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라는 내면의 일원성 속으로 들어가라. 일원성 속의 나(眞我)는 다투거나 추구하지 않는 자유(自由)다.
내면에 '자아' 없음을 아는 사람, 내면의 '무'를 본 사람은 여여(如餘)해진다. 내면에 아무도 없음을 알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거기 아무도 없다면, 그대의 삶을 통제할 사람이 없다. 그대의 삶을 교묘히 조작할 사람이 없고, 훈련시킬 사람이 없다. 일체의 통제, 일체의 훈련, 일체의 조작은 사라진다. 그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 저 멀리에 있는 무엇이 아니다. 바로 지금 그대의 내면 깊숙이에 있는 것이다. 그대가 거기에 없는데 어떻게 그대의 삶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 모든 통제는 사라진다. 통제가 사라짐과 더불어 온갖 긴장도 사라진다. 통제와 더불어 모든 걱정이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자신을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살아간다.
인위적인 통제력은 얼마든지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 모든 통제력은 상대적이고, 일정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통제력을 지켜보라. 만일 거기 백만 원이 있다면 아마 훔치지 읺울 것이다. 하지만 일 억이 있다면, 그러면 약간 마음이 쏠릴 것이다. 그런데 십억이 있다면, 그러면, 그대는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생각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대는 꿈꾸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죄를 짓는다. 그대는 한번만, 딱 한번만 하고 싶을 것이다. 모든 통제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을 넘어서면 추락할 것이다. 아무도 완벽한 통제를 할 수 없다. 통제란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본질(本質)만이 완벽할 수 있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에너지(energy)와 투쟁(鬪爭)과 고투(苦鬪)가 있어야 지탱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는 동안에, 속에서는 거기에 반발하는 또 하나의 그대(ego)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통제하고 있갰는가? 통제는 항상 그대를 분열시킨다.
통제하는 사람과 통제받는 사람, 승자와 패자로, 패자는 자신의 때를 기다린다. 그들은 안에서 끝도 없이 으르렁 거리며 싸워댄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을 안다. 그대는 분노를 통제할 수 있는 순간이 있고, 그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어떤 때는 승자가 힘이 있고, 어떤 때는 패자가 힘이 있다. 투쟁은 계속되고 승리는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지쳐서 쉬고 있는 다른 쪽이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머물고 있으니 도무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 하나가 통제력을 지니고 있을 때면 항상 다른 쪽은 휴식을 취하며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통제함으로서 통제자는 힘을 잃는다. 통제한다는 것은 에너지를 잃고 있다는, 소진(燒盡)시키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조만간에 통제자는 약해지고 통제받던 쪽은 강력해진다. 이것은 계속된다. 이것은 수레바퀴이다. 선객(仙客)들은 동요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전연 다르다. 그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ego)가 부재(不在)하기 때문에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해해야 할 것은 그는 부재하므로 분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냥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선객은 자연적인 사람이다. 마치 새들이 노래하듯 선사는 말한다. 하지만 그의 삶은 숨은 동기가 없고 목적지가 없다. 온 생애를 통해 설법을 했던 선사들도 있고, 전혀 말하지 않았던 선사들도 있어왔다. 때로는 노랫말을 통해 노래하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으로 노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곳에 행위자(ego)는 없다. 무엇이 일어나든 그것은 자연 발생적이다. 이것이 붓다가 말하는 자유이다. 통제하거나 조정할 자가 없고, 모든 통제가 사라지면 자유가 태어난다. 자아로부터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다. 자아를 위한 자유는 거짓된 자유이다. 선(禪)은 자아로부터의 자유일 뿐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때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된다. 이것은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그는 다시 태어난다. 원은 완성된다. 그는 세상의 움직이는 방식을 보았고, 그것의 온갖 불행들을 보았다. 그는 지혜로워졌다. 이제는 어떤 욕망도 그를 실체로부터 떼어내어 끌고 다닐 수 없다. 그는 그냥 산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생활의 사소한 일들을 해 나가지만 그는 완전히 비인물이다. 그대가 자연스럽고 자발적이고 단순하게 되면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대는 고타마 붓다에게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 어떤 안내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대가 자연스럽다면 그 자연성으로 족하다. 그대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면 스승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진정한 스승은 단순히 그대를 그대의 궁극적인 자연성 속으로 던져 넣을 것이다. 그대에게 이것이 돼고 저것이 되어야 한다는 거창한 꿈들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저 이렇게 말하리라. 쉬어라, 내맡겨라, 그냥 존재하라, 무엇이 되지 말아라. "그대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이것은 붓다의 근본적인 가르침 가운대 하나이다.
그는 그대를 그대 자신에게 내던진다. 그대는 스승에게 매달리고 싶어할 테지만 그는 계속 그대를 되던진다. 진정한 스승은 그대가 매달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매달리지 않는 것이 성숙함이고 매달리는 것은 어린애 같은 짓이기 때문이다.
파지 않은 우물,
고이지 않은 물 위에 파문이 일고,
그림자도 형상도 없는 이가,
소일을 하네~,
그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 이것은 붓다의 계속되는 후렴구이다. 아무것도 일어난 바 없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희망속에 살고 희망을 통해서 산다. 마음은 계속 무언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일어난 바 없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물은 그대로이다.
그대는 그것을 부단히 상기해야 한다. 일체가 꿈이다. 돈을 추구 하느냐, 신을 추구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갑부가 되고 유명해지고 싶은가, 아니면 깨닫고 싶은가가 문제가 아니다. 일체가 꿈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된다는 것은 꿈이다. 있는 그대로의 그대를 보라. 자꾸만 이상형의 그대를 구하지 말라.
희망은 마음이 존속하는 비결이다. 마음은 희망을 통해 살고, 희망에서 영양분을 섭취한다. 일단 희멍하기를 그만두면, 일단 쉬면서 희망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면, 문득 그대는 진실을 자각한다. 그대 존재의 진실, 모든 존재의 진실을~, 그대는 자신이 기독교인, 불교인, 남자, 여자, 이것 저것이라는 생각들에 너무 빠져들었다.
그대는 너무 많은 신분들에 얽히게 되어, 자신이 다름아닌 순수한 하늘임을 보여주는 내면을 전연 들여다 보지 않는다. 거기엔 힌두교인도 없고, 기독교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흑인도 백인도 없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신분일 뿐이다. 그러한 것들은 마음속의 개념들일 뿐이다. 내면의 하늘을 생각해 보라.
내면의 하늘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것들은 일체가 구름이다. 모든 것은 마음속의 생각일 뿐이다. 너무 구름에 사로잡히지 말아라. 언제나 하늘을 기억하라. 파지 않은 우물, 고이지 않은 물 위에 파문이 일고, 그러함이 그대 인생이다. 그대의 꿈들을 자꾸자꾸 보지 못하였는가? 파문이 일고 있는 호수, 그리고 작은 배, 그대는 그 배 안에서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호수도 없고, 파문도 없고, 배도 여행자도 없다. 아침이면 그대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거기 호수도 없고, 물도 배도 아무것도 없다. 모두 사라졌다. 장자의 유명한 꿈을 상기시키겠다. 장자는 어느 날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제자를 한가운데 앉아서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제자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젯밤 나는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러자 그들이 말했다. "그건 대단한 문재가 아닙니다." "우리도 꿈꾸고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압니다." "그게 요지(要旨)가 아니야. 지금 문제는 이렇다. 지금 나비가 깊이 잠들어서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누가 옳으냐 - --"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장자가 실재냐, 아니면,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가 실재냐." "나는 누구인가", "그저 나비의 마음속에 있는 꿈은 아닌가?", "만일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될 수 있다면, 왜 나비라고 꿈속에서 장자가 될수 없겠느냐", 그러면 그대도 당황할 것이다. 아마도 장자가 옳았다고, 붓다의 대답은 둘 다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문제를 자각하게 된 자, 그만이 진실이다. 그는 둘 다 아니다. 장자도 아니고 나비도 아니다. 그 사람은 그러한 꿈들이 반영된 거울이다. 그러한 드라마들이 상영되는 스크린이다.
마음이라 해도
마음 같은 것은 없다
깨달음이라 하면
무엇을 깨닫는 다는 말인가?
지금 대단히 의미심장(意味深長)한 경문이 나온다. 지금까지 쭉 따라온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오쇼'는 세차게 한방 친다. 그는 말한다. 마음이라 해도, 마음 같은 것은 없다. 마음이란 꿈의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꿈꾸는 마음은 물질주의적인 마음이라 부르고, 깨달음을 꿈꾸는 마음은 영적인 마음이라 부른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꿈꾸고 있다. 마음은 꿈속에 산다. 그것은 저멀리 떨어진 멀리에 있는 것을 생각한다. 그것은 상상속에 살고 기억속에 산다. 둘 다 상상의 부분이다. 그것은 조금도 실체에 닿지 못한다. 마음에 있어 실체는 무리이다. 실체를 마주하고 조우하면 이슬 방울이 아침 햇살에 사라지듯이 마음은 용해되어 사라진다.
마음은 지금 여기로 아침 식사로 돌아올 때면 항시 돌연 증발해 버린다. 지금 한번 시도해 보라. 아침 식사를 할때는 그저 식사만 하고, 신이나 악마나 여자나 남자, 그리고 사랑과 오만 가지의 것들은 생각하지 말아라. 그저 아침 식사만 하라. 그냥 거기에 존재하라. 완전히 거기에 있어라. 여기 저기로 가지 말아라. 철저히 현존(現存)하라.
그러면 어디에 마음이 있는가? 그대는 마음을 찾지 못할 것이다. 마음은 결코 찾아지지 않는다. 진리를 본 사람들, 그들은 항상 거기에서 무심(無心)을 발견했다. 마음이라 해도 마음 같은 것은 없다. 깨달음이라 하면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그럼 의문이 생긴다. 만일 마음이 없다면 왜 깨달음을 말하는가? 마음이 없다면 깨달을 것도 없다.
깨달을 누군가가 없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심에 이르러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제 깨달음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마음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마음 같은 것은 존재하자 않는다는 그 사실울 보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문득 깨닫는다. 그때 그대는 거기에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여기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필요한 것도, 모자란 것도, 무엇을 구해야 할 필요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참나를 발견하시어 견성 성불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