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개의 백비(白碑) ●
백비는 묘비에 글자가 없는 무자비(無字碑)를 말한다.
아시아권에 여러 무자비가 있지만 가장 유명한 3대 백비는,
① 중국 3대 악녀 측천무후의 건릉백비
② 중국 13릉 만력제의 신공성덕백비
③ 조선 3대 청백리 전남 장성의 박수량백비
중국의 두 사람과 조선의 박수량 백비 의미는 정반대이다.
측천무후와 만력제는 악행 외에는 적어 넣을 업적이 없어서이고, 박수량은 너무나 청렴해서이다.
*측천무후 백비
당나라 고종 황제의 황후였지만 황태자인 아들 둘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제가 된 여성. 스스로 주나라를 세워 15년 간 중국을 다스린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악녀 여황제.
중국 섬서성 함양시에 위치한 당 고종과 측천무후가 함께 묻힌 건릉(乾陵)의 무자비(無字碑)에는 측천무후 曰: 자신의 공덕이 커서 너희들이 기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자비(無字碑)를 세우게 했다. 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만력제 백비
북경에서 서북쪽 창평현에 천수산(天壽山)이 있고, 이 산속에는 명 왕조의 13명의 황제의 능이 모여 있는데 이곳을 명13릉(明十三陵)이라한다. 그 중 만력제의 신공성덕비가 유명한 무자비(無字碑)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만력제 자신이 생각하기에 공적이 너무 크고 많아서 이곳에 다 새길 수 없다라고도 하고, 자신의 공덕을 기록하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했지만 만력제의 태만이 워낙 유명하여 실제로 그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결국 기록할 것이 전혀 없어서 무자비(無字碑)가 되었다 한다.
※ 장성군 청백리 정혜공박수량 백비
살아서는 염근리(廉謹吏), 죽어서는 청백리 (淸白吏)라고 하는 조선시대 총 217명 중에서 감사원에서 선정한 3대 청백리는 황희, 맹사성, 박수량이다.
▲ 청백리 정혜공 박수량백비
박수량(1491~1554)은 자(字)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我谷), 시호는 정혜(貞惠)공, 본관은 태인이며, 1491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종원의 2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명종 1년과 6년, 두 번이나 청백리에 오른 판서를 했지만, 한양에 집 한 칸 없이 셋집에 살았다.
23살에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 예조좌랑, 형조정랑, 병조정랑, 나주목사, 호조판서, 한성판윤, 전라도관찰사, 좌찬성지, 중추 부사 등 39년간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46년(명종1년)에는 동지춘추관사로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자식들이 서울에 집을 지으려고 하자 분수에 넘친다며 크게 꾸짖었다.
참판시절 어머니 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와 삼년상을 치를 때, 그의 청렴을 못마땅해 하는 세력들로부터 “상주가 호의호식을 하며 지낸다”는 투서를 받은 명종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사실 확인을 한 후의 “집은 비가 새고 굴뚝에서는 한 달에 절반은 연기가 나지 않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았다.
명종이 청백당(淸白堂)이란 현판과 함께 99칸의 기와집을 하사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고 현판만 남았다.
▲ 후손들이 보관해 온 청백당 현판
장성군은 2008년 선생의 생가가 있었던 [홍길동테마파크] 내에 청백당을 복원하여 전통한옥 체험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고위 공직을 지내면서도 접대 한 번, 뇌물 한 푼을 받지 않았고 부정한 뒷거래도 없이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살았고, 남긴 유품은 명종이 하사한 술잔과 갓끈뿐이다.
64세로 별세할 때, 후손들에게 “초야(草野) 출신으로 외람되게 판서(判書)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이 분수에 넘쳤다.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 고향에 장사를 지내되 묘를 너무 크게 하지도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자 장례 치를 비용이 없어 고향까지 상여를 운구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소식을 들은 명종은 예관을 보내 비용을 지원하고, 운구가 각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고을의 관원들이 맡도록 하였다.
또한 서해바닷가에서 암석을 골라 비석도 하사하고 “청백함을 알면서도 새삼스럽게 업적을 새기는 것은 오히려 명성에 누가 된다”고 아무것도 적지 말라고 하여 백비가 된 것이다.
선생은 살아서 욕심이 없었던 것처럼, 죽어서도 좋은 자리도 나쁜 자리도 아닌 무해지지(無害之地)에 묻혔다.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10(백비길 33-17)
박수량 사후 330년이 지난 1805년, 순조가 시호 정혜(貞惠)를 하사하자 후손들이 김인후(金麟厚)의 글씨로 선생의 유언을 담아 묘지명으로 세웠다.
박수량신도비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송병선(宋秉璿)이 비문을 짓고 일제에 항거하여 대마도에서 자결한 최익현(崔益鉉)이 글씨를 썼다.
▲ 묘 앞 빗돌이 無字백비. 우측 비석은 후대에 세운것
박수량백비가 있는 이곳의 주산인 편백림 축령산(622.5m)은 호남정맥 정읍 내장산에서 입암산(654.3m)과 방장산 (742m)을 걸쳐 있는 산으로 전남 장성과 전북 고창의 경계를 이루는 산세는 험하지 않지만 골이 깊어 6.25당시 빨치산의 은거지로 유명했다
풍부한 맑은 물은 상류의 유기질 토사를 운반하여 유속이 느린 곳에 퇴적시킨다. 장성이 산간지방이지만 골짜기마다 비옥한 들판이 있는 이유다.
황룡강 물길을 따라 가면 어디든지 갈 수가 있는 사통팔달 지세여서 물자유통이 용이한 전남 물류센터기지로 상업이 발달하고 외부 소식을 접하기 쉽다. 2014년 황룡강 젖줄을 모티브로 노란색 도시디자인을 통해 엘로우시티 장성으로 거듭나 노란꽃잔치축제로 연간 100만이상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호남의 노른자위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축령산 자락에 장성지역의 양반들이 많이 살았다. 하서 김인후 생가, 필암서원, 박수량 생가, 홍길동의 생가 등이 있고, 하서 김인후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의 묘들도 있다.
예로부터 장성은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전해지는 말이 있다.
● 文不如長城, 장성에서 글 자랑을 하지 마라!
● 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 한양에 있는 만 개의 눈이 장성에 있는 눈 하나만 못하다.
바로 그 장성에 아곡(莪谷) 박수량의 청백리 정신이 살아 있다.
조선 최초로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과 깊이 교유하며 높은 학식으로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던 박수량 선생의 청렴한 뜻을 이어받기 위해 장성에는 청렴연수원이 있고, 해마다 전국 공직자들이 이곳에서 연수를 받는다.
[참고자료 출처인용: 네이버]
완도문화관광해설사협회는 지난 12월1일 고창 문수사를 거쳐 장성의 필암서원,박수량백비,홍길동테마공원을 탐방하며 청백리 박수량의 정신을 가슴에 담았다.
2023년 새해에는 우리 한문관 및 문화관광해설사들도 마음에 각자 자신의 백비를 세워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올곧찬 해설활동이 이어지길 바래본다.
모두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한문관 화이팅!!
https://youtu.be/2qkOGMu-2Iw
첫댓글 백비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