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次
1. 머리말 2. 국내외 학자들이 인증한 한국미술의 독창성 3. 삼국금석문서예의 창조성 1) 창조적 재구성 2) 자연미 3) 곡선미 4) 부정형의 미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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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한국의 서예는 통일신라시대 때 중국의 서예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서예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수용된 서체를 너무 중시한 결과 글맛이 단조로워지고, 기존에 존재했던 한국의 대자연을 연상하게 하는 다양한 토속적인 미감이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발원지중심적인 서예관은 한국서예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냉정한 반성을 요하는 부분이다.
괴테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민족성이 갖는 의미는 예술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야나기무네요시는 “예술의 창조성에는 반드시 국민성이 담겨져야 하며, 국민성의 상실은 그 나라의 미술을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했다.
괴테와 야나기의 견해는 지금까지 중국의 서예를 중심에 두고 한국서예를 종속시켜 비교하는 차원에서 그치려했던 한국의 서예사를 크게 반성하게 한다. 종속의 서예사관은 보다 경쟁력 있는 이론이나 주체성 있는 작품을 기대할 수 없게 한다. 특히 자기정체성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제 모습에 대한 인식의 결여는 자신을 낙후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논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줄 대안을 한국미술사 속에서 발견한다. 근 100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미술사는 연구의 초기부터 한국미술이 갖는 독창성에 비중을 두어 왔다. 그에 비한다면, 한국서예사는 아직까지 한국의 서예가 지닌 독창성에 대한 문제가 철저하게 논의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한국미술사에서 밝혀진 한국미술의 독창성을 토대로 삼국시대서예 속에 담겨진 창조성을 밝혀내려고 한다.
제1장 머리말에 이어 제2장에서는 한국미술사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에카르트 ․ 야나기 ․ 고유섭을 중심으로 한국미술의 독창성을 소개 할 것이다. 이들은 한국미술의 미의식 연구에 평생을 바친 분들로서 일찍이 한국미술미학의 원줄기가 이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할 정도로 공헌이 크다. 본장에서는 특정한 시대에 제한을 두지 않고 한국미술의 전반적인 특징을 다루려고 한다. 이같이 시대의 경계를 허문 것은 보다 큰 틀 속에서 한국적 미의식을 조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같은 한국미술전반에 흐르고 있는 미학적 특징을 논의하는 중에 제 3장에서 해결하려는 “삼국 고대금석문서예의 창조성”이 좀 더 자연스럽게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미술사에서 논의된 미학적 관점을 서예사와 접목하여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의도에서 출발된 본 논문은 서예사 논문으로는 처음 시도되는 것이므로, 다소 생소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사와의 접점을 발견하기를 갈망하며 쓴 본 논문이 그간 서예위주로 연구되어온 한국서예사를 일신하는 데 조그만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국내외 학자들이 인증한 한국미술의 독창성
본 장에서는 한국미술사의 출구를 내는 데 기여한 에카르트 ․ 야나기 ․ 고유섭의 한국미술론을 중심으로 한국미술에 나타난 미의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기에서 소개될 내용은 주로 한국미술의 독창성에 관련된 것으로 그동안 우리서예의 ‘고유성’에 대한 자각 없이 중국의 서예를 모방하려했던 한국의 서예를 다시 바라보게 해 줄 것이다.
1) 안드레 에카르트 (Andre Eckardt, 1884-1971)
에카르트는 가톨릭 베네딕트 교단의 성직자이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부임하여 19년간 체류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문화에 심취하여 전국을 여행하면서 문화유적과 미술품을 조사하였다. 그는 오늘날 ‘한국학’이라고 부르는 영역, 즉 한국의 언어, 미술, 역사, 민속, 음악 등 다방면에 저술을 남긴 인문학자로서 이를 바탕으로 1924년부터 몇 년간 경성제국대학에서 언어학과 미술사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1928년에 귀국한 후 1년 뒤에 『조선미술사』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최초로 쓴 한국미술사 저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에카르트는 한국인들이 지닌 선천적인 예술 감각을 높이 평가했다.
때때로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이 많은 중국의 예술형식이나, 감정에 차 있거나 형식이 꽉 짜여진 일본의 미술과는 달리, 조선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가장 고전적이라고 할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에 대해 동양미술의 스승으로서 당연한 영예를 주어야겠지만, 그 가르침을 받은 학생인 조선은 스승의 예로부터의 전통양식을 계승하고 지킬 뿐 아니라, 많은 경우 그것들은 더욱 미적으로 심화했다는 생각이 든다.1)
위에서 보듯이, 에카르트는 한국 민족이 지닌 예술적 감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한국미술이 중국미술을 본받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미적으로 한층 더 심화시켰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서양 미술의 고전성이 그리스 미술 속에 살아있다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전통미술 속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중국에서는 여성의 전족(纏足)이 일본에서는 분재(盆栽)라는 불구의 것이 이상적인 미가 되었으나 조선의 경우는 이러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결국 조선은 항상 아름다움에 대해 자연스러운 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룰 때 그것을 고전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2)
이처럼 에카르트는 한국인들이 미적 표현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각을 잘 살려내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본 장에서 논의될 야나기의 이론과도 일치하며, 훗날 국내외 한국미술이론가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다음 문장에서도 한국미술이 중국 미술의 모방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중국미술과 문명을 조선의 교본(敎本)으로 간주하여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바꾸어 말해, 가능한 한 조선과 중국미술의 차이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3)
에카르트는 특히 한국의 고건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조선건축에 비교하면 중국의 건물은 답답함이 강하게 느껴진다. 조선 건축물의 특징인 섬세하게 잘 계산된 지붕의 경사, 또 상부구조의 조화를 도모하여 배치된 무수한 공포(栱包)나 첨차의 장식에 의해 시원스레 뻗어 나온 지붕과 기단의 연결, 이러한 것은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이다.4)
미적 표현 속에는 각 나라의 정서와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나라마다의 민족미감을 담고 있으므로 미술품에 대해 호악(好惡)을 구분 짓는 것은 항상 모순이 따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에카르트의 한국 건축에 대한 관찰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사찰이나 궁중, 일반가옥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의 건축물은 중국에 비해 위압감을 주지 않으며 여백이 많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전통 가옥, 누각, 성벽, 문, 다리, 왕궁, 사당과 불교사원의 전체적인 구조와 기둥, 공포(栱包), 지붕, 장식에 이르기까지 정밀한 연구를 하였다. 예를 들어, 건축구조의 접합법, 건물의 기둥의 각종형태, 목조건물의 공포, 공포와 화반의 변화 등 건축에 나타난 구석구석의 표현을 모두 도면화 하였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대상 하나 하나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에카르트가 한국 미술을 연구에 적용한 정밀하고 과학적인 조사방식은 독일미술사학의 특징 중 하나이다. 상당한 수준을 갖춘 독일의 연구방식을 원용한 에카르트의 한국 미술사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한국의 고건축에서 발견한 것은 중국과 일본의 건축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 성질이었다. 그리고, 조각 ․ 회화 ․ 도자기 ․ 수공예품 등에도 한국인들 특유의 자연스러운 예술적 감성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보았다.
2)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 1889-1961)
야나기 무네요시는 도쿄 제국대학 철학과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사라카바(白樺)》의 동인으로 신문화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조선 도자기를 접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평생을 그 연구와 수집에 심혈을 기울이고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 예술의 우수성을 널리 소개했다. 또 조선 민중이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그릇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와 같은 전통이 일본에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민예론(民藝論)을 제창하여 민예운동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야나기는 미술품에 국민적 독창성이 없다면 독립을 이루지 못한 국가와 같다고 할 정도로 독창성의 의미를 중요시했다.
풍토와 역사의 특수성은 각각 그 민족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표현을 추구시킨다. 그러므로 각 민족에게는 독자적인 아름다움의 표적이 있어야 한다. 일반적 원리에 입각한 어떤 독창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각 국민은 어떤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제시해야 한다. … 각 민족<나라>은 아름다움을 통하여 독자적인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어떤 국민이 빈약한 표현밖에 하지 못했다면, 그만큼 국민 생활의 독자성이 빈약했다는 얘기가 된다.5)
이와 같이 야나기는 독창적인 표현이 미술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핵심이라고 보았다. 국민이 지닌 창조성의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의 미술은 야나기로 하여금 큰 관심을 갖게 했다. 야나기는 한국의 미술이야말로 뚜렷한 자기 빛깔이 있다는 것을 글의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는 에카르트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예술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조선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중국의 감정이 그대로 조선의 감정이 될 수 있겠는가. 특히 뚜렷한 내면적인 경험과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을 가진 조선이 어째서 중국의 작품을 그대로 모방했을 리 있을 것인가. 비록 외면이나 역사에 있어서는 관계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마음과 표현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조선 민족의 내면적 감정이 고유하고 내면적 역사의 경험이 독특한 것처럼 그 예술 또한 독보적이다. … 오늘날 호류사나 유메도노에 남겨진 백제의 관음은 중국의 어느 작품에도 뒤지지 않는다. … 경주 불국사의 조각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그것은 물론 당나라 시대의 작품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것이 남을 모방하고 남을 섬긴 흔적뿐이었을까. 거기에는 참으로 움직일 수 없는 조선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지 않은가.6)
위에서 보듯이, 야나기는 한국전통미술에 관류하고 있는 독창적인 특징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한국의 미술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자기정체성이 뚜렷하며, 작품이 비록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국민족의 창조적인 요소가 가미되었으므로 중국미술의 아류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경주 불국사의 조각을 예로 들면서 거기에는 당나라의 것을 모방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한국미술의 독창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도자기를 평하는 문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또 고려의 도자기를 송나라 도자기의 모방이라고 한다. … 고려의 아름다움은 결코 송나라의 아름다움일 수 없다. 양자 사이에는 그 성분과 기교에 있어서 닮은 소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표현된 아름다움에는 엄연히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고려자기에 흐르는 미묘한 선의 아름다움을 송나라 도자기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7)
조선자기가 명나라 자기에서 유래했다고는 하지만 거의 모방한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중국에 비해 아주 작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어디에 그런 독자적인 힘이 있었던 것일까. 흔히 역사가들은 조선시대의 문화가 중국을 추종한데 불과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도자기에 한해서는 그렇지 않다. 가령 명나라 자기가 훌륭한 존재라고 해도, 또 그것이 강하고 예리한 것이라 해도 조선자기 앞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한다. 조용하고 점잖은 품성 그 자체가 부동의 가치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그 도자기 자체가 입증해 준다. 8)
야나기는 고려자기와 조선자기가 중국의 송 ․ 명 자기에서 유래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모방품이 아니며, 조형양식 면에서 송 ․ 명 자기와 완연히 구분되는 차이점이 있음을 밝혔다. 고려자기는 미묘한 선에 있어서, 그리고 조선의 도자기는 조용하고 점잖은 품성에 있어서 중국의 도자기와는 또 다른 심미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도 1․2)
야나기는 한국미술의 가장 큰 특징을 ‘자연미’로 보았다는 점에서 에카르트와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엄밀하게 보면 자연미라고 하는 것은 한국미술만이 갖는 특징이 될 수는 없다. 선사미술은 모두 자연미로 출발하고 있으며, 역사이후에 있어서도 자연미는 어느 민족미술이든 뿌리처럼 존숭되고 있다. 그런데, 왜 에카르트와 야나기는 유독 한국미술의 특성을 자연미로 규정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다음의 글에서 답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것보다도 청나라 때의 것이 더 훌륭하고, 청나라보다는 명나라가 훨씬 뛰어났으며, 명나라보다는 송나라가 더욱 고상하다. 송나라보다는 당나라가 한층 더 완전하고, 당나라보다는 육조의 것이 더 깊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걸음 더 나아가 한나라의 것을 찾고 주나라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높은 아름다움을 추구할 것이다. … 그러나 예외 없이 모두 그렇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잘못이다. 적어도 도자기에 있어서는 이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조선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변호를 세상에 바칠까 한다. 일반적인 추세로 볼 때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기교가 복잡도를 더하고 있다. 그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피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자연을 떠나 작위(作爲)에 예술을 맡기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자연에 대한 반역이다. 자연에의 반역은 아름다움에 대한 반역이다. 시대가 후대로 내려옴에 따라 예술이 타락하게 되는 주된 원인은 실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이같은 경향에 따르면 후대로 내려온 말기의 도자기에서도 그 결점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로 흥미 깊은 예술 사상의 예외를 조선의 도자기 공예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아름다움은 단순으로의 복귀였다.9)
야나기의 견해에 따르면, 세계 모든 나라의 미술이 초기에는 자연미를 추구했는데,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점점 인공미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야나기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예술의 표현이 복잡해지고, 자연미가 인공미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예술의 타락으로 보았다. 세계의 모든 예술은 단순에서 복잡으로, 자연에서 인위로 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에서 제외되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이것은 야나기가 평생 동안 한국미술에 열중한 가장 큰 이유라 하겠다.
자연미의 전통이 고대로부터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는 야나기의 견해는 다음 문장에서도 나타나 있다.
신앙, 습관, 생활, 용기에 있어서 조선만큼 시간의 추이가 적은 나라도 없다고 생각된다. … 사람들의 생활이 옛날과 같이 순박하며, 사용하는 기물은 지금도 올바른 격을 지키고 있다. 정체도 있겠지만 혼탁은 없는 것이다. 10)
이 문장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문제는 한국미술이 고유한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이유를 생활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적인 생활면에서 과거의 전통을 잘 지켜나간 한국인들의 삶이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야나기는 한국의 고건축에서도 한국인 특유의 미의식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집의 기둥을 예로 들어보자. 일본에서라면 반드시 각재(角材)를 사용하고 굵기와 길이를 가지런히 한다. 이렇게 하면 집을 짓기에 편할 뿐만 아니라 지붕이 평평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아름답게도 된다. 이것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상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간단한 상식조차도 조선인들은 무시해 버린다. 원래 재목은 둥근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구태여 각재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재목은 언제나 곧바르다고만 할 수 없다. 또 당연히 굵고 가는 데가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나무를 별로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정도가 지나친 것은 일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강 손질을 하지만 대충 쓸 수 있을 정도라면 그대로 사용한다. 즉 곧바르면 곧바른 대로, 구부러졌으면 구부러진 대로 일을 순응시켜 나간다. … 이것은 본래부터 ‘부정확성’에 흥미가 있기 때문도 아니고 ‘대강’이 좋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무슨 일에도 구애받지 않는 것이 그 특성인 것이다. 그런데 완성된 건물을 보면 일본의 건물에는 정연한 장점이 있기는 하나 조선의 건물 쪽에는 어딘지 모르게 따스함과 여유가 있고 친근감이 있으며, 특히 아름다움으로 본다면 후자에 더 자유로움이 있어 한층 더 취향이 풍부하다. 11)
야나기가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의 고건축에서는 가지런한 목재만을 건축에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본의 건축과 구분되는 큰 차이점이라고 했다.(도 3․4) 우리는 지금도 사찰이나 고택에서 휘어진 기둥과 대들보를 흔히 접할 수 있다. 인위적인 꾸밈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태도는 기교적인 완벽주의보다 자연미를 애호하는 한국인들의 심성이 담겨져 있다. 예를 들어 범종루, 심검당, 선운사의 기둥은 모두가 인위적인 가공 없이 자연그대로의 목재를 가지고 만들었다. 이러한 모습이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동서의 미술이론가들이 거듭 지적한 바 있다. 야나기는 조선의 목공품에서도 곧고 굽음에 구애받지 않는 자연의 미의식이 나타나고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의 목공품은 가공이 지나쳐서 도리어 그 맛을 죽여 버린다.”12)고 보았다.
야나기는 이와 같은 한국의 건축에 담겨진 ‘부정확성’이 지닌 양면성을 지적하고 있다.
“나쁘게 말하면 무성의하고 만사에 무관심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좋게 말하면 무슨 일이나 무심하고 집심(執心)이 없으며 ‘불이(不二)’의 경지에 달해 있어 마음이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자유에 조선 작품의 아름다운 원천이 있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13)
‘부정확성’은 나쁘게 말하면 무성의하고 만사에 무관심하다 볼 수 있겠으나, 그것을 좋은 측면으로 해석하면, 집착을 벗어난 자유정신으로 작용해 작품을 아름답게 만드는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야나기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조선의 도자기였다. 그는 여러 편의 논고에서 조선도자기가 지닌 부정형성(不整形性)을 조선도자기의 독창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조선의 도자기는 인위적인 의도가 없는 상태 즉,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무심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야나기는 이러한 점에서 일본의 도자기와 조선의 도자기가 구분되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일본의 도자기는 정확성에 집념하거나 또 부정확성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부정확성에 집념하는 경향이 심하다. … 조선에서는 정확성에나 부정확성 그 어디에도 모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다. 그 구애되지 않는 마음이 조선 건축의 아름다움을 낳고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낳았다14)
야나기는 미술이론을 공부하기 이전에 종교 철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미술이론 속에는 늘 그의 전공분야인 종교철학의 느낌이 드리워져 있다. 그는 도자기, 건축, 목공, 민화 등 한국 전통미술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예술정신이 아름다움의 추구를 넘어서 종교의 궁극과 만나고 있다고 보았다.15) 그의 말기 저서라 할 수 있는『미의 법문』16)에서는 예술과 종교가 추구하는 세계가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종교와 예술을 하나로 본 야나기의 예술철학은 한국의 전통미술이 추구하려했던 정신적 깊이를 찾아나가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3) 고유섭 (1905-1944)
고유섭은 한국인으로는 가장 최초로 한국미술사를 연구한 학자이다. 초기에 서구미학에 전념했던 그는 이 학문을 한국미론에 접목시켰다. 지금 한국미론을 논할 때 사용되는 미학용어들 중에는 고유섭이 개척한 것이 대부분이라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고유섭은 위에서 소개한 에카르트 ․ 야나기와 같이 문학 ․ 역사 ․ 철학 ․ 심리학 ․ 미학 등 인문학적 소양과 작품을 해석하는 직관적 안목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고유섭은 「조선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라는 논고에서 “한국미술의 특색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가 첫 번째로 제시한 답안은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었다. 고유섭은 ‘무기교와 기교’, ‘무계획의 계획’은 기교와 계획이 생활과 분리, 분화되기 이전의 것으로, 구체적인 생활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따라서, ‘무기교의 기교’,‘무계획의 계획’은 기교와 계획이 의식과 분별에서 나온 ‘기교적인 기교’, ‘계획적인 계획’과 엄연히 분리되어야 함을 밝혔다. 이렇게 기교와 계획이 분별되기 이전의 의식에서 나온 미술은 개성적인 미술 ․ 천재주의적 미술이 발달되지 못하고, 일반적 생활, 전체적 생활의 미술, 즉 민예라는 것이 큰 동맥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17)
또한 민예는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된 것으로서, 이것은 상품화된 것이 아니므로 정치한 맛, 정돈된 맛에서는 다소 부족하지만, 그 대신 질박한 맛과 순진한 맛에 있어 우수하다고 했다.18)
다음으로 고유섭은 한국미술의 특징을 ‘비정제성’이라 했다. 한국의 미술은 정제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유섭에 의하면, 정제성의 부족은 예술표현의 미숙함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미술의 독창성을 탄생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도자공예에서 예를 들자면, 기물의 형태가 원형적 정제성을 갖지 아니하고 왜곡된 기형을 많이 이루고 있다. 이곳에 형태가 형태로서의 완형을 갖지 않고 음악적 율동성을 띠게 된 것이다. 조선의 예술이 선적(線的)이라한 야나기의 정의는 이 뜻에서 시인된다 하겠다.19)
일반적으로 한국의 도자기는 중국의 도자기와 비교할 때, 정제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뒤떨어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흐트러짐 없이 정제된 송 ․ 명 도자기에 비하면, 고려와 조선의 도자기는 정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고유섭은 이것을 작품을 평가하는 우열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각기 다른 민족의 미의식으로 파악하려 했다.
고유섭에 의하면 한국의 전통 도자기에 나타나는 비정제성은 그로 말미암아 음악적 율동성을 띠게 되므로 비정제성은 극복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한국도자기의 정체성이 확보된다고 보았다.(도 5)
고유섭은 한국미술의 또 하나의 특질을 ‘비균제성(asymmetry)으로 들고 있다.
즉, 상하나 좌우가 규격적으로 같지 않은 점이다. … 단일 건축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과 반드시 같지 않은 점도 그 특색이며, 가람배치에 있어서도 같은 점을 본다. 제일 알기 쉬운 것은 조선의 민가제도이니, 그것은 결코 중국의 그것과 같은 균일한 것이 아니다.20)
일본 ․ 중국의 건물은 그 절반만 실측하면 나머지 절반은 실측하지 아니하고도 해답이 나오지만, 조선의 건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 불국사의 건축평면, 그 돌계단과 다보탑, 고려 만월대궁전 평면, 기타 각 사찰건물에서 볼 수 있는 창살의 모양 등 모두 알기 쉬운 예이다.21)
한국의 건축은 좌우가 비균제한 것을 특징(도 6)으로 하는데 반해, 중국과 일본의 건축은 좌우가 균일하다고 보았다. 고유섭은 한국 건축에서 흔히 사용되는 비균제성은 다양성과 다채로움의 기교를 낳았으며, 이러한 기법은 바로 한국인들의 풍부한 상상력과 구성력이 건축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보았다.22)
다음으로 고유섭은 조선미술의 특색을 ‘무관심성’으로 들고 있다.
조선의 건축에는 목재의 자연적 굴곡이 아무런 정리를 받지 않고 그대로 사용되었다.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 같은 데서 그 심한 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보통 민가에 있어서도 추녀의 반전을 형성할 때 바른 나무를 굴곡지게 목재를 그대로 얹어 만들어낸다. 이리하여 무관심성은 마침내 자연에 순응하는 심리로 변하게 된다.23)
한국전통 건축에 나타난 ‘무관심성’에 대해서는 앞서 야나기의 글에서도 밝힌 바 있다. 그는 무관심성에서 나오는 결점, 즉 한국의 고건축에서 나타나는 거칠고 세부에 치밀하지 않음이 오히려 ‘구수한 큰 맛’을 이루게 하고, 생동감을 더해준다고 했다.
지금까지 한국미술의 독창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위에서 소개한 세 학자의 한국미술론은 그동안 발원지 중심적으로 전개되어온 한국서예의 해석방식을 크게 반성하게 한다. 에카르트, 야나기, 고유섭의 미술사적 관점을 서예사에 적용한다면, 그 글씨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가를 밝히는 것보다 수용된 서체를 어떻게 발전시켰는가에 대한 의미부여가 더 중요하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미술이 중국미술을 본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을 모방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심화 발전시켰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미술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자연미’에 근접해 있다고 보았다. 그가 본 한국미술은 분명 중국의 아류가 아니라, 중국미술과 일본미술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을 구가한 미술이었다.
야나기는 한국미술의 특징을 ‘자연미’로 보았다는 점에서 에카르트와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한국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미술이 중국미술의 영향을 받았지만 분명히 독립되어 있는 미술로 보았다. 그는 불국사, 석굴암, 고려자기, 조선의 도자기, 고건축, 목가구, 민화 등에서 중국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독창성이 있다고 했다.
고유섭은 한국미술의 특징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작위, 비정제성, 비균제성, 구수한 큰 맛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다양한 용어를 함축하고 있는 정신은 역시 ‘자연미’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미술이 중국, 일본과 색채를 달리하는 독창적인 미술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카르트 야나기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미술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강조한 한국미술론은 그동안 발원지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한국의 서예이론과 너무 대조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세 학자가 주장한 한국미술에 나타난 독창성은 한국서예를 전면적으로 검토하게 한다.
3. 삼국금석문 서예의 창조성
앞에서 제시한 한국미술론에 대한 이해는 본 장에서 다루려고 하는 “삼국금석문 서예의 창조성”을 규명해내는 중요한 거울로 작용될 수 있다. 특히, 한 ․ 중․ 일 미술을 비교하면서 찾아진 한국미술의 독창성은 그동안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각 없이 글씨 잘 쓰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왔던 한국의 서예를 크게 반성하게 한다.
야나기는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나라의 자연환경과 생활양식을 미술에 반영하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으로 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 국민에게 창조성이 있다면 남의 나라 것을 모방하는 일에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은 각 국민에게 특수한 토지, 특수한 기후, 특수한 역사, 특수한 풍습을 주고 있다. 거기에서 독자적인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자연의 의지에 어긋난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기물도 국민의 성격이 충분히 나타나야 한다. 그게 당연하다. 국민성의 상실은 한 나라의 공예를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24)
야나기는 ‘설사 외래의 풍조(風潮)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충분히 소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며, 자각 있는 민족은 남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부끄러움을 범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자신을 존중하는 자만이 남을 존중할 줄도 알며, 세계 모든 국민의 독창성을 존중하는 공동(共同)의 기초 - 거기에 참다운 국민성이 있다’25)고 했다. 결론적으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국제성을 띤 다는 것이다. 이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임을 주장한 괴테의 주장과 일치한다.
이같은 석학(碩學)의 견해는 자기가 속해있는 자연환경과 문화적인 환경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외부에서 들어온 문화예술의 겉모습만을 모방하는 사람들에게 큰 경종을 울렸다.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면서 삼국서예가 지닌 창조성을 몇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1) 창조적 재구성
삼국의 서예는 일찍부터 중국서예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풀 수 없는 문제는 삼국시대의 글씨가 중국의 어떤 글씨의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국시대의 서예는 중국서예와의 영향관계가 불분명한 데 반해 통일신라시대를 시작으로 중국서예와의 영향관계가 분명해진다. 이것은 삼국시대인들이 고유한 서체를 만들어나가는 자생력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설령 외부에서 서체를 수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광개토왕비>(414)는 서한 고예(古隸)와 전진(前秦)의 <광무장군비>(368)와 장산비(368)그리고, 낙랑의 전명(塼銘)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딱히 <광개토왕비> 서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할 수 있는 중국의 글씨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고구려인들이 남긴 <광개토왕비> 이외의 금석문 서예를 보면서 추론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고구려인들은 어떤 한 서체를 고정화시켜서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한 예는 <광개토왕비>와 1년의 차이를 둔 <광개토왕호우>(415)의 조형분석을 통해서 제시될 수 있다. <광개토왕호우>는 개별적인 글자의 형태로 보았을 때 <광개토왕비>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전체 장법(章法)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두 금석문은 전혀 다르다. <광개토왕비>가 계선(界線)을 그어 규칙적인 배열을 하고 있다면, <광개토왕호우>는 글자의 대소와 자간의 간격이 서로 다르고 글자의 배열 또한 불규칙적이다. 이렇게 표현양식이 달라지는 것은 고구려인들이 같은 글씨라도 재료와 용도에 따라 글씨를 적재적소(適材適所)하게 변용시킬 줄 아는 심미적 감수성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중원고구려비>(5C중반) 또한 융통성 있는 고구려인들의 심미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중원고구려비>는 <광개토왕비>와 유사한 느낌을 주고 있어, 많은 학자들이 <광개토왕비> 서체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또한 두 서체의 차이점에 비중을 두고 본다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광개토왕비>는 고예적인 필의가 강하고, <중원고구려비>에는 해서적인 필의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두 금석문은 유사하면서도 다른 “동중유이(同中有異)”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렇게 동류의 서체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은 고구려인들이 어떤 한 서체를 고정시켜서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금석문을 쓸 때마다 창조적으로 재구성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백제의 금석문 또한 쓸 때마다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무녕왕릉지석>은 ‘왕의 지석’, ‘왕비의 지석’, ‘매지권’으로 나누어지는데, 서로 느낌이 다르다. 이것은 백제인들이 어떤 한 서체를 고정시켜 쓰고 있지 않고 그때 그때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은 외형상으로는 서로 다르지만, 다양한 변화를 동반한 부정형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각법(刻法)에 있어서는 마치 모필 서사로 쓴 것과 같은 자연스러움이 있다. 각법은 백제인들의 조각솜씨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백제의 각수(刻手)들은 돌을 다루는 기술이 삼국시대인중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전한다. 지석의 글씨는 붓으로 직접 쓴 것과 같이 생동감이 있으며, 신기(神技)를 연상할 만큼 신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창왕사리감>과 <사택지적비> 또한 백제인들의 서예적 감수성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 글씨들은 중국서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되어 오다가 최근에는 백제서예의 내재적인 전개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는 견해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26)
신라의 글씨는 매우 독창적이어서 다른 나라의 서예와 연결 짓기가 더욱 어렵다. 신라는 지정학적인 조건으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중국과의 문화적인 교류가 적었다. 이것은 자기문화의 ‘고유성’을 보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삼국의 금석문 중 신라의 금석문은 대비적이고 의외적이고 파격적인 글씨들이 가장 많다. 신라의 서예는 석장승, 목장승, 남산 돌부처, 그리고 탈춤놀이에 쓰이는 탈처럼 익살과 해학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스타일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라서예만의 특수한 모습이다.
정병모는 「신라서화의 대외교섭」이라는 논문에서 <적성비>(551, 도 7)가 북위에서 제작된 <신구삼년명조상비(神龜三年銘造像碑)>(520, 도 8)와 유사하다고 했다. 그는 ‘곡선적이면서도 열린 구조를 한 <적성비>의 서체적 특성이 <신구삼년명조상비>를 닮았다고 했다.27) 서체양식의 유사성과 제작연대, 그리고 <신구삼년조상비>에 실린 역사적인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의 <적성비>가 북위<신구삼년명조상비>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좀 더 진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 두 글씨는 형태상으로 유사하지만, 내부적인 구조로 보았을 때엔 큰 차이점을 발견 할 수 있다. <적성비>는 <신구삼년명조상비>에 비해 박진감이 느껴지며, 변화가 더 많다. “子”의 비교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신라의 <적성비>는 변화 면에서 훨씬 더 뛰어나다.(도 9) 이것은 신라인들이 북위에서 수용된 서체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예술에 있어서 창조적 재구성은 그 나라 사람의 미적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권영필은 「한국미술의 미적 본질」이라는 논고에서 창조적 재구성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미술의 기본요소가 외래의 영향을 통해 이루어 질 때 그 영향의 수용과정에서 더 보태진 것은 새로운 창의적 부분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미술은 중국 것의 아류 또는 지방성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편견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영향 자체에 중점을 둔 소극적인 평가방법이다. 오히려 영향을 받은 후에 그것을 어떻게 변형시켜 자기화하였는가에 더 큰 비중이 두어져야 한다. 이때에 새롭게 생겨난 자기화가 곧 ‘고유성’인 것이다.28)
위의 내용은 ‘고유성’의 의미를 재해석하게 한다. 비록 한국 미술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창조적인 재구성을 거친 것은 중국 미술의 아류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에 입각하여 신라의 <적성비>를 평가한다면, 그것은 북위의 <신구삼년명조상비>의 아류가 아니라 자기가 가미된 창조적인 글씨이며, 새롭게 생겨난 ‘고유성’인 것이다.
지금까지 삼국시대 서예에 대한 평가는 ‘고유성’에 대한 의미부여가 무척 소극적이었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글씨에 대해서도 중국서예와의 “같음”을 중시할 뿐, “다름”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다름”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의미부여가 적극적으로 개진되지 못했다. 삼국의 서예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서예를 막론하고 중국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이 자주적(自主的)인 서예를 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수용된 서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그들의 정서에 맞게 변용할 수 있는 창조적인 잠재력이 그들에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2)자연미
삼국시대 때 제작된 비문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주로 자연석을 이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거의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글씨를 새겼으며, 마치 대자연의 돌 그대로를 옮겨다 놓은 듯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삼국시대인들의 정신에 흐르는 친자연적인 사고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왜 남북조시대의 비문처럼 화려한 귀부와 이수를 갖추지 않고, 잘 다듬지도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 썼을까? 혹자는 이에 대해 생활이 미개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 때 제작된 화려하고 정교한 금관 ․ 불상, 그리고 분묘나 석탑에서 사용된 반듯한 판석을 보면, 자연석을 사용한 입비(立碑) 풍습은 그들의 생활자체가 미개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들의 ‘자연미’ 애호 사상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고건축에는 자연에서 채취한 나무의 몸통에서 나무껍질을 벗겨 내고 여기에 이렇다 할 가공을 하지 않고 그냥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선운사 ․ 실상사 ․ 봉정사에서 보듯이 휘어진 나무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건축재로 사용하고 있다.’29) (도 10․11․12) 이렇게 자연을 고스란히 건축에 옮겨놓으려는 생각은 중국이나 일본의 건축문화에서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현상이다. 이렇게 자연과 문화를 이분화하지 않으려는 한국인들의 미의식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쓴 삼국시대의 비문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도 13․14․15․16)
서체는 재료의 영향을 받는다. 중국의 서예에 있어서도 동시대에 쓴 글씨라 하더라도 화려한 귀부와 이수가 갖추어진 비에 쓴 글씨와 자연석에 쓴 글씨는 차이가 많다. 예를 들어, 천연암벽에 쓴 마애글씨는 바윗돌과 주위의 나무 숲 등 자연경관으로 이어지는 곳에 쓰여 졌기 때문에 잘 다듬어진 비면 위에 쓴 비문 글씨에 비해 열린 구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먼데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필획이 가늘고 성글며 글씨가 비교적 크다. 이렇듯 재료와 용도를 고려하여 그에 맞는 글씨를 쓰려함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서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었다.
삼국시대 때 사용된 비문은 대부분 자연석을 다듬은 석각이다. 삼국시대인들이 자연석 위에 쓴 글씨는 마치 돌의 형상을 닮았다. 거기에는 인위적으로 아름답게 꾸미려는 작위(作爲)의 흔적이 적으며,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솔직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석을 이용한 비문의 전통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청제비>(798)와 <사천매향비>(1387)에서 보듯이 자연석에 새긴 글씨는 무작위한 삼국시대의 유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도 17) 그것은 바로 재료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글씨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