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시기: 2000년 5월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축제기간
답사목표: 화서 이항로 선생 생가와 그 주변의 자연환경 답사
참가자:
정진구, 류민경, 박미자, 신주연, 유진주, 이민정, 이영진 등 철학과 학부 대학원 학생 여러분
철학과 강사 여러분
철학과 교수 여러분
道學이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라면 '길에 관해 배우는 것'이 도학일 것이다. 혹자는 '배움'이라는 것이 이미 무엇인가 배울 것이 정해져있는 것을 전제로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19세기 조선에서 도학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정해져있는 인간의 길을 배우는 아니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미 정해져있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으나, '道'에 관한 '學'이 생긴 것을 보면 정해져있는 길을 따라가는 일은, 예로 부터 쉬운 일 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학자 화서 이항로의 유적을 찾아가는 우리의 길도 쉽지는 않았다. 우리는 두 번 길을 잃었고, 마지막엔 차를 버려야했다. 차를 버린다는 것은 몇몇 사람에겐 아주 큰 시련이었다. 다산 정약용 생가를 지나 진중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구양수대교를 건너야할 지점에서 우리는 강을 건너지 않았다. 그리고나서 계속 45번 국도를 달려 대성리에 거의 다다라서야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고 청평대교를 건너 우회전하여 363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여기에서 이항로 생가로 접어들어가는 길을 놓치고 엄한 길로 접어들어 무척 헤메다가 다시 나와서 363번 국도를 죽 거슬러올라가 처음부터 다시 거슬러 내려오다가 94학번 하철웅이 길을 발견한 덕에 비로소 방황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웬걸, 아직 먼 길이 남은 상태에서 학교 버스의 기사님은 차를 멈추는 것이었다. 길이 좁아 위험하다는 것.
목표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점심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기 때문에, 강가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준비한 안주꺼리를 곁들여 술도 한 잔 씩 했다. 식사 겸 낮술을 끝냈을 때, 이미 돌아갈 시간이 다 되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답사는 해야겠기에, 가볍지않은 몸을 이끌고 화서 생가를 향하여 걸어갔다.
차를 타고오면서도 그랬지만 차에서 내려 걸으면서도 크고 작은 논들을 볼 수 있었다. 모내기를 막 마친 논바닥. 황지우 시인은 그것을 우주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였었지. 뿐만 아니었다. 곧게 뻗은 침엽수들. 아마도 최근 30년 내에 조림된 것들이리라.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우리가 걷고있는 길은 서울 인근의 자동차 유람 도로로서 손꼽히는 곳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급히 걸어 지나치기엔 아까운 풍경이었다.
화서 생가는 그리 크지않았지만 집의 왼쪽 어깨 뒤에 자리잡은 講學堂 터와 祠堂은 꽤 큰 규모였다. '청빈한 선비'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있는 구한말 도학자들. 하지만 그들의 삶의 자취를 더듬다보면, 그들은 지금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호사를 누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지않을 수없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들 중 한 분께서 '그들은 무얼 먹고 살았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셨다. 유교 특히 조선 주자학은 선비들이 이끌어가는 사회의 정치론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선비들은 本에 해당하는 수양에 치중하였을 뿐 末에 해당하는 實業에는 손대지 아니하였고, 규범의 보존을 위하여 목숨을 내던지기도 하였다. 대의를 위하여 언제건 목숨을 내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존경받을 수 있었다. 또한 他의 모범이 되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통제하였기에 그들은 존경받을 수 있었다. 화서와 같은 경우는 아마도 그런 삶을 몸소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반' 전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99%의 양반은 1%의 진짜 수양군자들에게 無賃便乘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찌보면 그들의 生活史를 도외시한 채 논리와 명분 만을 연구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滔滔한 놀리와 명분을 덮어둔 채 그들이 살다 간 사회역사적 상황 만을 강조하는 것 또한 만만치않게 위험한 일일 것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이곳에 이르는 길가에 카페가 즐비하여, 인근의 '서종'이 '미사리' 못지않은 카페촌으로 변하여있지만, 1970년대 말 까지도 이 지역은 전기가 들어오지않고, 서울의 대학생들이 농촌 활동을 오던 곳이었다. 화서는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갈문 마을에서 명달리로 가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속샛'이란 곳은 화서에게 공부하러온 문생들이 머물며 동네를 이루었다고 하니, 화서는 한 평생 이 곳을 떠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두물머리로부터 시작하여 카페가 즐비한 북한강변을 따라 올라오는 길도 절경이지만, 강변에서 우회전하여 접어들어야하는 계곡 또한 궁벽한 시골 만은 아니었고 그 계곡 속의 한 지점에 화서의 생가는 도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화서 생가는 깊은 계곡 속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더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작지 않은 분지 속에서 그 지역의 주인이 居할만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세상 사는 이치의 완결성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기가 쉬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화서의 사상과 논리는 양면성을 가지는 것같다. 한편으로 先學들의 성리설을 門戶에 관계 없이 종합하는 면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문화에 대한 조선문화의 우월성을 주자학의 인륜성에 근거하여 아주 쉽게 확신하는 일면을 가지고 있다. 포용적이면서도 배타적이라고나 할까? 좀 어거지일런지 모르겠으나, 인근의 정약용 생가와 비교하여보면,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일행은 목적지에 도달하여 한숨 돌리고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나서, 화서 생가에 들어앉아, 95학번 박성균이 준비한 화서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어서 시간강사 이유진의 보충설명도 들었다. 설명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여보면 다음과 같다; 화서와 그 학파에 이르면 心 개념은 더 이상 과거 先學들이 사용하던 방식으로는 사용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첫째, 生體로써의 心에 관한 정보가 그 이전에 비하여 훨씬 상세하여졌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주자학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가 강고하여질수록, 주관적 도덕판단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더욱 강하여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조선의 도학자들은 첫째 요인까지도 둘째 즉 주관적 도덕판단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의 강화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19세기의 지구촌 전체를 놓고 볼 때엔 터무니없는 것일 수 있지만, 鎖國 상태를 500년간 지속해 온 조선 내부에서는 당대의 조선주자학은 정당화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었다. 즉 어떤 세계 속에 두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조선주자학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등등.
설명이 거의 끝나갈 때 쯤, 생가를 지키고 사시는 후손이라는 분이 나타나셔서,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으며, 문화재적 가치도 가지고 있는 곳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거냐고 항의하셨다. 나의 생각으론 옳은 말씀이셨다. 학술 답사도 좋고, 관광유적(?) 개발도 좋지만, 모든 땅은 지금 살고있는 사람들의 삶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거늘, 사람들은 그걸 쉽게 잊는다. 나는 95학번 소영식에게 음료수 한 상자를 사 들려보내서 예의를 표하도록 하였다.
아주 짧은 답사를 마친 우리는, 걷고, 차 타고, 사진 찍고 남은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면서, 서종과 미사리의 카페촌을 누비며, 축제가 끝나가는 학교로 돌아왔다.
덧붙임 1 : 2000년 5월이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벌써 1년 8개월 전의 일인데, 이제 와서 이 답사기를 정리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이다. 나름대로 깔끔 떠는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 개인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글을 쓰다보니, 수선스럽지않고 상쾌했던 양평의 풍경, 그리고 답사 준비를 하겠다고 토요일 오후에 명진관 3층으로 한국유학철학(?) 수강생들을 불러내서 고생시켰던 기억이 떠오른다.
덧붙임 2 : 그때의 메모를 정리하다보니 '이론과 실천은 분업할 수 없다', '정보 제공과 정보 가공은 분업할 수 있다'는 구절이 덜렁 남는다. 도대체 그때 이런 메모를 남긴 이유는 뭘까? 앞의 구절은 아마도 '도학자들은 뭘 먹고 살았을까?' 라는 질문과 관련해서 끄적였던 것같다. 80년대 한국의 대학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참 지겹게도 논의하던 곳이었다. 그 논의는 그때나 지금이나 영 無用한 논의일런지도 모른다. 그 주제가 중요할 수는 있지만 'talk'의 차원에서 해결을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기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조선주자학의 경우, 이론과 실천의 不可分離性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 학계의 과제는 이론을 정교하게 설명하는 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양자의 관계 양상을 설명하는 데로 나아가고있는 것같다. 한편 '정보 제공과 정보 가공은 분업할 수 있다'는 메모는 도대체 왜 해놓은 것일까? 지도와 답사 정보를 제공했으면 길 안내까지도 책임져야하는 거 아니냐는 비난에 대한 나름대로의 변명이었을까?
덧붙임 3 : 답사 정보를 모으는 과정에서, '양평군 서종면 지명 유래'라는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그 자료의 가치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평가가 크게 다를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지명 유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들을 생각나는대로 열거해보자면, 지역의 풍토를 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여주고, 옛 사람들의 우주관과 생활 정서를 알게하여주고, 지역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우리말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주고, 그 지역을 사랑하게 하여준다. 그 이후에는 답사에 앞서서 지명 유래를 최대한 찾아보게 되었다.
양평군 홈페이지에서 찾은 '양평군 서종면 지명 유래'
<노문리> - - - - - -
1973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영천과 배치부락을 가평군 설악면에 편입시키기 전에는 1리와 2리로 나뉠만큼 면적이 넓었고, 조선조에서는 벽계리로 부른 흔적이 있다.
1988년 현재 5개반-갈문·벽계·동면·진대·속샛-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문리라는 명칭은 용문산에서 발원한 물이 60여리를 거쳐 흐르는 동안 여러 갈래로 모이기도 하고 흩어져 갈 물이 되었다가, 갈문리로 음이 변하여 갈문→노[蘆:갈대 노]문으로 한자표기를 하니 갈대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면서 종내에는 노문리가 된 것이다. 내의 이름도 지금 사기막천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선인들이 남겨 놓은 전적에 의하면 벽계천이 본디 이름이다. 이 벽계천은 새 을자로 흐른다하여 을자수라고 하며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벽계천은 수입리에서 북한강과 합류된다. 노문리에는 화서 이항노선생이 태어났으며 선생이 유적이 많고, 노산 8경과 벽계 9곡이 절승으로 매년 여름이면 피서를 겸한 관광객들이 찾아든다. 노산 8경이란 노문리 일대의 뛰어난 경치 8곳으로, 다음과 같다;
1. 제월대의 밝은달
2. 명옥적의 맑은 바람
3. 묘고봉의 높이 나는 비연
4. 자라 소의 뛰노는 물고기 잉어
5. 분설담의 기암
6. 태극정의 산수
7. 석문의 절벽
8. 일주암의 꽃 돌
벽계 9곡은 북한강이 드는 수입리에서부터 노문리에 이르는 을자를 그리는 벽계천 구비마다 넘치는 정취를 아홉 개로 나눈 것이다. 다음과 같다;
이와 중복되는 곳으로 화서 이항로 선생은 자신의 고향인 노문리 일대의 17곳에 친필로 새겨 그 이름을 정한 명소가 있는 데 가히 절경이라 할만하다.
* 갈물 … 내가 분류하는 곳을 뜻한다. 즉 '내가 갈라져 흐르는 물'을 가리켜 부르게 된 이름이다.
* 노산사 … 노문리 벽계 마을에 위치한 사우로써 주자·송시열·이항노의 입패(位牌?)와 影幀을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15일에 제사한다.
* 낙지암 … 벽계마을 오른쪽 내 가운데 있으며 "참뜻을 즐긴다[樂志?]"는 뜻이다.
* 관내성중만고심 … 묘고봉 아래 바위에 새겨져 있는 데 "노젓는 소리 가운데 옛 생각이 나서 세상명리를 잊고 심성이 안정된다"는 뜻으로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유래된 것이다.
* 다락재 … 벽계 마을 동북쪽에 있는 고개로 다락과 같이 높다해서 유래된다.
* 동면 … 벽계 마을 동쪽에 있다.
* 명옥정 … 벽계천에 있는 바위로 "鳴玉"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명옥이란 글자 그대로 옥이 운다는 뜻으로 옛 선비들이 허리에 옥을 차고 다니면 그 소리로 선비의 움직임을 할 수 있다는 데 유래하여 군자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라 하겠다.
* 묘고봉 … 벽계마을 동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냇물이 태극 모양으로 흐르니 봉우리의 모습 또한 태극의 형상을 하고 있다. 여름철에 강학을 하던 곳으로 현재 매년 산신제를 지내고 있으며 "우물봉"이라고도 한다.
* 벽계 … 청화산 계곡을 흐르는 하천에서 유래되어 주위의 마을 이름으로 변했다. 황경나무가 많았다. 이 마을에서 성리학자 화서 이항로 선생 태어나 살았으며, 생가가 남아 있다.
* 배치고개 … 갈문에서 가평군 설악면 배치로 넘어가는 고개로 근처에 동남 남 언경의 묘가 있다.
* 분설담 … 벽계마을 오른쪽에 있고, 냇물이 좁은 바위틈으로 흘러가면서 급류를 이루어 내뿜는 광경이 마치 눈발이 서는 것과 같아서 이간이 이름이 붙었다. 전서로 새겨져 있다.
* 석문 … 속샛부락 앞 개울에 있는 바위가 마치 문처럼 생겨 사람도 가히 다닐 수 있어 석문이라 했고, 글씨를 전서체로 양각했다.
* 섶도리 … 벽계 서남쪽에 있는 마을. 섶나무가 많았다.
* 소부연 … 정어랑 상류에 있으며 가마소라고 한다. 매우 깊이 들어가기 어렵다. 전설에 의하면 송아지 한 마리를 가마소 근처에 매어 놓았다가 이무기가 나와서 끌고 들어 갔다고 하며 명주실 한타래를 드리워도 끝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 솟대백이 … 동서 부락앞에 솟대를 세워 마을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솟대 아래에서 굿을 했다.
* 속샛 … 갈문 마을에서 명달리로 가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화서 이항로에게 공부하러온 문생들이 머물며 동네를 이루었고 삼연 김창흡의 서고터가 있다.
* 솟샛구비 … 속샛마을 앞 개울이며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 일명 살당이라고도 한다.
* 쇄취암 … 벽계천 자라소 근처에 있는 커다란 반석인 데, 옛날에는 이 바위 근처에 느티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나무 그림자가 물에 비칠때면 마치 온 시냇물이 푸르름으로 물든 것 같아 이름 지어졌다.
* 일주암 … 갈문마을 윗보 동쪽에 높이 약 20m의 바위가 하늘을 떠받히는 모습을 하며 당당히 서 있다. 옛부터 소금강이라 불렀을 만치 경치가 아름답다. 주민들은 선바위하고 한다.
* 오동단 … 제월대 아래에 있으며 여기에서 화서 이항노 선생이 문인들을 가르쳤다. 지금은 수령 약 3백년된 느티나무가 있어 오가는 이의 땀을 식혀 준다.
* 오자정 … 동서부락 당재고개에 있으며 "사람의 다섯가지 성품인 인·의·예·지·신은 바른 것이다."를 알려준다.
* 자라소 … 화서의 생가가 소재하고 있는 벽계부락의 어귀에 있는 소로 물이 깊고 넓어 수영하기에 알맞고 선생이 즐겨 찾아 피서하던 곳이다.
* 장자버덩 … 갈문 마을아래 옛날에 부자가 살았다하여 장자 버덩이라 한다.
* 장승백이 … 벽계 부락 입구에 장승이 있어 장승백이라 불리웠다.
* 진댓 … 속샛 남쪽에 있는 마을은 원래는 진댓였는데 차차 변하여 진댓가 되었으며 옛날 군병이 주둔해서 진을 쳤다고도 하며 궁에 숯을 공급했다해서 진대라고도 한다.
* 중죽은골 … 진댓부락 서쪽의 작은 골짜기로 옛날 한 중이 나물하는 부녀를 욕보이려 할 때 사냥꾼이 이를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해 총을 쏘아 중이 죽어 붙여진 이름이다.
* 진댓고개 … 진댓에서 정배리 싸리골로 넘어가는 고개.
* 제월대 … 화서 이항노를 모신 노산사 뜰앞에 있다. 제월대에서 바라보면 그윽한 산그림자가 펼쳐져 신경에 든 듯하다. 타원형의 자연석에 "조그만한 구름이라도 보내어 달빛을 손상치 말라. 지극히 공허하고 지극히 명랑하여 이로써 태양의 짝이 된다." 는 시를 새겼다. 이 때 화서의 나이 56세였다.(헌종 13년 정년 여름,1847)
* 타어랑 … 휘수대 윗쪽의 여울목으로 고기잡이가 좋다.
* 태극정 … 묘고봉의 모습이 태극과 같아 유래됐다.
* 화서선생 생가와 노산정사 … 노문리 535번지에 있는 화서 이항로선생이 태어나 자란 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됨. 화서선생이 구한말 많은 애국열사를 배출하였던 곳.
* 휘수대 … 갈문마을 윗보 가운데 있는 넓적한 바위로 많은 사람이 앉아 놀수 있다.
<도장리> - - - - - -
본래 사기그릇을 굽던 도장리로, 1914년 잠실, 국로소, 매곡, 헌터벌을 병합하여 도장리라 하였다. 현재 2개 행정리와 3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장1리>
* 국노소 … 조선조때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에 백씨성을 가진 분이 정착해 살었는데 이분의 호가 국노당이였다고 해서 국노소라 불리고 있다 한다.
* 아랫말 … 잠실 아랫쪽에 있는 마을.
* 웃말 … 잠실 윗쪽에 있는 마을.
* 잠실 … 국로소 서쪽에 있는 마을로 앞산이 누에 머리같다하여 잠실이라 한다.
* 조기 통고개 … 잠실마을 끝에서 문호리 다리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70년전 조기장수가 동네 가는 길을 묻자 골려주려고 잘못 가르쳐 주어 조기통과 함께 굴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장2리>
* 매곡산 … 매화가 피고지는 골짜기가 있다하여 매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함.
* 잠실 … 마을 앞산이 누에 머리모양과 같아 붙여졌고, 마을의 북동쪽에 잠실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지금은 공원묘지가 들어서 있다.
* 만석골 … 350년전 충주에 살던 남양 홍씨가 부모상을 당하여 지관과 함께 묘자리를 잡다가 지관이 '삼정승 날 자리'와 '만석군 날 자리'중 하나를 택하라하여 후자를 택하여 오늘에 이름.
* 풀무골 … 사기 가마풀무에 땔 나무를 베었다하여 풀무골이라 하였다함.
* 굴바위 … 매골 골짜기 안에 들어가면 천연동굴이 있는데 맑은 샘이 흘러 약수로 사용하였다 한다.
* 헌터벌 … 헌터풀이라고도 한다. 옛날 한씨형제가 살아서 유래됐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제 새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니 새터벌이라고 하자고도 한다.
* 가마건너 … 사기가마터 건너에 있다해서 유래된 지명이다.
* 김묘동 … 김씨의 묘가 있어 김묘등이라 하며 후손중에는 장성도 있다 하나 지금은 숲으로 변해 찾을 수 없다.
* 국노소 … 약2백년전에 국노당 백씨가 살았다해서 이름이 유래됐다.
* 굴바위 … 매골 골짜기를 들어 가자면 굴바위라는 지명이 있고 여기에 2개의 천연동굴이 있다. 예전에는 토종벌의 설통자리로 유명했으나 1977년도에 방공취약지구라 해서 예비군들에 의해 인구를 폭파했다. 약수가 흘렀으나 이무기가 나타나 폐하였다 한다.
* 난봉바위 … 국소노 앞 산상봉 기슭에 조그마한 바위를 말하며 이 바위를 건드리면 동내에 치정사건이 발생한다고 전하며 짖궂은 나뭇꾼이 일부러 건드리면 꼭 말썽이 생겨 화제가 된다.
* 만석골 … 옛날 남양 홍씨가 이곳에 자리잡고 조상의 묘소자리를 잡을 때 지관이 '만석군 날 자리'라하여 이곳에 산소를 모시고 부자가 되어 만석골이라 유래된다.
* 매골 … 매골은 매(새의 한 종류인 매가 많다하여 매골이라고도 하며 풍수상 '매화낙지' 형 이라하여 매곡이라고도 한다.
* 맷골 … 국로소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매화락지형이라하여 매화곡이라 하던 것이 차차 변하여 매곡이 된 것이라 한다.
* 반찬목 … 성가마골과 김묘동 고개 사이에 있고 사냥꾼들의 말로는 매골안의 돼지들은 복이 고개를 넘어야 하니 여기를 지키면 돼지를 잡을 수 있다 해서 이렇게 부른다.
* 상돌백이 … 150년전 진동개에 최별제의 묘를 쓰고 상돌을 못 올려가 상석이 그대로 묻혀 오늘날에 이렇게 부르고 있다.
* 선바위 … 굴바위 중간, 북쪽 산중턱에 있다.
* 장사샘 … 산상봉 중턱에 있는 샘인데 수릉리에 살던 경주 이씨 형제가 갈을 꺾으러 왔다가 이 샘물을 마신 후 장사가 되어 남이 먹지 못하게 큰 바위로 샘 입구를 막고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힘자랑하다가 초립동이 어린 소년에게 봉변을 당한 뒤 힘을 더하기 위해 다시 샘을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한다. 지금은 샘물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만 입구는 찾지 못했다.
* 절터번더구니 … 굴바위 근처에 있으며 기와장이나 돌 층계로 보아 절이 있었음이 분명하고 전하는 말로는 이 절이 무척 번성하였으나 빈대가 극성을 부려 끝내 폐사가 됐다 한다.
* 풀무골 … 사기가마가 있을 때 풀무에 쓸 나무를 베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토번마루 … 임진왜란때 의병들이 지키던 곳이다. 아랫쪽에서 쳐들어 올때면 넘기 힘들어 의병들이 웅거하기에 적합한 요새였다고 한다.
* 한터골 … 맷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 한씨 형제가 살았다해서 부르게 된 것이라 함.
<명달리> - - - - - -
본래 양근군 서종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명덕(벌통씌우개)-처럼 생겼으므로 멍덕 또는 멍덜 명달이라 하는데 융희 2년(1908)개칭된 양평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소유곡·낭하탁골·삼각골이 병합되어 명달리라 함.
1988년 8월 1일 현재 3개반으로 편성 조정되고 있음.
* 나가터골 … 소유골 동쪽에 있는 마을
* 통방산 … 가마봉 뒷산으로 해발 649m로 서방이 훤히 통한다하여 통방산이라 하였는데 화서 이항노 선생은 이 산을 청화산이라 불렀다.
* 멍덜 … 부락이 높은 곳에 위치하였고 벌통씌우개, 쪽지 같은 쪽대기에 있다하여 멍덜이라고 불렀다.
* 멍덜 … 부락이 높은 곳에 위치하여 제일 먼저 해가 뜬다고하여 명달이라고 부른다 함.
* 삼태봉 … 산형이 농가의 농기구중에 하나인 삼태기를 닮았다하여 삼태봉이라 불렀다 한다.
* 명덜고개 … 명덜에서 정배리 솥비로 넘어가는 고개로 매우 높아서 자동차 길이 생긴 이후 자동차를 타고 넘어가변 비행기를 탄 것 같이 높아 속칭 비행기고개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사람이나 소도 넘기 어렵던 고개가 지금은 차가 넘게 되어 문명이 발달 되었다고 명달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함.
* 삼각골 … 나가터골 남쪽에 있는 마을. 세골짜기가 합하여 삼각골이라 했고, 화전민 10여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빈터이다.
* 상산재 … 소유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 통방산 밑이 됨. 산이 높고 고개가 있다 하여 상산재라 함.
* 삼성당 … 삼백여년전에 벽진이씨·경주김씨·곡성임씨 성씨를 가진분이 병자호란을 피해 이곳에 정착한 곳이라 삼성당이라 한다고 한다.
* 가마봉 … 마을 뒷산 정미의병봉기때 마을 사람들이 움막을 치고 큰 가마숱을 걸고 밥을 해 먹었다 하여 가마봉이라 함.
* 삼태봉 … 산의 모습이 농기구 중에 삼태기를 닮았다해서 삼태봉이라 했다 한다.
* 쇠수 … 소유곡 남쪽에 있는 마을.
* 가마봉 … 병오와 정미 의병항쟁때 마을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가 움막을 짓고 큰 가마솥을 걸고 밥을 지어먹었다 하여 이 산을 가마 봉이라 하게 되었음.
* 소유곡 … 명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소부와 허유라는 두 중인인이 쉬어갔다하여 소유곡이라 한다고 함.
<문호리> - - - - - -
본래 양근군 서종면의 지역으로서 무너미 고개 옆이 되므로 무너미 무네미 또는 문호라고 하였는데 융희 2년(1908) 개칭된 양평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갈호 수호 영암 갈맬길골 꽃대울이 병합하여 문호라 함. 1988년 8월 1일 현재 5개 행정리에 11개반으로 편성 조정되고 있다. 1리-2개반, 2리-2개반, 3리-3개반, 4리-3개반, 5리-1개반.
문호1리>
* 덕고개 … 예전에는 작은 고개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용이 강물을 마시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라 한다. 백년전 외문호 일대에 논을 만들기 위해 고개를 끊었을 때 붉은 물이 흘러 사람들이 용의 허리를 끊었기 때문에 그러 했다는 말을 했다고하여 이후 주민의 살림이 줄고 부자가 떠나고 타지에서 들어오는 사람의 살림이 늘었다 한다. 덕고개는 경기관찰사 홍재철과 오위장 류종섭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늪벌 … 팔당댐으로 인하에 수몰되었으나 그전에 당미늪이 있는 곳.
* 당미늪 … 당미 뿌리 앞에 있는 늪.
* 당미뿌리 … 바깥말 남쪽 부리에 있는 마을로 당미(수수쌀)가 주산물로 생산된 곳으로 부쳐진 동리 이름이라고 함.
* 덕고개 … 안무너미와 웃무너미 사이레 있는 고개로 용문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작은 산인데 용이 강물을 마시려고 입을 벌린 형태라고 한다.
* 무네미나루 … 무네미 앞에 있는 북한강의 나루터로 과거에는 서종면의 서울교통과 강원도에서 내려오는 뗏목등으로 한때 번창하였으나 육로발전으로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 바깥말 … 무너미 바깥쪽에 있는 마을.
* 아랫무너미 … 무너미 아랫쪽에 있는 마을은 지도상에는 외수여리라고 기재되었으며 북한강 하부에 있음으로 하문호라 부르게 되었음.
* 중방여울 … 문호리 앞 북한강으로 지금은 수몰 되어 흔적이 없음.
* 하가동 … 중간말 동쪽에 있는 마을.
* 활인소터 … 문호1리의 하문호에서 당미뿌리쪽으로 내려가는 쪽에 있다. 한말에 동궁무관장을 지낸 조동윤(호 혜석, 난초 그림과 글씨에 능함)이 동네에 토지를 희사하여 마을 주민들의 모를 쓰게하여 활인소라 했다.
문호2리>
* 녹가골 … 다리골 안에 있는 작은 골짝으로 그전에 집이 한집 살던 곳.
* 다리골 … 수대울 북동쪽에 있는 마을.
* 문호교 … 무너미 앞에 있는 다리.
* 안무너미 … 무너미 안쪽에 있는 마을.
* 양짓말 … 안말 개울북쪽에 있는 양지바른 마을.
* 장터거리 … 안말 서남쪽(외문호)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백중놀이터로 유명하였던 곳.
문호3리>
* 가루개 … 밤나무 단지 남쪽 갯가에 있는 마을로 원래 가로개인데 개가 외지로 가지 못하게 가로 막고 있다하여 가로개로 불리다가 가루개로 변했다 한다.
* 논골 … 문호리에 있는 골짜기. 논이 많음.
* 매바위 … 도장리 매곡 도로변에 있는 바위, 매처럼 생겼음.
* 매바위골 … 매바위가 있는 골짜기.
* 밤둔지 … 무너미 남쪽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았음(현재 경찰지서가 있는 주변 음지말).
* 수대울 … 가루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안동 권씨가 정착해서 개척하였다고 한다. 그 족보에는 수대곡이라 했고 200년전경에는 수달피라는 동물이 서식하여 수달골이라 했는데 근년에는 수대울이라 한다.(옛날에 권씨문중 오흥문이 있었다.)
* 수호교 … 수호 서쪽에 있는 다리.
* 아랫가루개 … 가루개의 아랫마을.
* 오리골 … 문호리 영암(마른바위)으로 가는 우측으로 있는 마을.
* 외수 … 안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웃 가루개 … 가루개의 윗 마을.
* 조절 … 영암부락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
* 화성돌 … 문호리에 있는 바위, 유황처럼 누럼.
* 갈맬 … 무너미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앞산지형이 목말라 하는 말의 형상이라하여 갈마울로 불리우다가 갈맬로 변형되었다 함.
* 꽃대울 … 걸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꽃대봉이란 산봉우리가 있어서 꽃대울이라 하게 됨.
문호4리>
* 질골(길곡) … 갈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땅이 질다고하여 질골이라 하던 것을 차차 변하여 한자표기 지명으로 길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마당재 … 문호리에 있는 산, 나뭇꾼들이 쉬는 언덕이 있는 고개마을.
* 덮푸지개울 … 문호리에 있는 내.
* 비둑재 … 문호리에 있는 산, 문호4리 갈말과 길곡을 잇는 고개.
* 사당골 … 문호리에 있는 골짜기 능성 구씨사당이 있으며 유명한 우물이 있어 그 전에는 홍수가 나면 문호리(외문호) 일대가 이곳에서 물을 길어 먹기도 한 곳임.
* 숫돌고개 … 웃무너미 동북쪽에 있는 고개, 수입리로 넘어 감.
* 어신여울 … 문호리(꽃대울)앞 북한강에 있는 여울.
* 웃무너미 … 무너미의 윗쪽 마을로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여 상문호라 함.
* 자라바위 … 문호리에 있는 바위, 자라처럼 생겼음(지금은 수몰되어 보이지 않음).
* 잔갈말 … 갈맬의 작은 마을.
* 중간말 … 웃말과 아랫말 중간에 있는 마을.
* 큰갈말 … 갈맬의 큰 마을.
문호5리>
* 맞은바위 … 밤나무둔지 맞은편에 있는 바위로 부락에서 마주보인다하여 영암이라 부르고 있으며 한글로 맞은바위라 한다.
* 맞은배 … 맞은 바위가 있는 개울건너 마을.
* 무네미 … 북한강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 홍수가 나면 물이 넘나든다하여 무너미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조조울 …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낸 조하망이 이곳에서 살며 큰 조조울에 본실을 작은 조조울에 부실을 두고 왕래하였는데 가정불화로 패가 망신하였다. 큰 조조울의 바위에 '대은병'이라는 글을 새겨 지금도 전하고 주춧돌과 집터도 남아 있다.
<서후리> - - - - - -
본래 양근군 서종면의 지역인데 융희2년(1908) 양평군에 편입되어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차남리, 후곡리, 동점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차남과 후곡의 이름을 따서 서후리라 함. 1988년 8월1일 현재 2개 행정리와 5개반으로 편성 관할함. 1리-3개반, 2리-2개반.
서후1리>
* 두텁골(후곡) … 퉁점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김씨와 이씨 두 집이 살았다하여 두터골이라 불렀다 하며 두터라는 뜻을 두터울 '후'로 표기한 것이다. 원래 신씨명곡공의 신도비에 보면 부락명이 섬곡이라고 표기되었는데 신씨는 지금으로부터 200년전에 이곳에 정착하였다 한다. 조선말에 면암 최익현이 와서 살았다.
* 동점 … 3백여년전 장사랑공이라 하는 밀야 박씨가 현종때 이곳으로 낙향하여 산수를 벗하며 농업을 하던 중 퉁쇠를 발견 생산하였다하여 퉁점이라 유래한다.
* 송골 … 서차남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소나무가 울창하여 유래됨.
* 청계산 … 서종면 서후리와 양서면 신원리 경계를 이루는 해발 658m되는 산으로 산밑 계곡에 흐르는 물이 너무 맑고 푸르러서 청계산이라 함.
서후2리>
* 말고개 … 서차남에서 옥천면 신북리 엄두레골로 넘어가는 고개에 안장바우와 말구유(말먹이통)바위가 있고 지형이 말같이 생겨서 말고개라 함.
* 된고개 … 서차남에서 양서면 청계리 반월형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가파라서 오르기가 힘들어 된고개라 함.
* 제치레미 … 마을 개척당시 바위 일곱 개를 제쳐 굴려냈다하여 제칠암이라 부르던 것이 변형되어 제치레미가 되었고 한자 표기로 서차남이라 함.
<수능리> - - - - - -
본래 양근군 서종면의 지역인데 융희 2년(1908)에 양평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회리, 능곡리, 낙촌리, 동점리 일부를 병합하여 수회와 능곡의 이름을 따서 수릉리라 함. 1988년 8월1일 현재 2개 행정리와 4개반으로 편성 조정 관할하고 있다. 1리-2개반, 2리-2개반으로 조정되었고 원래는 소수여리라 했으며 작은 하천에서 흐르는 물이지만 농사짓기에 넉넉하다하여 소수여리라 불러오다가 1914년에 수릉리라 개칭되었다 한다.
수릉1리>
* 낙촌 … 본래는 락촌이라 하였는데 이는 마을이 낭떨어진 곳위에 있다하여서이며 떨어질 '락'자는 상서롭지 못하다하여 '낙'자로 고쳤는데 그 후 마을이 부유해졌다 한다.
* 노루고개 … 능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경주이씨 선대 묘지를 노루가 정해 주었다는 유래로 노루고개라 하게 되었다 함.
* 절골 … 산골짝에 큰절이 있었는데 빈대등쌀에 견디다 못해서 주지가 불을 지르고 가벼렸다 함.
수릉2리>
* 가래골 … 노루고개 동북쪽에 있는 마을, 가래나무가 많음.
* 능곡 … 능곡은 옛날 이곳에 능자리가 있다하여 능골이라 하며 지금은 남원 양씨인 양헌수대장 조모의 산소가 있음.
* 호랑바위 … 수릉리에 있는 바위, 호랑이처럼 생겼음.
<수입리> - - - - - -
무드리. 수입. 본래 양근군 서종면의 지역으로서 물이 마을앞으로 돌아들므로 무드리 또는 수입리라 하였는데 융희 2년(1908)에 양평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공곡리를 병합하여 수입리라 함. 1988년 8월1일 현재 3개 행정리에 9개반으로 편성됨, 1리-3개반, 2리-4개반, 3리-2개반. 강원도 양구군에는 수입면이 있다.
수입리 마을을 옛날에는 수회리라고 했는데 이는 용문산 계곡으로부터 사십여리를 이구비 저구비를 돌고 돌아 내려와 마을 어귀에서 북한강으로 합수한다하여 수회리라 전래한다. 옛날에는 리포라 하였다.
수입1리>
* 무드리 나루터 … 무드리 서쪽 북한강에 있는 나루터, 남양주군 화도면 금남리, 서울, 청평등지를 건너던 나루였는데 지금은 육상교통이 발달하여 통학생과 행락탑승객들이 이용하는 정도다.
* 바깥무드리 … 무드리 바깥쪽에 있는 마을.
* 바치울 … 무드리 남쪽에 있는 마을. 강가에 높은 언덕위에 있는 마을로서 물이 들어오는 것을 받쳐주는 형상이라하여 바치울이라 하며 한편 옛날 이곳에서 거두운 곡식을 상감에게 바쳤다하여 바치울이라고도 유래된다.
* 소구니 … 문호리와 수입리 사이에 있는 곳으로 공동묘지로 되어 있음.
* 소군교 … 소구니 앞에 있는 다리.
* 아미산 … 해발 80m로 웅장한 기상으로 북한강이 감싸고 있다. 달 속의 아미산과 닮았다하여 아미산으로 부르고 있다. 산 정상에 우물이 있는데 구전되는 말에 의하면 명성황후 민씨의 총애를 받던 무당 진영군이 석벽을 쪼아내고 샘을 파고 그 물을 궁에 바쳤고, 물이 마르면 강물을 떠다 샘에 붓고 샘물이라 속였다 한다. 중턱에 커다란 소나무(일산송)이 있다.
수입2리>
* 귀시울(귀실) … 석바탕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때 왕족의 태를 묻기 위해 궁인들이 머물렀다하여 귀실이라 한다.
* 능곡 … 마을 뒷산에 태봉이 있는데 옛날 왕자의 태를 묻었다하여 능곡이라 함.
* 석바탕(석평) … 비선말 동쪽에 있는 마을로 바위가 병풍같이 둘러 있다하여 석병이라 한 것이 석바탕(석평)으로 변했다 함.
* 지그레미 … 청강 이제신이 쉬던 정자터.
수입3리>
* 고동산 … 해발 540m로 아미산과 연결되어 있고 청강 이제신선생이 묘자리를 잡기 위해 쇠나무신을 신고 산을 오르내렸다하며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정상에 서서 보면 서울이 보인다고 한다.
* 덜멍삼거리 … 청강 이제신의 4대손인 이만웅의 묘가 있고 회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이 있다.
* 비선말 … 안무드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전의이씨 선대의 신도비가 서 있는 마을이라하여 비선말이라 유래됨.
* 청서갈장 … (범산덜멍) 무당이 빠져 죽어 일명 무당소라고도 하며 바위가 넓고 커서 전설에는 큰 호랑이도 놀고 갔다고 한다. 청서갈장이란 청강의 '청'자와 서당(이덕수로 영조때 대제학이다. 시호는 문정임)의 '서'자를 따서 이제신선생과 이덕수의 옛 집터란 뜻이다. 이곳은 농경지의 면적이 6만평이 넘고 항상 물이 흘러 조해가 없다. [청산이 집을 둘러 쌓았으니 병풍이 없어도 좋으며, 흐르는 물이 집문턱에 닿으니 우물은 파서 무엇하리오.] [앞 시내에서는 물고기를 낚고, 뒷산에서는 살찐 나물뜯어 식량을 삼는다.] 고 한만큼 살림살이와 경치가 실로 넉넉한 곳이다.
* 빗고개 … 비선말에서 구시울로 넘어가는 고개.
* 안무드리 … 무드리 안쪽에 있는 마을.
* 황금내 … 안무드리 내에 금이 많이 나와 이러한 이름이 유래됐고, 전설에는 큰 황금수닭이 이곳에서 울었다하며 내의 가운데 청강 후손이 새겨 놓은 '수회구곡'이라는 글씨가 있다.
<정배리> - - - - - -
본래 양근군 서종면의 지역으로서 솥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솥바위 솥배 또는 쇄삐 정배라 하였는데 융희 2년(1908)에 양평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퉁점골, 반곡, 멍덕골 건대를 병합하여 정배리라 하였다. 1988년 8월1일 현재 2개 행정리에 4개반으로 편성 관할함. 1리-2개반, 2리-2개반으로 조정되었고 정배리는 조선인조때 고령박씨 재정이란 사람이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이지대를 개척하고 은행나무, 대추나무, 느티나무 세그루를 솥발모양으로 심고 자기이름자인 정자를 따서 부락이름을 솥발로 부르다가 한자로는 정배리가 되고 솥비,솥배등으로 변형되었다 한다. 그리고 이 고장은 산천경계가 수려한 정배 팔경이 있다.
* 멍덕 골 … 사릿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명덕이 변한 것이며 옛날 고명한 학자가 살았는데 대학지도는 재어명덕이라고 훈도한 글귀중 명덕 두자를 따서 부르게 된것이라 한다.
* 사릿 골 … 쇠삐 서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사리여졌다하여 사리골이라 부르고 한자로 반곡이라 함.
* 퉁점 골 … 사릿골 남쪽에 있는 마을. 퉁점이 있었음.
* 화서 선생 묘 … 퉁점골 뒤에 있는 화서 이항로의 묘소.
* 맹 고개 … 웃말에서 옥천면 신복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
정배2리>
* 반곡 … 용문산 락맥이 줄기차게 뻗어내려 오다가 반곡에 와서 사리였다하여 사릴반 자반곡이라 부르고 있다 함.
* 솟삐 고개 … 웃말에서 서후리 퉁점으로 넘어가는 고개.
* 양짓 말 … 쇠삐 양지쪽에 있는 마을.
* 웃말 … 쇠삐 윗쪽에 있는 마을.
* 용소(롱소) … 용소십자 상부에 폭포가 있는데 이 폭포를 롱소라 한다. 롱담 박세호가 영월부사로 가다가 자기의 호자를 따서 롱소라 이름하였다 함.
* 탑거리 … 상촌에 거주하던 박시옥이 학질에 걸려 롱소에서 목욕하다 돌한개를 옆구리에 끼고 나왔는데 그 돌이 마치 미륵보살 같이 생겼고 마을 사람들이 지금도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