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의 역사를 담다, 국립기상박물관 -
지난 7일 오후 1시, 서울시민대학(서울 종로구 송월길)은 조하만(전 기상청 차장) 이학 박사와 함께 조선시대 측우기와 우량 관측망에 대한 특별강연이 있었다. 조하만 박사는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기상 관측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으며 BC 34년 고구려에서 관측된 안개 기록을 위시해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상 관측을 보유하고 있다.”며 강의를 열었다.
고려시대는 서운관, 조선시대는 관상감을 두어 기상업무를 수행했다. 1441년에 발명된 측우기는 서양보다 200년이 앞선 것으로 선조들의 뛰어난 과학 기술을 입증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측우기 등장 이전에도 빗물이나 눈이 쌓인 깊이를 장·척·촌의 정량적 단위 측정기록이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총 44건이다. 조선 시대에 들면서 빗물이 땅에 스며든 깊이를 재어 우량을 측정하는 우택 관측법이 있었으며, 측우기 등장 직전에는 우택 관측을 전국적으로 시행했다.
우량 관측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과 끈질긴 노력은 측우기를 발명하는 초석이 되었다. 측우기가 고안되고 시험 관측이 이루어진 것은 1441년(세종 23년) 9월이며, 측우기의 규격과 관측 규정이 확립되고 전국적 관측망이 구성된 것은 1442년(세종 24년)이다. 측우기 등장 이전까지 우량 관측은 젖은 흙의 깊이나 강의 수위 측정에 의존했다. 1442년 측우 제도가 확립된 후에는 서울과 8도 감영 및 지방의 부·군·현 등 350소에서 측우기에 의한 우량 관측이 행해졌다.
세종조에 시작한 측우 사업은 임진왜란 등 국란으로 중단되었고, 약 180년 후 1770년(영조 48년)에 재건되었다. 영조는 세종조의 옛 제도에 따라 측우 제도를 재건하였으나 측우기 관측망은 대폭 축소하였다. 영조는 측우기 관측지점을 서울(창덕궁·경희궁)과 관상감, 8도 감영, 개성, 강화 등 14개소로 제한하고 지방의 부·군·현 등 기관에는 젖은 흙의 깊이를 쟁기 또는 호미로 리 또는 서의 단위로 우택 우량 관측을 제도화하였다.
측우기 관측지점은 수원, 광주를 비롯해 6개 지방에 추가되었고, 우택 관측 지점은 총 352소이며 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25소로 산악지대가 많은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우 관측소가 적지만, 경상도를 위시한 대부분의 지역이 상당히 조밀한 관측망을 보유했다. 조선시대 측우기에 의한 우량 관측 사업은 측우기 규격이 현대의 우량계에 손색이 없는 매우 과학적이라는 점에서 분(2mm) 단위까지 정밀하다.
현재 임진왜란 이전의 측우기 자료는 대부분 유실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영조가 측우 사업을 재건한 1770년 이후의 자료는 상당 부분 잘 보존되고, 특히 서울에서 관측된 측우기 자료는 대부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보존되어 있다.
조하만 강사는 “지방에서 관측된 측우기 자료는 상당 부분이 조선시대 지방에서 중앙정부에 보고한 문서를 영인 편찬한 기록물 각사등록(各司謄錄)에 담겨 있으며, 기상청과 (재)한국기상기후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복원 사업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측우기 창시와 전국적 우량 관축망 구축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조상들의 과학적 업적”이라고 했다.
이어서 학습자 30여 명은 국립기상박물관(서울 종로구 송월동)을 탐방했다. 국립기상박물관은 국가등록 문화제로 관상감 측우대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전시되어 있다. 최정희(기상연구원) 해설사는 한반도의 근현대사 기상기록 관측인은 조선총독부(1912년) 당시 모두 일본인이었다. 한국인 관측인이 없는 것은 기상 기록은 유사시 전쟁 자료로 필요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복원 기자
첫댓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측우기 창시와 전국적 우량 관측망 구축이
세계적으로 자랑할 정도라니 정말 우리 조상들이 존경스럽습니다.
한국기상기후 아카데미가 있군요~
가끔 올라가 보군 하는데~
우리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측우기가 밖에
있지만 가까이 못가게 되어 있어 눈요기만~~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