보고 외국 사람들은 '항아리 독개그릇의 나라'라고도 부른다. 과연 그렇다고 생각해도 큰 과장이 없다. 한국은 남이 안 가진 독개그릇을 지닌 은근한 행복에 자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독대에는 비록 함박꽃처럼 화려하고 푸짐한 즐거움은 없다. 그러나 햇살을 받은 장지문의 은은한 한지의 멋, 그리고 삼배 생모시 같은 소박하고도 정다운 아름다움이 오지 독개그릇이 지닌 착하디 착한 아름다움과 어울려 함께 살고 있다. 한국의 독개그릇은 그리 서러울 것도 그리 즐거울 것도 없이 한국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고 같이 살아간다.
삼국시대에는 이미 크고 작은 질그릇 독항아리들이 수없이 구워졌고, 오늘날 우리 독개그릇들의 풍토적인 아름다움은 아마 고려시대에 틀이 잡힌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우리 독개그릇들처럼 버금찬 민족의 숨김없는 감정을 발로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이래였다.
전국 방방곡곡의 무수한 가마에서 수없이 구워내던 이 오지독들은 각기 제고장 냄새를 훈훈히 풍기면서 무던히도 동포들의 얼굴을 닮아 왔다. 이 못생긴 것 같으면서도 지지리도 착하고, 은근하고도 또 정당한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동포들의 정다운 얼굴들이 포개져서 보이는 것만 같아진다.
십년 묵은 또는 백 년이나 묵은 길든 장독 속에 10년이나 100년이나 묵은 진하고 값진 간장이 한 번만이라도 담겨 있다면...... 이것은 이제 하나의 환상이 되어 버렸지만 6.25사변 전만 하더라도 서울 안의 큰 장독대와 창덕궁 같은 궁전의 장독대에는 언제부터인지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진하고 값진 액체가 들여다 보는 고운 얼굴들을 거울같이 비춰주고 있었다.
해묵은 스카치 위스키나 프랑스의 포도주가 나이 수대로 값진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간장도 이제 무슨 표 무슨 표에서 왜식으로 마련된 그릇에 왜맛을 담고서 마구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이 그리운 장독들의 운명, 그리고 장독대의 존엄은 과연 얼마나 수명이 남은 것일까?
양옥이네, 문화주택이네 해서 벌써 수많은 젊은 세대의 뇌리에서 장독대의 멋은 사라져가도 나는 이 다정한 장독들의 아름다움, 그리고 장독대에 서린 조상 이래의 훈훈한 정서를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어머니가 손수 달이시던 햇간장의 희한한 맛과 함께 어린날의 장독 그늘을 연연히 추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