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서사 / 임영주
저녁모임이 있어서 바쁘게 약속장소로 가는 중이었다. 뒤에서 내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낯선 남자다. “왜요, 접니다” 했더니 아무 말 없이 스쳐갔다. 그 사람이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저만큼 앞서가고 있는 여성이었다.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영주’는 흔한 이름이다. 학교 다닐 때 같은 반에도 있었고 직장이나 동아리, 아내의 친구 등 여러 곳에 있었다. 대부분 여성들이 많다. ‘영주’라고 부르면 어감도 좋고 부드럽지만 한자 ‘영주(永柱)’를 살펴보면 무게감이 있다고 한다.
20대 중반의 일이다. 뜻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비슷한 이름도 많아 개명을 하고 싶은 마음에 작명소를 찾았다. 그 동기는 고등학교 때 우연히 공원 나무그늘 아래서 사주, 작명, 궁합 을 보는 노인을 만나고부터이다. 학생이니 공짜로 이름 풀이를 해주겠다기에 심심풀이로 이름을 적었더니 음양오행설을 들먹이면서 진지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학생, 타고난 머리는 괜찮으나 젊어서 어려움이 많겠네. 인생행로가 순탄하지 않아. 건강도 위기를 맞을 수 있네.” 하면서 언제든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다고 했다. 공원을 빠져나오면서 괜히 물어본 실없는 행동에 헛웃음을 짓고는 이내 그 사실을 잊었다.
직장생활을 처음 할 때이다. 새로운 일에 의욕을 갖고 창의적으로 도전하면 왠일인지 동료들로부터 심하게 견제당했고, 하찮은 일로 음해를 받아 억울한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 수양도 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때는 외국에 취업 이민을 하려고 자격증을 따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서류 제출부터 인터뷰까지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정부에서 기술자격증소지자 해외유출방지를 한다고 취업 이민의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하는 일마다 뒤틀리고 직장생활도 어려움이 많아지자 옛날 공원에서 만난 그 노인이 떠올랐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소문난 작명가를 찾아갔다. 차례가 되어 그분과 마주 앉자 “인간은 사주팔자를 타고 나지만 사주팔자도 후천적으로 변화되며 개명도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암울한 현실에 실낱같은 희망이 보여 가슴이 떨렸다. 먼저 이름 풀이를 해야 한다기에 한자와 한글 이름을 적어 보였다.
“타고난 바탕은 나무랄 데 없구만. 초년 풍파가 많아. 중년에도 어렵기는 하지만 건강이 문제야. 젊어 고생하고 중년 잘 지내면 잘 풀리겠어.” 설명을 듣고 보니 공원에서 들었던 노인의 말씀과 비슷하다. “한글 이름은 어떤지요?” 했더니 “크게 성공할 수 있네. 음양오행의 조화가 한글 이름에는 잘 조합되어 있어. 신체 건강도 한글 이름이 많이 돕겠군.” 찬찬히 듣고 보니 한자와 한글 이름 풀이가 완전 달랐다. 그렇다면 한글 이름을 많이 사용하면 되겠다 싶어 개명은 뒤로 미루고 밖으로 나왔다, 그 이후 이름에 관해서는 달리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나니 한결 기분이 가벼웠다.
이름에 관해서는 나뿐만 아니라 어머님도 아내도 불만이 많았다. 우리 가족 중에 같은 이름이 둘 있다. 성이 다른 어머니와 아내 이름이 ‘말순’이다.
어머니 이름을 지은 연유는 외할머니께서 딸 셋을 연이어 낳자 손주를 원하는 시어머니의 구박이 심했다고 한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와 상의하여 아들 낳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말순’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름 덕분인지 어머님 아래로 사내아이 셋을 연달아 낳았다고 무척 사랑을 받으셨단다. 하지만 어머님은 ‘말순’으로 부르는 게 싫어 ‘순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던 옛적 이야기를 하면서 함박웃음을 지은 일이 떠오른다.
반면 아내는 7남매의 막내이다. 장모님은 큰 며느리를 보고 낳은 딸이니 이제는 막내딸이 되어야 하고, 명도 길고 순둥이가 되도록 이름을 ‘말순’으로 지었다고 한다. 부모의 뜻대로 막내가 되어 순둥이로 잘 자랐으니 역시 이름 덕이라고 처가에서는 환영일색이다. 하지만 아내는 이름 때문에 놀림과 웃음거리가 되는 것 같다며 결혼 후에도 개명을 추진했었다. 요즘에는 개명이 쉽게 되지만 2,30년 전 만해도 절차가 복잡해서 쉽지 않았다. 아내는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름 덕분에 이 만큼이나마 살고 있는 것 같으니 개명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것 같다고 한다.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결혼식 청첩장에서부터 결혼식장까지 혼주와 신부가 이름이 같아 착오 아닌가 하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시어머니 모시고 며느리가 의료보험증 들고 병원 가면 간호사 선생님이 ‘말순’ 씨를 몇 번 부르면 누굴 부르는지 웃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말순’ 씨 두 사람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각기 이름 지은 목적은 달랐으나 같은 이름으로 한 집에서 20여 년을 화목하게 함께 지냈다.
이름은 먼저 쓰기와 부르기, 듣기가 좋아야 하고 음양오행에 맞으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 2남 1녀의 이름은 내가 지었다. 나름대로 음양오행의 기본을 맞추고 사전과 옥편을 찾아서 지은 이름으로 한 글자이다. 성과 이름이 단 두 자여서 읽기, 쓰기, 발음도 쉬워 잘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할 때면 친구들 모두 이름이 두 자인데 자기만 한 자여서 놀림을 받는다고 울먹였다.
우선 이름자가 한 자인 위인들을 찾았다, 문인으로 이황, 이이, 조식, 김구 선생과 윤관, 최영 장군 등을 열거하면서 설득하여 위기를 넘겼다. 지금은 아이들도 모두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독창적이면서 부르기도 쓰기도 좋은 이름을 지어줘서 나에게 항상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젊은 시절 작명가의 이름 풀이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일정 부분 맞는 것 같다, 지난 세월, 생활의 어려움도 극복했고 건강의 위기도 잘 넘겼으며 이럭저럭 칠순을 넘긴 지도 꽤 된다. 나를 살게 한 이름. 그 이름은 지금도 변함없는 임영주(林永柱)이다.
첫댓글 ㅎㅎ 이름이 독특해 놀림감이 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그들로 하여금 오랜 세월 기억할 수 있기에 먼 훗날 추억 여행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요즘 유튜브 등 자신을 잘 알리(띄우)려면 평범한 이름보단 엉뚱하고 튀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분들이 많음을 볼 때 흔한 이름보단 개성이 담긴 이름이 좋은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