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 강인한
은빛 서걱이는 강변에
바람 부는 갈밭, 검은
달이
애드벌룬처럼
기나긴 쇠사슬 끝에 매여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갈대는 여기저기서
단칼에 허리가 꺾인다.
허리 아래 드러난
복두장이의 피 묻은 너털웃음이
비비꼬여 달아난다.
쇠사슬을 절컥이며 절뚝절뚝 달아난다.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앙금으로 남은 귀엣말
시퍼렇게 녹이 슬려 인양된 뒤.
강변북로 / 강인한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었다.
장미가 부르는 편서풍 / 강인한
굴레와 채찍을 벗어날 수 없다.
눈을 감아도 나는 안다.
저 길이 내 몸속에 들어와 요동치다가
망각처럼 몽롱해지는 것을.
장밋빛 암벽의 페트라 협곡을 지날 때
방울소리와 이천 년 전의 물소리가 반죽이 되어
때로는 영혼의 기도가 된다.
그러나 그뿐 희미한 이명으로 스러진다.
게으른 몸을 태우기 위해 내 허리는 잘록하고
베두인의 채찍을 견딜 만큼 옆구리는 아직 튼튼하다.
알 카즈네 신전을 출발하여 꼭대기의 수도원까지는
무릎이 꺾이는 층계, 층계, 돌층계들
굴욕과 소금의 길.
둘러봐도 연대해야 할 동지들이 없다.
저들을 이겨낼 수는 없다고 눈을 내리뜬다.
모르는 척 수그려 귀를 닫는다.
나바테아인들의 수도원, 절벽을 늘어뜨린 산 정상에서
이방인들이 느릿느릿 등에서 내린다.
향나무를 쓰러트릴 듯 바람은 편서풍이다.
삶과 함께 이 고통을 끝내자. 바로 지금이다,
자갈을 차며 앞으로 내달린다.
밑바닥이 바람처럼 번개처럼 다가온다.
—당나귀! 당나귀가 떨어졌다!
구불거리는 협곡,
검푸른 심연에 흰 별들이 소용돌이친다.
몸을 벗고
바람 속에서 나는 웃는다.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 2세 / 강인한
삼천 년도 훨씬 지나
이제야 나는 바코드라는 지문을 가진다.
모래와 바람과 강물처럼 흘러간 시간이었다.
넌출지는 시간의 부침 속에
스쳐 가는 존재들,
철없는 것들,
공포의 아버지가 무섭고 두려웠으리.
아랍 놈들이 코를 뭉개고, 영국 놈들이
수염과 턱을 깨부수고 마침내
스핑크스는 눈도 빠지고 혀도 잃어버렸다.
시간의 돛배를 타고 이승, 저승을 오가는 검은 태양.
한 나라의 역사란
파피루스의 희미한 글자들
바스러지는 좀벌레들에 지나지 않으리,
날마다 피를 정화하는 히비스커스 꽃차를 마셔도
추악한 것을 어찌 다 씻어서 맑히랴.
콩코르드 광장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
저것은 일찍이
테베의 신전 오른편에 세운 것이었다.
트랩이 내려지고 갑자기 울려 퍼지는 팡파르,
공항이다.
엄정한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나는 아부심벨에 두고 온 사랑을 생각한다.
불타버린 심장으로 느낀다.
전쟁에 이겨야만 남의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저 오벨리스크가 침묵으로 말한다.
이곳에서 나는 이집트의 파라오,
까마득한 이방의 시간과 대지 위에 서 있다.
왕의 눈물 / 강인한
—마티스 1952년, 색종이에 구아슈 292cm×386cm
아흔아홉 칸 비밀한 슬픔에는 문짝을 해 달고
마침내 그 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해와 달, 아무도 이 안을 엿보지 말라.
왕은 아침마다 침실에서 나오면
오렌지와 핑크가 향기로운 장미 정원에 섰다.
내 배에서 나온 아이야, 죽지만 말고
살아 있어라. 지금은 찾진 못할지라도 어이 잊으랴.
익사한 아이들의 부러진 손가락들이
밤새도록 창문에서 창문으로 떠돌아다니는 꿈을 나는 꾼다.
검은 상복을 입은 어릿광대여
물결 위에 물결을,
노래 위에 노래를 장식하는 음악을 연주하라.
밤마다 침실 가까이 기르는 뿔 돋친 애완,
삼각형 꼬리털이 귀여운 한 마리 성(性)을 만나는 은밀한 밤까지
내 눈길 닿는 모든 곳에 그대들 슬픔의 영역을 허락하노니,
핏빛 노을 깔고 앉은 코발트블루
하늘 아래 날리는 저 투명한 꽃잎이며 누런 이파리들은
지향 없는 눈물, 모두 짐(朕)의 눈물이노라.
하늘의 물고기 / 강인한
벚나무 꽃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꽃잎 두 장
다른 세상으로 날아간다
떨어진 수많은 꽃잎들이 맨땅에서 서로 손잡고
빙글빙글 원무를 추며 흙에 섞일 때
그렇게 시들어감에 순응하고 있을 때
물살에 실려 멀리 떠내려가기로
작정한 물고기처럼
기류를 타고 높이 솟구쳐 오르고
간질거리는 이승의 소식이 차마 그립지 않은 듯
날아올라 허공에서 맴돌며 가슴 죄며 꽃잎들은
바라보는 것일까 저 먼 피안의 기슭을
환하고 둥근 비늘
하늘의 물고기가 된 꽃잎 두 장
더 높이 더 높이 날아오른다
알 수 없는 향기와 빛이
낯선 이름으로 파닥이는 곳, 당신의 꿈 속을 향해
[ 강인한 시인 약력 ]
강인한 시인
*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 전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 『이상기후』 『불꽃』 『전라도 시인』『우리나라 날씨』 『칼레의 시민들』 『황홀한 물살』
『푸른 심연』 『입술』 『강변북로』,
* 시선집 『어린 신에게』, 시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등
* 수상 : 1982년 전남문학상, 2010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