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로 담아내어 흥취(興趣)를 돋우어 주다 백자청화시문전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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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술은 즐거움과 위로를 주고 때로는 괴로움을 동반하며 무수한 추억과 일화를 남긴다. 조선 초기는 태종, 세종, 성종 때 재차 시행된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술을 어떻게 마시는가보다 얼마나 마시는가에 중점을 두었을 만큼 술이 애호되었던 시기였다. 주당이자 문인이었던 윤회(尹淮)는 세종이 무절제한 음주를 금하려 내린 삼배주계(三杯酒戒)에 술잔의 크기를 늘려 주량을 채웠고, 이사철(李思哲)은 목숨을 위태롭게 한 종기를 앓고 있음에도 독주(毒酒)를 고집할 만큼 술을 탐했다. 한편으로 수많은 문인에게 술은 인격을 평하기에 내면적 자질과 연관된 요소로 인지되었고, 취하지 않은 정신이 취한 육체를 제어한다는 맥락에서 음주를 합리화했다. 01.백자 청화시문전접시, 조선, 높이 1.8cm, 구경 21.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덕수3834. 접시에 새겨진 글귀는 ‘竹溪月冷 陶令醉 / 花市風香 李白眠 / 到頭世事 情如夢 / 人間無飮 似樽前’으로 ‘대나무 숲 계곡에 달빛이 서늘하매 도연명이 취하고, / 꽃 가게 부는 향기에 이백이 잠드네 / 세상의 정은 꿈과 같은 것! / 인간사란 마시지 않아도 취해 사는 것과 같네’ 라는 의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도연명과 이백을 칠언절구로 표현하다
술은 여럿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담소를 즐기는 매개체에 그치지 않고, 술을 마시며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짓고, 가무를 즐기는 놀이문화의 모습으로 그 영역을 넓혀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고상한 군자의 삶을 닮고 싶었던 문인들은 평소 존경해 온 과거 고사의 행위를 따라 했고 친목을 위한 모임에서 금기서화(琴棋書畵, 거문고·바둑·글씨·그림)를 즐겨 행하기도 했다. 1447년 5월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지인들과 강가에서 술을 마시며 달을 감상하고, 동궁이 보낸 동정귤 쟁반에 놓인 시구에 따라 시 한 편을 지어 즐겼던 일화는 당시 정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인들에게 술을 마시며 시를 지어 읊음은 풍류를 누리고, 한편으로는 자신과 시대의 시름을 달래는 방편이 되었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청화시문전접시(詩銘白磁靑畫皿)는 술에 의탁해 시를 즐겨 읊었던 대표적인 중국 시인, 도연명(陶淵明)과 이백(李白)을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시로 담아내고 있다. 고상한 음주의 멋을 지닌 도연명과 이백은 대나무 숲속 달빛 아래에서, 꽃을 파는 거리에서 술에 취해 잠들었다. 마치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하는 꿈만 같은 세상사 이치와 멋은 보는 이의 마음을 위로하고 다독여 준다. 또한 백자청화시문전접시의 투명하고 옅은 백색 유조와 수려한 왕희지체로 표기된 시는 이러한 분위기를 한층 단정하고 청아하게 이끈다.
02.백자 청화전접시편 등, 조선 1505년경, 경기도 광주 도마리 1호 가마터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수 19367 ©국립중앙박물관 03.「세종실록」 132권 오례 / 가례 서례 / 준작 / 준작의 예에 나타난 쌍이초엽금잔 및 잔받침 ©국사편찬위원회
16세기 중후반, 음주문화를 보여주는 도자기
이 백자청화시문전접시의 시는 1505년경 제작된 백자청 화편의 검게 발색되거나 고르지 않은 청화 안료와 비교해 한층 밝은 청색조로 표기된 점에서 청화 안료를 다루는 기술의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전체 높이가 낮아지고 구경이 넓어져 굽 내면이 고르게 다듬어진 점에서 16세기 중후반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였던 것으로 이해 된다. 「세종실록오례의」에 금제 잔과 함께 그려진, 턱[盞座] 없이 바닥이 넓고 편평하며 가장자리에 전이 달린 잔 받침과 기형상 일치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에 조선 왕실과관청에서 진행되는 의례용으로 관요에서 정해진 규격과 기형, 문양에 따라 특별 제작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백자청화시문전접시에 담긴 도연명은 일찍이 절의(節義)와 충분(忠憤)의 표상으로 받아들여졌고, 그의 문학은 유적이나 명승의 이름뿐만 아니라 자호(自號), 당호 (堂號), 실명(室名) 등으로 사용될 만큼 처사(處士)적인 삶을 지향했던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백은 술을 좋아하는 팔선[飮中八仙] 중 한 명으로 조선시대 수많 은 고사 인물화의 주인공으로 묘사될 만큼 선망의 대상이 었다. 그런 의미에서 백자청화시문전접시의 도연명과 이백을 다룬 시는 조선시대 의례용 기물에 표기되기에 거리가 먼, 지극히 사적 영역에 치우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관요를 관할한 사옹원의 책임자, 도제조는 늦어도 1470년 부터 대군이나 왕자, 부마(駙馬), 의정부의 재상이 겸했다. 또한 제조는 종 1·2품 및 왕실의 종친(宗親)이나 부마가 담당해 관요 운영에 관여해 왔다. 흥미롭게도 1524년 당시 사옹원 제조였던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은 관요에서 제작한 자기를 사적으로 취득했고, 1540년 번조관이었던 한세명(韓世鳴)은 사사로이 자기를 제작(사번)하고 관요 소속의 인력을 마음대로 이용했다. 즉, 사옹원의 책임자와 관요 실무 관리자가 개인의 이득과 남용을 위해 사번을 일삼았고, 한편으로 관요에 소속된 인력은 생계를 위해 암묵적으로 사번에 동참하고 있었다.
자연히 관요에서는 개인의 요구에 따른 주문 제작이 이뤄질 수 있었고, 시장의 수요에 따른 공급도 가능했다. 실제로 심수경(沈守慶)은 사옹원의 참봉이자 관요 감조관이었던 자신의 5촌 조카 심일승(沈日昇)에게 오언절구의 시를 지어 보냈고, 그 시를 표기한 잔과 잔받침을 받았다고 밝혔다. 술을 마시는데 공간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적 정취, 그 안에 자리한 인물과 주고받는 이야기와 놀이, 여기에 술을 위한 기물까지 사용자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술자리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연명과 이백은 고상한 음주의 표상으로 투영되기에 적합한 대상이었다. 즉, 이들을 술잔받침의 공간 속 시로 담아낸 백자청화시문전접시는 16세기 중후반 술자리의 흥취를 한층 돋우었던 음주문화의 일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글. 오영인(김포국제공항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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