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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구간은 고산분지인 탓에 권력에 밉보인 조선 선비들의 탈출로요 유배지였으며
1951년 이른바 거창사건으로 더 잘 알려진 아픔을 안고 있는 거창과
구천동과 나제통문으로 유명한 무주의 경계를 소위 작은 삼도봉(초점산)까지 따르게 된다.
삼도봉으로 향하는 길목인 삼봉산 구간에서 작은 삼도봉인 초점산도 만나보고
지리산에서 얘기했 듯 아무생각 없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쓱 그은 경계가 얼마나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는지를 소사고개에서 만납니다
더불어 나제통문의 진실과 오해도 잠시 만나게 됩니다
주자료 : 무주, 거창군 홈피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
영문도 모른 채 제 나라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어간 719명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84명, 대현리 탄량골에서 102명, 과정리 박산골에서 533명이 희생됐다.
유족들이 유골을 수습하기까지 3년여, ‘빨갱이’라는 딱지를 떼기까지 반세기가 흘렀다. 전쟁은 대간에 피를 뿌리고 이념의 상처를 남겼다.
그해 겨울 국군의 작전명은 ‘견벽청야’(堅壁淸野)였다. 이는 <후한서>에 등장하는 병법으로, 벽을 쌓아 고립시킨 뒤 적을 초토화하는 전술이다.
놀랍게도 그때 국군의 적은 양민이었고 그중 14살 이하 어린이가 359명, 60살 이상 노인이 66명이었다.
군인들은 신원중학교 교실에 주민 800여 명을 감금했고, 면장과 지서 주임이 입구에 서서 군경 가족만 따로 추려냈다.
그날 살 자와 죽을 자를 가려냈던 면장도 아홉 해 뒤 주민들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됐다.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박산골은 한동안 귀신들만 사는 골짜기였다. 지명 그대로 신원(神院)이었다.
이곳에서 흘러내린 피가 신원천을 붉게 물들여 그해 여름 신원면 지역의 가재들은 유난히도 불룩하고 붉었다.
유족들은 부패한 주검더미에서 큰 뼈, 중간 뼈, 작은 뼈를 나누어 묻고 남자합동지묘, 여자합동지묘, 소아합동지묘라 적은 비석을 세웠다.
그중 어린이의 뼈가 묻힌 소아합동지묘가 제일 먼저 훼손됐다. 비문마저 흐릿해진 소아합동지묘에 소주를 붓고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거창 사건 희생자에 대한 국가 배상은 아직도 요원하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187.html
빼재 신풍령(930m)
고갯마루와 일부 지도엔 빼재를 잘못된 지명인 수령(秀嶺)으로 표시하고 있다.
원래 이 고개 부근에는 사냥꾼과 도적들이 많아 그들이 잡아먹은 동물뼈가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명이 ‘뼈재’라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뼈재가 경상도 발음으로 빼재가 됐는데, 이 고개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빼’를 ‘빼어나다’로 해석하면서 빼어날 ‘수(秀)’자를 썼다고 한다.
또 숱한 국난 중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왜구와 맞서 싸울 때 이곳의 토착민들은 험준한 지형 속에서 산짐승들을 잡아 먹어가며 싸움에 임했고
그 산짐승들의 뼈가 이곳저곳 널리게 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해진다.
왜구와 처절한 싸움에 임했던 민초들의 한이 담긴 빼재라는 이름으로 우리들만이라도 불렀으면 하는 마음이다
빼재의 또 다른 이름 신풍령(新風嶺)은 추풍령을 본 떠 바람도 쉬어 넘는 새로운 고개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또 다른 명칭인 상오정고개는 고갯마루 북쪽 무주에 있는 상오정마을에서 빌어와 붙인 것이다.
상오정 (上吾井) 무주군 무풍면 삼거리
상오정은 다섯 줄기의 원천(源泉)을 이루는 발원지(發源地)가 있는 곳이라 하여 오정동이라 불리던 것이 후에 고쳐진 것이다
거창군 고제면은 무명의 도승이 입석마을 서쪽을 흐르는 개명천을 건너기 위해 높이 6m, 11m의 큰 돌다리를 놓았다는 데서 유래하여 높은다리[高梯]라 하게 되었는데 이 다리 이름이 곧 면 이름이 되었다.
덕유 삼봉산(1245m) 1,2,3봉
무주읍내에서 동남쪽으로 약 38km지점에 위치한 삼봉산은 해발 1,254m의 거봉으로 봉우리가 셋이라서 삼봉(三峰)이란 이름을 붙인 명산이다.
덕유연봉(德裕連峰)의 첫번째 봉(峰)우리에 해당되는 이산은 삼봉산으로 유래가 된 지명인 투구봉, 노적봉, 칠성봉이 능선에 도열하고
그 중앙에 금봉암이 자리잡고 있고, 칼바위, 부부바위, 챙이바위 등이 어울어진 정상부는 칼날같이 솟아있고
거창의 진산으로 덕유산의 첫머리에 있어 덕유원봉라고도 부른다. 2봉이 중심이며 멀리서 보면 연꽃이 피어올라오는 모습이라고 한다.
금봉암(金鳳庵)
절과 산 모두가 나한도량(羅漢道場)이라 하여 기도처로 이름나 있는 삼봉산 기슭 좋은 터에 금봉암이라는 절이 있다.
이 삼봉산은 불심(佛心), 산심(産心), 무심(無心)의 三心이 깃들고 금봉암을 둘러리한 바위무리들은 병풍처럼 둘려쳐 봉황의 산세를 이룬다
세 개의 영험스런 바위 샘물이 솟아나 목을 축일만한 데 모두 신령스럽고 영험스런 샘물이라고 하며
천지인(天地人)을 우러른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인연이 깊다
덕유산으로 달리는 큰 줄기에서 동쪽으로 내린 가지에는 시루봉이 솟아 있으며 남쪽 골짜기는 금(金)이 난다
소사고개(690m) 전북 무주(무풍면)와 경남 거창(고제면)을 잇는 1089번 지방도로
소사라는 마을 이름은 집집마다 마루바닥에 가는 모래가 깔리는데,
일년 내내 미풍이 불어 쌓여있는 모래가 모두 날아가 기쁜 마음으로 소사현(笑沙峴)로 불려졌다 한다.
도 경계선이 대간의 마루금을 벗어나 북사면(무주 쪽)으로 약간 처져 있다. 마루금을 도나 군의 경계로 삼는 일반율을 벗어난 것이다.
소사동, 지경내, 부흥동 등 세 마을은 전라도와 경상도로 두 동강난 상태다
소사고개(680m)는 경상남도 거창 땅이며 고갯마루에서 전라북도 무풍 방향으로 10여분 걸어 내려간 '도계'(道界) 마을이 경계 지점이다.
따라서 고개 이름을 전라도 쪽에서는 '도마치'라고도 부른다.
“부흥동에는 재 넘어 소사동(거창)에 땅을 갖고 게서 농사지으며 세금을 거창군에 내는 출입경작민도 여러 사람 된다”고 말했다.
도경계선이 지나는 부흥동(무주군 무풍면)의 버스정류장을 보면 더 답답하다. 거창과 무주의 시내버스가 각각 예까지만 운행하고 모두 차를 돌려 돌아간다.
삼도화합을 기원하는 기념탑을 세운 삼도봉이 그리 멀지 않고 매년 10월이면 삼도화합 행사까지 열지만 행정은 이렇듯 거창과 무주를 단절시킨다.
동아일보 2005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289693
수도지맥 분기점 - 삼도봉(초점산) 직전
수도지맥(修道枝脈)은 분기봉인 백두대간 삼도봉에서 국사봉, 봉산, 수도산, 두리봉까지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의 도계를 지난다.
깃대봉, 우두산(의상봉), 비계산, 두무산, 오도산까지는 온전히 경남 합천과 거창의 군계를 이루고,
매화재에서 만대산, 솜등산까지 다시 경북 고령과 경남 합천의 도계를 지난다.
이어 온전히 경남의 합천 땅으로 부수봉, 성산을 끝으로 청덕면 말정마을 황강과 낙동강이 합수하는 곳에서 그 맥을 다한다.
수도지맥의 최고봉은 단지봉(1,326.7m)이나 지맥의 이름은 수도산(修道山 1,317.1m)에서 땄다.
삼도봉(초점산)(1176m)
나무가 별로 없고 억새밭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초점산은 동쪽은 경북 김천시와
서쪽은 전북 무주군, 남쪽은 경남 거창군과 이웃하고 있어 또 다른 삼도봉으로 불린다.
매년 이웃한 주민들이 모여 화합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며 친목을 다지고 있다
초점산에서 덕산마을로 내려오면 우는 아기를 업고 달래는 엄마 모습을 한 '모자바위'와 효자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수리봉을 볼 수 있다.
대덕산 (1290m)
무주군의 최동단에 위치한 1,290m의 대덕산은 가야산을 향해 뻗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을 갈라놓은 삼도분기점,
즉 해발1,250m의 초첨산을 옆에 둔 명산으로 옛날에는 다락산, 다악산으로 불리었고 정상에는 기우단이 있었다고 전하는 명산이다.
이곳으로 살러오는 사람들마다 모두 큰 재산을 모음에 따라 산의 덕을 입었다는데서 연유됐다.
경상남·북도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丁酉再亂)때에는 전라병사(全羅兵使) 이광악(李光岳)이 왜적을 물리친 곳이며,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亂)의 난 때에는 이 지역의 의병들이 반란군을 물리쳐 국난이 있을 때마다 고장을 지켜 주었던 명산이다.
대덕산 자락은 역사적으로 은신처이자 구원의 땅이었다.
조선 명종 때의 예언가 남사고는 대덕산 아래 무풍 땅을 이르기를 “국난이 닥칠 경우 이주하는 땅”이라고 했다.
실제로 조선 말 위기에 내몰린 명성황후를 모시기 위한 행궁이 들어서기도 했다.
민병석이라는 이가 지은 99칸에 이르던 행궁, 명례궁은 일제강압기를 지내면서도 무사했지만 해방 뒤 이리저리 팔려나갔다 한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187.html
덕산재(644m)
무주 쪽으로 내려서는 무풍 지역은 호남 속의 영남으로 불려왔다.
생활권이 김천이다 보니 말씨도 경상도에 가깝고 생활풍습도 무주 토박이와는 차이가 난다.
무풍을 지나 설천에 이르면 비로소 전라북도 산골 분위기가 제대로 나타나는데, 두 고을 사이에 무주구천동 33경 가운데 제1경 나제통문이 있다.
신라와 백제가 오가던 굴로 알려져 있는 나제통문은 1910년께 일제가 인근 금광의 금과 임산물 등을 가져가려고 인공적으로 뚫은 굴이다.
당시만 해도 ‘기넘이굴’로 불리던 굴은 1963년 무주구천동을 관광지화하면서 명승지 33곳을 지정할 때 나제통문의 이름을 얻고 제1경 자리에 올랐다.
나제통문이 있는 산의 이름은 석모산이고 그 산을 넘나드는 고개의 이름은 기넘이고개였다. 백제와 신라의 깃발이 넘나들던 고개라는 것이 이름의 내력이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187.html
무풍면茂豊面)
대덕산은 운장포호두(枟莊包虎頭)라는 길지로 명당있다는 풍수지리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구름속에 호랑이가 감춰져 있다”라는 전설때문인지 이고장에서는 대덕산의 정기를 받아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김천(金泉)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불린다.
'삼산'은 황악산(1,111m)`대덕산(1,290m)`금오산(977m )을 가리키고 '이수'는 감천(甘川)과 직지천(直指川)을 일컫는다.
그런데 김천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금릉'이다.
예전 김천 사대부들이 중국에 대한 모화(慕華)사상이 높을 때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이태백과 최호를 흠모해 지명을 빌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에는 금릉 이외에도 삼산이수. 봉황대, 황학산 등의 지명이 있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부항령 釜項嶺 과 무풍 5일장
부항령은 경상북도와 전라북도를 연결하는 옛길로, 작게는 김천시 부항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오가는 지름길이다.
일제 강점기 부항령 남쪽의 덕산재에 도로가 나기 전 김천과 무풍의 주민들 대부분은 부항령을 넘어 무풍장을 이용했다고
경지가 부족한 해인리 사람들은 봄이면 머리에 보리를 이고, 여름이면 감자를 이고, 가을이면 호두를 이고 무풍장을 향했다고
해인리 사람들이 이용했다는 무풍장은 김천의 부항면 사람들을 비롯해 경상남도 거창과
전라북도 무주, 충청북도 영동의 4개 지역 사람들이 어우러진 이 일대 최대의 5일장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400m가 넘는 곳에 자리한 무풍장이 인근에서 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산준령 자락에서 생산된 부산물,
특히 호두와 담배, 산채와 각종 약재 및 고랭지 채소 등이 많이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김천 지역을 비롯해 무주와 영동 등 4개 도민의 잔칫날과도 같았던 무풍장에는 무주읍장에는 없는 생선은 물론이고,
진주에서 거창을 거쳐 온 싱싱한 해산물이 무주에는 안 가도 무풍에는 온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세 개의 도가 모여 있던 이곳에서는 항시 좋은 이야기만 전해졌던 것은 아니다.
“삼도봉헬기장에 가면 정상에 돌무더기 세 개가 있는데, 처음에는 한 돌무더기를 경상도에 가면 그 돌무더기를 경상도에 가져다 놓고,
전라도에 가면 전라도에, 충청도에 가면 충청도에 가져도 놓았어.
자꾸 자기네들 마을에 가져다 놓은께, 나중에는 돌무더기가 세 개가 되었는데, 각자 크게 쌓으려고 해서 계속 올렸다고 하더라고.
그것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싸움도 많이 하고, 몰래 가서 옮긴다고 보초를 서기도 했어. 지금은 없어지고 헬기장을 만들어 놓았어.”
서수생[1936년생] 씨의 말처럼 삼도봉의 돌무덤은 그것이 위치한 도가 잘살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늘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3도가 만나는 삼도봉에서는 한 발자국만 옮겨도 다른 도로 넘어가는 것이 쉬웠다.
이 때문에 이곳에 돌무덤을 쌓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도에 돌무덤이 많이 걸칠 수 있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3도의 사람들이 깊은 밤 몰래 삼도봉을 올라 돌무덤을 옮겨 놓기를 거듭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된 행동은 결국 분쟁으로 이어져, 돌무덤이 세 개나 만들어지는 웃지 못할 결과를 초래했는데,
돌무덤이 세 개가 되었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은 다른 도의 돌무덤보다 더 높게 쌓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 옛날에 있었다는 삼도봉의 돌무덤을 직접 본 해인리 사람은 없다. 다만,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 이야기를 전혀 허구로 생각지는 않고 있다.
지리적으로 한 곳에 위치하지만 3도 사람들의 기질은 확연히 구분된다. 하지만 경쟁적 돌쌓기는 분쟁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3도의 사람들은 돌쌓기와 돌무덤을 이동하면서 서로 부딪히며 만났을 것이고,
이것도 하나의 관계가 되어서 상호 교류의 물꼬로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간5기팀이 걷는 8차 대간길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초보산꾼 도 덕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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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장님 지가 2기때 여기서 카메라 분실한 지역인 것 같네요.. 찾으러 가야하는지 집 안일로 못 감을 이해하여 주시고요...
하늘소님 카메라 찾으러 오셔야죠. 대간차량 너무 넓어서 춥습니다.
듬직한 하늘소님 반갑게 뵙겠습니다. 언제라도 환영합니다.
이 구간 지날때 혼자 뚝 떨어져 무지 겁이 났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역사속 기행을 하는것 같아요.
도덕산대장님 늘 감사드립니다. 반갑게 뵙겠습니다~^^
대간길은 어째됐든 긴길이니 혼자 걷는 경우가 많은데 겁도 나겠지요.
이번길 걸으면서 그때 왜 무서워했지? 한번 생각하면서 걷는 기분도 색다른 맛을 느낄 수있는 구간이 되겠네요
대간길에서 뵙겠습니다.
올려주신 글 잘~읽고
멋진산행 준비합니다~~ㅎㅎ
넵 청목님 관심 감사합니다. 멋진 산행 같이 합니다. 대간에서 뵙겠습니다.
소사고개, 덕산재는 바로 도로에 접해있는데 날머리 부항령은 부항령 표지석에서 급격하게 내려서는 것은 새로뚫린 터널 때문이지요?
언제나 풍부한 자료를 정리해서 알려 주시는 도덕산대장님께 감사하며 백두대간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걷게 합니다.
감사 드립니다.
요즘은 무조건 뚫거나 다리로 모든 공사를 진행하니 대간길도 조금은 바뀐곳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부항령이 그렇군요
정보 감사합니다. 상황봉 대장님 대간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