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프랑스 영토에 봉토를 가지고 있던 오만한 영국 출신의 귀족들을 무력으로 내쫒음, 그러나 아키텐은 제외함, 신성로마제국과의 동맹...프랑스 남부국경지대인 툴루스에 아라곤세력이 약탈을 자행하며 간간히 쳐들어오고 있으나 특별한 위협세력은 아님
2.그보다 시급한 것은 영국과의 국교 정상화가 절실해졌음 브루고뉴와 앙쥬를 영국으로부터 탈환했으나 아직까지는 본토의 영국군을 무시할수는 없는지라 영국에서 프랑스로 넘어오는 관문인 플랑드르의 방위를 강화하였음.....
3.한편 성요한기사단이 트리폴리에 대한 십자군의 원정을 호소하며 프랑스 국왕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음, 살펴본바 이미 트리폴리는 강력한 이교도세력에 의해 장악된것으로 파악됨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립 1세는 국가와 교회의 위신을 떨치기 위해서 성요한기사단의 간청을 승낙,결국 일드 프랑스에서 십자군을 모집하였음
4.제 1차원정==) 트리폴리 지역은 아무래도 가망성이 없다고 판단한 필립 2세는 이집트와 비잔틴의 혼전양상을 보이고 있었던 콘스탄티노플로 원정을 떠나기로 계획하였음, 그러나 분명 떠날때는 이집트의 영토였던 콘스탄티노플이 불가리아에 당도할 무렵에는 비잔틴의 영토로 다시 바뀌어 있었음, 프랑스 십자군은 더 이상 이교도의 영토가 아닌 콘스탄티노플을 어리둥절 바라보며 한 동안 당황했으나 결국 목표 달성을 위해서 비잔틴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음
프랑스 십자군 1200명은 일시에 콘스탄티노플을 기습함, 겨우 400가량이 방어를 하던 콘스탄티노플은 쉽게 함락됨. 프랑스 십자군의 성당기사단장인 리옹 드 부용 경은 그 공로가 인정되어 콘스탄티노플의 대공으로 임명됨 그러나 대공에 임명된지 10년만에 계속되는 비잔틴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됨..
5.프랑스 본토의 유일한 영국령인 아키텐이 남쪽의 아라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음, 영국국왕인 헨리 2세는 예전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공주를 보내오며 동맹을 청하였음. 더이상 영국과 싸울 이유가 없었던 필립1세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며 아라곤에 대한 선전포고를 함. 그러나 결국 아키텐전투는 영국의 패배로 끝나며 아라곤의 수중으로 들어갔음,
6.프랑스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아라곤의 수중으로 들어간 아키텐을 공격하였으나 어이없게도 그때 교황이 개입을 함, 상호간에 10년간은 전쟁을 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화해를 요구하였음
1130년~ 1170년 프랑스의 전성기
1.아라곤과 프랑스의 싸움은 스페인의 개입을 불러옴, 스페인의 왕인 페르디난드는 사절단을 보내오며 동맹을 청하였음 당시 이베리아 남쪽의 이교도세력인 알모하드는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농민폭동 때문에 스페인과의 싸움에 계속해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스페인입장에서는 자연히 눈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음, 필립2세(필립1세 승하)는 스페인의 이익과 프랑스의 이익이 일치함을 인지하고 페르디난드의 동맹간청을 수락하였음
2.그러나 스페인과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음, 프랑스가 아라곤의 수중에 있는 아키텐을 탈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성난 교황이 같은 카톨릭국가를 공격한다는 이유로 파문선고를 내려버렸기 때문임, 그런데 공교롭게도 동맹인 스페인이 십자군을 조직하여 우리 영토를 노리며 진군중이다는 소식이 전해오고 있음,
필립2세는 페르디단드 국왕에게 더이상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서신을 밀사를 통해 전달하였으나 광신적이고 누구보다도 교황의 충직한 신하를 자청했던 페르디난드에게 있어서 교황의 적은 모두 자신의 적이였으므로 필립2세의 정전요구는 자연히 묵살되버리고 맘
3.성난 노도와 같은 스페인 십자군은 순식간에 아키텐을 치고 들어왔음 아키텐의 대공이였던 시몽 드 브르와는 숫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십자군의 상대가 될수 없음을 알자 급히 농성마져도 포기한체 부르고뉴로 후퇴하였음, 그제서야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한 필립2세는 일드 프랑스의 왕국 최고의 정예친위대를 이끌고 앙쥬로 이동함, 툴루즈의 왕세자 군단과 합세하여 아키텐을 공격하기 위해서였음
스페인 십자군은 아키텐을 함락시킨후 부르고뉴까지 진출하였으나 그로인해 군단의 집중력이 분산되고 전력이 약해짐에 따라 군사적 우세는 일단 스페인쪽에서 프랑스쪽으로 바뀜, 필립2세는 직속 친위대와 툴루즈의 왕세자 군단, 바다를 건너온 플랑드르와, 노르망디의 지원병력을 모두 아키텐으로 투입시킴 (1700명 가량),, 상대인 스페인은 십자군에 2개군단이 포함해 거의 3천명 이상이었음, 결과는 프랑스의 패배..... 피해상황으로는 프랑스 국왕이 전사하고 왕세자는 포로가 되는 수모를 당함,(스페인 병력손실 포로포함 1233 프랑스 병력손실 1347)
그러나 부르고뉴에서 공화파의 난이 일어났기 때문에 스페인은 그곳에서만큼은 철군하지 않을 수가 없었음..일단은 아키텐을 제외하고는 전 프랑스 영토를 수복함
4.필립 2세의 사망으로 프랑스는 파문국에서 다시 정상국으로 복원되었음..따라서 스페인 역시 전쟁의 명분은 더 이상 없었으나 페르디난드는 계속해서 간혈적으로 앙쥬와 부르고뉴로 병력을 보내며 싸움을 걸었음.. 그때마다 순조롭게 격퇴시키니 지금의 국면은 마치 휴전상태와 흡사함
5.새롭게 프랑스의 왕에 오른 샤를 1세는 스페인에게 공주를 보내며 강화협정을 제안하였으나 계속해서 프랑스와 전쟁을 할것이라는 스페인의 다짐만 재확인함, 그러나 조금 지난후에 스페인은 프랑스와 강화협정을 제 발로 맺을수밖에 없었음, 왜냐하면 남쪽의 알모하드가 대군을 이끌고 레온을 급습했기 때문임
6.이베리아에서 강력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스페인의 위기는 너무도 빨리 찾아왔음 이교도의 대군은 카스티야까지 진격하였으며 카스티야의 군단은 곧 괴멸되었음, 레온에서 충성파들이 난을 일으켰으나 그것마져도 제압되고 맘...기회를 놓지않았던 샤를 1세는 이교도를 막기위해서 병력이 빠져나가 거의 무방비나 다름없는 아키텐을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고 재수복에 성공함
7.이베리아의 카톨릭국가였던 스페인이 멸망함...그 후 간혈적인 폭동이 있었으나 곧 제압됨..이베리아의 이교도세력은 스페인을 멸망시켰지만 같은 카톨릭 국가인 아라곤과는 동맹을 맺었음, 아마도 프랑스까지는 넘보지 못할 것임...
그로부터 약 수십년간 프랑스는 평화가 지속됨, 이 시기에 많은 건물들이 축조되었으며 많은 선단과 해군이 창설되었음, 특히 프랑스해군은 북해를 장악하고 북아프리카의 항구도시인 모로코까지 진출하는 등 이 시기는 프랑스의 최전성기라 할만함...무역도시인 플랑드르와 아키텐, 툴루즈, 브르고뉴, 노르망디등은 경제적으로 크게 번창했으며 내륙의 일드 프랑스, 상파뉴, 앙쥬등의 도시 역시 크게 번영 발전하였음...
프랑스의 쇠퇴기 (1170~1235년)
1.평화가 계속되자 호전적이었던 기사단과 군인들은 싸움거리를 찾고 싶어했음. 이들에게 있어서 평화란 따분한 것이었으며 자신들의 남성다움을 위해서는 전쟁은 꼭 필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임...그런데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오고 있었음..이탈리아가 교황령을 공격함으로써 파문당했기 때문임
2.곧 십자군이 조직되어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진격하였지만 참담히 패배함...그로인해 왕의 영향력이 많이 감소하고 신하들의 불만이 계속 쌓여감...
3.샤를 2세의 후계자인 앙리 3세는 무능한 왕이었음..계속해서 국력을 소진하며 십자군을 만들었지만 계속된 실패로 내란까지 일어남...내란은 곧 쉽게 진압되었지만 차츰차츰 국력이 소진되고 있었음..
4.이베리아반도를 모두 통일한 알모하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모로코 근해에 있던 프랑스해군 3선단을 포르투갈 근해쪽으로 이동시킴(모로코 근해에 있던 알모하드의 해군선단의 수가 더많았으므로 전쟁이 발생하면 프랑스쪽의 피해가 우려되었기 때문임)...그리고 북해의 선단을 이베리아 동쪽해안으로 급히 증파함.. 알모하드와의 국경인 아키텐의 병력을 증강시킴...영국왕이 공주를 보내옴...
5.알모하드의 해군선단의 포격을 시작으로 이교도와의 싸움이 시작됨..바다에서는 프랑스가 우세했으나 육지에서는 알모하드가 우세할것으로 예상됨..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국가가 알모하드였음..
6.알모하드는 대병을 몰아 아키텐을 공격하였음 엄청난 수의 병력을 맞아 프랑스의 주력군단인 아키텐 대공의 군대는 싸움을 포기한체 부르고뉴로 퇴각하였음...그런데 공교롭게도 때맞춰 동시에 그동안 군사를 모으고 있었던 아라곤까지 북상...툴루즈의 군단마져 괴멸됨...
너무도 갑작스러운 기습에 앙리 3세는 당황, 선친이 스페인과 싸웠던 방법으로 적의 병력을 분산을 유도하면서 계속해서 후퇴명령을 내렸으나 상대방의 병력이 너무도 압도적이므로 그 방법은 통하지 않았음...수년도 안되어 부르고뉴의 군단이 괴멸되고 때 맞춰 내전마져 발생하니 프랑스의 운명은 갑자기 풍전등화가 되버렸음..
앙쥬에 있던 앙리3세는 일드 프랑스에서 또 다시 십자군을 일으켰으나 알모하드에 비해 프랑스 병력은 너무도 소수였음.. 게다가 일드 프랑스와 노르망디에서 내란까지 발생하니 이미 프랑스의 운명은 정해진듯 보임...
그러나 앙리3세는 시종장관인 부용에게 군권을 위임.. 앙쥬에 십자군을 포함한 프랑스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니 그 수는 대략 1600이 조금 넘었음..그에 비해 프랑스에 들어와있는 알모하드의 병력만 해도 모두 합쳐 대략 8천이 넘어가고 있었으므로 매우 힘든 상황이였음 그리고 영국으로 인해 플랑드르의 병력은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병력이 프랑스로써는 최대규모였음..
프랑스의 국운을 건 아키텐에서의 마지막 전투는 매복전술과 유격전 추격전을 구사하는 프랑스군과 많은 숫자로 밀어부치는 정공전략을 쓰는 알모하드 군대의 수시간에 걸친 전투였음..
프랑스의 불굴의 전사들은 무섭게 적을 내려치고 적의 진영을 해집어놓으며 초반에 승기를 잡았지만 중후반으로 갈수록 알모하드의 물량공세에 속수무책일수밖에 없었음..
결국 부용의 왕실기사단과 봉건기병대, 기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보병들은 사기를 잃고 퇴주하였으며 프랑스군의 대부분이 포로가 되거나 사살되었음..
프랑스는 이 전투 이후로 전투 다운 전투를 하지 못했음...플랑드르의 병력만이 아직까지는 희망이었으나 그 당시의 프랑스 영토가 상파뉴와 플랑드르밖에 없었으므로 플랑드르는 무슨수를 써서라도 사수해야 할 곳이었음..
7.동맹국인 신성로마제국이 개입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은 후였음..플랑드르와 상파뉴가 포위된 상태에서 신성로마제국군이 계속해서 원군을 보내주었으나 그때마다 알모하드의 군대에 패하였음..
첫댓글 재밋는 글입니다^^ 그리고 나라를 넓히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필립 2세에게 경의를........
엄숙하게~ 경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