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 8기-2학기 12차시 합평작 (11월 4일 용)
1. 만수국이 피다 /최정란2
① 학원 교실의 창밖으로 파란 하늘이 내다보이는 초가을 오후다. 초등이 빠져나가며 잠시 조용해지는 시간, 아이들을 배웅하려고 학원 문 앞으로 나왔다. 높지 않은 기온에 맑은 햇살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② '곧 중학생들이 오겠네.' 아이들이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짙은 초록과 환한 주황색이 시선을 끈다. 만수국이 피었다. 무성한 초록 잎들 사이에 햇살같이 환한 꽃송이들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무더기무더기 피어있는 꽃을 보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내가 심은 꽃이라 더 예뻐 보이는 것이겠지 생각하니 뿌듯한 마음이 들면서 이렇게 되기까지 애썼던 일이 떠오른다.
③ 몇 년 전, 학원의 출입구 옆을 정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입구 오른편의 빈터에는 잎이 검게 변해 말라붙은 야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비틀리고 꼬인 잎이 보기 흉했고, 나무 그림자는 창을 가려 교실로 들어와야 할 햇빛을 가로막았다. 그 나무 아래엔 잡풀들이 뒤섞여 자랐고, 담배꽁초나 과자 껍질 같은 작은 쓰레기가 떨어져 있기도 했다.
④ 평소 내 땅도 내 건물도 아니라는 생각에 무심했는데 그날은 눈앞의 풍경이 못마땅했다. 생각을 달리해 보았다. 오랫동안 머물러 온 일터이고, 앞으로도 계속 사용해야 하니 깔끔하게 치우는 편이 옳을 듯했다. 아이들이 드나드는 입구에 예쁜 꽃들이 피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⑤ 집주인에게 화단 중간의 썩은 야자수를 베어달라고 부탁했다. 답답한 것이 없는 주인이 나무 밑동을 베고, 썩지 않게 약을 치고, 쓰러진 나무를 실어가 흔적을 정리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 후로 나는 틈틈이 쓰레기를 줍고 풀을 뽑아 정리했고 밭농사용 퇴비를 붓고 호미와 부삽으로 땅을 뒤엎었다.
⑥ 처음에 심은 것은 번식과 성장이 왕성한 송엽국이었다. 빛깔이 곱고, 개화기간이 길며, 다년초인데다, 생명력이 강해 물 부족에도 살아남는다는 꽃이다.
“집에는 무슨 꽃이 피는지, 무슨 나무에 열매가 달리는지도 모르는 애가 제 땅도 아닌 학원 앞에다 무슨 꽃을 심는다고 이 난리냐?”
핀잔하면서도 엄마는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우리는 집 화단의 송엽국 줄기를 두 대야 가득 걷어 학원 앞 땅에 옮겨 심었다. 기쁘게도 그해에 뿌리를 잘 내리며 꽃을 제법 피워냈다. 땅에 달라붙어 핀 짙은 보랏빛 꽃들이 귀여웠다.
⑦ 그런데 다음 해에는 땅을 뚫고 나타나지 않았다. 무성히 자라는 풀에 묻혀버렸는지 꽃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실망감에 툴툴대고 엄마는 이유를 궁금해하면서 다시 한번 집 화단에 자란 송엽국을 옮겨 심었다. 뻗어가는 줄기를 보며 마음을 놓았는데 그것도 잠시였다. 며칠 연이어 비가 온 후 흔적도 없어졌다. 배수가 되지 않는 땅에서 물러져 녹아버린 것이다. 그 꽃은 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대신 햇살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⑧ 그 이듬해에 만수국을 심었다. 금잔화와 닮은 꽃으로 아프리카 메리골드라는 품종이다. 엄마가 건네준 꽃씨를 화단에 뿌리고 기다렸다. 이제나저제나 기웃거려 보아도 올라오는 기척이 없었다. 결국 집에 자라난 어린 만수국 줄기를 뽑아 옮겨 심었다. 퇴비를 가져다 얹고 업무 시간 틈틈이 현관 앞으로 나가 풀을 뽑았다. 얼른 자라나 예쁜 꽃송이를 달기를 소망하면서.
⑨ “선생님, 뭐하시는 거에요?”
“풀 뽑고 있다. 너희들 학원 올 때 깨끗한 화단 보고 기분 좋아지라고.”
가끔 등원하는 아이들이 물으면 대답하곤 했다. 그 시간 속에 차츰차츰 꽃이 피어났다. 떨어진 씨가 다시 나기를 몇 해째, 이제 여름이 지날 무렵이면 저절로 화단에 초록 잎이 자라오르고 눈부신 주황색 꽃이 핀다. 학원 입구는 말 그대로 작은 꽃밭이다.
⑩ 작년이었다. 오후에 낯선 사람 하나가 봉지를 들고 꽃송이를 따고 있었다. 처음엔 '꽃차 만들려고 몇 송이 따 가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도, 아이들을 배웅하러 나갈 때도, 어두워져 오는데도 계속 꽃을 따고 있는 것이었다. 속이 상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정성껏 가꿔놓은 꽃입니다. 다 따가시면 서운합니다."
그는 미안하단 말도 없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가 가버렸다.
⑪ 얼마 전이었다. 두 친구가 학원에 들렀다가 수업으로 분주한 나를 불러낼 수 없었던지 화단에서 풀을 뽑고 있었다고 했다. 수북하게 쌓인 풀이 그들의 수고를 말해주었다. 두 친구의 마음 씀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입구에 꽃이 보이니 기분 좋더라. 아이들처럼 예쁘기도 하고. 이제 우리 손길 닿아서 더 곱게 필 거다."
⑫ 나의 일터 입구에는 나의 소망에 엄마와 친구의 수고가 더해진 만수국이 피어있다. 학교를 파한 중학생 아이들이 다가오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을 햇살처럼, 밝은 주황색 메리골드 꽃송이처럼 환하다.
2. 빼때기 죽 / 유광목3
1.고향에서 어릴 때 먹던 음식이 이제는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중앙시장 옆 강구안 거리에서 통영의 대표 먹거리인 충무김밥, 꿀빵, 빼때기 죽의 맛을 관광지에 온 여행객은 느끼고 간다.
2.동생과 해마다 벌초를 마치고 나면, 바다 고기가 가득한 중앙 시장의 어물전을 구경하고 김밥과 꿀빵, 김치 등을 사 가지고 돌아간다. 빼때기 죽은 옛날에 먹던 맛과 달라 사 가지 않는다.
3.빼때기는 가을에 생고구마를 썰어 지붕 위나 묘지 옆이나 잔디밭에 말렸다. 고구마를 말리면 수분이 나와 비틀어지는 모습을 경상도 지역에서 ‘빼때기’로 불러 ‘빼때기 죽’이라고 했다.
4.중학교 다닐 때, 시내 밖에서 통학하는 친구는 책가방에 빼때기를 넣어와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다른 친구들은 군것질 대신으로 빼때기를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5.빼때기를 ‘절간고구마’라고도 부르는데 농협에서 주정용으로 수매하여 60〜70년 대 농가에 큰 도움을 주었다. 지금은 빼때기 말리는 모습이 보기가 어렵다.
6.어릴 적, 겨울에 점심은 빼때기 죽이었다. 어머니가 만든 빼때기 죽은 팥도 넣지 않고 빼때기만 솥에 넣고 밀가루를 조금 넣어 익을 때, 소다와 조미료인 당원을 같이 넣어 삶았다. 푹 고우면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와 먹고 싶어졌다. 단팔죽 같은 뜨거운 빼때기 죽을 입으로 불어 가면서 한 숟갈 한 숟갈 먹는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7.가끔 이웃집에서 팥과 조를 넣어 팍팍하게 끊인 빼때기 죽을 별미라고 하면서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죽이 뻑뻑하고 입에 씹히는 것이 있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단맛이 있고 입으로 잘 넘어 가는 우리 집 죽이 좋았다. 집안 형편에 따라 동부콩, 찹쌀가루, 조, 새알 등도 넣어 먹는 집도 있었다. 이제는 웰빙 식품이다.
8.부산에서는 빼때기를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김해에 사는 제수가 오일장을 둘러보고 사와, 어머니는 빼때기를 씻어 솥에 넣었다. 팔, 조도 넣고 간을 맞추기 위해 설탕과 소금을 넣어 푹 고왔다. 어머니는 죽 끊이는 것을 즐거워했다. 빼때기 외에 잡곡을 넣으니 죽이 퍽퍽했다.
9.아내가 죽을 먹을 때는 소죽 냄새가 난다고 하고 제수도 아내와 같은 고향이라 죽이 맛있다고 한 적이 없었다. 먹는 사람은 어머니와 나, 동생뿐이었다. 피자나 햄버거를 먹고 자란 애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10.남아 있는 죽은 나 차지가 되었다. 맛을 내기 위해 죽에다 설탕을 더 넣고 빼때기가 물러지면 주걱으로 으깨어 단팔죽 같이 만들어 먹었다. 고향에서 어머니가 끓인 빼때기 맛과 비교하면 별로다.
11.겨울 연휴 때 빼때기 죽이 먹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시내 죽 집을 찾아보았으나 파는 곳이 없었다. 몇 년 전에 우리 집 부근 백화점 지하 식당에서 판다고 했으나 지금은 철수했다. 통영 중앙시장에 있는 빼때기 죽집을 찾아 택배로 신청을 했다. 이틀 후에 물건이 도착했다.
12.전자레인지에 넣어 삼 분간 돌렸다. 맛을 보았다. 팥과 조가 넣어져 있었다. 맛은 있으나 어릴 때 먹던 맛과 달랐다. 가족들은 몇 숟갈만 하고 다 먹지도 않았다.
13.며칠 후, 냉장고에 남아 있던 죽을 꺼내. 설탕을 넣고 뜨거운 물을 섞어 단팥죽처럼 만들어 먹었다. 어머니가 계시면 내 어릴 때의 빼때기 죽 끓이는 방법으로 같이 죽을 만들고 싶다. 단맛이 좋았던 죽을 어머니에게 한 그릇을 드려 옛날 맛이 맞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어머니가 해준 죽 맛이 그립다. 세월이 사람과 맛도 앗아갔다.
3. 길 위에서 /문성미 4
1. 오랜만의 부산 나들이였다. 전날부터 계속된 비 때문인지 부산을 들어서는 길목부터 차가 밀렸다. 시내까지 운전할 자신이 없어서 공용주차장에 차를 대고 지하철을 탔다. 다섯 정거장을 지나자 땅 밑에서 올라온 지하철은 도로와 땅이 내려다보이는 선로를 달렸다.
2. 친구들과 놀며 자란 동네는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촘촘히 들어서 낯선 곳처럼 느껴졌다.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에서 문득 산 중턱에 걸린 D 중학교와 색이 흐려진 J 여고 건물을 찾은 내 눈이 커졌다. 찬찬히 살펴보니 빌딩 사이로 학교를 오갔던 버스길이 보였고,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길을 따라왔다.
3. 고등학생이 된 후 중학교와 가장 다른 점은 매달 모의고사를 치는 것이었다. 수업시간에 배운 것만으로 대비할 수는 없지만, 학력고사와 문제 유형이 비슷해서 성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험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면 희망 학과상담을 하겠다고 하셨다.
4. 첫 모의고사 성적이 나온 날, 1등부터 꼴찌까지 전교생 이름과 성적이 적힌 종이가 벽에 나란히 붙어있었다. 희망 학교에 합격할 수 있을까 무척 떨렸다. 잘하는 것보다 재미있는 과목이 끌려서 희망 학교와 학과로 K 대학교 물리학과를 적었기 때문이다.
5. 담임선생님은 내 성적이면 희망학교에 갈 수 있다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셨다. 신이 나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한테 얘기했다. 엄마는 탐탁지 않은 듯했다.
“여자가 물리 공부해서 뭐 하려고?”
“.......”
“B대 간호학과에 가거라!
집에서 가까우니 걸어가서 좋고, 졸업하면 바로 대학병원에 출근한다더라.”
6. 간호학과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병원 냄새와 피만 생각해도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엄마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기에 마음을 바꾸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간호학과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내 고민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고, 가족들까지 엄마 생각을 따르라고 했다.
7. 2학년부터 희망학교와 학과를 적어내지 못했다. 끝까지 버틸 고집도, 설득할 용기도 없었던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겠다며 소심한 반항을 시작했다. 자습 시간에 헤르만 헤세와 라즈니쉬의 책을 읽었고, 책상에 앉아 자유와 행복에 관한 공상에 빠지곤 했다.
8. 학력고사 성적표를 받은 날이었다. 모의고사 점수보다 30점 넘게 떨어진 이유를 묻는 선생님께 아무 대답을 못 했다. ‘엄마한테 성적표를 어떻게 보여주나?’ 걱정이 앞섰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걸어서 집에 갈 생각으로 걸어가는 친구들 무리에 합류했다.
9. 친구들은 하나둘 떨어져 갔고, 집이 멀었던 나는 혼자 걸었다. 매일 다니는 길이라서 쉽게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갈림길마다 생각이 막혔다.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중간에 버스를 탈지 싶다가도, 성적표를 받고 실망하는 엄마를 볼 준비가 되지 않아서 계속 걸었다.
10. 혼자 걷는 내내 후회가 밀려왔다.
‘지레 포기했나, 고집이라도 부려볼걸! 더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학과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겠다고 배수진을 치고 공부했어야지!’
엄마가 권해준 길과 내가 가고 싶은 길, 그때의 갈림길에서 나는 3년 내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맴돌고 있었나 보다.
11. 가족을 실망하게 할까 어둡고 멀었던 길, 열정 없이 보낸 시간을 후회하며 2시간 넘게 걸었던 그 길을 지하철은 10분 만에 달린다. 갈림길을 선택할 용기가 없어서 부끄러웠던 그날로부터 40년이 쏜살같이 흘렀다. ‘나는 조금은 용기 있는 사람인가?’, 오늘의 길 위에서 물어본다.
4. 갈대와 억새 속에 핀 꽃들처럼 / 이선옥 (3)
산책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강가의 갈대들이 보라색 수술을 들고 마스게임 중이다. 억새들도 은빛 머리를 휘날리며 현란한 몸짓으로 가을을 흔들고 있다.
두 해 전에 이 강가로 이사를 왔다. 도시 기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주거지로 각광받지 못하는 곳이다. 지인들도 이사를 극구 말렸지만 인생 후반기를 지낼 집인데 나름 생각이 없겠느냐며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마다 사는 곳을 달리 한다. 친구 중 몇몇은 편의시설이나 문화 시설이 좋은 곳에 붙박이로 살고 있다. 마치 그곳을 떠나면 죽는 줄 안다. 공해에 시달리면서도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의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또 일찍이 아이들 교육에 눈을 뜬 친구들은 학군이 좋은 곳을 택하여 자녀 교육과 재산 증식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고 자랑한다.
한 친구는 바다를 바라보면 속이 시원하다며 바닷가에 사는 것을 언제나 행복해 한다. 또 한 사람은 전원에 집을 지어 국수를 삶고 강된장에 상추쌈만으로도 친구를 대접하고 일회용 커피로도 인생을 논한다. 이렇듯 삶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는 각자의 가치관에 달려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마을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강을 휘어감은 나지막한 산비탈 양지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그 곳에 살고 있을까 늘 궁금했다.
“남향 따스한 뜰에 꽃이랑 과일 심어 두고 강섶 풀밭에 오리도 기르면서 오로지 너로만 한 폭 그림같이 살자.”던 어느 시인의 희망처럼 살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게 살 수 있다면 한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늘 그 삶을 동경하였다. 그들의 영혼은 순박하고 티 없이 맑을 것만 같았다.
나는 어릴 때 산촌에서 살았다. 유년시절 겨울방학이면 하루에 두 차례씩 소나무 갈비를 긁어 와야 했고, 여름이면 소풀을 뜯기러 산 속을 나돌았다. 밭 매고 모내기, 김매기와 보리타작을 하고, 가을이면 벼 타작을 했다. 타작을 할 때면 까끄라기들이 온몸을 찔러 따갑고 가렵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시댁조차도 시골이어서 농촌 생활이 지긋지긋할 만도 한데 나는 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지 모를 일이다. 나의 몸속엔 농촌 사람의 DNA가 숨어 있는 듯하다.
쉰 즈음에 17평짜리 황토 집을 지었다. 돌담을 짜고, 원두막을 짓고, 텃밭을 만들고, 엄마가 정성스레 비손하던 장독대도 만들었다. 도라지꽃도 봉숭아도 백일홍도 맘껏 심었다. 아버지가 아끼시던 대추나무와 석류나무도 장독대 옆에 심고는 부모님을 추억했다. 채소나 꽃을 가꾸면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말끔히 씻어졌다. 그러다가 그곳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들이 결혼하자 집이 비좁은 데다 도시 며느리가 벌레를 무서워 할까봐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기로 한 곳이 소읍이라 지인들이 가지 말리면서 추천해 준 곳이 도심 아파트였는데, 잠깐 저울질했던 그 아파트는 이 년 사이에 오억 원이나 올랐다. 친구들은 날더러 배가 아프지 않느냐고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곳의 집값이 아무리 올랐다 한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자연의 혜택을 누릴 수는 없지 않을까. 영남알프스 산들이 기개를 펼치고 창으로 들어오고, 사철 물이 흐르는 남천을 따라 아름다운 산책길이 나 있으니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무한 재화이다.
오일장이 걸어서 십여 분 거리에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산이다. 시골에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오일장의 묘미를 알지 못한다. 신선한 제철 농산물을 싼값에 살 수 있는 곳, 지역 특산물과 웬만한 생필품이 다 있는 곳, 흥정과 덤으로 인심이 풀풀 넘쳐나는 곳, 장터국밥이나 잔치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호떡 한 장이 간식이 되는 곳이 오일장이다. 장날이면 올망졸망 묶은 장거리를 이고 가서 신발이며 사탕을 사 오시던 어머니, 술 한 잔 걸치고 기분 좋게 귀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장날을 기다리는 기쁨이 자못 크다.
KTX 역이 도보로 십여 분 거리에 있는 것은 덤이다. 기차를 타고 두 시간 남짓이면 서울에 사는 자식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이 올 때도 마찬가지다. 아들더러 제삿날에 바쁘면 오지 말래도 극구 내려와서 국 한 그릇 먹고 밤차로 올라간다. 저도 조상 뵈어 좋고 우리도 아이 얼굴 한 번 더 보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어쩌면 은연중 내가 노린 얄팍한 꾀는 아니었을까. 기차가 쏴아 하고 바쁘게 지나다닐 때면 저 차에는 누가 타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궁금하다. 꼭 누가 올 것만 같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상상이 쉽게 현실로 이루어지는 곳에 살고 있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문밖을 나서면 바로 산책로가 기다린다. 우레탄이 깔린 길, 숲 사이로 난 길, 도로변 인도, 이렇게 강을 따라 나란히 세 길이 나 있다. 나는 강에 가장 가까운 우레탄 길을 주로 걷는다. 산책로 없는 지역이 어디 있을까마는 일이십 분 걸어가서 접하는 산책로는 젊고 부지런한 사람의 길일 뿐, 나이든 사람에겐 그림의 떡이다. 이사 온 후로 강변길을 자주 걷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산책한 것보다 두 해 동안에 걸은 시간이 더 많은 듯하다.
산책로에 발을 들이 밀면 멀리 보이던 강물이 가까이 다가온다. 여름 내내 “낄낄 끼리끼리 낄낄!” 거리며 유난을 떨던 이름 모를 새들이 떠나고, 청둥오리가 물에서 곤두박질을 치면서 먹이 사냥을 하고 있다. 흰색 백로와 회색빛 왜가리는 언제나 먼 산을 보며 사색을 한다. 가을을 만끽하는 그 여유로움이 한 없이 부럽다. 저들은 삭막한 겨울 강에서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할 배우들이다.
지난여름 태풍에 할퀴어 누웠던 갈대는 어느새 일어나 강을 뒤덮고 있다. 언제 준비했는지 손에 손에 자주색 수술을 들고 흔들며 와하고 함성을 지르며 살아남은 것을 자축하고 길손에게 낭만을 선사한다. 옆에서는 질세라 억새도 은발을 휘날리며 존재를 과시한다. 열심히 이 길을 걸었을 뿐인데 멋진 모습들을 보여 주다니 고맙기 이를 데 없다.
갈대밭에는 갈대만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꽃들이 철을 바꿔 피고 진다. 그들은 허다한 좋은 땅을 마다하고 갈대 속 볕 한 줌 들지 않는 모래땅에 왜 터를 잡았을까. 누가 봐 주지 않아도 싹 틔우고 꽃 피우고 씨를 맺는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두들겨 맞고 태풍이 오면 갈대를 의지하면서 어우렁더우렁 살고 있다. 봄에는 애기똥풀, 개불알꽃, 광대풀 등이 넘실거리는 갈대 사이에서 수줍게 웃고, 여름에는 개망초 박주가리, 석잠꽃 들이 제법 당당하게 겨룬다. 가을에는 노란 고들빼기가 곱고, 빨간 역귀, 고마리 꽃들의 몸짓에 마음을 빼앗긴다.
도로변에서 차 먼지를 푹푹 뒤집어쓰고 숨 막히는 것 보다야 하루를 살더라도 깨끗이 살다 가고자 함인가 보다. 이들은 물소리와 함께 노래하고 백로나 왜가리도 훔쳐보며 더러는 벌 나비도 휴혹하며 안빈낙도의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시골을 택한 것도 저 꽃들이 추구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어떠랴. 자연이 내 것이지 않은가. 병원이 멀어도 산책길이 내 병을 치유해 줄 것만 같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지 않는가.
강둑길을 걸으며 갈대와 억새와 꽃들의 군무를 본다. 이들의 유희에 내 몸도 흔들리어 향기가 배어들 것만 같다. 18
5. 불암곡 마애불/ 박희곤(4)
1인생에 퇴직할 나이가 되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무료함과 무료함 사이에 맴도는 직장은 늘 경주남산으로 출근했다. 죽음이 계류하는 계류장에서 저승 가는 나룻배는 빨리도 오고 역류하는 죽음은 너무도 느려 긴 역병에 멀미가 난다. 출근길은 평화로워서며 단정히 단장된 무덤들 사이로 걸어가는 등산길은 숨은 차고 가슴은 참꽃들로 만발하였다.
2샛갓골 중턱에 와서는 잠시 쉬면서 아이고 힘들다 했는데 어디서 나도 힘들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등산화 끈을 다시매고 고개를 드니 눈앞에 거대한 바위가 내 앞을 막고 엎드려져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돌부처가 거꾸로 넘어져 물구나무를 서 있는 것이었다.
3부처님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셨나요? 아니면 지금 수행중이신가요? 부처님 왜 그렇게 하고 계세요? 했더니 부처는 지진이라는 인연법에 따라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정수리에는 피가 역류하고 해와 달이 바뀌고 산이 거꾸로 보여도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하며 살고 있다 하시며 태연히 물구나무를 하고 있다. 그래, 너도 늙고 병들고 혼자 사는게 힘들지 그러면 산속에서 혼자 물구나무를 서서 육백년을 견디어 봐라 단 하루도 멀미 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지.
4그럼 내가 대신 물구나무를 서 줄 수는 없는 가요 해더니 그래 고맙구나 중생아 “인생은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이다”그러니 잘 살아야한다 하시며 어지럽다고 손사래를 친다. 이 부처님은 2007년 발견된 열암곡 마애불로서 서기1430년도 경상도 일대애서 일러난 지진으로 입상부처상이 넘어져 역상 부처가 되었던 것이다. 넘어질 당시 불상의 얼굴과 넘어진 바닥과의 거리는 불과 5Cm정도 밖에 되지 않아 5Cm의 기적이라고 했다.
5인생을 살다보면 넘어져 뒤통수를 맞는 일도 있고 하루아침에 명태를 당하여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도 있다. 때로는 억울한 일도 당하기도 하고 연애에 실패하여 죽음을 생각할 때도 있다. 인생이란 것이 구구절절 사연 없는 것이 없고 이유 없는 죽음은 없다. 부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생아 사는 것도 힘들고 죽는 것도 힘 더냐? 나도 그렇다 한다. 육백년 동안 지구를 머리에 이고 살면 어지럽고 하늘에 별들을 징금 다리로 삼아 열반으로 가는 길 가자면 하루도 힘들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하는 것 같았다.
6마치 부처님은 역상의 고통 속에서도 아무러치도 않다는 듯, 석굴암 부처님의 온아한 미소보다 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나는 끓어 앉아서 땅에사 5cm가 떨어져 있는 부처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부꺼러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7나는 죽지 않고 하느님에게로 간 아내를 원망하던 마음도, 평생을 암과 싸우던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는 육백년 동안이나 피가 역류하는 고통에 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치는 순간이었다. 역상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부처에서 보는 순간 나는 불자는 아니 이었지만 한순간의 대오에 합장하고 말았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들고 간 삼다수 한잔을 부처님 앞에 올려 드렸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지팡이 집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탄식과 한숨을 훔치며 붉은 산을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8그날 이후 어떻게 하면 부처님을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고통을 드려 드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고 내가 꿈에서도 역상의 부처가 되고, 넘어진 부처님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9그 후 몇 년 뒤 역상의 부처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 싶어 열암곡로 갔다. 그러나 보수 공사가 진행중이였다. 산에 모노레일을 깔고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최근에 넘어진 부처가 발견되고도 15년 이상 엎어진 채로 있어야만 했던 열암곡 마애불을 원상복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매스컴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10오랜만에 보는 부처님이 반갑고 또 가까이 볼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생각에 잠겨 부처를 바라보았다. 부처는 400년 동안이나 여기서 서서 살다가 지진으로 너머져 600년 동안 물구나무를 서서 살았다. 그 동안 천년동안이나 중생을 위해 자연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철재 지붕을 세워 나를 감옥에 가두냐 하신다. 아니 지붕을 덮고 칸막이를 세우면 비바람을 피할 수 있어 좋 찮아요 했더니, 그건 중생 너 생각이고 나를 이대로가 좋다고 하신다.
11그러나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처기 하는말, 중생아 나는 본래 인연법 따라 이렇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전 세계적으로 입석 불, 반가상불, 좌불, 와불 등 수많은 불상이 있지만 나처럼 해 있는 역상으로 있는 불상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나는 이 세상에서 무일유일한 존재지. 억지로 복구하다가 남산에 많은 있는 목 없는 부처 처럼 되기 싫다. 그리고 원상복구에 소비되는 막대한 경비는 중생들의 피와 땀이다 하시며 도리어 중생들을 걱정했다. 또한 자네 같은 중생들이 나를 보고 대오각성 할 수 있는 본래의 존재 목적이 없어지게 되잖아 하는 것이었다.
12언뜻 생각해보니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넘어진 불상을 복구를 하던 안하든 그것은 인연법에 따라 간다고 생각하니 중생인 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역상의 부처를 보는것 만으로도 내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부처, 나는 무언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만약 5cm 기적의 역상부처가 그대로 있다면 꼭 기네스북에 올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살면서 내 존재의 행복함을 알려준 기적 그 부처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6. 장례식장의 돼지수육/ 박정애1
1 며칠 전, 지인 어머님을 모신 장례식장에 갔었다. 예를 표하고 식사를 대접받았다. 간단한 상이었지만 내 입맛을 사로잡은 음식이 있었다. 바로 돼지고기 수육이다. 돼지수육이야 언제든 사먹을 수 있고 직접 만들기도 하지만, 나에게 장례식장의 돼지수육은 특별한 맛이다.
2 처음 그 맛을 느낀 것은 집에서 치른 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다. 갓 결혼한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새도 없이, 아픈 엄마를 대신해 하객에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돼지수육도 그중 하나였다.
3 문상객들은 잠시 유족을 위로하나 싶더니, 어느새 먹고 떠들어댔다. 돼지수육이 맛있다며 리필 하는 문상객도 있었다. 장례식에 온 것인지 회식 자리에 온 것인지, 볼썽사나워 보였다. 그들에게 고인은 이미 과거가 되어 있었다.
4 나는 가까운 사람의 상을 치르는 것이 처음이었다. 상실감인지 뭔지 모를 먹먹한 감정에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음식을 삼키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5 그런 나를 지켜보던 친척이 내 손을 잡아끌어, 상 앞에 앉히며 말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6 흔하디흔한 산 사람의 변명이라 생각하면서도, 어른의 통사정을 뿌리치지 못해 억지 수저를 들었다. 마침내 기름지고 촉촉한 돼지수육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맹렬한 허기가 밀려왔다. 내 혀와 위장은 슬픔 따위와 관계가 없었다. ‘죽으면 이런 건 못 먹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7나는 내가 더 이상 슬프지 않은 것에 당황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면 절절한 슬픔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돼지수육 한 점에 내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부모를 잃은 슬픔을 하늘이 무너지는 것에 비유한다는데, 나의 슬픔은 고작 돼지수육 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자신이 몹시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8 ‘먹고 기운 내기를 아버지도 바라실거야.’
아버지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나 자신에게 구태의연한 변명을 했다. 돼지수육을 리필 했던 문상객이 생각났다. 그와 내가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들킬 새라 얼른 입안에 든 수육을 삼켰다.
9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이제 아득하다. 하지만 혀에 감기던 돼지수육의 부드러움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장례식장에 갈 때면 돼지수육을 맛보는 은밀한 설렘이 있다.
10“나는 장례식장의 돼지수육을 좋아해.”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이상한 취향을 가졌다거나, 고약한 입맛이라 할지 모르겠다.
왜 장례식장의 돼지수육이 좋으냐,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거창하게 '죽음 가운데에서 느끼는 삶의 기쁨' 까지는 아니지만, 장례식장에서 먹는 돼지수육에는 슬픔을 중화시키는 어떤 맛이 있다, 그렇게 대답할까.
11 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몇 점 남기고 온 돼지수육이 생각났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남김없이 먹는 것에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장례식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맛인데 남긴 것이 아쉬웠다. 그렇다고 누군가 죽기를 바랄 수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