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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가 장기화되면서 우리 주변에 알게 모르게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적 격리로 사람들간에 만남이 단절되고, 생업이 끊겨 불안과 두려움, 자책, 화로 마음의 병이 심화되고 있지만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우울증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4회에 걸쳐 우울증을 극복한 사람들과 패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뤄본다. <편집자 주>
'신은 죽었다'로 호기롭게 유럽 지성계를 강타한 니체. 그러나 말년에 정신분열증과 우울증으로 불행한 말로를 맞는다.
링컨과 처칠이 굴곡의 개인사, 우울증, 엄중한 전쟁 상황에서도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면, 다음의 두 사람, 철학자 니체와 문호 헤밍웨이는 반대의 경우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위대한 걸작을 남기는 성취는 이뤘지만 결국 우울증에 굴복, 불행한 종말을 맞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는 아버지를 목사로 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대학 시절인 만 20살 때 신학 공부를 중단하고 신앙생활도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그는 파격적인 삶을 살았다.
일체의 기존 관습, 논리, 철학, 종교 등을 부정하고 초인(超人․superman)사상을 내세웠다.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초인이 나와 세상을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서 초인은 모든 도덕과 위선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위해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 사소한 도덕이나 동정심에 사로잡히지 않을뿐더러 모든 인간적 요소를 극복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완벽한 인간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그는 이런 강자(强者)의 의지에 의한 통치가 기독교의 위선적 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렇게 기독교를 비롯 모든 기존의 권위와 우상에 격렬히 저항함으로써 당시 보수적인 유럽 사회에서 그는 ‘떠오르는 별’이 됐다.
그러나 ‘작은 목사’라 불리며 누구보다 기독교 신앙에 투철한 성장기를 보낸 니체가 자신의 근본 출발까지 뒤집으며 보인 급격한 반동과 저항의 대가는 어떤 것이었을까.
처음에는 신을 부정했으나 이후에는 자신의 철학적 멘토였던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바그너 등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그들과 결별했다.
니체의 교만과 독단은 하늘을 찔렀다. 그만큼 더 니체는 고립되고 결국 정신적․육체적으로 병들게 됐다. 스스로 천재와 초인을 갈망하고 강자로서 독립적이길 원했으나 결국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우울증은 그의 집안의 가족력이기도 했다. 니체는 45세 때 졸도하면서 55세 죽을 때까지 말년 10년간은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잇단 정신병 발작으로 완전한 정신 상실자로 있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명석했으나 매사 부정적이었다. 이를 인간적으로 극복하기에는 자기 확신과 자만심이 너무 컸다.
남자다움의 상징이던 헤밍웨이. 그러나 내면은 우울증과 불면증, 자살충동의 악몽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대표적 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도 비슷한 케이스다. 우울증은 그의 가족력이었고 평생 고생했다.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했고 아들, 손자도 우울증의 길을 걸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소설가로 꼽히는 헤밍웨이는 부, 명예, 사랑, 술, 여자, 모험 속에서 살았다. 그의 명성은 지금까지 이어져 그가 한때 살았던 쿠바와 카리브해 인근에선 지금도 그의 이름을 팔아 관광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
역사상 헤밍웨이만큼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문필가는 없다. 지금도 그의 말 한마디, 취향, 살던 곳, 행적 등이 전설처럼 회자된다. 요즘 헐리우드의 대스타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그는 37살 때 비로소 자신의 우울증, 불면증과 자살 충동 등을 실토했다. 외형적으로 헤밍웨이는 남자답고 모험을 즐기고 도전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와 가까웠던 지인들은 다른 말을 한다.
“헤밍웨이는 감흥을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인생 여정의 진실은 비겁함과 자살하고 싶다는 은밀한 유혹과 일생을 싸운 것이다. 그의 내면의 풍경은 악몽이었으며, 매일매일 악신들과 씨름하며 밤을 지새웠다”(노먼 메일러・작가)
말년의 헤밍웨이. 알콜 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어느 새벽 장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일부 정신 분석가들은 헤밍웨이가 평소 모히토(moiito)를 비롯 온갖 술을 좋아하고, 권투, 사냥, 바다낚시, 사파리 등 거친 스포츠를 즐겼으며 심지어 목숨이 오가는 살벌한 전쟁터를 수차례나 참전한 내면의 동기에는 자신의 신경정신증 질환들에서 오는 고통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다고 해석한다. 그의 글쓰기도 처칠의 그림 그리기나 링컨의 유머 사용같이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한 대표적인 방어기제로 본다.
호원대학교 문영수 교수는 자신의 논문 ‘문학과 우울증에 관한 연구: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어부 산티아고가 바로 헤밍웨이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산티아고가 보여주는 폭력적 언행, 혼잣말, 식욕 부진, 우울한 감정, 허무한 태도 등을 종합해보면 이는 곧 우울증이 심한 작가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문교수는 나아가 “그의 우울증은 창작 에너지의 원천이자 자살 충동, 그리고 천재성을 부여한, 독특한 광기(madness)”라고 강조했다.. 헤밍웨이의 광기의 에너지가 ‘노인과 바다’를 잉태시킨 근원이며, ‘노인과 바다’를 통해 우리는 산티아고로 변신한 헤밍웨이의 우울증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이 소설로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공교롭게도 일년 전에는 처칠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었다. 그러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던 그 즈음 헤밍웨이의 정신은 이미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져 폭음을 일삼았고 더 이상 짧은 문장조차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우울증은 결국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되지 않는다’고 역설한 헤밍웨이를 굴복시킨다. 말년 2년 동안 그는 두 차례 병원에 입원했고 여러 차례 전기충격요법을 받았다. 결국 퇴원한 지 이틀 뒤 새벽(1961년 7월) 아내 몰래 아래층에 내려와 장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2세. 이것이 과연 헤밍웨이다운 죽음이었을까.
이쯤 해서 우리는 우울증과 싸워 승리한 링컨, 처칠과 굴복당한 니체, 헤밍웨이와의 차이를 생각해 보게 된다.
앞의 두 사람은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평생 공익을 생각하고 책임감 속에서 살은 반면 뒤의 두 사람은 사상가․문인으로서 평생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앞에 두 사람은 신앙과 용기로 무장한 반면 뒤의 두 사람은 기존 권위에 대한 반항과 행동주의로 일관했다.
앞에 두 사람은 인류보편적 가치에 대한 외경(畏敬)과, 자신의 한계와 약함을 인식함에 따른 겸손(謙遜)의 자세를 평생 유지했으나 뒤의 두 사람은 데카당스한 삶과 자신이 최고라는 교만을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니체의 철학과 헤밍웨이의 행동주의는 외견상으로는 멋지게 보일 수도 있었으나 그 뒤에 찾아오는 허탈과 허무를 설명하거나 극복할 그 무엇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것은 교만이 가진 숙명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네 사람의 인생의 결말은 신의 선택인가, 아니면 사람의 의지의 문제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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