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27, 다시만난 마태목사
마태목사를 다시 만난 것은 30여년도 더 세월이 흐른 2004년의 12월 어느날, 부산의 지하철 1호선 전동차 안이었다. 강제납치 탈출사건의 바로 그 주인공이다. 당시 부산의 '초량12교회'는 일제때 지은 2층 짜리 낡은 목조건물이었는데 40평 정도 될까 말까한 좁은 대지에 협소한 마당이 조금 있었고 전형적인 왜식 건물의 아래층은 몇 개의 방과 조그만 마루, 부엌이 그대로 있었으며 다다미가 깔린 2층은 칸막이를 전부 철거하고 홀을 만들어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래층의 방 한칸을 차지하고 있던 마태목사는 2층에 성민(세칭 동방교에서 신도들을 부르는 명칭)들이 많이 운집해 건물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면 당장 2층으로 뛰어 올라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서 고함을 치곤 했다. ‘너거 이라다가 집 무너지믄 우짤라 카노오~’ 고함을 지르지만 그도 세칭 동방교의 목사인지라 신도들이 예배본다고 몰려 있는데야 어쩔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이 목조건물은 지은지가 오래됐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것 같았다. 많을때는 부산에 산재한 각 지교회에서 모인 100여명 가까운 인원이 다다미가 깔린 그 좁은 2층에 촘촘하게 앉아서 구슬픈 성가를 부르면서 연합집회를 열곤 했었다. 다분히 붕괴위험이 상존하고 있었다. 많은 인원이 모이면 2층에서는 모르지만 아래층에서는 계속해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위험한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사고는 없었다. 할아버지의 은혜(?)였던가. 그는 신이나면 바이올린을 목에 끼우고 연주를 하면서 계단으로 올라와 2층 홀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눈을 지긋이 감고 자신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선율에 스스로 도취되곤 했다. 언제 바이올린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의 애장품중의 하나였다. 이곳에 거주하면서 그는 대구에서 발행하는 어느 지방 일간지의 부산 주재기자를 겸하고 있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날, 이분을 우연히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만나게 되었다. 저쪽에서 부터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노신사 한분이 머리에 중절모를 쓰고 “예에수 믿읍시다. 예에수 믿고 복받고 천당갑시다”를 계속 외치면서 오고 있는데 웬지 낯이 익어 자세히 보니 반가운(?) 마태목사님이 아닌가, “아이구, 목사님, 이거 우짠 일이십니까” 하고 일어서서 인사를 하니 “아이구, 이게 누고오...” 하면서 그도 대번에 나를 알아본다. 그만큼 우리는 친숙한 사이였던가 보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손잡고 그를 이끌어 지하철을 내려 근처에 식당을 찾아 들어가 점심 한그릇을 대접하면서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 이야기는 할 겨를도 없었다. 원체 입담이 좋은 그였다. 나이가 들어 어느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세칭 동방교시절에는 자체적으로 부르는 호칭상 목사였을 뿐 기성 기독교 교단이 인정하는 목사는 아니었다) 졸업 후 목사안수를 받아 지금은 어느 기성 기독교 교단의 선교목사로 일하고 있다고 하면서 명함을 보여 주었다. 한 교회를 맡아 목회에 헌신할 계제는 못되고 그냥 떠 돈다는 이야기다.
신학교라는 곳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이 아닌 나도 누가 신학교를 나와 목사한다고 하면 한참 캐물어야 그의 근원을 알 수 있을만큼 신학교도 많고 교단도 많다. 예수교 장로회라고 하면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파(派)가 갈라지고 그 파(派)에서 또 파(派)가 갈라져 똑 같은 예수교 장로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니 일반 신도들은 복마전같은 그 내막을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게 되니 그저 돈내고 복받고 병낫게 해준다는 치병기복의 무지몽매한 하급종교 미신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세칭 동방교가 이런 복마전속에 안전하게 몸을 숨기고 재기를 노리며 세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 예배당 입구의 표식중에 두루마리에 십자가(얼핏보면 한반도 위에 십자가로 보임)를 새겨놓은 교회정도가 그나마 건전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일백 수십개가 넘는 총회와 교단이 있고 그들이 누구의 통제나 간섭도 없이 제각각 노는것이 개신교의 실태인지라 세칭 동방교도 그중의 하나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각 총회와 교단마다 어느 예배당 지하실 정도 한칸이나 혹은 어떤 건물 한칸을 빌려 보습학원 수준의 무슨 신학교입네 하고 신학생을 모집하여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학사관리를 할 만한 제도나 인력도 없는 수준이 수백개 신학교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아는 어떤 한 사람은 하도 내세울것이 없다보니 우리 신학교는 등록금이 부산대학교 하고 똑 같다는 소리를 자랑이라고 하면서 등록금이 대학수준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수준이니 부끄럽기 짝이없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교육부의 학사관리를 받아 대학 수준을 유지하는 신학대학은 겨우 십여개에 불과하다. 학문이랄것도 없는 졸강 수준의 수업을 한후 이들을 배출하여 목사안수를 주니 도대체 이나라의 수 만명 성직자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목사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한심할 따름이다. 개신교는 믿음과는 별개로 가톨릭의 목회제도와 신부양성제도를 배워야 한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부류도 그 수준은 오십보 백보다. 박사중에 엉터리 박사가 제일 많은 것이 신학박사라는 통계가 이를 웅변해 주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쉴새없이 계속 되었다. “한번은 말이야, 지하철에서 선교를 하는데...” 조금전 처럼 “예에수 믿읍시다. 예에수 믿고 복받고 천당갑시다”를 계속 외치고 다녔다는 이야기다. 누가 다리를 불쑥 내밀어 발을 걸더란다. 그래서 지하철 바닥에 그대로 넘어졌는데 항용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털털 털고 일어나면서 ‘복음 전하는 일에 이쯤이야...’ 생각하고 지나 갔는데, 몇 달 후에 다시 지하철에서 ‘예에수 믿읍시다. 예에수 믿고 복받고 천당갑시다’를 계속 외치면서 지나가는데 안면부지의 어떤 청년이 벌떡 일어서더니 “아아구 목사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하면서 손목을 잡고 사죄를 하더란다.
사연을 들어본즉 몇 달전에 ‘예에수 믿고...’ 하면서 지나갈 때 발을 걷어 바닥에 넘어지게 했던 그 청년인데 그때는 예수쟁이들 하는 꼬락서니가 아니꼬와서 일부러 그렇게 했는데 그후에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쳐서 고생을 했고 지금은 다 나았지만 그때 일을 회개하고 이제는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더란다.
또 계속되는 이야기 하나, ‘예에수 믿읍시다. 예에수 믿고 복받고 천당갑시다’를 지하철 1호선 6개 차량을 모두 다니며 외치고 다음 차량을 바꿔타기 위해 부산역에서 내려 후속 차량을 기다리는데 어떤 잘 생긴 중년의 남자 하나가 “아이고 목사님, 이제야 만났습니다. 내가 타면 목사님은 내리고 내가 내리면 목사님은 타버리고 해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는
두 손을 잡고 “잠간 말씀 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하면서 손목을 이끌고 지하철 밖으로 나와 부산역 광장에 나와 “아이고 목사님! . . . ” 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이 지하철에서 ‘예에수 믿읍시다. 예에수 믿고 복받고 천당갑시다’를 외치면서 지나갈 때 ‘지랄하고 자빠졌네, 할 일없으면 집에가서 밥이나 쳐먹고 낮잠이나 자지, 에이 예수쟁이들 꼬라지 보기 싫어서. . .’ 하고 욕을 퍼 부었는데 어쩌다가 잘못해서 팔을 부러뜨려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예배당에 다니는 마누라가 평소에는 그렇게 교회다니는것이 마땅찮아 두드려 패기도 하고 구박을 주었는데 그날따라 자기를 정성스레 간호하는 마누라가 그렇게도 착하게 보일 수 없더란다. 마누라가 ‘여보, 이제 교회 좀 나갑시다’ 하길래 ‘그래, 못나갈것도 없지, 기브스하고 바로 가자’ 했는데 교회에 가면서 마누라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여보, 사실은 내가 지하철에서 선교하는 어떤 목사님을 보고 하도 꼴보기 싫어 욕을 실컷 했는데 그후에 바로 팔을 다쳐서 벌을 받은것인가 보다’하고 말했더니 마누라 이야기가 ‘당장 가서 그 목사님을 찾아 용서를 빌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날 이렇게 목사님을 찾을려고 지하철을 헤메고 다녔는데 이렇게 오늘 여기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때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빕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목사는 말하기를 “형제여, 하나님께서 형제를 사랑하셔서 팔을 부숴뜨려서라도 예수를 영접하게 하셨으니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요”하면서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를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더란다.
“아멘, 할렐루야, 그리고 말이야...” 다시 계속되는 이야기, 지하철안을 소란하게 한다고 직원에게 붙잡혀 파출소에 끌려가게 되었는데 그때 파출소장과 지하철 직원과의 대화,
소장 : 어떤일로 데리고 왔어요?
직원 : 지하철내 소란행위 때문에 잡아 왔어요.
소장 : 무슨 소란행위를 했는데요?
직원 : ‘예에수 믿읍시다. 예에수믿고 복받고 천당갑시다’를 계속 외치고 다닙니다.
소장 : 큰 소리를 질러서 누구한테 신고가 들어왔어요?
직원 : 그 정도는 아니고요.
소장 : 그러면 이 사람이 그렇게 하면서 무슨 물건을 팔았어요?
직원 : 아니요.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사람을 처벌해 달라고 끌고 왔느냐고 오히려 지하철 직원이 된통 당하고, “... 그래서 그 지하철 직원이 얼굴이 벌개서 돌아갔다 아이가, 그라고 부터는 아무도 나를 지하철에서 제지하는 사람이 없지”하면서 무용담을 쏟아 놓았다. 그가 누구던가, 검찰청과 경찰서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기자 출신이 아닌가, 언감생심 파출소장 앞에서 주눅 들 그가 아니었다.
“지난번에는 말이야 . . . ” 또 계속되는 이야기.
목욕탕에 목욕 하러 가서 옷을 옷장에 집어놓고 알몸인체로 탕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서서 “여러분~!” 하면서 일단 고함을 쳐 놓고는 “나는 아무개 목사 올시다. 여러분! 육신의 때는 물로 씻을 수 있지만 영혼의 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씻을 수 있습니다. 예에수 믿읍시다. 예에수 믿고 복받고 천당갑시다”를 외쳤단다.
그러니 탕안에서 알몸인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서서 자기에게로 다가 오더니 “아이고오, 목사님, 나도 목사지만 이렇게는 못하는데 정말 대단 하십니다” 하면서 둘이 서로 알몸을 부둥켜 안고 감격했단다. 우 하 하 하 ! 세기의 명장면이었을듯 하다. 알몸을 서로 부둥켜 안고 감격을 나누었던 그분이 바로 내가 잘 아는 부산 대연동 산성교회 김형대목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보고 “자네도 신학교 가서 목사 안수받고 활동해야지, 하나님의 큰 일군이 이래 있어서 되겠나, 내가 잘 아는 신학교 교장한테 추천해 줄테니 지금 들어가면 1년학기가 거의 끝났으니 1년은 공짜로 먹고 몇 번 출석만 하면 되는 일이니 빨리 서두르게” 하면서 적극 권하고 있었다.
그날 이야기가 잘 진척되었으면 나는 하나님의 큰 일군으로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 안수를 받고 ‘예에수 믿읍시다. 예에수 믿고 복받고 천당갑시다’를 외치고 다닐 뻔 했다. 그의 와이셔츠 윗 주머니에서는 부산지방의 수많은 기관장들의 명함이 수두룩 했다. 이 사람은 누구고 또 이 사람은 어떻게 만났으며 자기가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만사가 형통이라..., 정말 굉장한 입담의 소유자요, 추억의 인물이었다.
그때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에 잡혀 들어가서 폭언과 린치, 생명의 위협으로 심판을 당하고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체 구사일생 탈출한 그 충격이 어찌 쉽게 사라졌으리요.
이런것을 의학에서는 PTSD,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정상인의 상식적 보편성을 깨뜨리는 독성있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교리와 심어진 공포가 오랜 세월 습관적으로 세뇌되어 깊이 잠재하고 있어서 웬만큼 세월이 흘러도 의식, 무의식적으로 공포와 두려움, 분노, 조울증, 자기과시, 과대망상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납치, 감금, 살해위협등 극심한 충격 때문이었던지 정신적으로 아직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잔존하고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