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민주항쟁기념토론회
|토론회 일정|
구분 |
일정 |
구분 |
주제 / 방법 |
발표자 / 진행자 |
1부 |
13:30 |
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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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종률_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3:35 |
인사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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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이사장 | |
13:40 |
기조강연 |
민주화운동의 반성과 과제 |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 |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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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토론 |
의견교환 및 참여자 자유 토론 |
허인회 녹색드림협동조합 조직이사 정현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 |
진행: 오세제_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 ||||
2부 |
15:20 |
주제발표 |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
16:00 |
토론 |
전문가집중토론 |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이상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영위원장 | |
진행: 오세제_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 ||||
16:40 |
의견정리 |
의견그룹 별 분임토론 |
진행: 정완숙_DEMOS * 자료집 55p 참조 | |
18:00 |
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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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기조강연 드높은 이상, 성숙한 민주주의 .................................................. 1
: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1부 토론 진보의 혁신, 민주화운동의 성찰과 전략................................. 5
: 허인회 녹색드림협동조합 조직이사
시민사회운동은 지금 당장, 현실 문제 해결 능력을
요구받고 있다 ..................................................................................... 11
: 정현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주제발표 6·10항쟁 26년,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 15
: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 대표
2부 토론 민주주의는 ‘시장’의 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 45
: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6·10 민주항쟁의 현재적 의미와 계승 방안 ........................... 49
: 이상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영위원장
|기조강연|
드높은 이상, 성숙한 민주주의
- 6․10민주항쟁 26돌을 맞으며 -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경건함과 자부심 그리고 깊은 고뇌와 결단으로 26년 전의 저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6월 민주항쟁, 민주주의 축제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경건함과 자부심은 민주주의 제단에 신명을 받치신 민주열사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떨쳐 일어난 수백만 국민의 함성을 가슴에 품고 있어서입니다. 고뇌와 결단은 우리의 위기, 심화되는 위기, 복합 위기, 전면적 위기, 대위기에 대한 자각이며,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문명창조에 대한 끊임없는 전진과 노력을 다짐하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합니까?
대한민국 공동체가 추구하는 이상은 무엇이며, 우리 국민들이 함께 이루려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 가치, 제도, 내용, 생동력이 굳건하게 지켜지고 새롭게 진보하고 있습니까?
나 스스로는 어떻습니까?
이 모든 것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성실한 응답과 창조적인 실천이 6․10민주항쟁 26돌을 모시는 우리 모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은 대위기입니다. 위기는 여러 가지 현상과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위기이며 우리만이 겪는 위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심, 편견, 어떤 사유체계, 학문방법, 신앙, 심지어 현재와 미래에 대한 낙관이나 비관 같은 일체의 것을 내려놓고 현실과 역사, 개체생명과 지구생명에 대한 겸손과 직관으로 봐야만 하는 대위기인 것 같습니다.
경제위기, 정치위기, 남북한의 대결위기!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도 가난과 억압,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반 성취한 저력과 활력과 창조력을 발휘한 용감하고 부지런한 국민이기에 이런 위기는 반드시 극복할 것입니다.
정작 두려운 것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는 물신숭배, 사치, 타락, 생각 안하고 떼 지어 따라다니기, 많이 쓰고 버리기, 일 안하고 편하게 살기, 편 가르기, 남 탓하기, 허세 부리기, 생명 경시… 등 온갖 탐욕과 무지가 문명과 교육의 이름으로 혼재하고 심지어는 부추겨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사회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퇴행과 추락의 위기”가 아닌가하고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재벌의 탐욕과 정치권의 무능에 깊이 있는 비판과 대안이 있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돈과 권력을 쫓는 상당수 법조계·학계·종교계·언론계의 모습에는 커다란 경종이 필요합니다.
400만 대학생들의 대부분이 등록금에 시달리고 있고, 취업에만 매달려 높은 이상과 용기를 잃은 현실, 700만 초·중·고 청소년들이 입시에만 내몰리며, 끊임없이 단순정보, 오락 소비자로 전락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 쇠퇴기의 적나라한 모습이며 바로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입니다.
제일 경각심을 가져야 할 위기는 뭐니 뭐니 해도 “생명의 위기”, “지구생명의 위기”입니다. 탐욕스러운 자본의 끊임없는 집적, 축적, 독과점 체제는 지상·지하·해상·해저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대량생산, 소비, 폐기하는 거대문명이 서로 작용하며 지구생명은 고열에 시달리며 계속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런 복합위기, 전면적 위기, 생명의 위기, 대 위기는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문명으로 대전환하려는 결단 없이는 한 치라도 개선될 수 없습니다.
남북한의 평화와 통일, 자본독점과 차단을 극복한 공존과 순환의 사회구조, 생명파괴와 죽임의 거대문명을 넘어선 생명복원과 살림의 새로운 문명, 곧 생명의 문명은 우리에게 “성숙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이제 정치적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선 경제 민주주의를 포함한 전면적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 깊이 의논하는 숙의 민주주의, 곧 성숙한 민주주의를 대담하게 실천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대위기의 우리사회와 지구촌은 이제 “인간사회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바탕위에서, 지구의 뭇 생명과 함께 살아갈 “생명사회의 민주주의”를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민주주주의 깃발에는 생명·평화·통일·자치·협동의 5태극이 진하게 그려질 것입니다.
대위기를 극복하는 대전환의 희망찬 새로운 6월의 결단과 행진을 다짐합니다.
고맙습니다.
2013. 6. 1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정성헌 올림
|1부 토론_1|
진보의 혁신
- 민주화운동의 성찰과 전략 -
허인회_녹색드림협동조합 조직이사
<한줌도 안 되는 진보로 전락한 현실>
2012년 대선 당시 여의도를 중심으로 민주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한나라당, 안철수 세력 등의 정당 관계자, 국회 보좌진, 지자체 보좌진, 기타 정치예비군 등에 몰린 과거 학생 노동 운동 경력자의 수가 3,000명 이상을 상회한 반면에 현재 노동, 시민사회 등 각종 운동의 전국적 상근자 수는 1,000여 명에 불과하다. 근로대중조직의 실력 없이 기성 제도 정당의 무능과 배신적 행위들을 비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러 논객들이 주장하는 유럽식 사회복지 국가이든, 미국식 민주당 빅텐트 정치 이론이든, 최장집교수 등의 서민중심 정당론이든, 직접민주주의 운동이든 이를 실현할 정치의 조직적 기초가 취약한 현실 상황에서 제도 정치 중심 담론은 현장 역량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 현장 노동 조직의 붕괴
2010년 현재 한국은 총노동자 1,700만 명 중 930만이 비정규직으로 56%에 이른다. 정규직 노동자 중에서도 조합가입률은 9.8%로 164만 명밖에 안 되고, 전국 4,420개 등록 노조 중 ‘교원조직’이 18.9%와 ‘공무원’이 58%로 합 77%이다. 조직 노동자 중 삶의 형편이 조금 나은 대기업 노조와 공기업 노조를 제외하면 '고단한 삶을 개혁할 필요를 느끼는 노동자들’의 조직율은 전체 근로자의 ‘2%'도 안 되는 상황이다. 실제로 현재 민주노총은 이름의 진보성과 달리 정규직 중산층 노조 중심의 운동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의 주 조직원은 교사조직인 전교조, 공무원노조, 대기업 고액 연봉자 중심의 금속노련 등 소득상위 30%(월 454만원-3인 가구 세전기준)이상이 절대 다수이다. 이러니 최근 언론에 보도된 5월 양재동에서 벌어진 금속노련 정규직 시위 현장에서 비정규직이 투쟁 중 끌려 나가도 모른 채 하는 상황이 나타나기도 한다. IMF 이전에 직장을 구한 정규직은 블루칼라나 화이트칼라나 소득의 큰 차이가 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 조건을 공고히 하기 위해 비정규직의 등장을 막지 않은 원죄가 있으며,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수준을 넘어 용인하는 행태도 나타나고 있다(기아자동차 등 정규직 세습 노조가 합의). 이와 같은 조직 기초의 약체화는 민노총 조직의 대량 분열(대선시기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7개 후보 및 정파활동) 및 지도부 장기 부재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한계와 오류- 행세적 이벤트 및 기자회견 전문 조직!
지난 20여 년간 합법적 자금과 운동 인력이 민중 운동권으로부터 대거 이전 집중되어 시민운동 시대를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갈수록 협소해지는 중산층 정서(제도 언론으로 공고화되는)에만 의존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사회 변혁의 신념과 대중 실천 조직을 만들지 못하고 있어 한마디로 시민 없는 시민 조직이 되었다.
활동가들은 작지만 안정적인 월급을 받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변화만 모색 하고 향후 ‘소수 지도부’의 정계진출이 모델이 되어 왔다. 지속적인 신념 가치 체계의 학습 부재로 20~30대 과로한 활동 이후에는 생계 문제 등으로 운동 포기. 대중 투쟁의 경우 대중 동력의 자발적 형성 이후 동참하기도 한다. 광우병 촛불 시위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쁘띠부르주아 조직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대안을 내오기보다는 현실에서 고칠 점들을 아기자기하게 수리하는데 자기만족적 행태를 노정하고 있다.
예) 성미산 마을 공동체, 공동육아, 생활협동조합 형태를 만들어 중산층
유기농 식품 전달 창구로만 사용
* 자발적 시민행동 - 노사모, 춧불, 국민의 명령 경험
노사모, 광우병-FTA-언론 촛불, 야권통합 국민의 명령 등은 매번 각 각 20만 이상의 자발적 시민들의 참여와 대규모의 자금을 모아왔다.
고 노무현대통령의 “원칙과 상식”에 기반을 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 이상의 관(觀)을 재생산 하지 못한 채 '노무현은 무조건 옳다, 여론은 무조건 옳다’등 의 한계를 보여 왔다. 80년대 지도부 중심 하향식 운동에 대한 반발로 자발적 참여를 중요시하나 10만이 모였다가도 그 다음날 흩어지면 그만이고 조직적 성과로 남지 않았다. 유시민, 명계남, 문성근 씨 등의 정치활동 과정은 사실상 조직적 토론 결정 없이 개인과 친한 소그룹 판단에 의존해 진행되었고 결과적으로 어마어마했던 조직도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조직을 유지 발전시킬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토론 학습 조직의 부재도 주요 실패 요인이다.
* 학교 내 학생운동 조직은 사실상 붕괴됐다. 일부대학 통합진보당 학생
위원회, PD써클 정도가 겨우 생존하고 있다.
결혼도 할 수 없고 취직도 할 수 없는 비정규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학점, 스펙 관리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학생들의 현실이다. 혹여 진보적 아젠다에 관심이 있더라도 시민운동의 자원봉사로 머물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의 집요한 노력으로 역사와 현대사에 대한 인식 매우 부족하다.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지 않거나 왜곡된 역사를 교과서에 넣고자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생들은 왜곡된 인터넷(일베) 등을 통해 역사를 배우고 있다. 학생운동을 고쳐서 쓸 생각을 포기하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 할 때이다. 학내 협동조합, 정당 조직의 학생 견인 등의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
<진보의 대안 - 새로운 대중운동 공간으로 하방하자! 가치 학습조직을 재건하자!>
* 운동 구 지도력의 혁신 - 노동, 농민, 빈민 등 기본 계급 운동을 중심으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직업(변호사, 노무사, 조합 경영 컨설턴트 등 등)을 매개로 우선 그들의 생활 지역과 공간으로 내려가는 것이 기본이다.
* 환경, 교육, 문화 조직-기본적인 생활의 틀이 준비 된 정규직에겐 생활환경, 교육 등이 주요 의제로 부각 되고 있다. 각자의 실정에 맞추어 조직화가 절실하다. 환경과 생태를 매개체로 조직화를 시도해야 한다. 종국에는 근본적 구조 변화 없인 생태계를 살릴 수 없다는 결의를 내오겠다는 전망을 가져야 한다.
* 사회적 협동 경제- 협동조합형 인간으로의 가치형성이 중요
국가와 지배층과 정규직이 비정규직 양산에 동의하는 체제 밑에서 비정규직으로 편입해 그 중 몇몇이 정규직화 되는 구조에 들어가면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협동조합법의 개정 등으로 '지역 노동대중 조직화'의 법적 토대 마련되었다.
협동조합, 지역 자활 조직들은 초기 조직 구성원들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학습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근대 협동조합의 효시 영국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사례와 스페인 몬드라곤 노동자 협동조합 등의 성공사례에서 보이듯 초기 그룹의 사전 합의 및 사상적 틀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는 기술 실무적 교육과 접근이 중심이 되고 있어 앞날이 매우 우려되고 있다. 이는 협동 조합형 인간으로의 가치 의식 전환 구조가 부재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이기적 경제조직에 머무르고 말게 된다. 가치 형성교육에 세밀하며 전력투구하는 교육 체험 체계가 없는 조합 활동은 진보, 사회변화와 무관하며 운동역량의 소모만 가져와 기존 시민운동과 마찬가지로 진보에 역행하는 결과 초래가 예상된다.
* 생활 현장의 서민들에 대한 홍보, 교육, 상담의 새로운 물적, 기술적
토대마련 필요하다.
최근 대선 결과 등으로 회자된 '서민의 계급 배반 투표'는 서민 의식의 변화로 초래된 측면도 있겠지만 과거 수많은 '운동권'이 서민들의 삶의 현장에 유인물과 구전홍보로 누비던 시대가 사라진 후 언론 자본의 무차별한 일방적공세가 가득 찬 데에도 기인한다. 실생활에서 인터넷 소셜미디어 접근이 어려운 서민들에게는 자본언론의 대안인 서민 설득 구조의 붕괴 및 부재가 초래 되었고 소셜미디어 공간의 여론과는 동 떨어진 행동이 펼쳐지고 있다. (뱅뱅 이론).
이를 극복하기위한 지역 단위 민중들의 민원, 복지 상담, 직업 교육, 조직센터 절실하다. 지자체 등과 협력하여 합법적 커뮤니티 공간을 형성, 진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 386 운동권의 기득권화- 빅텐트론, 복지정책론 등의 허구를 벗어나야 한다.
특히 386 정치인들은 25년 전 민중운동에 헌신했던 초심을 돌아볼 때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 후 국회에서 다수가 되어 국가보안법 폐지까지 당론으로 호소했으나 지금은 누구도 사상의 자유를 말하지 않고 있다(통진당 의원 국회 윤리위제소). 본인들은 당, 정부 등에서 정규직 형태를 유지하면서 후진 양성도 외면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90학번 이하로는 386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하는 후진이 없다. 통합진보당은 90학번 이후 학생운동권이 집중하고 있으나 국민 일반 정서와는 동떨어진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탄압당하는 상을 연출하려고 하나 실제로는 국민들로부터 그냥 외면을 받고 있을 뿐이다.
유럽의 복지 국가는 오래고 강력한 ‘계급 계층조직’에 기초하고 있고, 미국 민주당 빅텐트론 구조도 역시 수많은 ‘풀뿌리 이익단체들’에 기초하고 있다. 조직기초 없는 복지국가, 빅텐트론은 허구이다. 기층민중조직의 강화와 정당 구조로의 연결에 힘써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자신이 속한 정당 조직 안에 노동위원회, 농민위원회, 정규직위원회, 빈민자활조직위원회, 자영업자위원회, 철거민위원회, 해고자위원회, 생태환경위원회, 접경군사지역 주민위원회, 남북경협사업자위원회, 협동조합위원회 등 다양한 삶의 요구를 담는 조직을 중심으로 세워야 한다.
진보 안의 낡은 것과 허구와 결별해야 한다. 과거의 훌륭했던 원칙과 방법론을 새롭게 돌아보며, 새로운 환경에 맞는 운동방법을 개발하는 법고창신의 정신을 실천하자. 나는 민주인사들이 여의도로 가려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이 갈 수 있는 삶의 현장으로 우선 내려가고 그곳에서 조직된 힘으로 정당구조와 연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미 민중들의 현장 조직이 무력화되어 있고, 민중들은 정치를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여의도에서의 조직 활동이 얼마만한 효과가 있겠는가?
민주주의자들은 지역과 부문으로 즉시 하방하자! 자신과 만나는 구체적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지속적으로 귀 기울이며, 함께 학습하고, 함께 체험하며 공동체를 만들어가자. 이것이 진보혁신의 첫걸음이다.
|1부 토론_2|
시민사회운동은 지금 당장,
현실 문제 해결 능력을 요구받고 있다
정현곤_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1. 사회화하고 있는 권력관계, ‘갑을’ 사회
6월 항쟁 기념일은 늘 민주주의의 구현을 지표로 삼는다. 그리고 그 의미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다르게 포착된다. 항쟁 25년이었던 지난해에는 ‘6월의 완성, 99%의 승리’를 구호로 걸고 부제로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적었다. 당시의 구호에는 사회적 양극화와 차별을 넘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많은 이들이 ‘1:99 사회’라 탄식했던 사회분위기의 반영이다. 그 때 개혁의 방향은 국가의 공공성 회복이었다.
항쟁 26년을 맞는 올해라면, 단연 ‘갑을사회’라는 표현이 첫 손에 꼽힐 것이다. 사회 속에서의 일상적 ‘갑을 관계’를 하나의 권력체계로 표현하고 있는 이 말에 지금 우리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 반영일까, 6.10항쟁 기념일을 맞아 ‘이제는 경제민주화, ’을‘들의 항쟁이다’라는 제하의 행사가 개최되었다.
‘갑을 사회’의 의미가 무서운 것은 국가권력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관계에서조차 바로 그 민주항쟁의 대상이던 권력의 포악한 모습이 전면적으로 발현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실제 원-하청 관계에서 드러나는 인간관계의 억압은 첨예한 인권 침해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건 분명 민주주의가 직면한 중대한 도전과제라 할 수 있다.
2. ‘추상적 공공성’보다는 ‘구체적 시민’을 대변하자
시민사회운동이 어떤 사회적 존재여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이처럼 그를 둘러싼 사회 현실에 영향 받는다. 그것은 26년 전에 민주화운동이 처한 위치와 동일하다. 헌정 질서를 문란케 하는 군사 쿠테타를 도발하고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이, 장기집권을 음모하면서 내건 ‘호헌’에 맞서야만 했던 것이 그의 존재가치였던 것과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명암의 단면이 뚜렷한 가운데 어두운 면이 점차로 확대되는 사회로 바뀌고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노동에서의 차별에 기초해 있다.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준비가 미비한 가운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으로의 전환이 급격히 이루어졌고, 이로부터 삶의 피페화가 더 깊게 진행 중이다. 이렇게 밀려난 사람들이 자영업으로 대거 투입되면서 이 시장도 지금 전쟁 중이다. 숱한 폐업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불평등은 예비 사회인의 생활터전인 학교도 짓누른다. 학교는 지금 좌절한 청소년의 한숨에 넘쳐난다. 그 외에도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은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기술될 수 있다. 이처럼 고도성장의 이면에서 더욱 불공정하고 불평등해진 삶을 살아내며 한국의 시민들은 간절히 지원자, 대변인을 원한다.
지금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바로 이런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강력한 지원요청을 받고 있다.
여기서 국가의 공공성 회복은 이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는 필요한 접근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국가의 공공성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의 구체적 현실이다. 그 현실에 대한 관심과 그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구체적 시민들에 대한 애정이야말로 공공성을 실현해 낼 수 있는 요체다. 바로 시민사회운동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공공성 실현은 지금 간단치 않다. 이유는 보수정권의 장기화에 따라 이런 방향의 제도화와 국가의 공적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해 왔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공적 국가 기능의 사유화’가 두드러졌다. 그런 결과가 지금 사회에 지천이다. 밀양 송전탑 건설 문제가 7년을 끌어 오면서도 쉽게 해결이 되지 않고, 제주강정의 해군기지 건설문제도 아직까지도 민-관 대화의 형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부당하게 해고된 쌍용 노동자의 복직 문제가 경영자의 탐욕 속에서 이렇게 길게 끌고 있는 것이다.
공공성 자체는 추상적이다. 공공성이 발현되어야 할 구체적 시민이 존재한다. 이 시민과 밀착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바로 시민사회운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3. 시민들은 “해결책을 내 놔라” 한다. 뛰고, 또 공부하자.
현실은 늘 구체적이지만 또 현실은 늘 팍팍하다. 특히 사회적 강자들이 양보하지 않을 때, 문제해결은 쉽지 않다. 따라서 분배의 강제를 통한 공평함을 추진하되 생산의 의미를 배가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대안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구체적 시민’을 말했다. 그것은 달리 말해 ‘현장성’이다. 그러나 현장성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해결책을 찾자면 좀 더 나가야 한다. 물론 특정의 해결책이 이해관계자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해관계는 늘 상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결책이란 모두가 보기에 마땅하다고 느낄 수 있는 해결 가능성에의 접근이다. 이것은 공부를 해야 나온다. 다른 나라, 다른 지역, 다른 경험의 사례를 찾아 비교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현장을 뛰는데도 바쁘고 시간 없는데, 언제 공부하고 언제 연구하란 말인가? 그래도 해야 한다. 시간을 쪼개 공부해야 한다. 다만 시민사회활동가 한 몸 속에 그 모든 것을 다 갖추려고 할 필요는 없다. 시민사회활동가가 전문가나 연구자와 다른 것은 자원동원 기획을 한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연구자나 전문가는 자신의 연구능력만을 운영하면 되지만 시민사회활동가는 이런 능력들을 동원해 내는 기획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원동원에 있어 필요한 것이 역시 전문성이자. 한 가지 더 있다면 그건 개방성이다. 타자의 지혜를 모우자면 그 지혜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전문성이 없이는 어떤 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개방성이 없다면 지혜의 다양성을 만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뛰면서 또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4. 시민주권의 시대에 걸 맞는 리더십을 위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민사회운동에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 ‘정답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둘러보라. 지금은 그야말로 시민의 시대다. 권리의식을 가진 수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삶에서 나오는 전문적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사회에 자신을 내 보이는 시대다. 그것은 소통체계에서, 동원 매카니즘에서, 심지어 담론생산에서조차 그러하다. 개인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것을 탈 중심화라 칭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시민운동은 후(後)지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시민사회운동이 시민들과 비교해서 어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지 반문하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시대의 다른 측면은 정보의 과잉이며 무분별함이다. ‘보여주기’, ‘신상털기’가 이런 면을 지적하는 말이다.
시민사회운동은 권리의식을 가진 자유로운 시민의 긍정적 동력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가치 지향의 공론화가 가능해진다. 이들 시민들에게 느끼게 해 줄 신뢰, 그것이 소통체계, 동원체계, 담론 생산 과정에서 시민사회운동의 역할을 만들어 준다. 뭘까? 역시 전문성과 개방성이다. 이 두 키워드는 앞에서도 나왔지만 여기서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다만 시민과의 전면화된 관계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자원동원의 의미를 넘어선다는 점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소통능력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5. 시민사회운동 스스로의 미래를 사회의 미래와 밀착시키자
‘헌신, 봉사’ 이 두 단어는 시민사회운동을 표현하는 긍정적 언어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의 얼굴은 어둡다. 박봉에, 과로에,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다. 이래서는 앞에서 말한 사회적 과제, 존재가치를 실현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것이 필요하다. 시민사회운동의 미래가 우리 사회의 미래와 더 밀착되어 있다는 확신 말이다.
실제 그렇다. 시민사회운동의 미래는 우리 사회의 미래와 늘 맞닿아 왔다. 다만 그 무게가 힘들고 고달팠을 뿐이다.
한국 사회의 미래는 소수의 특권과 다수의 소외계층으로 구성되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모두가 부자가 되는 사회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모두가 가난한 사회도 아닐 것이다. 아마도 삶의 다양한 조건을 인정하면서 스스로의 삶에서 만족을 구하는 그런 사회가 될 것이다. 수천 개의 직업이 있는 이 사회에서 살면서, 자식들에게 단지 10개의 직업만을 구하라 말하는 그런 사회는 아니게 될 것이다. 모든 이가 자신의 직업 하나하나에 보람을 느끼는 그런 사회일 것이다. 이런 삶의 풍성함을 만들어가는 데 시민사회운동은 제격이다. 시민사회운동의 삶 자체가 이런 다양한 직업군의 풍성함속에서 더 생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마을 만들기와 같은 시민사회의 기획들은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주제발표|
6·10항쟁 26년,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정승일_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 목 차 이제 가치관과 세계관을 논하자 어떤 가치관, 어떤 세계관의 경제민주화인가? 어떤 가치관, 어떤 세계관의 복지국가인가? |
이제 가치관과 세계관을 논하자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가?
대통령 선거의 패배와 야당에 대한 전반적 실망, 그리고 제반 진보정당 및 민주노총의 몰락으로 나타나듯이 한국의 진보 세력 내지 민주화 세력은 현재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이 위기는 매우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향했던 정신적 지향성과 가치관, 세계관, 즉 한마디로 신념 체계 그 자체가 붕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가치란 가장 소중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세력이 지난 수십 년간 가장 소중하게 여겨온 가치는 독재에 대한 저항 즉 민주주의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과연 민주주의가 그 자체 가장 소중한 가치이며 가장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 2007년 말의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가장 많이 이야기된 화두가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말이었다. 이것처럼 두고두고 우리가 곰씹어야할 말이 없다. 이 말은 민주주의보다 더 중요하고 높은 가치이자 더 궁극적인 목표는 국민들의 밥 즉 생계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이며 민주주의는 그러한 가치·목표에 복무하는 수단 또는 도구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를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민주주의와 함께 금과옥조처럼 소중히 여겨져 온 또 다른 가치인 자주와 통일 역시 비슷하다. 민족자주, 민족통일은 식민지 경험과 남북분단의 역사 속에서 고통받아온 우리 민족 전체에게 매우 소중한 과제였고 따라서 자주와 통일은 매우 소중한 가치, 목표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의문은 곧바로 “자주가 밥 먹여주냐?”, “통일이 밥 먹여주냐?”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실제 남북대화, 남북통일에 열심이었던 김대중 정부 치하에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서민들의 생계는 악화되었으며 청년들의 3포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민족자주 차원에서 전시작전권 환수가 결정된 노무현 정부 치하에서도 서민들의 밥 먹고 사는 문제는 더 힘들어졌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놓고 당시 진보적 식자들은 “밥먹고사니즘”이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 인권 등보다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비아냥거렸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 등의 주체는 개인이 아닌 집단이다. 즉 민족 또는 민주공화국으로 결집된 집단으로서의 국민이다. 이에 반해 “밥 먹고 살기 힘들어” 허우적거리는 이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생활인들, 즉 서민들 개인과 그 가족들이다. 그런데 집단으로서의 민족 또는 국민 전체에서 개인과 개성, 인격, 그리고 밥 먹고 사는 생활문제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확연하게 나타나는 사실이 있다. 즉 개인들 간의 생활수준 격차가 매우 심하고 더구나 민주화 이후 격차가 더 크게 벌어졌다는 점이다.
더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과거의 386 또는 7080 세대에 비하여 요즘의 20대와 30대는 매우 개인주의적이다. 그들은 집단보다 개성을 중시하며, 정치보다는 문화에, 민주주의보다는 스펙쌓기에 더욱 관심이 많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인생 가치관에는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 등은 별로 끼어들 여지가 없으며, 그들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각자 자신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라는 개인적 관심사들로 가득 차있다.
민주주의와 자주, 평등, 통일 같은 집단주의적 가치를 소중히 여겨온 전통적인 민주화 세력 또는 진보세력의 관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요즘 청년 세대의 개인 중시, 개성 중시는 이기주의로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과연 개인의 개성과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와 입장을 이기주의로, 개인주의로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민족과 민주공화국은 그 자체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만약 민족과 민주공화국의 이름으로 대다수 개인의 자유와 개성, 행복이 유린된다면, 그런 민족, 그런 민주공화국은 거부되어야 한다. 만약 민족자주와 통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다수 개인들이 가난과 궁핍으로 떨어진다면 그런 민족자주, 그런 민주주의는 거부되어 마땅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보다 더 소중한 가치, 더 궁극적인 가치라고 생각한다.
개인과 개성, 그리고 자유주의
그런데 자유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궁극적인 가치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세계관이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는 1987년 6.10항쟁과 함께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의 보수, 진보 양 진영 모두의 사고방식 속에 맹렬하게 침투하였다. 더구나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의 세계관은 이삼십 대 청년들의 생활방식, 사고방식에도 잘 부합한 까닭에,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의 담론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과 개성, 그리고 자유주의 화두의 등장과 담론 지배에 대한 한국의 민주화 세력의 대응은 참으로 무기력하고 소극적이었다. 어느새 개혁적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한국의 진보적 담론과 사상적 토론 지형을 지배하게 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그 정당들은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개혁적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들은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 등의 가치를 개혁적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보다 상위의 가치 체계 내에 포함되는 일종의 하위 가치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듯 자유주의적 세계관과 그 담론이 민주 또는 진보 세력 내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그것에 대립해온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등 여타의 세계관들은 뒤로 밀려나게 된다. 게다가 1990년대 중후반 이래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의 현대판 버전인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자유주의는 부동의 우월적 지위를 지난 20년간 누렸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자유주의의 세계관에는 개인과 개성은 있되 사회와 국가, 민족 등은 없다. 아니면 한참 뒷전으로 밀려난다. 극단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화신인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이 말했듯이,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언까지 나온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개인의 이기성과 이기적인 행동마저 윤리적으로 권장한다. 왜냐하면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강력한 자동기계 메커니즘이 자유 시장(free market)에는 탑재되어 있는 까닭에, 이기적 행동의 총화가 자동적으로 이타적 사회성으로 승화된다고 자유주의자들은 믿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이자 시장주의다. 자유주의의 힘이 세질수록 이기주의와 시장주의의 역할은 최대화되고, 국가와 사회, 민족공동체와 민주공화국의 역할은 최소화된다. 그것은 보수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이건, 아니면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이건 마찬가지이다.
사회와 민족, 국가란 없다 - 자본과 시장이 있을 뿐
그런데 과연 인간의 자유가, 즉 개개인의 개성과 인격의 발전이, 과연 사회 및 국가와 무관하게, 따라서 민주주의와 민족(자주, 통일의 가치를 포함한)의 발전과 무관하게 진행될 수 있을까? 더구나 자유주의가 말하듯 인간의 자유, 개성의 발전이 사회공동체와 국가( 민족)와 같은 집단성의 역할을 축소해야만 가능할까? 따라서,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 같은 기존의 진보적 가치(집단성의 가치)의 역할을 축소해야만 개성과 자유, 자아실현과 같은 새로운 가치(개인성의 가치)의 발전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개인의 개성과 자유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 존재한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 자유주의가 말하듯이 - 개인과 사회 간의 대립, 개성과 집단성의 대립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개인과 개성의 발전을 억누르는 그런 사회성, 그런 집단성이 실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개인과 타자간의 사회적 관계는 기본적으로 ‘시장’의 관계, ‘자본’의 관계이다. 시장(market)이 사회(society)를 대체한다. 그리고 그 시장은 그냥 시장이 아닌 자본주의적 시장이고, 따라서 자본(capital)이 사회(society)를 대체한다. 마르크스는 개인은 총체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간파했는데, 그렇지만 동시에 그 총체적 사회적 관계의 정점에는 자본과 시장이, 즉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군림하고 있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골방에 처박힌 개인주의적 고립성을 떨치고 나와 알바를 뛰어야 하고, 어렵게 취직하더라도 야근과 특근을 밥 먹듯이 해야 겨우 먹고 사는 현실에 허덕이는 것이 오늘날 주변에서 보는 대다수 개인들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과 사회, 개인과 국가(민족), 개인과 집단 간의 대립을 중시하면서 사회-국가-민족-집단성보다는 개인성과 개성을, 이타성보다는 이기성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추상적인 일반론적 사회-국가-민족-집단성이란 픽션일 뿐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국가-민족-집단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자본주의에서, 국가(민주주의를 포함한)와 민족(민족자주와 민족통일을 포함한), 그리고 그 집단성 역시 그 내용과 실체에 있어 자본주의에 의해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유주의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대다수 개개인의 개성 있고 자유로운 삶을 매일 매순간 억누르는 현실의 집단적(사회시스템적) 실체인 자본과 시장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
자유와 개성을 억누르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적 실체이며, 그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 자본주의가 아닌 –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 경제 시스템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해온,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이것은, 5천만 국민들 중 대다수 개인들의 삶을 압도적 힘으로 짓누르면서 그들의 실질적 자유와 개성을 억누르는 현실적 실체로서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대해,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서의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와 자주/통일 등의 중요성을(따라서 그 가치를) 말하는 것은 대다수 개인의 힘든 생계의 관점에 볼 때 공허하게 들린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고액 등록금에 허덕이면서 최저임금 알바 찾기와 스펙쌓기, 취업준비, 월세 자취방/하숙집 구하기에 끙끙 매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등록금 인하와 최저임금 인상, 공립기숙사 대량 신축과 같은 복지국가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채, 5.18정신과 6.10항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다. 그런 민주항쟁 기념식은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민주화+진보 세력 전체가 처한 정신적 위기의 본질은 민주주의와 자주/통일, 평등 등의 기존 가치들을 껍데기로 만들어 형해화(形骸化)시키며 국민 개개인들의 생활과 생계를 힘들게 하는 압도적인 현실적 파워로서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해온 다양한 형태의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침묵하거나 비판하지 않은데 있다.
개성과 자유 –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앞서 말했듯이, 나는 민주주의와 자주/통일보다 더욱 소중하고 궁극적인 가치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 인간의 자유, 개성과 자아실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진보 세력의 가치관에서 그 동안 완전히 배제되어온 ‘자유’를 이제는 진보의 궁극적 가치로,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생활인의 관점과 같다. 이제는 민주주의와 자주/통일을 넘어, 대다수 국민들을 (단지 밥 먹고 사는 수준을 넘어) 잘 먹고 잘사는 그런 세상, 자신의 개성과 잠재력을 마음껏 발전시킬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free society)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가치, 목적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와 개성, 인격이 만발하는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하에서는 불가능하다.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법률적, 형식적·절차적일 뿐이다. 생활인들이 직면하는 생활의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유란 사유재산권 및 시장 영업 활동의 자유를 의미하며, 그 평등이란 오직 재산이 있는 자들의 사유재산권 행사와 경쟁적 시장 참여기회의 평등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활현실에서 자유와 평등은 서로 대립되어 나타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낳는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자유롭고 부유한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를 나누며, 그 결과 ‘평등 없는 자유’를 낳기 때문이다. 대다수 생활인들이 직면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평등 없는 자유, 대다수 개인에 있어 실질적 부자유와 실질적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형식적, 절차적 자유·평등을 넘어 ‘실질적 자유’와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여야 한다.
실질적 자유란 개개의 생활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인간적 잠재력을 그 어떤 경제사회적 이유로 제한받지 않고 구현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실질적 평등이란 형식적인 기회 균등을 넘어 삶을 향유함에 있어 실질적인 경제사회적 평등을 뜻한다. 예컨대 모든 개개인이 적절한 주택과 함께 좋은 교육 기회를 가지며, 병에 걸렸을 때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고, 또한 노후에도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하는 생활 유지가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안전한 노동 환경에서 적절한 시간 동안 노동할 수 있는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때의 자유란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러한 실질적 자유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개개인의 삶의 자유, 실질적 자유의 구현을 가로막는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경제적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2. 어떤 가치관, 어떤 세계관의 경제민주화인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
최장집 교수는 지난 5월 10일 한국 사회학회에서 발표한 「경제민주화에 대한 소고 - 그동안 논의되지 않는 것들을 중심으로」라는 글에서 “그동안 한국 정치에서 정당 간 경쟁과 갈등은 민주-반민주 같은 대립구도에서 나타나듯이 관념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이념 내지 가치를 중심으로 한 진영 간 대립의 형태를 띠었다”면서, “그렇지만 서구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좌우 구분의 일반적 기준이 되는 것은 사회경제 문제에 대한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 그것을 표현하는 이념이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경제민주화가 총선·대선의 중심이슈로 떠올랐다는 것은 한국 정치에서 큰 의미를 갖는 전환적 사건이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2013년 5월9일자 신문기사 인용)
그는 또한 “민주주의의 본질적 관심사는 얼마나 많은 경제적·사회적 평등을 창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는 민주주의가 실제로 무엇을 성취했는가를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거울이자 정치민주화의 핵심 요소다”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 체제의 기반으로서 경제 체제를 끊임없이 민주화하려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도 지적했다.
최장집 교수의 이러한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문제는 민주냐 반민주냐가 아니라, 자본주의냐 경제민주주의냐이다. 그런데 모두가 다 알 듯이, 경제민주주의가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묻게 되면, 백인백색의 답변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최장집 교수는 연이어 말하기를
“지금 경제민주화의 정의는 광범위하게 열려 있다. 여당과 야당, 보수파와 진보파 누구도 아직 분명히 정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선거가 거듭되고, 정당 간 경쟁이 거세지고, 사회로부터 경제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게 될 때 ‘무엇이 경제민주화냐’ 하는 것에 대해 정치인들이 구체적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압력이 높아지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장집 교수는 “경제민주화 이슈가 판도라의 상자처럼 현대의 중요한 이념과 이론적, 철학적 이슈들을 불러내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경제적, 사회적 평등의 창출과 관련하여 판도라의 상장에서 튀어나올 현대의 중요한 이념과 그리고 이론적, 철학적 이슈들은 과연 무엇일까? 먼저 떠오르는 강력한 이념은 공산주의·사회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최장집은 같은 글에서 공산주의·사회주의보다는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 정당 정치인들이 고민하게 될 문제의 초점은 ‘경제민주화가 사회민주주의를 포괄하느냐 아니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경제민주화가 유럽으로 대표되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 체제에 접맥하고 그것을 지향하느냐, 아니면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유지하면서 경제민주화를 도모하느냐 하는 질문이다”.
1980년대 말 소련 및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공산주의·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대안체제로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렇지만 영미 자본주의(Anglo-American capitalism)로 대표되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 (free market capitalism) 역시 2008년 말 발발한 글로벌 금융위기와 극심한 빈부격차로 그것의 윤리적 정당성과 경제적 효율성, 역사적 지속가능성을 의심받고 있다. 그렇다면 남는 유일한 대안적 경제 이념은 공산주의·사회주의와 자유시장 자본주의(신자유주의)라는 양 극단의 중간에 위치한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다.
그런데 다양한 중간적 이념의 스펙트럼의 입장의 맨 왼쪽에 사회민주주의가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영미의 사회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가 있고, 이것이 한국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라 불린다. 또한 ‘반성한 자유주의 또는 건전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 또는 미국의 리버럴(liberal) 주류가 있고 이것은 한국에서 개혁적 자유주의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개혁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민주당 주류, 안철수 신당 주류의 중도주의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반해 민주당내 진보파, 그리고 안철수 신당 흐름 내의 진보파들(최장집처럼 노동중심 진보 정당을 말하는)은 대체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 들어 박근혜 정부 내에서 뿐만 아니라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개혁적 의원들이 “독일 경제, 독일 기업에서 배우자”는 국회의원 공부을 하고 있다 하는데, 그 지향성은 대체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론(질서자유주의론)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공산주의·사회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신자유주의)라는 양극단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경제민주화론에는 그 중간에는 사회민주주의에서 진보적 자유주의, 질서자유주의(건전 자유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그리고 최장집 교수가 지적했듯이, 경제민주화 담론이 작년 총선과 대선에서 전면에 떠오르면서 이제 판도라의 상자로부터 다양한 현대 이념들이 유령처럼 뛰쳐나오고 있다.
시장주도형 경제민주화냐 국가주도형 경제민주화냐
그런데 왜 민주 세력의 기존 가치관이 그렇게 (신)자유주의에 푹 물들어 있었을까? 1990년대 초반 이래 민주 세력 내에서는 정부주도형 경제보다는 시장주도형 경제가 바람직하며 특히 투명한 시장, 공정한 시장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담론이 지배해왔다.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은 관치경제고 박정희식 경제의 유산이다’는 생각에서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해체하자고 했고, 그러려면 ‘더 많은 시장 논리’, ‘더 강한 시장 규율’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진보 경제학자들의 시각이었다.
이런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 관점에서, 한국 경제를 시장주도 경제로, 특히 선진국 중 가장 시장 논리의 힘이 강한 미국식 자본주의로 바꾸어 놓겠다고 한 것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였고 민주당이었다. 그런데 2008년 말에 시작된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는 과거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가 추구했던 ‘글로벌 스탠다드’ 즉 미국식 자본주의를 향한 이른바 ‘시장 개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더구나 똑같이 시장 논리, 시장 규율 강화의 시각을 가진 것이 보수적 자유주의, 즉 시장만능주의였고 이명박 정부는 그 생각을 극한까지 추구했다. 민주 세력은 그런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 속에서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고, 그 과정에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민주 세력 내에서 처음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물론 이번에는 박정희 식이 아닌 다른 방식, 다른 형태의 국가개입주의였다.
몇 년 전부터 민주 세력 내부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다른 국가 개입론이 등장했다. 하나는 복지국가론이고, 또 하나는 공정국가론이다. 복지국가론이란 나처럼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만들자는 입장이며 특히 보편적 복지와 노동민주주의(이것이 경제민주화의 본질이라고)를 강조한다. 그에 반해 공정국가론이란 반칙·특권 세력인 재벌을 (그리고 모피아를) 정부가 규제해서 ‘반칙과 특권이 없는 공정한 시장질서’를 만드는 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은 복지국가보다 공정한 시장질서(이것이 경제민주화의 본질이라고)를 앞에 내세운다.
작년 말의 선거운동 기간 내내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 비하여 경제민주화-재벌개혁을 더 강하게 이야기했다. 순환출자 규제와 지주회사 규제, 금산 분리 같은 재벌규제를 놓고 박근혜 후보와 차별화하겠다는 문재인 후보와 진보 진영의 전략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물론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모두 선거판에서 핵심 쟁점이 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문재인-안철수 후보만이 아니라 박근혜 후보까지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하겠다고 하는 통에, 미래 비전이나 정책을 가지고는 후보 간 차별화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문재인 후보는 정책 대결, 미래 대결이 아닌 인물 대결, 과거 논쟁(박정희-장준하 논쟁)으로 선거판을 끌고 갔는데, 결국 그것이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원인이 되었다.
그것이 문재인 캠프의 근원적 한계였다. 물론 유세의 마지막 단계, 특히 2차 및 3차 TV토론에서 문재인 후보는 건강보험과 같은 복지 정책에서 박근혜 후보를 압도했다. 그렇지만 선거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제시된 차별화된 복지 정책으로는 국민들에게 어필할 시간이 없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장기적 국가 비전의 결여이다. 당시 문재인 후보도 그렇고 현재의 민주당도 그렇고, 그들이 과연 어떤 유형, 어떤 지향성의 복지국가를 앞으로 10년 뒤, 20년 뒤에 만들어내고자 하는지 장기적인 국가비전이 분명치 않다. 당시 문재인 후보 쪽은 박근혜 후보가 제시하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즉 적어도 독일 기민당이 만들어낸 독일 수준의 복지국가를 20년 뒤 한국의 모습으로 제시하면서 차별화했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향후 5년 뒤만이 아니라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는 건지, 어떻게 대다수 서민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나라, 대다수의 개개인들의 생활 속에서 행복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건지에 관한 장기적 국가 비전의 결여는 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여러 진보정당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정당들 역시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재벌개혁(재벌해체)-경제민주화를 복지국가에 비해 더 시급하고 우선적인 과제라고 제시하였다.
그런데 과연 생활하는 서민들의 관점에서 볼 때, 순환출자 규제, 지주회사 규제, 금산분리와 같은 재벌개혁(재벌해체)-경제민주화가 기초연금 20만원, 반값 등록금, 4대중증 무료 진료와 같은 복지국가 이슈에 비해 그렇게 시급하고 우선적인 것으로 다가왔을까? 게다가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이 제시했던 (지금도 제시하고 있는) 재벌개혁의 방법과 지향성은 1999년대 말의 김대중 정부가 제시한 재벌개혁과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과연 서민들이 체험한 과거 민주 정부 시절의 개인적 삶이 행복하고 자유로웠던가?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절망의 시절이었다. 많은 이들이 민주 정부가 처음 시행한 이른바 ‘시장개혁’(구조개혁)과 함께 새로 등장한 명퇴와 희망퇴직, 정리해고의 희생자들이었다. 회사가 통째로 다른 회사에 매각되고 임금이 삭감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밀려난 이들의 상당수가 퇴직금으로 통닭집, 피자집, 음식점을 차렸고, 그 중 다수가 파산하여 빈곤층이 되었다. 지금 은행대출과 신용카드 대출을 못 막아 전전긍긍하는 신용불량자 중에도 그런 이들이 많다.
우리 사회가 1990년대 말부터 상시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대규모 명퇴와 희망퇴직, 정리해고 등이 재벌개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문재인과 안철수, 이정희와 심상정 후보 등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복지공약 및 노동 공약에 비해서도) 가장 우선적이고 시급한 과제라고 국민들에게 제시한 경제민주화-재벌개혁, 또는 재벌해체의 슬로건이 그들을 감동시켰을까?
정의란 무엇인가?
앞에서 나는 민주주의와 자주/통일 등이 삶에 찌든 대다수 생활인들,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선뜻 다가오지 않는 가치라고 말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새로이 떠오른 화두가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정의는 매우 근본적인 가치이다.
그런데, 말 그대로, 정의란 무엇인가?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은 ‘복지보다 더 우선적이며 소중한 가치는 특권과 특혜의 철폐이며, 따라서 정의와 공정·공평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즉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은 (안철수 진영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지난 선거기간 내내 말로는 복지를 입에 올렸지만, 내심 복지국가는 그 자체 정의와 공정 구현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정의와 공정·공평의 내용과 실체는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 서로 다른 세계관과 정치경제 사상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실질적 평등(실질적 공평·공정)보다는 형식적, 절차적 평등(절차상의 공정·공평)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자유주의자들은 (여기에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 안철수도 포함되는데) 흔히 ‘복지보다 더 소중한 것은 공정·공평’이며, ‘복지국가보다 더 소중하며 우선적인 것은 특권과 특혜의 철폐’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은 (안철수 신당도 마찬가지) 재벌로 상징되는 특권세력 해체를 늘 가장 우선시되는 과제로 제시한다.
그렇지만 실질적 자유와 실질적 민주주의, 즉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를 가장 중시하는 사회민주주의의 관점에서는 보편적 복지와 노동민주주의야말로 정의와 공정·공평이라는 가치/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며, 더구나 재벌의 특권과 특혜를 철폐(완전경쟁 시장 창출을 위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특권과 특혜를 실질적으로 철폐하여 사회 평등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직 민주당과 자유주의만이 정의(正義)와 공정(公定)을 대변한다고 하는 것은 억지다. 정말로 중요한 화두는 그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아마도 내 주변에서 흔히 보는 보통의 서민들, 생활하는 개개인들의 직관적 느낌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어떻게 복지국가의 도움 없이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건가? 그들이 제시하는 최고의 정의·공정성 회복 방안은 ‘공정한 시장질서’ 원칙의 구현이다. 그리고 공정한 시장질서 창출을 위해 최우선시 된 과제가 바로 각종 재벌 규제를 통해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는 일이다. 공정한 시장 질서를 경제민주화의 실체로 이해한다. 그런데 과연 ‘공정한 시장질서’가 정의가 보장되는 경제체제를 창출할 수 있을까?
‘공정한 시장질서’란 시장 경쟁 절차의 공정성(즉 기회의 평등)을 의미할 뿐이다. 즉 공정한 시장질서 그 자체는 소득 분배의 공정성(즉 결과의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시장이 더 공정해질수록, 즉 더 완전경쟁 시장 모델에 가까울수록, 성과주의의 확산에 따른 불평등한 소득분배와 승자와 패자의 빈부격차 심화는 불가피하다. 공정한 시장질서는 필연적으로 불평등한 사회, 불공정한 사회를 낳는다.
아무리 공정한 ‘경쟁적 시장질서’가 관철되더라도 그 경제는 자본주의적 착취도, 노자 대립 심화도 막을 수 없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1998년 이래 경제민주화-재벌개혁이 진행되면서 동시에 도입·확산된 것이 기업에서의 미국식 성과주의 및 개인주의 문화였다. 그것은 기업들에서 살벌한 비인간적 경쟁을 낳았다. 미국식 성과주의와 능력주의는 모두 사람들이 이기적이며 경쟁과 금전적 보수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주된 동인이 된다는 전제 아래 경제적 생산성을 최대한 높이는데 주안점을 주는 원칙인데, 성과주의와 능력주의에 가장 부합하는 경제이론이 바로 미국에서 발전한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 생산성 원리이다.
‘공정한 시장질서’의 이름으로 시행된 1998년 이래의 경제민주화 또는 시장주도형 경제로의 개혁(시장 개혁) 과정에서 한국 경제에서 임금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투입노동 대비 낮은 한계생산성을 보이는 중하층 노동자들에게는 과거보다 낮은 임금을, 높은 한계생산성을 보이는 고급 관리자와 경영자들, 특히 금융권 직원들과 펀드 매니저들에게는 높은 봉급을 주는 것이 정당하고 정의로운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저소득 노동자(워킹 푸어)와 고소득 임직원간의 소득격차는 과거 박정희 체제에 비해 크게 벌어졌다.
공정한 시장질서와 자본주의 시장질서
반칙과 특권이 없으며 누구나가 평등·공평하게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는 공정한 경제, 정의로운 사회를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반칙과 특권의 내용과 실체가 뭐냐는 것이다. 그게 명확해야만 공정·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의 실체와 내용이 분명해진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부인하지 않는다. 존 로크나 아담 스미스, 볼테르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축을 이루는 사유재산권과 시장경제를 자연스런 상태(자연법)로 보면서 긍정한다.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 공병호와 복거일 같은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에 반해 루소나 마르크스 같은 이들은 사유재산권의 존재 그 자체가 반칙과 특권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장 경제가 공정하고 공평하게 작동하려면 완전 경쟁이 되어야 한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수요-공급이 완전 경쟁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완전경쟁 상태가 되어야만 공정·공평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정의와 공정·공평은 주로 경쟁적 시장질서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가 경쟁은 아니고, 더구나 경쟁에 시장 경쟁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쟁보다 협력하여야 할 사안들이 많고, 더구나 경쟁이라 하더라도 수익을 위한 시장 경쟁이 아니라 시장 밖에서의 비영리 목적을 위한 선의의 경쟁도 많다.
달리 말해서, ‘반칙과 특권이 없는 공정·공평한 정의로운 세상’이라는 테제는 매우 올바르고 정당하지만, 그 자체만으론 내용과 실체가 없는 공허한 말이다. 그런 말은 자유주의 개혁가도 할 수 있고, 공산주의 혁명가도 할 수 있다. 또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론자도 할 수 있다. 마치 복지국가는 정의 및 공평·공정과 무관한 양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유주의의 관점을 보여준다.
공정시장, 공정 경쟁 원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 수없이 많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삶을 찌들게 하는 핵심에는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유린하는 냉혹한 현실인 시장 자본주의가 있다. 자유주의는 결과의 평등(소득의 평등)보다는 기회의 평등(기회 균등)을 더 강조하고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데, 과연 모든 사람이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부모로부터 사유재산권(부와 재산)을 물려받은 이들은 출발점부터 특권을 가지며 따라서 출발점부터 공평하지 않은 반칙 세력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그 자체 공정·공평한 체제가 아니다.
정의로운 경제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 사회처럼 빈부격차가 심하고 자살률과 비정규직 세계 최고, 행복도 세계 최하위의 나라를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재벌이 빵집과 순대사업에 진출하여 영세자영업자를 몰락시키는 재벌공화국을 정의로운 경제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에는 여러 종류의 상벌 체계가 존재한다. 법과 관습은 대표적인 상벌 체계인데, 법이 철저하게 적용된다는 것은 곧 법으로 표현된 ‘정의’가 관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벌 범죄의 경우, 재벌 총수들 역시 ‘법 앞에서의 평등’ 원칙에 따라 다른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처벌하여 구속시키는 것이 당연히 정의로운 나라이다.
그런데 자유 시장도 상벌 체계의 일종이다. 정상적인 자유 시장에서는 좋은 상품을 값싸게 생산하는 기업이 돈을 벌게 되는 반면, 저질 상품을 비싸게 생산하는 기업은 망한다. 시장에서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자유시장이 상을 내린다는 뜻이고, 망한다는 것은 자유 시장이 처벌한다는 뜻이다. 자유 시장 즉 완전 경쟁 시장은 명백한 책임 추궁을 바탕으로 하는 ‘공정한 보상·처벌 시스템’이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자유 시장 그 자체가 훌륭한 상벌 체제라고 말하는 복거일과 공병호, 하이에크와 프리드먼과 같은 시장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매우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본다.
그런데 스스로를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자’라고 자임하는 공정시장론자들은 공정한 (즉 완전한) 경쟁적 시장을 회복하는 것이 공정과 정의를 회복하는 핵심적인 방법이며, 따라서 공정한 시장질서 구축이 복지국가보다 논리적, 시간적으로 우선시 되는 과제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경쟁적 시장질서의 회복을 위해서는 재벌그룹처럼 기업 간 경쟁을 왜곡하는 특권·특혜 세력을 약화 또는 해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며 가장 중요하다.
물론 공정한 시장 질서를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를 놓고도 그들 안에서 견해가 엇갈린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같은 인사들은 공정한 완전경쟁 시장 창출을 위해서라면 한미FTA도 필요하며 더구나 노동운동의 약화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경우, 자유시장론과 공정시장론이 갈라지는 유일한 분기점은 독점과 경제력 집중 즉 재벌에 대한 태도에서 뿐이다. 즉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신자유주의자들)이 독점과 경제력 집중(즉 재벌그룹의 계열사 확대)이 자유 시장 경쟁의 자연스런 결과이므로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공정시장 우선론자들은 재벌그룹을 자유로운 완전경쟁 시장의 작동을 저해하는 ‘왜곡 요인’으로 보면서 그것을 제거 또는 축소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재벌그룹 축소 또는 해체를 통해서만 ‘합리적인 완전경쟁 시장’ 즉 ‘공정한 시장’을 만들 수 있고, 그래야만 정의와 공정·공평이 넘치는 공정사회 또는 공정국가가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정한 시장질서 구현 즉 재벌개혁과 (그리고 그것과 긴밀하게 결합된)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이 복지국가보다 더 우선적이고 더 중요한 과제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주요 인물로는 정운찬(전)동반성장위원장과 그리고 김광수(김광수경제연구소장), 그리고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등을 들 수 있다. 장하성 교수 역시 마찬가지로 공정한 시장질서면 충분하다고 말하는데, 그는 안철수 대선 캠프의 정책총괄이었고 현재 안철수 의원 중심의 싱크탱크인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소장이다.
그에 반해 이병천과 유종일, 김상조, 정태인 같은 이들은 복지국가와 ‘동시에’ (즉 병렬적으로) 공정한 시장질서(이것을 경제민주화라고 그들은 부르는데)가 이룩되어야 한다고 요즘 말한다. 하지만 이들 인사 대부분이 1년 전까지만 해도 복지국가에 비해 논리적, 시간적으로 더욱 우선적이고 중요한 과제는 경제민주화(공정한 시장질서)라고 말했었다. 단지 작년 중반 이후 나 같은 복지국가론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입장을 일부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들은 여전히, 장기적으로는 복지국가와 공정한 시장질서가 동시에 구축되어야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공정한 시장질서 구축이 더욱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그들은 “선제적 복지로서의 재벌개혁-경제민주화”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2차적 소득분배 즉 복지국가적인 ‘국가개입주의’ 정책(세금징수와 사회복지 재정지출을 통한 소득의 재분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1차적 소득분배 즉 ‘합리적 시장’ 경제 속에서의 원천적 소득분배이며, 이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중소기업 하청단가 삭감과 대리점 수탈(남양유업 사태에서 드러난)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공정한 시장질서 구축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실은 최장집 교수 역시 이와 인식을 함께 한다. 그는 앞서의 발표문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운영과 재벌 중심의 성장이 한편으로 한국을 경제선진국으로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던 동안, 다른 한편으로 사회 양극화와 사회 해체 효과들, 노동배제, 최고율의 (하급)자영업 비율, 노동 인구 절반의 비정규직과 그들에 대한 차별 같은 부정적 결과도 만들어냈다. (...) 한국 민주주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체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고, 그것이 경제민주화의 내용이 된다”고 말하면서, “국가의 일방적인 재벌 지원에 대한 특혜를 실체적으로 제한하고, 재벌에 대한 법의 지배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공정시장은 시장소득 분배를 얼마나 개선하는가?
공정시장 우선론자들은 2차 분배 즉 정부의 조세수입 및 복지예산지출을 통해 달성되는 공정한 소득재분배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1차 분배 즉 공정한 시장질서 수립을 통해 달성되는 원천적 시장소득 분배의 개선이라고 말한다. 정운찬과 김광수, 김대호 같은 이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며, 정태인과 이병천, 유철규, 유종일 같은 진보적 경제학자들도 동일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민주당과 여타 진보정당들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1차 분배를 앞으로 얼마나 개선하여야 할까? 이는 총부가가치 즉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노동소득의 몫 즉 노동소득분배율을 척도로 가늠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소득 분배율은 1970년 41%이었지만 1980년 51%, 1990년 59%로 급격히 개선되었다. 자본 측으로의 소득분배가 상대적으로 줄고 그 대신 노동하는 서민들에게 더 많은 소득이 분배되었다. 경제민주화는커녕 정치민주화조차 달성되지 않은 개발독재 시절이었는데도 노동소득 분배율이 빠른 속도로 개선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직업 생활을 한 오늘날의 많은 장년층, 노년층이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 주된 이유는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기업투자 비율이 40%에 육박할 정도로 기업들이 왕성하게 신규 투자를 늘린 덕택에 노동시장에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지속되었고 그 결과 종업원 실질임금이 30년간 계속 올라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1980년대 말부터는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1990년대 초중반에 노동소득분배율이 사상 최고인 63%까지 상승하였다. 노동소득분배율은 그렇지만 1990년대 말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래 오히려 악화된다. 그것은 1998년 직후 58% 수준으로 곤두박질 쳤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60%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그에 반해 선진국의 노동소득 분배율은 평균 70% 수준으로 알려져 있고 그만큼 1차 소득분배(즉 시장소득 분배)에서 우리보다 더 평등하다. 따라서 우리가 OECD 평균 수준의 1차 분배를 달성하려면 노동소득 분배율을 60%에서 70%로 10% 올려야 하는 과제가 있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을 2013년 1300조 원으로 볼 때, 2013년 기준 130조 원의 몫이 종업원등 일하는 직장인들에게 더 분배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장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먼저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를 말하는 이들은 출총제 강화와 금산분리 강화 등 재벌개혁을 통해 재벌의 소유 지배구조를 개혁하고, 동시에 원하청 규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등을 통해 대-중소기업간 공정거래 질서를 만들어 내게 되면 돈 많이 버는 수출대기업들로부터 그 아래 관련기업들로의 트리클다운이 원활하게 작동하여 궁극적으로 종업원 등 서민들을 위한 1차 분배가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말한다. 일리가 있으며 일정한 긍정적 효과가 예상된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효과도 예상된다. 왜냐하면 지난 민주 정부들이 주주자본주의를 재벌체제의 대안으로 제시하여 그것을 정착시킨 이래 주식투자 재테크가 만연하고 있다. 그런 조건에서의 출총제 강화, 금산분리 강화 등은 주식투자자들의 힘을 더 크게 하여 오히려 총자본(재벌가족과 주식투자자들을 핵심으로 하는)에는 유리하고 총노동에는 불리한 방향으로 1차 분배를 악화시킬 것이다. 그것은 실제 90년대 말 이래 10년간 민주 정부 하에서 일어난 일이다. 빈부격차가 그 시기에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심해졌다.
더구나 둘째로, 대중소기업간 공정거래 정책의 긍정적 효과가 예상되지만, 그 효과를 너무 과장하면 안 된다. 재벌기업을 포함한 대기업 전체의 연간 순이익 총액이 50~100조 원인 상황에서 제아무리 재벌개혁과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정책을 잘한다 해도 이를 통해 중소기업에 트리클다운되는 액수는 연 10~20조원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 더구나 중소기업, 영세기업에 만연한 노동권 부재, 노동조합 부재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 액수가 다 종업원과 직장인의 몫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겨우 이 액수로 130조 원의 격차를 메우겠다고?
자유주의자들은 대-중소기업간 원하청 거래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규제하면 중소기업·영세기업에 유리한 방향의 시장소득 분배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이들 기업에서 저임금 착취가 원천적으로 사라질 것처럼 말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치명적 착각이다. 아무리 원하청 거래가 공정거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저임금 착취와 장시간 노동을 민주공화국이 금지하지 않는 한,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는 신생 하청 기업은 계속 나타날 것이며, 그런 기업이 공개입찰 하청계약 경쟁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공정시장 질서를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중소기업·영세기업에 만연한 저임금 노동 착취를 원천 금지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저임금을 높이고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를 포함한 전국적 산별 노조를 구축하며, 전국적 단일 단체교섭이 법률적으로 유효하도록 민주공화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총자본과 총노동 간의 원천적 시장소득 분배(즉 1차 소득분배)에서 총노동에 유리한 방향의 변화가 달성될 수 있다.
복지국가 전략 – 생산적 투자와 노동민주주의, 소득재분배
2013년 기준 130조 가량의 1차 소득분배 개선을 달성하는 방법은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고 동시에 생산적 투자가 매우 활발했던 1980년대 말 우리나라의 경험으로부터도 유추할 수 있다. 즉 노동조합과 노동권의 대폭 강화시켜 노동조합의 임금교섭력을 높임과 동시에 기업들의 신규투자를 왕성하게 만들어 노동시장에서 실질임금이 높아지도록 하는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구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비정규직 및 파견노동의 엄격한 규제와 함께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과 이를 통한 수백만의 신규 일자리 창출, 최저임금 인상 등의 복지국가적 국가개입 조치가 필수적이다. 동시에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기업별 노조가 아니라, 비정규직 및 중소기업 노동자를 모두 포함하는 산별노조를 의무화하는 입법조치가 필요하며 산별 단체교섭의 효력이 모든 사업장과 모든 종업원에 적용되도록 의무화시켜야 한다. 동시에 금융자본 및 주주자본주의를 강하게 규제하여 대중소기업 전체에 있어 왕성한 신규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견인해내야 한다.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권의 대폭 향상(이것을 노동민주주의라고 부르자)과 함께 기업의 왕성한 생산적 투자(이를 위한 주주자본주의 억압)를 견인하는 전략은 1950년대 이래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추진한 전략이기도 하였다. 130조의 시장소득(원천소득)을 종업원 등 서민의 몫으로 새로이 분배하는 1차 분배 개선을 위해 오늘날 우리나라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전반적 기획이다.
또한 동시에 OECD 평균에 비해 10% 즉 130조원이 부족한 2차 분배(즉 국가적 복지재정)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제 역시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앞으로 130조 원의 세금을 더 거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겨우 오늘날 이태리, 스페인 수준의 사회복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듯 2013년 기준 총 1,300조원의 GDP에서 그 20%인 도합 260조 원의 막대한 소득을 자본으로부터 노동(서민)에게 이전시키는 소득분배 혁명을 일거에 - 수년 내에 -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국민들 다수의 정치적 동의로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프로젝트이며, 복지국가 5개년 계획의 수립을 통해 향후 10년, 2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OECD 평균의 비교적 평등한 소득분배에 도달할 수 있다. 게다가 OECD 평균을 넘는 스웨덴 수준 복지국가로 가려면 다시 그것의 두 배, 즉 2013년 기준 500조 원 가량의 1차 및 2차 소득분배 개선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30년에 걸친 단계적 이행이 필요하다.
어떤 가치관, 어떤 세계관의 경제민주주의인가?
최장집 교수의 말처럼 경제민주화 화두의 부상은 현대의 다양한 이념적 유령들을 판도라의 상자로부터 뛰쳐나오게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역시 일종의 경제민주화론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근간인 사유재산권이 존재하는 한은 경제를 민주주의 즉 피플의 지배하에 놓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 역시 일종의 경제민주화론이다. 자본과 사유재산권, 시장 경제를 인정하지만 그것들을 민주공화국으로 결집된 피플이 적절하게 통제하는 복지국가를 만들어내지 않는 한, 민주주의가 자본·시장 권력에 의해 유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경우 경제민주주의보다 산업민주주의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 그런데 산업민주주의 핵심은 바로 노사관계의 민주화 즉 노동민주주의이다. 회사 안에서는 기업주 즉 자본에 대항하는 종업원과 노동조합의 권리를 드높이고, 동시에 회사 밖에서는 복지국가를 만들어 없는 사람들도 부자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잘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정지한다’는 말이 있다. 참된 경제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회사 안에서도 관철되는 것이다. 종업원의 대표자가 회사 이사회에 이사로 참여할 권리를 법적으로 확보한 독일과 스웨덴의 경우 경제민주주의가 제대로 발전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경제민주주의를 이렇듯 산업민주주의, 노동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이다. 종업원을 대표하는 이사들이 주주(사유재산권)를 대표하는 이사들과 동등한 숫자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이사회에 참여하여 사장 등 경영진을 선출할 권리를 갖는 것을 ‘종업원 공동결정제’라고 부른다. 공동결정제를 경제민주화의 본질로 보는 세계관이 사회민주주의이다.
그에 반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논의되는 경제민주화론에는 이런 이야기가 아예 없거나, 또는 간혹 있더라도 본론이 아닌 부록에 등장할 뿐이다. 그것은 공정한 시장질서 구축에 집중하는 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이다. 자유주의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노동권 신장(그리고 노동권과 긴밀하게 결합된 사회복지권 강화)이 아니라 경쟁적 시장질서의 구축이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 경제민주주의라는 개념은 훌륭하며 앞으로 더 발전시킬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도 경제민주주의가 곧 재벌개혁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비아냥거림은 곧 “경제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비아냥거림으로 전환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가장 많이 듣던 말이 경제민주화-재벌개혁이었는데,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대다수 서민들, 가난한 이들의 삶이 더 피폐해졌다.
대다수 국민 개개인의 삶의 현실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일을 해결해주는 경제민주화, 밥 먹여주는 경제민주주의만이 국민들의 열렬한 동의와 지지를 받을 것이다. 순환출자 규제와 금산분리처럼 직장인·서민들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고용안정과 봉급인상, 비정규직 차별 해소로 직결되는 경제민주화, 저녁 6시에 칼퇴근하고 주말 이틀 쉴 수 있으며, 일 년에 한 달의 유급휴가를 쓸 수 있게끔 하는 경제민주화, 비정규직으로 또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더라도 임금이나 여타 처우에서 별다른 차별을 못 느끼고 살 수 있는 경제민주화, 이런 것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중요한 일상적 삶의 개선 과제들, 즉 개인의 실질적 자유를 위한 과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민주화는 단지 불공정한 시장 질서를 시정하는 차원을 넘어, 자본주의적 시장질서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정신을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3. 어떤 가치관, 어떤 세계관의 복지국가인가?
복지국가 – 프레임의 전쟁이 시작되다
경제민주화 담론만이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 아니다. 복지국가 담론 역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이제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까지도 복지국가를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반값 등록금과 노인연금 확대, 의료보험 확대 등을 말하고 있다.
2010년 6월의 지방선거에서 떠오른 무상급식 이슈 덕택에 우리나라 진보의 정신세계 속에 새로운 담론 즉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그리고 2012년이 되자 다시 또 다른 차원의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가 등장했다. 즉 경제민주화 담론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2012년 4월 총선과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모두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라는 화두를 내걸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당과 야당은 누가 진짜 경제민주화, 진짜 복지국가를 할 것이냐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그렇지만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에 진짜, 가짜는 없다. 지난 1백년간의 세계 역사는 복지국가에 여러 가지 유형, 여러 가지 이념적 지향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학자들은 유럽의 복지국가에 보수주의 유형(독일), 사회민주주의 유형(스웨덴), 그리고 자유주의 유형(영국)이 있다고 말한다. 미국과 호주, 뉴질랜드 같은 앵글로색슨 국가들 역시 영국의 자유주의 유형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핀란드와 덴마크, 노르웨이 같이 사회민주당이 전후 오랜 기간 집권한 북유럽 나라들은 사회민주주의 유형이라고 말한다. 그에 반해 건전 보수 정당(기독교 민주당)이 오랜 기간 집권한 독일은 전형적인 보수주의(조합주의) 복지국가로 분류된다.
최초로 사회복지 정책을 도입한 1백여 년 전 독일의 비스마르크 재상이 그렸던 세상을 보수주의 복지국가라고 한다면, 그의 정신을 일정 정도 계승하여 1950년대 라인강의 기적 시기에 독일의 집권 기독교민주당이 그렸던 질서자유주의(사회적 시장경제론)의 세상은 - 요즘 우리말로 옮긴다면 – 건전 보수 지향성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상당수 의원, 그리고 민주당의 상당수 의원이 포함된 건전 보수주의 세력의 지향성을 ‘건전 보수’ 지향성의 복지국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기존의 시장만능주의 입장을 버리고 건전보수의 입장으로 차츰 선회한다면, 새누리당과 민주당(안철수 신당도 마찬가지) 사이의 이념적, 정책적 차이는 점차 희석될 것이다.
경제 사상적으로 볼 때 한국의 보수 세력은 분명 스스로를 갱신하고 있다.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를 버리고 독일의 질서자유주의 정도의 건전 보수 (또는 중도 우파) 정도로 전환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우 문제되는 것은 한국의 민주 세력이다. 더 왼쪽으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건전 보수주의와의 차이가 더욱 불분명해질 것이고, 따라서 생활인의 관점에서는 굳이 민주 세력을 선택할 이유가 더욱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는 2012년 10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복지국가5개년 계획을 시행하겠다고 했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문재인 캠프에서 나온 복지공약과 재원조달 방안을 보면, 2011년 말 민주당이 발표한 것과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당시 민주당은 연평균 33조원의 추가 복지예산을 마련하여 사회복지를 늘리겠다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더라도 집권 말기인 2017년에 우리의 복지 수준은 지금의 미국(선진국 최악의 복지를 하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런 속도라면 미국 수준에 도달하는데 10년이 걸릴 것이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르랴’며, 10년 뒤 미국, 20년 뒤 OECD 평균의 복지에 도달하면 되지 않겠냐고 조급증을 달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당에는 언젠가 스웨덴 수준의 복지국가를 하겠다는 의지와 열정이 있는가? 나는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민주당에는 그럴 의지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없다.
스웨덴과 핀란드, 덴마크의 복지국가를 만든 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세계관과 정치경제학으로 무장한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수십 년간 집요하게 노력하여 만들어낸 성과가 북유럽 복지국가이다. 그에 반해 민주당에 (그리고 안철수 신당에) 모인 정치인들과 관료들, 지식인들의 거의 모두가 자유주의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자유주의의 프레임 안에서 복지국가를 만든다? 가능하다. 그게 바로 미국 민주당 리버럴이 생각하는 복지국가이고 그게 바로 클린턴-오바마 수준의 복지국가이다. 선진국 최하위의 복지국가 말이다.
그렇다면 안철수 신당은 나은가? 지난 2012년 11월의 안철수 캠프의 발표를 보면 복지 구상도 그렇고 그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 구상도 마찬가지고, 문재인 캠프보다도 못했다. 특히 충격적인 점은 그 발표 내용들이 작년 7월 말 발간된 책 <안철수의 생각>과 달랐다는 것이다. 그 책에서 안철수는 보편적 복지 구상을 제시했고 또한 부자증세만 아니라 보편적 증세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후 결성된 안철수 캠프는 그 책과 전혀 다른 공약을 제시하였다. 장하성 교수를 필두로 하는 개혁 자유주의 학자들이 복지-노동 공약 마련에 참여하면서 문재인 캠프보다 더 보수적인 복지-노동 공약이 발표되었다. 복지-노동 공약만 보면 오히려 박근혜 캠프와 더 가까웠다. 당연히 스웨덴 복지국가 같은 것은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았다.
현재 박근혜 정부는 연평균 27조원의 추가 복지예산으로 더 나은 복지를 하려 있다. (안철수 캠프 역시 이런 수준의 추가 복지예산을 상정했다). 이런 속도라면 향후 13년 뒤에 오늘날 미국 수준 복지에 도달할 것이고, 25년 뒤에야 OECD 평균의 복지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복지정책 하나만 볼 경우, 민주당이 집권하나 (그 경우 20년 소요), 새누리당이 집권하나(그 경우 25년), 큰 차이가 없다.
노인연금 개혁 – 어떻게 할 것인가?
박근혜 정부-새누리당이 집권하나, 민주당(또는 안철수 신당)이 집권하나 큰 차이가 없는 대표적인 분야가 노인연금 정책이다. 박근혜-새누리당은 모든 노인에게 1인당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공약했다. 문재인 캠프(민주당)와 안철수 캠프는 모두 모든 노인에게 1인당 18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했었다. 선거 공약만 보면 박근혜-새누리당이 더 진보적이었다.
왜 민주당과 안철수 캠프는 노인 기초연금의 확대를 꺼려했을까? 결정적인 걸림돌은 재원 조달이었고, 자칫 재원조달을 위해 큰 규모의 증세를 해야 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현재 보편적 복지 원칙이 아닌 선별적 복지 원칙으로(소득 하위 70% 노인들에게만 지급) 최고 9만2천원 지급되는 기초노령연금은 2012년 4조원의 중앙정부 예산이 소요되었다.
물론 박근혜 정부의 인수위는 노인연금 재원 조달 문제 때문에 공약을 수정하여, (1) 소득 하위 70%의 노인들 중 국민연금 미가입자에게는 원래대로 월 20만원을 지급하지만 국민연금 가입자에게는 월 14-20만원을(가입기간에 따라) 차등하여 지급하고, (2) 소득 상위 30%의 노인들에게는 그 중 국민연금 미가입자에게는 월 4만원만을 지급하고, 국민연금 가입자에게는 월 4~10만원을(가입기간에 따라) 지급하는 안을 새로 제시하였다.
필자는 연금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노인연금 개혁안의 구체적인 전문적 내용에 대해 왈가불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한 점은, 조세(세금)에 의해 그 재원이 조달되는 기초(노령)연금에 관한 한, 보편주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유한 고소득자에게서는 세금만 걷고 그들에게 동등한 복지 혜택을 주지 않는 선별적 복지의 원칙으로는, 당장은 한정된 재원을 서민 계층에게 집중 투하하여 그들의 복지 혜택을 늘릴 수 있을지라도, 세금은 부담하면서 별다른 복지 혜택은 누리지 못하는 고소득 부유층의 조세 저항에 심해지는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
복지 정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자산 및 소득조사를 통해 선별된 소수의 가난한 자들에게만 복지혜택을 주는 것을 선별주의 복지라고 한다면, 그런 조사를 다 생략한 채 모든 대상자들에게 복지 혜택을 주는 것을 보편주의 복지라고 할 수 있다. 부자건 가난한 자건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하는 것은 보편주의이며, 그렇지 않고 소득순위 50% 또는 70%까지만 무상급식을 제공하고 그보다 부유한 중상위 50% 또는 상위 50%에게는 급식비를 받는 것(유상급식)은 선별주의라고 한다. 초중등 공교육 강화도 보편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학령기 어린이와 청소년이 의무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공교육은 부자와 빈자를 차별하지 않고 동일한 교육의 권리와 의무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복지 정책을 보편주의 원리에 따라 설계할 수는 없다. 원리상 모든 대상자에게 혜택을 제공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 예컨대 주택분야의 경우가 그러한데, 고급 호화주택에 거주하는 고소득자와 초라한 공공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저소득자에게 동일한 액수의 주거보조 수당을 지급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복지 선진국들의 경우에도 주거수당은 소득 및 자산조사를 통해 일정 수준 이하인 주민들에게만 그 혜택을 제공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은 마치 선별주의 복지는 보수의 전유물이고, 보편주의 복지는 진보 의 전유물인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오히려 진보 인들이 선별주의 복지를 더 지지한다. 왜냐하면 한정된 복지 예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집중적으로 투여하여 복지혜택을 주는 것이 더 정의롭고 공정·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의 노동당과 노동조합은 1950~60년대에 그 세력이 매우 강했는데도 북유럽 같은 복지국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자들에게도 혜택을 주는 보편주의 복지국가보다는 가난한 자들에게 집중적으로 혜택을 주는 선별적 복지국가를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경우 2000년대 초중반 민노당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가끔)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선별적 복지국가에 대한 지향성이었다.
그렇지만 선별주의 원리에 따라 운용되는 복지국가는 궁극적으로 ‘최소주의’ 또는 ‘잔여주의’ 복지국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 점은 복지국가를 혜택(복지)의 차원만이 아니라 기여(복지재정 즉 조세 및 보험료)의 차원에서도 살펴볼 때 분명해진다.
선별주의 복지의 경우 선별된 가난한 이들만이 복지 혜택을 받는다. 그렇지만 가난한 이들은 대부분 별다른 납세 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이다. 따라서 그 복지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것은 중간 소득층과 상위 소득층이다. 이 경우 복지 혜택은 거의 받지 못하면서 그 비용 부담은 전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중간 및 상위 소득층의 반발(조세저항)이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구나 어느 사회이건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나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중간 및 상위 소득층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강하다. 따라서 선별주의 복지를 하는 나라의 정치인들은 절로 복지 예산을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게 된다.
이에 반해 보편주의 복지의 경우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모두 동등한 복지 혜택을 받을 사회적 권리를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주의 복지에서 모든 이들은 ‘평등’하다. 모든 시민 또는 주민은 ‘필요’에 따라 복지 혜택을 분배받을 권리를 지닌다.
또한 보편주의 복지국가에서는 저소득층은 적은대로, 중간 및 상위 소득층은 많은 대로, 자신의 소득 대비 누진성의 원칙에 따라 더 많은 세금 즉 복지비용을 분담한다. 즉 보편적 증세(보편 증세)의 원리를 지킨다. 보편주의 복지국가에서는 모든 시민 또는 주민들이 각자의 세금지불 능력(즉 소득 및 자산)에 따라 그 비용을 분담한다.
간단히 말해,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기본적인 운용 원리는 “각자는 필요에 따라 분배받고, 각자는 능력에 따라 기여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일찍이 생시몽 등 초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우애적 협동조합의 원리로서 정초한 것인데,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우애와 협동의 원리를 개별적 협동조합을 넘어 한 나라 전체(우리 5천만 국민 전체)가 하나의 국가공동체, 사회공동체로서 작동하는 것으로 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지국가를 향한 ‘상상력의 정치’ - 잠정적 유토피아
보편적 복지국가 운동은 이제 겨우 출발점에 있다. 무상급식과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서 시작되어 이제 앞으로는 보편적 아동수당과 기초노령연금, 그리고 보편주의 원칙의 주거복지 및 도시계획, 그리고 문화예술-과학의 발전을 위한 공공 인프라의 구축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OECD 중간의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 OECD 중간 정도의 조세부담이 불가피하며 이를 위해서 2013년 기준 130조원의 추가 세수 확보가 필요하다 말하더라도, 그것은 학술적 논의에 불과하다. 대다수 국민들이 그 주장에 동의하며 폭넓은 복지국가 지지자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정치’가 필요하다.
예컨대 반값 등록금은 하나의 상상력이다. 완전 무상 등록금은 더 큰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이건희 회장을 포함하여 모든 65세 이상 노인에게 동등하게 향후 4년 뒤 1인당 월 50만원, 10년 뒤 월 100만원의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여 노인들의 삶이 즐거워지는 것을 꿈꾸는 것이, 그 꿈을 국민들이 함께 꾸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복지국가를 향한 상상력의 정치이다. (실제 스웨덴의 모든 노인들은 2013년 기준 일인당 우리 기준으로 120만 원가량의 기초(노령)연금을 – 국민연금 같은 소득비례 연금을 제외하고라도 - 동등하게 지급받고 있다). 더 나아가, 오늘날 스웨덴처럼 모든 노인들에게 온갖 의료-레저 설비가 완비된 저렴한 공립 실버타운을 제공하고 그리하여 노년 생활이 행복과 자유가 넘치는 모습으로 국민들이 상상하고 꿈꾸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복지국가 정치의 역할이다.
설령 4년 뒤 월 50만원, 10년 뒤 1백만 원의 기초노령연금에 필요한 추가적 복지예산이 30조 원(50만원의 경우)이고, 70조 원(백만 원의 경우)의 추가 예산이 소요될 지라도, 만약 국민들 개개인이 이런 꿈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 비용을 십시일반으로 감수할 것이다. 그 복지에 필요한 막대한 복지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단지 부자들만이 아니라 중산층, 그리고 저소득층들도 자기 소득에 (누진적으로) 비례하여 십시일반으로, 보편적으로, 세금을 납부한다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복지는 보편적 증세와 함께 가야 한다.
이런 멋진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 ‘부자 증세’부터 먼저 할 건지, 아니면 ‘보편적 증세’부터 먼저 할 것인지는 방법의 문제, 즉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의 문제이다. 물론 여전히 우리 국민들은 부유한 특권층의 탈세와 온갖 조세감면 혜택에 신물이 난 상태이다. 따라서 향후 몇 년간은 부유층에 대한 과세와 중세에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소득층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복지를 위한 재원 조달에 적극 참여하도로고 설득하는 것은 그들이 먼저 상당한 복지 혜택을 체험적으로 누린 이후에라도, 즉 노인연금 20~50만원과 반값 등록금, 무상 보육과 초중고 무상교육 등을 체험한 끝에, “이렇게 좋은 복지 혜택을 지금보다 훨씬 더 늘려서 그 좋은 혜택을 모두가 누리겠다는 건데, 나도 미약하나마 조금 세금을 더 납부하겠습니다”는 의견이 절로 그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을 때 시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꿈과 이상(理想)을 갖자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이야기하면 흔히 너무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1950년대 당시 미국 정부의 대외원조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의 내부 보고서에서 '밑 빠진 독'이라고 부를 정도로 경제 개발에 실패한 완전한 무능력자로 알려져 있었다. 1961년 경제개발에 착수할 당시에는 1인당 소득이 연간 82달러로, 당시 아프리카 가나의 179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은 우리의 2012년 1인당 국민소득은 연간 2만4천 달러에 달한다.
우리가 제시하는 스웨덴 수준의 복지국가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은 우리의 복지 수준이 OECD 최하위로 멕시코와 비슷하지만, 우리가 전 국민의 뜻을 모아 복지개발-인간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10년, 20년, 30년 뒤를 바라보면서 줄기차게 나아간다면, 10년 후 이탈리아 수준, 30년 후 스웨덴 수준의 복지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복지국가의 모범으로 알려져 있는 스웨덴의 경제사회 시스템 역시 평탄한 역사 속에서 구현된 것이 아니다. 『비그포르스 -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홍기빈)에 나오듯이 그것은 193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거의 반세기 가까운 기간에 온갖 정치경제적 논쟁과 대립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구축된 것이다. 스웨덴 역시 우리와 비슷하게 재벌 문제와 노동 문제, 복지 등 다양한 경제사회적 문제들에 직면했었으며, 그에 대해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공산주의는 모두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이런 여러 가치관․세계관들은 스웨덴 복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때론 대립하고 때론 협조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국가 스웨덴은 그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꿈과 이상(理想), 미래 비전의 집약체가 이념이다.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이념의 빈곤이 오늘날 민주 진보 세력의 위기를 낳는다. 민주당의 패배와 여러 진보 정당들의 혼란은 한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을 보여준다. 1980년대 386 세대의 등장과 함께 출현했던 NL과 PD, 그리고 1990년대 소련의 붕괴와 미국 자본주의의 융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융성한 각종 자유주우의 사조의 종말이요, 그것을 중심으로 하던 정치의 종말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정신과 세계관, 새로운 목표와 가치의 설정은 아직 뚜렷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까닭에 혼란은 무기력은 계속된다. 이제는 새로운 꿈과 이상(理想)에 대해, 새로운 가치와 목표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2부 토론_1|
민주주의는 ‘시장’의 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홍기빈_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권력의 재분배: 정치민주화와 경제민주화의 공통분모
경제민주화라는 말의 의미가 모호하다는 이야기가 작년부터 계속 나왔지만, 아직도 이 말의 정의는 ‘창조 경제’만큼이나 모호하다.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새기기 위해서 먼저 정치적 민주화의 의미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정치적 권력의 재분배’였다. 왕과 소수의 귀족들이 정치적 활동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보통 사람들은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물론 생각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아예 이 ‘자유’라는 말 자체가 불온시 되었다. 여기에서 대략 5백 년 전 정도부터 이러한 상태는 죽음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퍼져나가면서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과 토론의 자유 나아가 그렇게 해서 형성된 자신의 의견을 실현하기 위해 선출하고 또 선출될 권리 궁극적으로 정치적 영역 전체를 구성할 권리를 외치며 죽음을 불사하는 거대한 운동이 생겨났다. 이것이 시민 혁명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왕과 귀족을 폐지하거나 명목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그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정치권력을 혁명적으로 재분배하는 일이 나타났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이 되면 이러한 정치권력의 재분배만으로는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바로 경제 영역에서의 불평등과 권력의 독점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들과 민중들은 선거와 투표의 권리가 주어진다고 해도 이것으로 삶에서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조셉 프루동은 이를 일찍이 간파하고 1848년 혁명에 나서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불행은 선거권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고 갈파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경제 영역에서 자본과 소수의 지배 계급에게 여전히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압도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경제 권력을 빼앗아 재분배하자는 운동이 나타났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시작이다.
20세기 스웨덴과 독일의 걸출한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여러 번 지적했듯, 이런 면에서 보자면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의 ‘해방’의 프로젝트의 연속선에 있으며, 자유주의의 정신적 상속자이다. 단,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정치 영역에서 성취한 것으로 멈추는 반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이 성취한 것을 사회 경제적 영역으로 본격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민주주의는 사회 경제 영역의 민주화 운동이라고 정의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민주주의와의 공통점 위에서 덧붙여야 할 쟁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회적 시민’의 문제요 또 하나는 ‘시장’의 문제이다.
‘사회적 시민’ : 모든 개인은 자신과 사회의 경제적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
발표문에서도 지적되고 있지만, 이 경제 권력의 재분배로서의 경제 민주화는 공산주의부터 진보적 개량적 자유주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권력의 재분배’라는 원칙만으로 경제 민주화가 선명하게 정의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회적 시민을 위한’ 권력의 재분배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 필요하다.
민중들이 봉기하여 왕 혹은 귀족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빼앗아오는 일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고대 시절에 숱하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이며, 아테네는 그 불멸의 유산이다. 하지만 근대의 시민 혁명이 이러한 고대로부터의 민중 봉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근대의 혁명은 칸트의 말대로 ‘자치적 시민’이라는 준거점으로 권력의 재분배라는 행위에 일정한 제한과 방향성을 둘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고대의 민중들은 봉기하여 스스로가 지배 계급이 되었다. 하지만 근대의 시민 혁명은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왕과 귀족의 모든 권력을 다 빼앗아오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지배 계급의 성격과 숫자만 달라질 뿐 지배라는 행위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자치적 시민’이었다. 즉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여 스스로 행동하는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만큼의 정치적 권력으로 의미를 제한하여 여기에 해당하는 만큼의 권력을 재분배한 것이다.
이 점을 경제 영역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 이래의 공산주의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의 프로젝트는 사실상 경제적 권력을 모조리 빼앗아 와서 이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반면 사회적 자유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경제 영역은 ‘시장’에 맡겨두어야 한다고 보므로, 이들이 생각하는 경제 권력의 재분배란 그저 지극한 비극을 막는 소극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정치적 시민 혁명에서의 ‘시민’ 개념을 확장하여 ‘사회적 시민’의 개념을 가져온다면 이 둘 사이의 길을 찾아나갈 수 있다.
오늘날 특히 한국의 민중들이 가장 절망하는 것은 단순한 (상대적)빈곤 때문이 아니다. 자기가 아무리 기를 써보아야 자신의 경제적 운명을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고 만들어갈 수 없다는 비관적 전망이 훨씬 더 큰 이유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냥 돈을 준다든가 그냥 편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땀 흘려 배우고 익히고 일하여 스스로가 원하는 형태의 경제적 삶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경제적 운명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무제한의 경제적 재분배나 무제한의 경제적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스스로가 이 ‘사회적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만큼의 권리 즉 스스로 일할 능력을 키우고 일하여 스스로의 경제적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필요한 만큼의 권력을 달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7년 6월 거리의 ‘정치적 시민’은 이제 ‘사회적 시민’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장’의 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방금 말한 종류의 경제 민주화의 원칙은 분명히 시장이라고 하는 경제 영역의 작동과 모순된다. 자유주의자들이 민주화를 정치 영역으로 국한시켰던 것은 경제 영역은 ‘시장’이라는 신성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또 지배되어야 한다는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이 ‘시장’이라는 영역은 자유주의자들이 믿었던 것처럼 그렇게 모든 이들이 자기가 생산에 기여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것을 돌려받게끔 보장되어 있는 그런 메커니즘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밝혀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급기야 시장의 작동에 맡길 경우 인구의 다수는 스스로의 경제적 운명을 전혀 개척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이 ‘시장’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서 ‘시장’을 뿌리 뽑자는 극단적인 공산주의의 입장까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방금 말한 ‘사회적 시민’의 원칙에서 보자면 이 ‘시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답도 도출된다. ‘시장’은 ‘사회적 시민’의 확립에 도움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그렇게 되는 방식으로 통제되고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을 폐지하거나 억압해야 할 선험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시장’은 시민 혁명 이전부터 개인을 확립하고 사회의 온갖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한 장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신성한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사회적 시민’을 확립한다는 사회적 목적에 부합하는 충실한 종이 되도록 재구성되어야 한다. 요컨대, 산업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인 문구를 바꾸어 표현하자면, 경제 민주화의 요구는 ‘시장’의 문 앞에서 멈추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2부 토론_2|
6·10 민주항쟁의 현재적 의미와 계승 방안
이상구_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영위원장
6월 항쟁의 의미와 한계
○ 6월 항쟁의 성과
- 10. 26과 12. 12로 이어진 30년 독재정권의 실질적 종식과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폭력 진압의 반작용
-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승리를 통한 절반의 민주주의 달성
- 6.29선언을 통한 사실상의 항복 선언에도 불구하고 3당 야합 전략으로 인한 또 다른 민주화의 후퇴 초래
○ 6월 항쟁의 한계
- 민주주의 구체적 구현에 대한 조직적인 준비와 체계적인 고민 없이 자연발생적인 학생운동과 시민저항 운동으로 진행 : 이집트, 중동, 터키의 민주화 운동?
- 군사 정권의 물적 토대에 대한 단절 및 대안 정치 체제에 대한 준비 없이 진행된 주먹구구식의 혁명
- 정치적으로 87년 체제의 정착으로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보수적 양당 정당 체제의 고착 초래 ⇒ 여야를 넘나드는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정당 명부식 비례 대표 제도 도입이나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 및 대통령 중심제 이외의 집권 체제에 대한 논의 차단 등 이후의 정치적 발전은 정체
- 경제적으로 주주 자본주의의 확산 및 IMF 체제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단초를 제공 ⇒ 기존의 재벌 대기업 중심의 왜곡된 경제구조 정착,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이후 26년 동안 더 이상의 고용 창출도 없고 소득분배 구조는 악화되는 형태로 고착되면서 경제 성장률 저하, 내수 위축 등 한계에 도달함
○ 6월 항쟁 정신의 발전적 해석
- 미완의 혁명의 완성 : 비례 대표 확대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정당 정치의 회복 등 정치 구조 개편을 통한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정착
- 정치적 민주화의 한계를 넘어 경제적 민주화로 발전 방향의 제시
- ‘87년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복지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도입
-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개개인의 삶의 실질적인 자유를 가로막고 있으므로, 정치적 자유를 넘어서는 경제적 자유를 포함하는 “실질적 자유”에 대한 발제자의 문제제기는 타당함
2. 6월 항쟁 정신의 계승과 발전: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에 대한 시대적 요구
○ 6월 항쟁의 미수금 정산 : 준비 안 된 민주정부의 출현
- ‘87년 이후 노태우 정부와 문민정부를 넘어, 10년 만에 민주정부 출현
- ‘87년 체제 이후 구체적인 사회경제 체제에 대한 대안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 각종 민영화와 외환 자유화는 결국 외환 위기로 연결되어 IMF 체제를 초래함
- ‘98년 민주정부의 출범과 ’03년 참여 정부의 출범에도 주주자본주의의 심화 등 신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 체제의 고착과 심화
- 수출 관련 분야의 유래없는 호황과 내수관련 분야의 지속적인 불황,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극화, 소수의 대기업과 다수의 중소기업으로 양극화, 소수의 고소득자와 다수의 저소득자로 양극화 하면서 중산층이 붕괴되고 대다수 국민들의 삶이 어려워지는 등 총체적인 경제위기에 봉착
- ‘87년 이후의 가장 극적인 정치적 변화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출현한 보편적 복지를 중심으로 하는 복지국가 담론의 대두
○ 복지국가 담론의 확산과 성장 과정
- 10년 동안의 민주정부 집권기의 각종 개혁 조치와 다시 출현한 5년간의 과거 회기식 토목건설 중심의 성장국가론에도 불구하고 일자리 창출, 소극 분배 개선, 일상적인 삶의 비용 부담 완화 등 더 이상의 국민들의 삶의 개선이 없자 새로운 대안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높아짐
- 무상급식 정책을 계기로 기존의 체제에서 이득을 얻는 보수 세력과 새로운 대안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진보 세력으로 정치적 구도가 나누어지는 전선이 형성됨
- 새로운 시대정신을 외면한 한나라당은 지방선거에서 패배하고, 이를 거부한 오세훈 시장이 중도사퇴를 하면서, 박원순 시장이 집권하는 등 정치적 변화가 시작됨
-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고 승리의 경험도 망각한 채 과거의 정치구도에 집착한 민주당은 총선과 대선에서 연이은 패배를 하게 됨
- 반면 시대적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한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에 전향적으로 대응하면서 상대편의 이슈를 오히려 선점하였고,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기게 됨
- 집권 세력의 정체성과 선거에서 내세운 이념과의 불일치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대통령 업무보고, 장관 인선 등의 여러 과정에서 국민들의 실망과 집권 세력 내의 갈등을 야기하고 있으며,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한계로 작용할 것임
- 독일 기민당 식의 국가개입을 통한 수정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전략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국가모델 연구모임(남경필 의원)이 새누리당 내에서 태동하고 있으며, 민주당 내에서도 독일의 사민당식 모델을 지향하는 혁신과 정의의 나라 포럼(원혜영 의원), 복지국가 모델을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의원모임(인재근 의원)에서 복지국가 모델에 대한 10회 연속 세미나를 진행하는 등 단순히 경제민주화나 정치시스템의 변화를 넘어 국가 모델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
3. 6월 항쟁 정신의 궁극적 완성 : 시대정신으로서의 복지국가
○ 경제민주화를 넘어 복지국가로
- 재벌개혁과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우선론(정운찬, 김광수, 김대호, 장하성) 및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병행론(이병천, 유종일, 김상조, 정태인) 모두 복지국가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부족한 측면이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 서서히 “복지국가론”으로 수렴되고 있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음
- 재벌 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공정 시장 정책이 재벌체재 붕괴 보다는 총자본의 이득으로 결과 될 우려에 대한 지적, 대중소기업 공정거래 정책만으로는 소득재분배가 연간 20조원 이내에 불과하다는 한계 지적, 그리고 경제민주화 정책 모두가 노동소득 분배율을 10% 수준으로 까지는 개선시키지 못하는 한계에 대한 지적은 실증적 연구를 통한 보완과 더불어 경청할 필요가 있음
⇒ 비정규직 및 파견 노동의 제한과 금지, 실질 임금의 감소 없는 노동시간의 획기적인 단축과 일자리 창출, 최저 임금 인상, 전국적 산별 노조의 구축, 단체 교섭 협약의 적용률 확대 등의 복지국가 정책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함
⇒ 무상보육, 아동수당, 고등학교 의무교육과 실질적인 대학 등록금 경감 정책, 모든 의료비를 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하는 의료보장 정책, 기본적인 주거 수준을 보장하는 월세 보조를 포함하는 적극적 주거복지 정책, 장기요양 보험의 확대 등의 노인 돌봄과 기초연금의 확대 등의 적극적인 노후 소득보장 정책 등 보편적 복지국가 정책의 동시 시행이 되어야 실질적인 가처분 소득 증가와 내수 진작을 통한 실효성 있는 일자리 창출과 창조 경제를 통한 경제 활성화가 가능해 짐
○ 6월 항쟁 정신의 계승 : 정치적 자유를 넘어 국민의 실질적 사회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운동으로 승화
- 미완의 혁명을 완성하는 것은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경제적 민주화로, 독재타도나 대통령의 교체를 넘어 실질적인 새로운 국가모델로의 전환으로 가능할 것임
- 여러 분야에서의 분절적인 노력들이나 여러 가지 sub-system의 변혁 운동이 이미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고 있음
⇒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
⇒ 보편적 증세 운동
⇒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 실질적인 경제 민주화 정책
⇒ 다양한 복지국가 사회정책
⇒ 지역 구도의 양당 체제를 극복하는 정치 개혁 운동
- 6월 항쟁의 계승은 전체적이며 유기적인 변화를 포함하는 복지국가 운
동으로의 전환을 통해 실현 가능해 질 것임
[발제 보완글]
1. 경제민주주의의 세 가지 프레임
□ 자유주의 : 공정한 시장질서가 경제민주주의
○ 경제민주화의 실체는 불공정한 시장질서의 개선을 통한 ‘공정한 시장질서
○ 공정한 시장질서란 무엇인가?
- 완전 경쟁 시장 : 독과점이 없고, 경제력 집중이 없는 시장
- 시장 독과점의 규제를 통해 완전 경쟁 시장을 창출
- 경제력 집중 규제(재벌규제), 경제력 집중의 완화/약화를 통해 완전 경쟁 시장을 창출
- 대중소기업간의 불공정 거래에 대한 규제를 통해 대중소기업간 동반성장
○ 공정거래위원회의 핵심적 역할
- 공정거래 관련 법률의 제정/개정이야말로 경제민주화의 본질
- 공정거래위원회 중심의 경제민주화
- 재벌규제(순환출자 규제, 출자총액제한, 지주회사 규제, 금산분리 등)를 책임진 공정거래위
- 하도급(원하청 거래) 규제기관으로서의 공정거래위
○ 재벌개혁은 경제력 집중 완화/약화
- 재벌그룹의 계열사 감소(매각+해외매각 등)가 목표
□ 사회민주주의 : 종업원 공동결정제가 경제민주주의
○ 종업원 공동결정제란 무엇인가?
- 대기업의 이사회에 종업원 대표가 주주(소유주)의 대표와 동수로 참여하여 사장 등 경영진을 선출
- 종업원 대표는 종업원(노동자 및 부장급 이하 전종업원)의 직접 투표로 선출
○ 공동결정제와 재벌개혁
- 삼성전자, 현대차, LG(주), SK(주)의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이사회에 종업원 대표가 참여
- 지주회사의 경우: 재벌그룹의 지주회사인 LG(주), SK(주)에 LG와 SK의 수십만 종업원을 대표하는 이사가 직접 참여
- 非지주회사형 재벌그룹(삼성, 현대차 등)의 경우 : 그룹 이사회의 합법화(기업집단법의 제정)와 그 그룹 이사회에 종업원 대표의 참여
- 효과 1: 재벌 가문의 사적 이해관계 추구를 원천 봉쇄; 재벌 가문의 편법/불법적 경영권 승계와 사적 이익 추구(조세회피처에 자금 은닉 등)을 원천 봉쇄.
- 효과 2: 기업그룹 체제의 긍정적 효과(계열사간 상호 지원)를 유지
- 효과 3: 기업그룹 내 종업원/노동자의 지위와 발언권을 획기적으로 향상
○ 노동권 신장과 중소/영세기업
- 중소/영세기업 보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소/영세기업에서 일어나는 저임금 착취의 원천 봉쇄와 그 종업원들의 보호
□ 진보적 자유주의 : 공정시장 질서 신장과 노동권 신장의 동시 추구
○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의 우선적 중요성
- 자유주의 일반과 동일한 시각에서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재벌규제, 대중소기업 거래 규제)의 우선적 중요성을 주장
○ 재벌개혁과 무관한 종업원 공동결정제
- 재벌개혁-경제민주화의 본론이 아닌 부록에 등장하는 종업원 공동결정제
- 공동결정제와 노동권 신장은 재벌개혁(공정시장 질서 중심의)과는 무관한 것으로 전제
- 종업원 공동결정제를 찬성하나, 그렇지만 본론이 아닌 부록에만 등장
- 노동권 신장(비정규직 차별 해소, 산별노조 승인)을 지지하나, 그것 역시 경제민주화의 본론이 아닌 부록에 등장
2. 복지 + 증세에 관한 두 가지 프레임
□ 선별주의 복지와 부자증세 프레임
○ 부유한 계층을 복지 수혜 대상에서 제외
- 부유한 시민/국민들의 사회복지 권리를 부인: 소득조사, 자산조사를 통해 파악된 부유한 자에게는 국가적 사회복지의 수혜를 받을 권리를 부여하지 않음
- 한정된 복지예산을 가난한 시민/국민들에게만 집중적으로 투여함으로써 사회적 평등을 높이는데 주력
○ 복지예산의 확대를 위한 증세의 대부분은 부자 + 중산층이 담당
- 부자들과 중산층, 대기업이 증세 부담의 대부분을 부담해야 함
- 동시에, 부자들과 중산층(대기업 근무 중산층=민주노총 조합원도 포함)은 복지 혜택의 대상에서 원천 제외
- 따라서, 부자들의 맹렬한 증세 반대 캠페인과 동시에, 중산층에 있어 복지예산 확대에 대한 무관심 또는 소극적 반대가 필연적(민주노총 소속 중산층 조합원들의 소극적 태도)
○ 최소주의 복지국가
- 부자와 중산층의 눈높이가 아닌, 극빈층/빈곤층의 소박한 눈높이에 맞추어진 낮은 수준의 복지국가 (예컨대, 무료급식, 공교육, 공공주택의 질적 수준 저하)
□ 보편적 복지 + 보편적 증세의 프레임
○ 부자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동등한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권리
- 소득조사, 자산조사가 불필요하므로 그것을 위한 행정비용 감소
- 부자들에게도 동등한 사회복지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법 앞에서의 평등”을 넘어, “사회적 권리 앞에서의 평등”을 보장
○ 복지예산 확보를 위한 증세를 누진적 조세의 원칙에 따라 모든 시민들이 공동으로 분담
- “능력(조세부담 능력)에 따른 보편적, 누진적 조세 분담”의 원칙
- 조세부담 능력이 높은 부유층에게는 소득에 비례하여 누진적으로 높은 세율 (예컨대 연 10억 이상 소득에 대해 75%의 세율로 과세)
- 조세부담 능력이 낮은 빈곤층은 소득에 비례하여 낮은 세율 (예컨대 연 2천만원 이하 소득에 대해 5%의 세율로 과세)
○ “각자는 능력에 따라 기여하고, 각자는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
- 협동조합의 원리에 구현된 협동과 우애의 원칙 (생시몽)
- 개별적 협동조합을 넘어, 5천만 국민 전체가 하나의 단일한 사회공동체로서 협동과 우애
○ 부자들/중산층의 눈높이에 맞추는 높은 질의 복지국가
- 부자들/중산층도 동등한 사회복지 혜택을 부여받으므로, 그들을 적극적으로 국가적 사회복지 혜택 확대에 관한 논의에 참여시킬 수 있음
- 따라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를 모든 국민들에게 동등하게 제공 (사립학교보다 더 질 높은 국공립 어린이집-유치원-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등), 더 질높은 학교급식과 공립 도서관 등; 질 높은 공공주택 등).
3. 노인연금 개혁에 관한 여러 가지 프레임
□ 노인연금의 두 가지 기본 프레임
◌ 자유주의 모델 : 사적 계약 모델(시장 모델)
- 개개인의 가입/탈퇴의 자유 (“선택의 자유”)
- 등가 교환 (시장 원리 교환) : “내간 낸 보험료(국민연금)을 내가 탄다”,“내가 낸 보험료로 왜 남들(국민연금 미납부자)에게 혜택을 주는가?”
◌ 사회민주주의 모델 : 공적 계약 모델 (복지국가 모델)
- 세대내, 세대간 연대의 원리; 따라서 개인적인 가입/탈퇴가 불가능
비등가 교환(협동/우래적 원리의 교환) : “기여(조세/보험료 지불)하지 않은 자라도 탈 수 있다”; “더 많이 기여(조세/보험료)했더라도, 남들과 동등한 혜택을 얻는다”.
□ 노인연금에 대한 3가지 프레임
1. 가족공동체 모델 : 일명 ‘효자 모델’(전근대적 모델)
2. 적립식 공적 연금 모델 : 일명 보험 회사 모델 (자유주의 모델)
3. 부과식 공적연금 모델(Pay-As-You-Go) : 일명 사회연대 모델 (사회민주주의 모델)
○ 가족공동체 모델의 붕괴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와 함께 전통적인 가족공동체 모델은 이미 1980년대부터 붕괴
○ 적립식 공적연금 모델인, ‘국민연금’이 활동을 시작
1990년대 초, 국민연금 제도가 시작
보험금(국민연금 보험료)을 적립하여, 그 적립금을 금융시장에 투자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의 핵심인 국민연금/군인공제회/교원공제회 기금)
수익성 지상주의 : “개 같이 벌어서, 청승처럼 쓰자”(투기자본 돈줄로서의 국민연금)
주주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의 국민연금 <==> 국민연금의 재벌기업 의결권 강화?
적립금 고갈의 위험(2060년) => 납입 보험료(적립금) 대비 갈수록 낮아지는 수혜금)
○ 부과식 공적 연금(기초노령연금, 기초연금)
노무현 정부 하에서 기초노령연금이 시작; 선별주의 원칙 : 소득 상위 30%를 제외; 최소주의 원칙 : 선별주의 복지 원칙 + 최소 혜택의 원칙(“용돈 수준의 기초노령연금”)
□ 노인연금, 프레임의 전쟁 : 자유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 자유주의 : 국민연금(적립식/보험료식 공적 연금)을 중심으로 하는 노인연금 제도
- 자기책임 원칙, 자기 지불의 원칙 (국민연금을 사적 보험금의 적립으로 이해)
적립금 고갈 위험에 대한 끊임없는 강조(사적 보험금으로서의 국민연금) => 국민연금 혜택의 지속적 축소
기초(노령)연금은 최소로 줄이고, 국민연금을 위주로 노후연금을 설계
◯ 사회민주주의 : 기초연금(부과식/조세식 공적 연금)의 대폭 확대
자기책임/자기지불이 아닌 세대간/세대내의 사회적 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기초연금
연금기금을 적립(따라서 금융자본으로 운용)하지 않고, 바로 필요한 자들에게 지불 (“각자는 필요에 따라 혜택 받는다”는 원칙을 관철)
기초연금의 확대에 필요한 누진적 조세(보편적 조세) 확대를 과감하게 실천(“각자는 능력에 따라 기여한다”는 원칙을 관철)
==> 노인 일인당 20만원을 넘어, 50만원(4년 뒤), 100만원 (10년 뒤)를 상상하자.
==> 이건희 회장과 같은 부자 노인들에게도 동등한 기초(노령)연금 혜택을 주자.
==> 그에 필요한 막대한 추가 복지예산(4년 뒤 40조원, 10년 뒤 70조원)을 부자증세+보편증세로 해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