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분디자인 프라자:2014년 동대문지역은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다시한번 새롭게 태어났다. 반짝거리는 DDP의 외부는 45,133장의 알루미늄 패널로 덮였지만, 그 형태가 전부 달라 단 한 장도 똑같은게 없다. 상상을 초월하는 DDP의 외관은 거대한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어우러져 나란히 동대문 지역의 미래와 과거를 대변한다.
공간개요 : 5개 시설 15개 공간으로 구성, 지역상권과 연계 도심 창조산업 플랫폼 역할 지하 3층, 지상 4층 규모의 DDP는 알림터, 배움터, 살림터, 디자인장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5개 시설로 구성되어 총 15개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알림터는 디자인 창조산업의 신제품과 트렌드를 소개하는 공간, 배움터는 전시를 통해 지식을 전파하는 공간, 살림터는 다양한 최신 트렌드 상품을 접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알림터(Art Hall)는 창조적 생각과 비즈니스가 만나는 곳이다. 컨벤션, 신제품 발표회, 전시, 패션쇼, 콘서트, 공연, 시사회 등이 열리는 창조산업의 런칭패드 역할을 한다. 지하 2층에 위치하며, ▴알림1관(1,500석) ▴알림2관(1,000석) ▴국제회의장(200석)으로 구성된다.
배움터(Museum)는 한국의 디자인 창조원형과 세계의 최신 트렌드가 만나는 곳이다. 공간은 지하 2층~지상 4층에 걸쳐 ▴디자인놀이터 ▴디자인둘레길 ▴디자인박물관 ▴디자인전시관 ▴둘레길쉼터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터(Design Lab, 8,206㎡)는 민간 창의자원의 교류 및 인큐베이팅, 디자인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플랫폼이다. 국내외 신진디자이너들이 프로모션 등을 통해 제품을 전시・홍보하고 최신 디자인을 체험하며, 디자인 상품과 아이디어를 사고 팔 수 있는 마켓이 형성된다.
즐거운 한때 다조은
필자도 한장
옛 동대문야구장 조명
청계천:'개천(開川)'이라고도 함. 총길이 5.84km, 산책로 12.04km, 하루 물 소비량 120,000톤. 청계천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서울 도심으로 모인 물길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던 청계천은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시대부터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태종은 즉위 초인 1406~07년 청계천의 바닥을 넓히고 둑을 쌓는 등 처음으로 청계천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1411년(태종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거도감(開渠都監, 이듬해 개천도감으로 명칭 변경)을 설치하고, 다음 해부터 대대적으로 정비를 했으며 광통교·혜정교 등 돌다리를 만들었다.
'개천(開川)은 '내를 파낸다'는 뜻으로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청계천을 '개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441년(세종 23)에는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 눈금을 새긴 수표(水標)를 세워 개천의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했다. 1759년에는 영조가 준천을 관리하기 위해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정비를 했다.
'개천'이라는 이름이 '청계천'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이 시기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된 청계천은 1925년부터 '정비'라는 명목으로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즉 백운동천·옥류동천·사직동천 등이 복개되었고 1937년에는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 복개되었다. 1950년대 중반 전쟁이 끝난 후 청계천은 여전히 대표적인 낙후지역이었기 때문에 또다시 복개되기 시작했다.
1955년 광통교 상류 약 136m, 1958년 5월∼1961년 12월 광교에서 청계6가 동대문운동장까지, 1965년∼1967년 청계 6가에서부터 청계8가 신설동까지,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다. 또한 광교부터 마장동까지 총길이 5,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가 1967년 8월 15일 착공되어 1971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복개되어 정비된 청계천은 1960~70년대에는 근대화의 상징이 되기도 했으나 공구·의류 등 여러 가지 산업이 집중되면서 시설낙후, 공해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 도시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자연환경을 복원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며, 역사문화를 복원한다는 취지로 청계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청계천 복원 구간은 태평로 시점에서 신답철교까지이며, 공사는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2년 3개월에 걸쳐 약 3,900억원을 투입하여 진행되었다.
복원된 청계천은 과거와 달리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강변 자양취수장에서 물을 퍼올려 뚝도 청정지에서 여과시키고 청계천 아래에 묻힌 관로를 통해 올라오게 한 것이다. 청계천 복원과 함께 2004년 4월 개천의 양쪽에 2차로의 양안도로가 건설되었고,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22개의 다리가 건설되는 등 청계천 주변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동대문(흥인지문):대한민국의 보물 제1호. 서울 성곽의 동쪽에 있는 대문으로,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불린다. 2008년 숭례문이 불타 소실되면서, 도성 사대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축조된 원형을 지키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종로에 소재한다.
조선 초부터 창건하기 시작해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지대가 낮아 땅을 돋운 후 건설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보다도 오래 걸렸다고 한다. 축조 당시 성문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흥인(興仁)’이란 어진 마음을 북 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사상의 덕목인 ‘인(仁)’을 의미한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인문이 크게 손상되어 정비할 때에,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고 하여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 현판이 세 글자인 다른 도성의 사대문과 달리 네 글자 현판을 달게 되었다.
완성된 지 5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에 일부 보수작업이 진행되었고,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1868년(고종 5)에 1년 동안 전면적인 개수 공사를 진행해 1869(고종 6)에 완공되었다. 한편, 일본이 1934년에 본래의 이름인 흥인지문이 아닌, 동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하면서 동대문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흥인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성문으로 국보 제1호인 숭례문과 비교하면 전체 모습과 규모는 비슷하되 화려함에 비해 웅장한 느낌은 덜하다. 특이하게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문 밖에 반달모양의 옹성을 둘렀으며, 옹성 위에는 방어에 유리하게 여장을 쌓았다. 아래층의 모서리 4기둥이 그대로 위층의 바깥기둥이 되는 합리적인 구조이며, 장식이 많고 섬세한 다포계 공포(包)형식은 조선 후기의 조형을 보여준다.
서울의 풍수에서 볼 때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駱山)이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에 비해 빈약하다 하여, 이를 보강하기 위해 꾸불거리는 산맥의 모습을 한 '지(之)'라는 글자를 이름의 중간에 넣은 까닭에 다른 성문보다 1자(字)가 많은 4자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반달형의 옹성도 같은 이유로 문 밖에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 다포계 성문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동대문에서 단테
낙산쪽
옛 이대동대문병원을 헐고 복원한 성곽길 스크렁이 한창입니다
동대문을 뒤돌아보고
비가다시 주룩주룩
비내리는 동대문쪽
안단테 한장
낙산가는길
낙산: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양도성의 동산(東山)에 해당하여 서쪽의 인왕산(仁旺山)에 대치되는 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숲이 우거지고 깨끗한 수석과 약수터가 있어 산책로로 많이 이용되었으며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를 위시하여 유적이 많았다. 효종 때 왕의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거소인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 영조시대의 문인 이심원(李心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은 왕족·문인·가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또한, 산록에 있던 쌍계동(雙溪洞)은 암석이 기이하고 수림이 울창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으로 삼청·인왕·백운·청학과 더불어 도성내 5대명승지로 꼽혔다. 현재는 산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옛 자취를 찾기 어렵고 다만 산정에 남아 있는 성벽만이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산 북쪽에 있었던 홍화문(弘化門)은 없어졌으나 남쪽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 : 東大門)은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잠시휴식
창신동일대
동숭동일대
배롱나무
와룡공원쪽
성북동쪽
대학로
육회집의 육사시미
육사시미에 한잔
육사시미 1인분에 2만8천원
노래방에서
신나게 놀고있습니다.
광장시장:1904년 7월 14일 개장했으며, 그해 11월에 시장관리를 위해 광장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부터 '광장시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1970년 12월 종로6가 맞은편에 기존의 동대문시장보다 훨씬 큰 규모로 개설된 동대문종합시장과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인근에 생긴 평화시장까지 아울러 동대문시장이라 한다.
동대문시장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혼수품 전문상가가 있으며, 3개동 건물에 약 2,391개의 점포와 신관 쇼핑타운에 345개의 점포가 있다.
동대문시장은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에 있는 한국의 대표적 시장으로서 최대 규모의 종합시장이며,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둘째, 도매를 주로 하고 있어서 백화점이나 일반 소매시장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으며, 셋째, 어물전·건어물·포목·야채 등 일반 백화점에서 대규모로 취급하기 힘든 품목들을 다양하게 취급하고 있고, 넷째, 거래망이 전국적인 규모이기 때문에 지방 상인들과의 거래가 활발하다.
모든 경제활동이 위축되었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체제에서는 고객이 30% 이상 줄어 케이블TV 홈쇼핑업체를 통한 판매를 모색하기도 했다. 1998년 거평 프레야, 밀리오레, 1999년 두산타워 등 대형 쇼핑 매장이 들어섬으로써 동대문 시장은 기존 재래시장의 이미지를 벗어나 패션 전문 시장으로 변신했으며 일본·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의 명소로 이름이 높아졌다.
2000년 서울특별시는 을지로5가에 서울패션디자인센터를 개관하고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을 국제적인 패션 메카로 만들기 위한 지원을 하고 있다.
청계천 비가와서 통제를 했네요
흥인지문을 배경으로 한장
오랜만에 걷는 서울 둘레길 맛잇는음식도 먹으면서 좋은사람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네요.끝.
첫댓글 서울 참 매력있는 도시라는 거 다시 한번 더 크게 느꼈집니다
비는 운치있게 뿌리고,
좋은 이들과 함께라서 즐거움은 배가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