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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괄목상대(刮目相對) : Rubbing One’s Eyes Before Looking at Somebody
-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대한다는 뜻으로, 상대방의 학식이나 재주가 갑자기 몰라볼 정도로 나아졌음을 이르는 말.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 여몽전(呂蒙傳)에 배송지(裴松之)가 붙인 주(注)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오(吳)나라 왕 손권(孫權)이 부하 장수 여몽(呂蒙)이 무술만 연마하고 학식이 없는 것을 염려하였다. 국가의 큰 일을 맡으려면 글을 읽어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왕의 당부에 따라 여몽은 이로부터 학문을 열심히 닦았다.
한편 평소 여몽을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경시했던 재상 노숙(魯肅)은 그가 전과 달리 인상이 온화해지고 학식이 풍부해졌음에 깜짝 놀랐다. 이에 여몽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비라면 사흘을 떨어져 있다 만났을 땐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해야 할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
이후 여몽은 노숙이 죽은 뒤 손권을 보좌하여 국력을 키우는데 힘썼다. 촉(蜀)나라 관우(關羽)를 사로잡는 등 갖가지 큰 공을 세워 오나라 백성에게 명장으로 추앙받았다.
괄목상대(刮目相對)는 《삼국지》에서 유래한 고사성어이다. 원문은 괄목상대(刮目相待)지만 한국에서는 刮目相對가, 중국에서는 刮目相看(괄목상간)이 주로 쓰인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며 대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학식이나 재주가 깜짝 놀랄 만큼 늘었음을 말한다. 삼국 시대 동오에서 과거에 비해 학식이 매우 해박해진 여몽의 모습에 노숙이 크게 놀라자 여몽이 “선비란 사흘만 떨어져도 눈을 비비며 다시 대해야 합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 일화에서 수불석권(手不釋卷), 오하아몽(吳下阿蒙)이란 고사성어도 함께 생겼다.
여몽은 무예는 뛰어났지만 소싯적에 경전을 익히지 않아 매양 글보다는 말로 대신하였다. 손권은 여몽과 장흠이 요직을 담당하는 만큼 학문도 닦기를 바랐다. 이러한 손권의 권유에 여몽이 “군중(軍中)의 많은 업무로도 힘든데 책 읽을 짬이 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하자 손권의 훈계가 이어졌다.
“이제 와 경이 박사가 되기를 바라겠는가? 그저 옛일을 두루 알길 바라오. 경이 일이 많다 하는데 나만 하겠는가? 나는 어린 시절 《역경》을 제외하고 《시경》, 《서경》, 《예기》, 《춘추좌씨전》, 《국어》(춘추외전)를 보았소. 형 손책의 뒤를 이은 후로도 삼사인 《사기》, 《한서》, 《동관한기》와 여러 병서를 살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소. 두 사람은 머리가 좋아 일단 공부하면 빠르게 익힐 텐데 어찌 하질 않는가? 어서 《손자병법》, 《육도》, 《춘추좌씨전》, 《국어》와 삼사를 읽어야 하오. 공자께서도 ‘종일 먹지도, 자지도 않고 사색하는 것은 무익하며 배우는 것보다 못하다.’하였소. 광무제는 군무를 보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조조 역시 늙어서도 배움이 좋다 하였소. 그런데 경은 왜 노력을 안 하는가?”
여몽이 비로소 학업에 열중해 그 경지가 옛 학자들을 뛰어넘었다. 210년(건안 15년) 주유 사후 그 뒤를 이은 노숙이 육구(陸口)로 가던 길에 혹자가 이르기를, ‘심양현령(尋陽縣令, 지금의 후베이성 황메이 현) 여몽의 공명이 나날이 높아져 예전같이 대해서는 안 된다’며 꼭 들렀다 가라 하므로 그렇게 하였다. 한창 술로 달리는데 문득 여몽이 “군께서는 중임을 맡아 관우와 접하는데 미연의 사태를 방비할 어떤 계책을 세우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노숙이 황망히 “그때그때 적절히 대응할 것이오.”라고 답하자 “지금 유비와 동오가 한 집안이라 하더라도 관우는 실로 곰과 호랑이 같은 자이니 미리 대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몇 가지 방책을 제시하였다. 노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몽의 등을 두드리며 “단지 무용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 보니 참으로 박학다식하오. 예전의 그 동오(東吳)의 아몽이 아니구려.”라 하였다. 여몽이 “선비란 사흘만 떨어져도 눈을 비비며 다시 대해야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노숙이 여몽의 어머니에게 절하며 여몽과 친구가 되었다.
손권이 항상 찬탄하기를, “여몽과 장흠처럼 나이를 먹고도 수양을 해 발전하는 것은 아마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부귀를 누리며 명성을 떨쳤으면서도 마음을 고쳐먹고 학문에도 뜻을 두어 여러 서적을 탐독하였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를 숭상하여 가히 타인의 모범으로서 나라의 뛰어난 선비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훌륭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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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呂蒙, 178년 ~ 219년)
여몽(呂蒙, 178년 ~ 219년)은 중국 후한 말 손권 휘하의 장군으로 자는 자명(子明)이며 예주 여남군 부피현(富陂縣) 사람이다. 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무인이었는데 손권의 권유로 시작한 공부가 일취월장해서 노숙이 놀랐다는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고사와 관우가 지키던 형주를 손에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1) 생애
어릴 적에 남쪽으로 내려와 손책 휘하에 있던 매형 등당을 의지하였다. 열대여섯 살 때 산월을 치러가는 등당을 몰래 따라갔다. 등당이 뒤늦게 발견하여 크게 꾸짖었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돌아오니 어머니가 벌을 주려 하기에 “가난하고 천하면 살기 어렵고 공을 세우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그 새끼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를 전해 들은 등당 휘하의 관리가 여몽은 어릴 뿐이라며 “그 풋내기가 무얼 한다고… 이는 호랑이에게 먹이나 던져주는 꼴이다.”라고 비웃었다. 다른 날 아예 면상에서까지 모욕하는 것에 화가 나 그를 죽이고 도피했다가 교위(校尉) 원웅(袁雄)에게 자수하였다. 이를 전해 들은 손책이 여몽을 불러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좌우에 두었다.
여러 해가 지나 등당이 죽자 장소의 추거로 별부사마(別部司馬)를 이어 받았다. 200년(건안 5년) 손책의 뒤를 이은 손권이 군대를 통폐합하려 하였다. 여몽은 넌지시 외상을 그어 병사들에게 진홍색 옷을 입혔다. 사열하는 날 화려하면서도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니 손권이 매우 기뻐하며 병사를 늘려주었다. 이후 단양(丹楊, 丹陽) 토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평북도위(平北都尉)와 광덕현장(廣德―)을 겸하였다.
(2) 거꾸로 장강을 거슬러
208년 강하태수 황조를 정벌할 때도 참전했다. 진취가 수군을 이끌고 맞서오자 선두에서 돌격하여 직접 베었다. 이에 손권군이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성을 점령하였다. 손권이 이 승리는 진취를 먼저 잡은 덕분이라며 횡야중랑장(橫野中郞將)과 천만 전을 주었다.
주유와 정보를 따라 오림(烏林)에서 조조를 격멸하고 조인이 있는 남군을 포위하였다. 주유가 앞서 감녕으로 하여금 이릉(夷陵)을 점거하게 하자 조인도 병력 일부를 떼어 감녕을 공격했다. 감녕이 구원을 청했지만 장수들은 병력을 나누기에는 부족하다며 난색을 표하였다. 이와 달리 여몽은 “능통이라면 능히 10일은 버틴다고 장담합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감녕을 구하러 가면 됩니다. 따로 300명은 나무를 잘라 퇴로까지 막아놓으면 적들은 패주할 때 말을 버릴 수밖에 없어 그 말들마저 노획이 가능합니다.”라고 진언하였다. 주유가 이를 채택하였다. 이릉에 다다른 날 바로 교전하여 절반 이상을 죽였다. 적들은 밤을 타 달아났고 주유군은 내버린 말 300필을 챙겼다. 209년 사기가 치솟은 주유군은 장강을 건너 조인을 격퇴하고 남군에 깃발을 꽂았다. 돌아와 편장군에 심양현령(尋陽―, 지금의 후베이성 황메이 현)을 겸하였다.
(3) 오하아몽(吳下阿蒙)이 괄목상대(刮目相對)하다
이 부분의 본문은 괄목상대(刮目相對)입니다.
210년 주유 사후 그 뒤를 이은 노숙이 육구(陸口)로 가던 길에 혹자가 이르기를, ‘여몽의 공명이 나날이 높아져 예전같이 대해서는 안 된다’며 꼭 들렀다 가라 하므로 그렇게 하였다. 한창 술로 달리는데 문득 여몽이 “군께서는 중임을 맡아 관우와 접하는데 미연의 사태를 방비할 어떤 계책을 세우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노숙이 황망히 “그때그때 적절히 대응할 것이오.”라고 답하자 “지금 유비와 동오(東吳)가 한 집안이라 하더라도 관우는 실로 곰과 호랑이 같은 자이니 미리 대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몇 가지 방책을 제시하였다. 노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몽의 등을 두드리며 “경의 재략이 이 정도까지 오른지 몰랐소.”라 말하였다. 여몽의 어머니에게도 절하며 여몽과 친구가 되었다.
이전에 손권은 여몽과 장흠이 요직을 담당하는 만큼 학문도 닦기를 바랐었다. 여몽은 소싯적에 경전을 익히지 않아 매양 글보다는 말로 대신하던 터였다. 손권의 권유와 훈계에 마음을 고쳐먹고 학업에 정진하여 그 경지가 옛 학자들을 뛰어넘었다. 노숙이 여몽에게 “단지 무용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 보니 참으로 박학다식하오. 예전의 그 동오의 아몽이 아니구려.”라고 하자 “선비란 사흘만 떨어져도 눈을 비비며 다시 대해야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여기서 학식이나 업적이 크게 진보한 것을 뜻하는 괄목상대(刮目相對)와 진보가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오하아몽(吳下阿蒙)이란 한자성어가 생겼다.
(4) 조조군과의 격전
기춘(蘄春)의 전농(典農) 사기(謝奇)가 환현(皖縣, 지금의 안후이성 첸산 현) 일대에 머물며 수차례 변경을 침입하였다. 말로는 안 되길래 틈을 노려 축출하였다. 그 부하 손자재(孫子才), 송호(宋豪) 등은 노약자들을 데리고 투항해왔다. 212년 조조가 남하한다는 소식에 손권에게 여러 기책을 헌책하고 유수구(濡須口)를 방어할 유수오도 건축하였다. 장수들이 ‘뭍에 올라 적을 습격하고 잽싸게 배로 돌아오면 그만인데 오(塢)가 무슨 소용이냐’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싸움이란 날카로울 때가 있으면 무딜 때도 있듯이 항상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만에 하나 물로 돌아올 겨를도 없이 적들의 보병과 기병이 닥쳐온다면 어떻게 배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라 답하였다.[4] 213년 조조는 어떻게 해보지 못하고 물러났다.
214년 조조 휘하의 여강태수 주광(朱光)이 환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논을 개간하고 장강 이남의 파양적들과 통하였다. 환의 토질은 기름지기 때문에 한 번 수확할 때마다 그만큼 병력도 많이 지탱할 수 있어 그대로 몇 년이 지나면 매우 강력해질 것이었다. 여몽은 이를 조기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손권도 이를 받아들여 장수들과 작전을 수립했다.
토산을 쌓고 공성 병기도 동원하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그러면 시간이 너무 소요돼서 환성은 방비가 강화되고 적의 원군도 오는 데다 물마저 말라버려 함락은 커녕 돌아오기도 어렵다며 반대하였다. 오히려 아직 수비가 견고하지 않은 때에 전군이 사방에서 몰아치면 금방 무너트리고 물길로 귀환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덧붙여 감녕을 승성독(升城督)으로 추천하여 선봉에 세우고자 하였다. 손권이 그대로 실행하였다. 새벽을 기해 총공세를 펼쳐 여몽이 손수 북을 치며 독려하니 사졸들도 분전하여 아침 무렵 성을 정복하였다. 합비의 장료는 이제 협석(夾石)에 닿았던 터라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공으로 여강태수와 많은 상을 받고 다시 심양으로 왔다. 이후 많은 장수들이 어찌 하지 못하던 여릉(廬陵)의 도적들도 진압하여 수괴만 베고 나머지는 석방하였다.
(5) 영릉 태수 학보를 낚다
그동안 유비는 유장을 굴복시켜 익주를 차지했는데도 형주를 내어주지 않았다. 215년 분개한 손권이 여몽에게 선우단(鮮于丹), 서충(徐忠), 손규(孫規)와 2만 명을 붙여주고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게 했다. 노숙은 1만 명을 이끌고 파구(巴丘)로, 손권은 육구로 나아갔다. 장사와 계양은 여몽의 편지에 바로 항복했으나 영릉태수 학보만은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 시각 유비도 5만 명을 동원하여 공안(公安)으로 진군하고 관우는 세 군을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손권은 노숙을 익양(益陽)으로 보내 관우를 저지하고 여몽에게도 영릉은 포기하고 급히 노숙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몽은 회군하기 전에 영현(酃縣)에서 데려왔었던 학보 친구 등현지(鄧玄之)를 이용해 학보에게 낚시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밤 북상하라는 명령을 숨긴 채 영릉 공성전에 대한 작전 회의를 하며 등현지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학보는 충의를 행하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습니다. 유비는 한중에서 하후연에게 포위당했고, 관우는 남군에서 우리 주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영현을 구하려던 움직임은 손규에게 박살났습니다. 저들조차 극도로 위태로운데 영릉을 신경쓸 여력이나 있겠습니까? 우리 군은 정예인 데다 사기도 높고 후속병은 끊이지가 않습니다. 학보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가망 없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학보가 영릉의 사람들을 일치단결시켜 고립무원의 성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래도 됩니다. 그러나 제가 보건대 금세 무너질 것이 뻔하고 그러면 자신은 물론 그 노모까지 죽을 테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다 외부 사정을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군께서 그를 만나 잘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과연 학보는 낚시에 걸려들어 성문을 열고 등현지를 따라나와 항복하였다. 여몽이 그 손을 잡아 환영하고는 실제 명령서를 보여 주며 박장대소하였다. 학보는 속았다는 부끄러움에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후속 조치를 취하고 곧바로 익양으로 올라갔다. 익양에서의 대치는 조조가 한중으로 내려오면서 종료되었다. 익주를 잃을까 염려한 유비가 손권에게 화의를 청했고 결국 장사군과 영릉군의 중앙을 흐르는 상수를 경계로 그 동쪽은 손권이, 서쪽은 유비가 영유하기로 합의하였다. 여몽은 심양현과 양신현(陽新縣)을 봉읍(奉邑)으로 받았다.
(6) 관우가 형주를 노리다
8월(음력) 손권이 합비로 쳐들어갔다가 철수하는 것을 수행하였다. 여태 최후미에 남아있던 손권에게 엄습해온 장료를 능통, 감녕 등과 함께 필사적으로 막았다. 217년 조조가 또 유수구를 넘봤다. 전에 축성한 유수오에 강노 10,000장을 배치하여 대항하고 그 선봉을 무찔렀다. 전후 좌호군(左護軍), 호위장군(虎威將軍)에 임명되었다.
노숙이 죽자 그 군대 1만여, 한창태수(漢昌―), 식읍 하전(下雋)·유양(劉陽)·한창·주릉(州陵) 4현을 물려받고 육구에 주둔하였다. 노숙은 조조가 존재하는 한 관우와 협력해야 한다고 했었다. 반면에 여몽은 관우가 효웅으로 오(吳)나라를 합칠 마음이 있는 데다 장강 상류까지 점유하고 있어 관계가 오래갈 수 없다고 여겼다. 은밀히 계책을 올리기를 “정로장군(征虜―) 손교[8] 가 남군을, 반장이 백제성을, 여몽이 양양을 틀어쥐고 장흠이 유격병 만 명으로 장강을 순행하며 상황에 따라 대처한다면 조조가 무슨 걱정이고 관우가 무슨 필요겠습니까? 게다가 관우는 자꾸 말을 바꿔 마음 놓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도모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일이 틀어질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주에 대해서는 일단 공략할 수 있겠지만 뻥뻥 뚫린 육로로 기병들이 내달리는 터라 칠팔만 명을 쏟아부어 고수해도 근심만 될 뿐이라고 보았다. 손권도 형주를 확보하기로 결심하였다.
(7) 앞에선 웃음, 뒤에선 칼을
겉으로는 관우와의 우호 관계를 더욱 증진하였다. 219년(건안 24년) 관우가 공안과 강릉(江陵,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구)에 병력을 남겨두고 위의 번성(樊城)으로 북진하였다. 여몽이 “관우가 번성을 공격하면서도 수비병을 많이 남겨놓은 것은 제가 그 뒤를 덮칠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병에 시달리므로 그 요양을 핑계 삼아 건업으로 귀환한다면 관우도 수비병을 거두어 몽땅 양양에 투입할 것입니다. 그 틈에 우리가 밤낮으로 질주하면 텅 빈 남군과 관우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라 상소를 올리고 위독한 척 연기하였다. 손권이 여몽을 중앙으로 소환하고 몰래 형주를 칠 계획을 짰다.
과연 관우가 안심하고 번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더욱이 강릉에서 우금 등 포로 3만 명의 식량이 부족하다며 손권이 소유한 상관(湘關, 영릉군 소재)의 쌀을 노략질했다. 여몽이 이를 빌미로 즉시 출격하였다. 심양에서 상선으로 위장한 배에 정예병들을 태워 쉬지 않고 재빠르게 나아가 강변의 관우군 초병들을 포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우가 다시 노략질을 하기 위해 설치한 관측소를 모두 철거했다. 공안의 사인, 강릉의 미방도 항복시켰다.[9] 미방은 진작에 손권군과 내통하고 있었고, 관우는 남군이 순식간에 넘어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8) 형주 평정, 그 미완성의 꿈
관우군의 가속들을 예로써 대하고 군기를 확립하여 인가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 여남군 출신 부하가 삿갓 하나를 취했는데 동향 사람이라도 봐줄 수 없다며 참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군사들은 길에 떨어진 것도 줍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노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없는지 위문하고, 병자에게는 의약품을, 춥고 배고픈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베풀었다. 뒤늦게 관우가 내려오면서 수차 탐문을 벌였다. 관우의 장병들은 가족이 무탈함을 넘어 평시보다도 대우가 좋다는 소식에 투지가 없어졌다.
손권도 강릉에 이르렀으며 육손은 의도군을 접수하였다. 사면초가에 빠진 관우는 맥성(麥城)을 버리고 십여 기만을 거느린 채 탈출을 시도했으나 주연과 반장이 퇴로를 끊어놓았다. 12월(음력) 마침내 관우와 관평 부자는 임저현(臨沮縣) 장향(漳鄕)에서 반장의 사마 마충에게 포획되어 죽고 관우가 통치하던 땅은 오나라로 넘어왔다. 손권으로부터 성대한 대접을 받아 남군태수에 잔릉후(孱陵侯), 1억 전, 황금 500근 등 어마어마한 상을 받았다. 돈과 금은 한사코 사양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채 봉작이 완료되기도 전에 병이 들었다. 손권은 여몽을 공안의 내전에 들여 만방으로 치료책을 찾고 성공하는 자에게는 천금을 주겠다 했다. 또 안색은 자꾸 확인하고 싶고 여몽이 힘들게 몸을 일으키는 것은 싫어서 벽에 구멍을 뚫어 살펴보았다. 조금이라도 음식을 들면 기뻐서 웃으며 말하고 그러지 못하면 한숨을 내뱉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깐 차도가 있어 사면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이내 위중해져 향년 42세로 사망하였다. 도사들이 별 아래서 드린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양양은 여전히 조조의 수중에 있었다. 손권의 슬픔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9) 평가
손권은 항상 찬탄하기를, “여몽과 장흠처럼 나이를 먹고도 수양을 해 발전하는 것은 아마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부귀를 누리며 명성을 떨쳤으면서도 마음을 고쳐먹고 학문에도 뜻을 두어 여러 서적을 탐독하였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를 숭상하여 가히 타인의 모범으로서 나라의 뛰어난 선비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훌륭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진수는 용맹하면서도 지략에 능하였으니, 무장으로써 여몽만한 인물은 없었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여몽의 배신으로 유비와 전쟁을 벌이게 된 것으로 조조세력을 이겨낼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려 최종적으로 오나라의 멸망의 시발점이 되었고, 더불어 단기적으로도 촉한을 배신하고 얻어낸 남 형주 마저도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점 등을 들어서 대전략적 안모가 심각하게 부족한 인물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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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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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1)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필명 엘리스 벨(Ellis Bell)로 출간한 유일한 소설이자 유작 소설이다.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 신부가 성공회 사제였던 가정환경상 에밀리는 어린시절을 사제관이 있던 영국 요크셔의 황량한 벌판에서 보내면서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길렀으며, 어른이 된 후 요크셔 벌판의 폐가(TopWithens)에서 영감을 얻어 《폭풍의 언덕》을 썼다. 캐서린(Catherine Earnshaw)과 히스클리프(Heathcliff)와의 불멸의 사랑을 우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난 게 장점이다. 출간당시에는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20세기에 토머스 몸 등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한국어판은 범우사 등의 문학전문출판사들에 의해서 역간되었다.
(2)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줄거리
1801년 황량한 벌판에 위치한 폭풍의 언덕에 세입자인 락우드씨가 찾아온다. 자신이 세든 집인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주인인 히드클리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거칠었고 잘 곳도 변변하지 못하여 감기에 걸려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과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가정부 넬리 딘에게 그동안 있었던 두 집안의 역사에 대해서 듣는다.
이야기 1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었던 언쇼는 리버풀에 갔다가 거지꼴을 한 소년을 데려온다. 가족들은 출신을 알 수 없는 소년에게 경계심을 갖고있었는데, 특히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한다. 죽은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줄 정도로 히스클리프를 편애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내 프랜시스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 힌들리는 결국 히드클리프를 머슴처럼 가혹하게 학대한다. 게다가 어린시절부터 같이 자랐던 친구이자 애인인 캐서린까지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아들인 에드거에게 사랑을 품자, 이에 상심한 히드클리프는 가출한다.
이야기 2
몇 년후 부자가 되어서 돌아온 히드클리프는 몸이 약했던 아내 프랜시스의 죽음이후 폐인이 된 힌들리를 도박으로 빈털털이로 만들어버린다. 알코올 중독으로 힌들리가 죽자, 그는 힌들리의 아들인 헤어턴에게 자신이 당한대로 앙갚음을 하여, 무식한 머슴으로 키운다. 새끼 뻐꾸기가 다른 새의 알들을 내치는 것처럼,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 머슴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애인을 뺏어간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해서 결혼한 뒤, 인권을 짓밟는다. 히드클리프와의 만남이후 결혼전부터 갖고 있던 정신착란이 심해져서 죽은 캐서린만 찾는 무관심과 학대를 견디지 못한 이사벨라는 런던으로 달아나서 아들을 낳는다. 한편 에드거는 죽은 아내가 남긴 외동딸 캐시를 곱게 키운다.
이야기 3
여동생이 병으로 죽자 에드거는 런던에 가서 조카를 몰래 데려오지만 12살의 철없는 꼬마 캐시의 말실수로 발각된다. 히드클리프가 아들을 데려갈 것이 분명하자, 에드거는 마지못해서 조카를 폭풍의 언덕에 데려다 준다. 까다롭고 버릇없는데다가 허약하기까지 한 아들이 마음에 들리 없었지만,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서린과 결혼시켜서 드러시크로스를 먹어치울 생각을 한다. 결국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시와 강제로 결혼시켜, 탐욕을 채운다. 딘은 셋방을 구해서 어릴적부터 모셔온 캐시 아가씨를 다시 모시고 싶어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이야기 4
1802년 친구의 초대를 받아서 가던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에 다시 온다. 전세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는데, 딘 아주머니는 히드클리프가 죽었다고 했다. 비가 몰아치는 날, 눈도 못 감고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어턴과 캐시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결혼을 앞두면서, 폭풍의 집과 드러시크로스저택의 불행한 역사는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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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2)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5)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다니엘디포우(Daniel Defoe)
(6) 파우스트 Faust / 괴테(Goethe)
(7)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8)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해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15) 크리스마스 선물 A Christmas Carol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4. 영한대역 칼라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 5권(각권 정가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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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나관중 / 20권 / 할인가 108,000원
6. 이솝우화 10권(오디오 CD 포함) : 할인 가격 3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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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위 도서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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