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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니오.]
[그렇다면?]
[후후... 그들은 강하오. 그러나 우리들은 더욱 강하오. 그들이 응하지 않는다면... 응하게 하면 그 뿐이오.]
단엽은 말을 끝내자마자 빙후의 고의마저 벗겨 내렸다. 순간, 빙후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단엽의 시야에 들어왔다. 단엽은 내심 탄성을 내질렀다.
(대...대단하다. 백여 살이 넘은 이 여인의 나신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이것은 하나의 충격이다.)
어둠속에 실로 아름답게 솟아오른 나신. 어둠속이라고는 하나 살결은 뽀얀 우유빛. 탐스런 가슴, 연분홍빛 유실. 한줌 가냘픈 허리에 야릇한 기복으로 꿈틀거리는 복부.
(완벽하다!)
단엽은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는 정신없이 마의를 벗어 던지고 침상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단엽은 거칠게 여체를 다루어 나갔다. 빙후는 정신이 없었다.
(이 사람... 어딘가 이상하다... 전에는 이렇게 거칠지가 않았는데...)
당연히 이상하리라. 상대는 소수천마가 아닌 단엽이기에...
(이..분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그녀는 전에는 맛보지 못한 쾌감이 전신으로 만연되어 가자 몸을 떨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희열이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충격이었다. 불꽃.
단엽은 그녀를 완전히 불꽃으로 만들었다. 현란히 타오르는 불꽃으로... 그 빛은 천만 가닥으로 갈라지는 희열로 불타올랐고 그 빛은 그녀에게 절정의 열락을 맛보게 한다. 여기에 단엽의 달라진 행동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상대가 소수천마라고 믿을... 비록 그가 거칠기는 하였지만 그가 단엽의 변신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천엽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소수천마를 거칠게 하였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밤은 이렇게 깊어갔고... 빙후의 소수천마에 대한 사랑의 농도는 더욱 깊어졌다.
다음날 아침, 바로 이 시간부터 적사오혼의 불행은 시작이 되었다.
그들은 달라진 소수천마와 빙후의 태도에 처음에는 완강히 반항했지만 그러기에는 상대는 너무 강했다. 천마교 사상 최강의 무공이라는 천마삼절학 가운데 이절학을 연성한 두 사람. 그들을 무공으로써 상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동시에 맛봐야 했으니...
쏴아아...
바닷가,
[으으... 마...마동 죽는다.]
[으악!]
비명, 이 찢어지는 비명은 이미 백일 전부터 이렇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전신이 껍질이 벗겨진 채 암벽에 쑤셔박힌 두 사람. 그들은 바로 알몸의 흑
접과 마동이었다.
껍질 벗겨진 그들의 앙몸 위로 파도가 덮쳐들고 그때마다 그들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것이다. 저 멀리서 이들 두 사람을 보며 웃음을 피어 올리는 단엽.
[후후후. 받은 만큼만 주는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닌.]
[멍멍...]
개짓는 소리다. 나무인간. 사목. 그는 목젖이 찢어지도록 개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 소수천마의 큰 발이 사목의 이마에 내리꽂힌다. 소수천마는 물론 단엽의 변신이었다. 퍽! 사목은 죽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쪽으로 나뒹굴었다.
[사목! 잊었느냐! 개는 얻어맞을 때 어떤 소리를 낸다는 것을...]
단엽의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목은 깨갱~ 소리를 냈다. 역시 목젖이 찢어지도록... 단엽은 빙긋 웃었다.
[좋아. 그런데 개는 어떻게 실례를 하더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다. 사목은 한쪽 다리를 들고 개란 동물이 실례하는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것이었어.]
단엽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이마를 탁 쳤다. 이어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한데... 개가 암내를 낼 무렵... 짝을 부른느 소리가 있는데 말이야.]
[우우우....]
사목은 턱을 내밀고 네발로 바닥을 짚은후 하늘을 향해 구슬프게 울었다.
[맞아. 바로 그 소리였어. 정말 사목, 너는 훌륭하다. 불과 백일만에 이렇게 완벽한 개가 되다니... 후후후.]
[감사합니다. 주인.]
[핫하하...]
단엽은 크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 뒤로 사목의 목젖 찢겨져 나가는 괴성은 계속 들리고...
(후후... 받은 만큼만 돌려주는 것이다. 사목.)
지옥겁과 은사혼. 이들이라고 무사할리는 없다. 비틀비틀... 그들은 정신없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꺼억...취한다.]
[왜 이렇게 하늘이 빙빙 도는 것이냐.]
그 모습은 영락없이 술취한 취한들의 그것이었다. 단엽은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너희들은 분명히 취했다. 그렇지?]
단엽이 이렇게 묻자 지옥겁과 은사혼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만에 우리가 취하다니...]
[딱 한잔 했는데.. 취할리가...]
단엽은 크게 웃었다.
[크핫하하... 맞다. 취한 사람은 절대 취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제야 정확히 알 것 같군. 이제는 한 사람은 사내가 되고 한 사람은 계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례를 해야 한다. 알았는가?]
[아... 알았습니다.]
지옥겁과 은사혼은 정신없이 다시 허리춤을 풀었다. 그리고 지옥겁은 서서... 음사혼은 쭈그린 채로 실례를 하는데...
[소리가 없지 않은가?]
단엽이 미간을 찌푸리자 지옥겁과 은사혼은 기겁을 하며,
[쏴아아...]
[쉬이...]
무엇이 쏟아지는 소리를 입으로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광경은 실로 가관도 아니었다. 한 시대를 패주하고도 남음이 있는 가공할 능력을 지닌 두 사람, 그들이 엉덩이를 허옇게 내놓고서 차마 못보일 꼴을 보이고 있었으니 누가 이들을 지옥겁과 은사혼이라 보겠는가.
단엽은 그런 그들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들은 단엽의 충실한 종이 되었다. 화열지맥을 폭발하여 굳이 죽일 필요도 없이 나의 한마디에 목숨을 버릴 정도로...)
백일 만에 그렇게 되어 버린 일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죽일 이유는 없다. 비록 음모자들이 이들을 이용하려 한다지만... 그리하여 천마교의 부활을 노린다 하지만 내가 이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나는 이 적사도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변화였다. 처음 이 적사도에 왔을때만 해도 어떻게 하면 천마교의 부활을 노리는 음모자들보다 먼저 화열지맥을 폭파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 있던 단엽이었다. 그러나, 삼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음모자들의 출현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곳에서 죽는 것이 무의미해졌고 살아야 함이 훨씬 의미가 깊어졌기 때문이다.
(온다. 군협천주 철군무의 말대로 누군가가 천마교의 부활을 노리고 있다면... 그 누구인가는 반드시 이곳 적사도에 올 것이다. 그리하여 단엽이 중원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리라.)
단엽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적사도를 떠날 그 날을. 지금의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삼년의 세월은 그를 절대무적의 고수로 변신시켜놓았던 것이다. 천마교 사상 최강의 무공이라는 천마삼절학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고 불문의 최고 기학이라는 단엽천불수마저 완벽하게 연성했다. 이런 상태로 그가 적사육혼을 거느리고 중원에 나선다면 무림의 판도에 일대변화를 일으킬 수가 있을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천하를 단숨에 피바다로 몰아넣을 수도 있을 것이며, 반대로 단엽의 뜻에 따라 음모자들에게 칼을 겨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백일이 시간이 금시 지나갔다.
한데 돌연, 암벽에 박힌 채 비명을 질러대던 흑접과 마동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저것이 무엇이지?]
[배... 배다... 배가 나타났다.]
[지금 우리가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분명히 헛것을 본 것은 아니었다. 나타난 것은 철갑선. 실로 거대한 철갑선이 적사도를 휘감고 있는 소용돌이에도 끄떡치 않고 유유히 안개를 헤치며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그 철갑선은 차라리 하나의 섬처럼 거대했다. 마동은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비명은 결코 아닌 소리를.
[배가 나타났다. 배가 나타났다. 배가 나타났다.]
이 소리가 단엽과 빙후 등에게도 전해졌고...
단엽과 빙후는 철갑선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아연실색하고 마니.. 철갑선에는 놀랍게도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던 것이다. 마치 유령선처럼.. 빙후는 말했다. 이 배가 폭풍을 만났거나, 아니면 해적선을 만나 선원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을 것이라고.
나머지 적사오혼 역시 이 말에 동감했다. 그러나 단엽은 느끼고 있었다.
(이 배는 우연히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니다. 이 배의 모든 것은 적사도의 소용돌이에 견디도록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목적을 두고 이 철갑선을 만들었고 이곳에 보낸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단지 적사칠혼이 이 적사도를 떠나 중원으로 나오는 것. 그들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음은 스스로를 철저히 은폐하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군협천주 철군무가 말한 음모자들의 소행이 분명하다.)
단엽의 전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격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들어올 당신만 해도 그는 살아나가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한데, 살아나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 철갑선이라면 중원으로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환호성. 이로부터 적사도에 살아있는 괴인들은 삼일 동안이나 목청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러댔다.
- 우리가 중원으로 간다.
- 천하여... 기다려라. 우리 적사칠혼이 나간다.
그리고, 어느 날씨 좋은 날 철갑선은 적사칠혼을 태운 채 중원으로 향했다.
인간의 운명은 이래서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라 했던가. 소수천마, 그는 아마도 물귀신이 된 채 이 광경을 보며 가슴을 치고 있으리라.
쏴아아아...
끼룩끼룩... 바다는 평화롭기만 하다.
남통.
강소성에 위치한 물좋고 살기좋은 아담한 항구이다. 때는 황혼 무렵. 초하의 제법 신선한 해풍을 등에 지고 지금 수많은 선박들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위로는 갈매기가 날고 아래로는 어부들의 흥겨운 노랫가락이 흐르는 이곳, 한척의 철갑선이 수많은 선박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거대하다. 도대체 이런 거대한 선박이 이 땅에 존재했던가 싶을 정도로 거대하여 어부들은 단지 그 규모만을 보고서도 아예 질려버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눈이 달리지 않은 배라곤 하지만 배의 눈을 대신하는 선원들은 있기 마련이 아닌가.
한데 이 철갑선을 좀 보자면 크고 작은 배들로 만원을 이룬 부두에 그 거대한 몸집을 들이미는가 싶더니 한순간 수척의 배를 묵사발로 만들어 그대로 부두를 들이박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부두의 한쪽이 무너져 나감은 물론이고, 어부들 가운데 십여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순간, 어부들은 철갑선을 향해 분노성을 발하기 시작했고 철갑선에서 누구라도 하선하기만 하면 그대로 때려죽일 기세였다.
거친 그들의 기질이 이런 경우에 사정을 둘리 만무하다. 한데 다음 순간, 그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다.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부들의 그 근육질의 몸이.
(저...저게 인간들인가?)
(우우... 마치 지옥에서 도망쳐 나온 악신들 같지 않은가?)
(귀기... 무서운 귀기가 풍겨지고 있다.)
그들이 동시에 느끼고 있는 이런 공포. 그것은 철갑선의 선상을 보면서 비롯되고 있었다. 철갑선의 선상, 그곳에 나타나 있는 일곱 사람들. 일신에 걸친 옷은 거의 누더기와 같고 모두의 머리카락은 거의 발끝까지 끌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눈빛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그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정 냉혹한 것이었으며, 보는 이의 심장을 단숨에 얼려버릴 정도로 차갑기 그지없다.
표정은 도대체가 일점의 변화도 없다. 마치 굳어진 석고상처럼. 그리고 그들의 전신에서는 죽은 자의 몸에서나 풍겨지는 회색빛 냉기가 자욱한 안개처럼 뿜어져나고 있었으니...
산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고, 차라리 죽은 사람이라고 보는 편이 더욱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런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동공에 숨길 수 없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은 감회의 빛.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격정의 빛이었다. 칠인, 그들 중 한사람이 최초로 입을 열었다.
[이곳은 어디지? 분명히 청도는 아닌 것 같은데.]
또 한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봐 사목, 이게 어쩐 일이지? 목적지는 청도였는데, 왜 이런 엉뚱한 곳으로 온 것이냐?]
[글쎄... 나도 모르겠는걸 아마 폭풍을 만난 탓이겠지.]
[빌어먹을 어쩐지 한참 기어온다 했더니.]
[좌우지간 우리는 중원의 한쪽 끝에 도착한 것이야. 그게 중요한 것이야.]
[그래. 분명한 것은 이곳이 적사도가 아니라는 것이야. 크핫하하하하. 우리가 중원이라는 한 많은 땅덩어리에 도착한 것이란 말이다.]
광소. 그것은 최초에는 한 사람의 입에서 터져 나왔으나, 이내 일곱 사람이 함께 웃고 떠들고 있었다.
적사칠혼, 바로 이 비정하며 냉혹한 인간답지 않은 적사도의 마인들이었다.
[크핫하하... 이 얼마 만에 맛보는 육지의 냄새인가?]
[저 인간들을 보라. 저 싱싱한 인간들의 피내음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 크핫하하하.]
[크핫하하... 좋아. 아주 좋아. 이날을 위해 우리 적사칠혼은 참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 온 것이야.]
[크홋호호... 중원이여 너는 이제 새로운 적사칠혼의 모습을 보게 될지니... 너는 이제 우리의 아래 신음하고, 우리의 아래 피를 뿌릴지니... 돌려줄 것이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그 고통의 세월을 이 중원의 땅에 돌려 줄 것이다.]
어부들은 진저리를 쳤다. 물론, 그들은 무림인이 아니기에 적사칠혼의 말을 확실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 가운데 한 가지 말만은 알고 있었다. 적사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이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한 곳이며, 바람을 일으키고 하늘을 나는 신통한 재주가 있는 무림인이라는 세계의 악마들이 그곳에 감금된 채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한데, 저들 적사칠혼의 중얼거림은 분명히 적사를 말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적사도를 말한 이상 바로 그들이 전설처럼 흐르는 적사도의 악마들이라는 말인데...
[피해야 한다. 이곳을 피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으으... 저들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다. 우리를 다 죽일지도 모른다.]
어부들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이미 바지춤을 흥건히 적신 인물도 있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어이, 덩치, 너 거기서!]
한줄기 음산한 음성이 철갑선의 선상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지옥겁의 음성이었다. 인간의 감정이 일체 배제된 무심의 그 음성에 어부들의 발길은 그대로 굳어지고 만다. 떨리고 있었다. 그들의 사지가.
(주...죽었다.)
어부들은 이제야 절실히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진작 이곳을 떠나지 못했음을.
어쨌거나 그들의 시선은 공포를 담고 지옥겁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거의 동시에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요?]
[너 말이야. 키 큰 네놈 말이다.]
지옥겁은 턱짓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며 음산하게 웃었다. 그러자 부두에 늘어선 수십여 명의 어부들의 키가 믿을 수 없게도 작아지고 있지 않은가?
무릎을 굽히고 될 수 있으면 허리마저 구부려 키를 작게 보이려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저...저요.]
그리고 이렇게 물으니...
[이 개자식들이 누굴 놀리나? 너 말이다. 아까 목젖에 유난히 힘을 준 놈 말이다.]
지옥겁의 안색이 회색빛으로 변했고 적빛의 동공이 불길처럼 어부들에게 내리꽂힌다. 그러자, 어부들은 사색이 되었고 더욱 작은 소리로 말한다.
[저...저 말인가요?]
이 지경이 되자 지옥겁의 눈에 살기가 드리워짐은 당연했다. 번쩍... 그
의 신형이 그대로 허공을 날아 어부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 그렇게
느끼는 순간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퍽!
[아이쿠!]
지옥겁의 발길에 턱을 채인 한명의 거한이 짚단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주위의 어부들은 마치 썰물처럼 좌우로 뒷걸음질 쳤다. 거한, 어부들 중 가장 덩치가 크고 건장한 체구를 지닌 이십 여세 가량의 청년이었다. 한 점 군살없게 느껴지는 몸과 탄탄한 어깨와 등. 흡사 매끄러운 화강암을 깎아 다듬어 놓은 듯 균형잡힌 완벽한 체구였다. 키는 거의 구척에 달했으며 근육질의 몸은 노을 속에서 적용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장산, 이렇게 불리우는 순박한 어부였다. 성격이 활화산처럼 급하고 불의를 보고서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어부들 사이에서는 적지 않게 신망을 얻고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선천적인 신력을 지닌지라 감히 힘으로써 그를 상대할 어부가 없을 정도였다. 한데, 그런 그가 지옥겁 앞에서는 한줌 티끌처럼 무력해지고 만 것이니...
[흐흐흐... 아까 보니 네놈의 목소리가 제법 균형이 잡혔던데. 어디 다시 한번 지껄여 보시지.]
지옥겁은 장산의 앞으로 다가서며 음흉하게 웃었다. 장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상대의 발길이 자신을 향해 날아온다고 느낀 그 순간, 장산은 그것을 피하려 했으나 턱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고는 쓰러져 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처음이었다. 상어 한두마리 정도는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자신이 이렇게 무력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불길에 데인 듯 화끈거리는 턱을 매만지면서 그는 거의 발작적으로 치솟은 울화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개새끼... 죽여 버리겠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온 것인가. 기실 지옥겁의 발길은 가벼운 동작처럼 보였을지라도 그것은 거대한 바위를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무서운 위력을 함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인간이 맞았다면 백이면 백 죽음뿐이다.
한데 장산은 단지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힘이 난다는 듯 길길이 날뛰며 지옥겁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으니... 오히려 놀란 쪽은 지옥겁이었다.
[어라? 이놈이 그야말로 덩치 값을 하네 그려.]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비릿한 살기를 내비쳤다.
[흐흐... 죽기 전에 꽥 소리라도 질러보겠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흐흐... 암 죽여주지... 죽여주고말고.]
순간, 쾅!
[윽!]
장산은 상대의 몸에 미처 접근하기도 전에 거대한 반탄력을 느끼며 정신없이 밀려갔다. 그가 어찌 지옥겁의 상대가 될 수가 있겠는가. 그의 신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것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다는 정도이지 무림인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수십여 년의 세월 동안 무림인들의 체내에 축적된 내공을 신력만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흐흐... 아예 그 숨통까지도 끊어주마.]
지옥겁은 잔인하게 웃으며 가볍게 장산을 향해 일장을 뻗었다. 츠츠츠...
수십줄기의 불꽃이 그대로 가공하게 장산을 향해 폭출되어 가는 것이었다.
불의 인간 지옥겁. 이것은 단지 그의 작은 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
나 이 장력에 적중된다면 장산은 그대로 한줌의 재가 되야 할 판이었다. 어
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장산의 얼굴에도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데 이때다.
[지옥겁, 멈춰라.]
한 가닥 차가운 위엄이 담긴 음성이 소수천마, 즉 단엽의 입에서 떨어진 것이다.
지극히 나직한 음성. 그러나 지옥겁은 그대로 질겁을 하며 손을 거두는 것이었다. 동시에 장산을 향해 날아가던 가공할 만한 불꽃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 소수천마 즉 단엽의 일행은 모두 하선해 있었다. 지옥겁은 황망히 단엽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주인, 소인은 살인을 하려 한 것이 아니옵고 단지 겁만 주려 했을 뿐.]
[닥쳐라.]
단엽은 싸늘하게 지옥겁의 말을 잘랐다.
[내 누누이 네 놈에게 쓸데없는 살인을 삼가하라 일렀거늘. 너는 육지로 나오자마자 나의 명을 어겼다.]
지옥겁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이마엔 식은땀마저 방울방울 맺히고 있었다.
[주..주인...그게 아니라.. 저놈이 배값을 물어달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대기에...]
[그래서 죽이려 했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겁만 주려 했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쯧쯧...]
단엽은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듯 혀를 내둘렀다.
(피와 죽음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습성을 하루아침에 뜯어 고칠 수는 없겠지. 어쨌든 이들의 살인을 막고 나서야 할 이 단엽의 고생문도 훤한 것 같군.)
단엽은 내심 탄식하며 지옥겁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이번 한 번만은 용서하겠다. 그러나 다음 또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네놈은 내손에 죽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지옥겁은 그제서야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엽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는 장산을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지옥겁은 단엽의 표정을 잽싸게 살피고는 급히 말했다.
[주인... 이 몸이 저 사람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겠습니다. 모두가 이 몸의 잘못이라고. 그리고 나중에 부서진 배값을 지불하겠노라고.]
이렇게 말한 지옥겁은 단엽의 고개가 끄덕이자 장산을 부축해 일으켰다.
[정말 미안하게 됐네. 모두가 내 잘못이야. 용서할 수 있겠나?]
지옥겁은 억지웃음을 흘리며 사정했다.
한데, 장산의 귓전으로 오직 장산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은밀히 흘러들어오는 지옥겁의 이 음성은 또 무엇인가?
[이놈아, 어서 용서를 하겠다고 말해. 그렇지 않으면 너를 비롯한 이곳의
어부들은 오늘밤 안으로 모두 이 세상과는 하직인사를 올려야 할 것이다.]
순간 장산의 안색이 대변했다. 이어 그는 입가의 피를 쓱 훔치더니 지옥겁을 노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과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어. 배값이나 내놔!]
[돈?]
[돈으로 주든 배를 만들어주든 그것은 자유외다.]
[물론 주어야지. 암 주어야 하고말고. 한데 말이야. 지금은 돈이 없는데 어쩌지?]
[뭐?]
[가진 게 없다는 말이야. 여보게. 그러지 말고 말이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나. 외상으로 하는 것이.]
[외상? 이곳이 뭐 기루라도 되는 줄 착각하시고 있군.]
장산은 그럴 수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순간, 지옥겁의 은밀한 위협은 계속 되고 있었다.
- 야... 이 개자식아... 네놈의 한 마디에 어부들의 목숨이 모두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흐흐흐 입이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는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야. 어서 외상으로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어서! -
그러나 겉으로는 만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사정하고 또 사정한다.
[여보게... 가진 게 없는데 어쩌겠나. 노부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건데. 훗날 부서진 배값을 배로 지불할 것이니. 그렇게 하세나.]
- 흐흐흐. 분명히 말하겠다. 이쯤에서 양보를 못하면 모두가 죽는다. 어부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노부모와 자식과 아내까지도.-
(죽일 놈!)
장산은 이빨을 갈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완강하게 나갔던 그의 심정에도 서서히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지옥겁의 말이 단순한 위협만은 아니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적사도에서 나온 악마라면...
그는 그의 말대로 모두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장산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도 할 수는 있지만...]
[있지만?]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데 어찌 믿고...]
[못 믿어?]
- 이 자식아. 뭘 못 믿어. 그럼 네놈은 진짜 배값을 받아먹을 생각이었냐? 배값하고 네놈들의 수십 생명하고 바꾼 것이란 말이다. 이래도 이해를 못하겠어?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 것이야.-
장산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의 근육질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며 힐끔 어부들을 주시하는 시선엔 암담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찌됐건 자신의불 같은 성미를 꾹꾹 눌러 참아야 했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할 수 없군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크핫하하하.]
지옥겁은 그제서야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단엽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다시 굽혔다.
[주인... 이제 모든 것을 해결지었습니다. 배값은 나중에 지불하기로 타협을 보았으니 이만 떠나시지요.]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이로군.)
단엽은 이미 상황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옥겁을 한번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본 후 손짓으로 장산을 불렀다.
[배값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저 철갑선으로 대신하면 어떠하겠는가?]
[저 철갑선으로요?]
[안 되겠는가?]
[어찌 그럴리가... 저 정도의 배라면 이곳의 배를 모두 합친다 해도 살수
가 없는 것인데...]
[그럼 됐네. 우리가 가진 것은 저것뿐이니. 저것을 내놓겠네.]
[정말이십니까?]
장산의 순박한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올랐다. 어부들의 입에서도 일제히 함성이 터져 올랐다. 이에, 단엽을 제외한 나머지 적사육혼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변했어. 우리보다도 더욱 잔인하던 사람이...)
(오직 죽음과 피만을 그리워하던 사람이...이렇게 자비롭게 변하다니...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고생문은 아아... 그야말로 훤하도다.)
장산은 바빴다. 그는 정신없이 철갑선에 대한 것을 어부들에게 말한 후 멀어져 가는 단엽의 일행을 향해 달려갔다. 순간, 어부들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어이, 장산! 어디를 가는 것인가?]
[그들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남은 것인가?]
장산은 히죽 웃어 보였다.
[아니예요. 이제 나는 이곳을 영원히 떠나는 거에요.]
[뭐...뭐라고?]
어부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장산은 달려가며 외쳤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 사람이라니?]
[핫하하... 철갑선을 우리에게 넘겨준 사람말이예요.]
[그래서?]
[장산은 그 사람의 종이 될 거예요. 그는 장산의 짐작대로라면 영웅일 것이며... 영웅의 종이 되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거든요.]
[뭐...뭐...?]
어부들은 경악했다. 이들은 고개를 흔들며 외쳐댔다.
[장...장산! 그 사람은 영웅이 아니야. 적사도의 악마란 말이야. 악마..]
[제발...장산! 정시을 차려라. 어서 돌아오란 말이다.]
[모...두...들... 안... 녕...]
장산의 음성만이 여운처럼 길게 들려올 뿐 그의 모습은 이미 어부들의 시
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어부들은 아연실색했다.
[미쳤어. 그놈이.. 미친것이야.]
[오오... 바다의 신이시여... 그 불쌍한 놈을 보호하소서.]
아직도... 무림인들은 천마교주 적용사우가 대소림사의 대과헌에서 자결한 그 날의 희열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헌데... 헌데... 참으로 무서운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천마교주가 죽음을 당한 십팔 년 후,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믿어졌던 천마교의 부활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칠대뇌옥의 파괴. 어느 날 동시에 무림칠대뇌옥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파괴되고 수많은 무림칠대뇌옥의 죄인들이 그와 동시에 중원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무림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여 들었다.
군협천의 보호아래 십팔 년의 세월동안 평온을 누리던 무림이 발칵 뒤집힘은 당연했다. 여기에 오는 중양절, 천마교의 인물들은 천마교의 부활을 위한 천마대회합을 중원오대호 가운데 하나인 태호에서 갖는다 했으니 일은 마침내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인들은 알고 있었다. 천마교의 부활이 다시 이루어질 경우, 그 가공할 힘은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며 무림은 또다시 무서운 난세로 빠져들 것이라는 사실을.
무림칠대뇌옥, 이곳이 어떤 곳이던가. 기실 이곳이야말로 천마교의 모든 힘이 응축된 곳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곳을 뛰쳐나온 천마교도들의 힘은 천마교를 사상 최대의 힘으로 부활시킬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무림인들은 벌써부터 공포에 떨고 있었다. 피내음이 비릿하게 천하무림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바로 군협천의 건재였다.
군협천이 있는 이상 천마교의 부활은 잠시 잠깐의 난세를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위안. 분명히 군협천이 건재하고 있었고 여전히 정파의 하늘로써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군협천의 엄청난 내분을.
현재의 군협천은 예전의 군협천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에, 대소림사마저 백년 봉문을 선언하고 무림의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더욱 사태는 암담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런 와중에서도 무림인들이 화제로 삼고 있는 것은 천마교주에 대한 것이었다.
과연 태호의 천마대회합을 기점으로 천마교주는 누가 될 것인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이미 천마교주는 배정이 된 상태라는 사실을. 십팔 년 전 천마교주 적용사우가 죽음을 당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제 십팔대 천마교주가 이 땅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그것도 한명이 아닌 두 명씩이나.
<막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마대회합만큼은. 아아... 천마교의 이백년 축적된 힘이 무림칠대뇌옥에 있었나니, 무림칠대뇌옥에서 살아나온 자 정확히 사백사십사 인. 그들을 막지 못하면 무림은 끝이오. 그들을 막지 못해 천마교의 부활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군협천으로서는 이 난세를 어쩔 수가 없는 것이오. 본 군협천주 철군무의 이름으로 천하무림의 동도들에게 명하노니 죽음으로써 천마대회합을 저지하시오.>
명령서.
철저히 밀폐된 이 비밀명령서가 전달된다. 군협천의 일천 산하지부와 그리고 군협천 내의 모든 고수들에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군협천의 세력이 무서운 긴장을 안고... 이것은 전에도 후에도 없을 난세를 예고하는 풍운의 전주곡. 그러나 알아야 한다. 이미 군협천의 모든 명령서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조작되고 있음을.
그리고 그는 천마교의 부활을 목적으로 두고 있는 인물일 수도 있음을. 그래서, 그래서... 그 명령서가 죽음의 전달서와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 희미한 만월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노인이었다.
숱이 빠져 엉성하게 느껴지는 백발이 야윈 등을 가리고 발밑까지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나이를 짐작키 어려울 정도로 수백겹의 주름살로 뒤덮여 있었는데 쭈글쭈글한 주름살 속에 파묻혀 있는 두눈 그것은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동공처럼 맑고 깨끗하다. 노인의 이름은 사마헌. 그는 바로 군협천의 대장로였다.
[아...]
문득 그의 메마른 입술을 헤집고 터져나온 것은 한숨. 그 한숨에 담겨진 것은 또한 침잠된 절망감이다.
[어렵다. 아아... 천마교의 부활... 군협천의 내분... 이를 막을 아무런 방법이 없지 않은가? 또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소천주께서 무사히 이 군협동을 나오시는 것뿐이라...]
이미 은퇴해도 서너 번은 더 은퇴했어야 할 이 노인. 그의 지치고 고뇌에 찬 눈빛은 문득 전면의 거대한 석벽으로 향했다.
석벽은 병풍처럼 사마헌을 중심으로 반월형으로 두럴져 있었으며, 그 하단 하나의 석문이 있었다. 석문에는 깊이 패여진 몇 글자가 있었다.
<절대금역 군협동>
그러나 그 깊이 패여진 글자는 무수한 세월의 흐름을 말하는 듯 푸른 이끼가 자욱하게 덮여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곳에 글자가 있음도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이미 오래 전에 군협천 최대의 금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군협천주의 허락 없이는 누구의 출입도 금지된 곳, 일설에 의하면 저 군협동엔 군협삼대금학이 비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완성의 절학.
과거 천마교를 이 땅에서 영원히 척멸시키기 위해 무려 백여 년의 세월에 걸쳐 정사무공을 합일시켜 만들다 실패한 미완성의 삼대금학이 버려진 채로 저곳에 있다 했다. 또한 그 무공들은 인간이 익힐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익히면 마성에 젖기 쉽고 그리되면 그는 무림사에 일찌기 나타난 적이 없는 무서운 살인마로 전락된다 하였다. 한데 바로 이 금지된 무공을 삼년전 이 날 군협천의 소천주 철류향이 연성하러 들어갔던 것이다.
목적은 하나였다. 무서운 내분에 휩싸여 있는 군협천을 구하자는... 가히 살신성인의 의지를 지닌 채 스스로의 가녀린 몸을 저 군협동에 던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결코 길지만은 않은 삼년의 세월이 우리에겐 너무 길었나 보오이다.]
사마헌은 흔들리는 눈빛을 석문에 고정시킨 채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과 노부가 가장 중요히 여겼던 것은 군협천의 내분이었으나 이제는 내분이 문제가 아니라 무림칠대뇌옥의 파괴... 더불어 천마대회합...아아..
. 바로 천마교의 부활이 문제이오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군협천의 거의 모든 인물이 천마교의 부활을 막기 위해 이 군협천을 떠났다는데 있습니다.]
사마헌의 눈빛은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명이오이까? 소천주께서 주고가신 군협천주인은 노신의 가슴 속에 있는데... 그리고 군협천의 모든 명령서는 이 군협천주인에 의해 내려지는 것인데... 오오... 노신은 누구에게도... 군협천의 누구에게도 천마교의 부활을 막으라는 명을 내린 적이 없는데... 그들은 모두 떠난 것이오이다.]
우수수... 이 떨어지는 소리는 단지 낙엽이 지는 소리인가? 아니면 이 노옹의 가슴에 서린 절망이 떨어지는 소리인가?
[이제사 알게 된 것은... 우리 군협천의 모든 명령서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철저히 조작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신이 지니고 있는 군협천주인조차도... 헛허...]
웃음은 허탈했다. 그리고 그것은 울음보다 더한 절규였다.
[군협천의 내분... 대소림사의 백년봉문... 이제 사지로 뛰어든 군협천의
모든 형제들. 그 모두가 바로 명령서의 조작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니... 끝났소이다. 당신이 비록 절대의 무공을 지니고 나온신다 해도... 군협은 끝났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