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별 일입니다.
낮에 휴대폰이 호들갑 떨면 신경이 쓰이는 장소에 있었습니다.
ISO 품질인증 사후 감사에 참여하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눈치가 보여, 전화기를 들고 얼른 감사 장소를 빠저나오면서
전화를 거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낮고 느린 목소리, 내 빠른 말투에 비하여 십분지 일쯤.
" 황종원씨이세요? 통신에서 혼불에 관한 글을 보았습니다.
저는 한겨레 신문의 누구입니다. 내일 만나주실 수 있는지요?"
나는 이제 막 심사원의 일자리에 들어서고 있는데 무슨 기자와
한담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 미안하지만, 일과 시간 이후라면 몰라도…. "
" 그러면 통신으로 질문을 드릴 테니, 답을 써주시겠습니까."
하면서
" 시간을 내주셔서 사진 기자를 보낼 테니 사진 한 장 찍게 해주십시오.
혼불 작가 최 명희씨를 추적할 수 있는 장소에서 말입니다. "
그랬더니 통신으로 질문이 왔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보낸이] hermes@hani.co.kr (이태희)
[제목] 한겨레신문의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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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이태희 기자입니다.
직접 만나뵙고 여쭤봐야 하는데, 이메일로 드리게 되서 죄송합니다.
그럼 질문 입니다.(질문들에 대해서는 가급적 자세히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가 최명희를 처음 만난 적은 언제 였는지, 최명희씨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작가 최 명희를 그이의 생전에 본 일이 없습니다. 97년도 mbc 라디오 아침 대담 방송에서 작가의 육성을 들었습니다.
둥실 하늘에 뜨는 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가슴을 뚫어야 하늘을 나를 수 있는 한국연의 정서에 대한 세심하고 절절한 작가의 말에 우리 누구나 연이면 연이지 하던 그 단순한 감정이 얼마나 부끄럽웠던지. 더구나, 눈 앞의 이익만 찾는 정서가 상실된 이 시대에 목마르게 혼불 하나에 목숨까지 버린 집념이 그이의 집념만으로 잊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명희씨의 사후에 그의 궤적을 쫓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 또한 그의 궤적을 찾는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혼불이 지금쯤은 아마 100만부 정도는 팔렸을까. 그만큼 우리에게 우리 것은 과연 대단해.하는 감정을 주었지만 너무나 혼불은 완벽해서 흠입니다. 누가 감히 그런 글을 또 쓰겠습니까.
그것은 좋을 수도 있지만, 문제도 있습니다.
또 다른 혼불을 써야하는 또 다른 최 명희가 언제나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최 명희의 고교 시절을 어떨까, 대학 시절은?
다행이었습니다.
기전 여고 3학년때 연대문예 콩클에서 우수상 받은 수필 '우체부' 나, 전북대학 4학년때 숙대신보사에서 개최한 범대학 문학상에서 우수상을 받은 '탈공', 4학년 같은 해 전북대내의 문학상을 받은 ' 정옥이' 를 보면 대학 시절 글 씁네 하는 문학청년 수준이었습니다.
남다른 점은 그 때의 글맛에서 지금 <혼불>의 서정과 음률이 느껴지는 글맛입니다.
최 명희는 노력하는 작가입니다. 스토리 작가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후배 최 명희가 선배 최 명희의 뒤를 따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최 명희와 전주 풍남국민학교 동기 동창이며 기전여고 교감 김 환생 선생님에게서, 기전 여고교지에 실린 대학생 최명희, 기전여고 서무직직원 최 명희의 글을 받아보았을 때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 또한 가장 먼저 궤적으로 쫓아간 날은 언제쯤에 어디였습니까. 최명희씨의 궤적을 ?아간 과정을 날짜, 장소별로 구체적으로 적어주십시요.
(답) 작년 12월12일 영안실에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작가의 영정을 찾은 걸음이 처음입니다. 문상객이 너무 없어서 남남인 내가 안타까웠었습니다. 작가를 알리자, 작가를 찾자 하는 내몰리는 듯한 감정으로 장례식장에서 작가의 강연문 '나의 혼, 나의 문학'을 얻어서 천리안 통신에 11일간 띄웠습니다.
그러다가, 금년 10월 들어 '혼불' 책 만으로 작가를 이해하기 부족했지요. 구할 수 있는 길을 국립 도서관 자료실이었습니다. 혼불을 집필하고 1981년 동아 일보사에서 2000만원 현상금을 탔던 제 1부 혼불을 집필한 도곡동 주공 아파트 13평 짜리의 현관문에 서서, 이 집에 지금 사는 사람은 이 집이 작가 최명희가 우리 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의 시작이 여기서 집필이 시작된 것을 알기나 알까, 그리고 작가가 운명하기까지 살았던 역삼동 보성아파트를 어렵게 찾았을 때, 느낀 감정은 작가를 찾아 나선 독자가 마치 들고양이처럼 동회로 문인협회로 등기소로 다니면서 생전의 주소를 찾아 헤매는 딱한 현실이 어지롭고 답답했습니다.
작가에 대한 대접이 이래야 되는지. 팻말 하나 없이 지워저가는 현실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도곡 아파트나 성보 아파트는 재건축하겠답디다. 그 집모양을 따서 어딘가에 기념관을 만들어야하는 정성에 우리는 왜 이리도 인색한지.
-최명희씨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또한 가장 서글펐던 기억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학생 최 명희의 상받은 글에 대한 기록이 아직 남아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그 기록을 모아놓았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모교인 초등학교에서는 선배 최 명희에 대한 기념할 만한 기념물이 없다는 것이며, 여중 최명희가 분명히 무슨 글인가를 썼을 전주 사범 병설학교는 폐교가 되어 여중생 최 명희 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군요. 기록 보존이 이토록 부실하다는 것이 서글픕니다.
-최명희씨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마주친 이들이 있었습니까. 만약 있었다면 그들로부터는 무슨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답) 국민학교 동기 동창인 기전 여고 교감 김 환생 선생님은 따뜻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열심히 제게 최 명희 의 정보를 보내주었습니다.
-최명희씨 1주기로 최명희씨 찾기는 그만 두는 것입니까,. 아니면 계속 됩니까.
(답) 최 명희 찾기를 홈페이지로 만들 생각입니다. 내년 이 맘때는 제법 모양을 갖출 생각입니다.
-한국의 작가 대접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인데, 21세기를 맞는 한국의 문화적인 문제점은 없습니까.
21세기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답) 평창에 있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 효석 선생의 생가를 가보십시오. 밥집이 되어 있습니다.
인사 삼아서라도 붙혀 놓았을 작가의 연역하나 없습니다. 이것이 작가에 대한 대접입니다. 문화가 무엇입니까.
부수는 것이 문화입니까. 작가의 생가라고 밥집만드는 것이 한국적 문화인 현실입니다.
보존하고, 돌보며 아끼는 정신이 바로 문화의 첫발자국이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앞으로 한국의 문학, 한국의 문화를 위해 하시고 싶으신 일은. 또한 본인의 간단한 자기소개(태어난 날짜와 장소, 출신학교, 현재 하고 있는 일 등등)를 부탁 드립니다.
( 답) 한국 문학, 한국문화라는 큰 제목은 잘 모릅니다.
나는 문학가가 아닙니다. 다만, 통신을 통해 평범한 남자의 일상을 쓰는 일에 열심인 별나다면 별난 사람입니다.
3년간 3000쪽의 글을 띄웠지요.
우리에게 조선조 시대의 민초의 기록이 드물지요. 지금도 잘 아는 것 같은 서민의 기록은 드물지요.
거의 매일 통신에 글을 쓰는 나는 매니아라면 매니아이니 그것도 크게는 한국 문화를 위하는길, 맞나요?
나는 47년 생 1월 10일 생, 작가 최 명희는 47년 10월 10일생이니 제가 오빠 턱이지요. 세상에 나온 장소는 지금의 중구청 정문 자리에 제 집이 있었고. 중앙대 경영과 , ROTC대위예편, 극동건설, 신동아 건설에서 주택사업부장, 재건축, 재개발 사업부장을 하다 작년에 남들 그렇듯 나와서 , 지금은 ISO 품질인증 컨설팅을 하고 다닙니다.
금년 봄에 MBC방송국에서 '손 또는 밥'이란 주제로 생전 처음 글 잘 썼다고 동상으로 상패와 30만원 받고 책에까지 실리고 , 10월에는 MBC라디오 여성시대에서 발행하는 여성시대 10월호에는 "여성 시대가 찾은 이 사람'으로 뽑혔지요.
이번 12월 9일 MBC 여성시대에서 '혼불 작가 최명희를 기리며'라는 제목의 방송이 나갔답니다.
이만 하면 나도 글줄깨나 쓰는 사람 같습니까.
신변잡기(身邊雜技)에 능하다 뿐이지요.
기타 사항 전합니다.
오늘 혼불 작가 추모의 밤에 한겨례신문논설위원이신 지영선씨가 차분한 사회를 보았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진 기자 편에 내가 1년간 쓴 혼불 이야기와 모은 자료를 모은 400쪽짜리 책을 보냅니다
개인 취향으로 딱 세부를 만들었습니다
이 태희 기자께서 혼불에 관심을 가져주시니 참고가 될까 해서입니다.
다 보신 뒤 제가 다시 반환 받거나 우편 발송 하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일 사진촬영시간은 오전 11시가 좋을 듯 하다는 것이 사진부의 입장입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내일이 오늘인 12월10일입니다.
위 글을 새벽 2시까지 정리해서, 지치고 피곤해서 아침 7시에 일어나 송신을 시키고, 이기자에게 전화를 겁니다.
했더니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 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진행을 못하겠어요. 다음에 뵙지요. "
맥이 빠집니다.
내일이 작가 최 명희의 1주기기일이니 내 이야기는 이때를 맞춘 것이니. 다음에 보자 하는 말은 2000년에 보자하는 말이 분명 할 터.
맥은 빠지나 실망은 없습니다.
신문에 나오려고 글을 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