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됐다.
그리고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오사마 빈 라덴 출현 이전까진 세계 최악(?)의 현상범이기도 했다. [1] 자세한 건 테러리스트 논쟁 부분 참고.
인물이 인물인지라 1960년대부터[2] 여러번 영화나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는데 초대에는 영화 감독이 손수 김구을 맡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백범 전문 배우는 원로 배우 박암이 주로 맡았다. 대표작이 백범 김구와 상해 임정,[3] 80년대 이후 등장해서 지금까지 김구 역을 가장 많이 한 배우는 제1공화국, 야인시대등에 출연한 중견배우 이영후씨이다. [4] 이후 MBC 특집극에서는 대조영에서 연개소문, 불멸의 이순신에서 어영담을 맡은 김진태가 맡았고 윤봉길 의사를 다룬 단막극에서 정욱씨가 맡기도 했다. 1995년 여름 그의 생애를 다룬 내용을 KBS에서 16부작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했었는데 청년시절의 김구 역을 배우 김상중이 맡았고[5] 장년, 노년의 김구 역은 연극계에서 백범 전문배우로 유명한 조상건이 맡았다.[6][7]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구안동김씨의 익원공파이나 떵떵거리는 집안은 아니였고 평민 수준의 가정생활을 하였다. 유년시절 이름은 김창암이었으나 1893년 18살에 동학에 입교하면서 이름을 김창수로 바꿨고, 이후 1912년 37세때 비로소 김구로 개명했다. 구 자도 龜에서 九로 바꾸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정치인. 건국유공자로서 그 중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들 중의 한 사람. 다른 여러 인물에는 국부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이견이 있지만, 김구 선생님에게는 국부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대부분 별 다른 소리가 없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도권을 놓고 최대 경쟁자였다는 점에서 흔히 <VS 이승만>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최근엔 이념에 더 큰 비중을 두어 <VS 여운형> <VS 김규식> <VS 박헌영> <VS 김일성> 등의 묘사도 나타나고 있다.
외모만 봐서는 온화한 학자풍에, 앞으로 대한민국의 길을 군사, 경제적 강국이 아닌 문화적 강국으로 제시하는 등 그냥 지식인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생전의 활동은 투사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였다.
본관은 안동. 김자점으로 인해 대대로 숨어지내야 했던 불미스러운 과거가 있다. 인조대의 재상이었던 김자점은 효종과의 갈등 끝에 북벌론을 청나라에 알렸고 이때문에 북벌에 실패한 효종은 김자점을 처형했다. 동시에 인조의 후궁이자 김자점과 내통한 조귀인(인조 후궁), 김자점의 손자이자 조귀인의 사위 김세룡 등도 함께 처형됐고, 김구의 11대조 김대충은 이후 개성으로 피신했다가 한성 근처라서 다시 황해도 해주 텃골로 낙향해서 양반 신분을 숨기고 살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글공부를 했으며 근처 마을 이씨, 강씨들에게 천대받는 것에 분개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을 할 생각이 있었으나, 당시 과거제도의 부패와 폐단을 보고 그만두었으며 동학에 입문하여 동학군으로 활동했다. 동학군이 패배한 후에는 얼마동안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의 집에 몸을 숨겼다. 재밌게도 동학활동 당시 그가 지휘하던 동학군을 때려잡은 사람은 바로 안태훈이었다. 덧붙여 나이가 비슷했는데도 불구하고 안중근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태훈에게 보호받은 건 약 1년 정도인데, 이 때 이후로도 계속 안태훈의 집안과는 친분을 유지한 듯하다. 일단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과 김구는 아는 사이였고, 나중에 김구의 장남과 결혼한 여성이 안태훈의 차남의 딸이다. 그리고 안태훈의 3남인 안공근은 김구의 측근이었다고 한다. 이 탓인지 1930년대 말,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이 자기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러 다닌다고 하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다. 국민당의 경찰력을 동원해 살해하려 했다고. 백범일지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고능선의 훈도로 청나라와 손잡고 일본을 쓰러뜨리려 계획했으나 계획대로 되지 않아 만주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던 중 치하포의 한 국밥집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료를 살해했는데, 자신의 자서전 백범일지에서는 국모의 원수를 갚기위하여 혼자서 맨손으로 죽인걸로 되어있었다. 자서전에선 살해한 일본인의 신분이 일본군 중위였다고 기술하였으며 이에 대한 학계의 논의가 분분하다.
치하포 사건에서 죽은 쓰치다의 신분에 대한 역사학계의 가설은 여러가지인데, 이중 수많은 논란을 내놓은 것은 월간조선에서 주장한 쓰치다는 상인이었다는 설이다.[8]
당시 개항장에서 활동하던 일본 상인이 몰려들어왔고 조선상인들의 피해가 많아 충돌이 빈번하였으며 반일감정이 심하여 일본상인들이 봉변을 당하는 일도 많았는데, 고종이 직접 일본인 피살을 막으라는 칙어를 내렸고 일본영사관의 요구로 각 지역 군인들로 하여금 일본인 보호를 강화토록 할 정도였다. 또한 일본정부는 내륙에서 장사하는 일본상인들에게 철수령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일본상인들이 조선옷으로 변복을 하여 다니기도 하였다. 아마 쓰치다도 변복을 하고 철수를 하던 상인이었고 당시 일본상인에 대한 반일감정의 발호로 살해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요컨데, 김구는 사업차 조선을 방문한 상인 쓰치다를 살해하곤 일본군을 살해한 것이라 주장햇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근거로 당시 취조문에서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는 부분이 나온다는 것을 거론한다.
또, 역사문제연구소 배경식 연구원이 쓴 '올바르게 풀어 쓴 백범일지'에서도 이러한 설을 지지하면서, 실질적으로 백범일지에서 직접 적은 것 외에는 쓰치다가 군인이라는 증거가 없고, 상인이라는 기록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상황이야 어쩃건 살인을 했으니 11월 법부에서는 김구에게 강도살인죄로 사형(교수형) 판결을 내렸으나, 집행을 보류하였다. 이는 우연히 승정원승지가 특이한 죄목명인 '국모보수'(國母報讐) 라는 단어를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라 한다.(승정원 기록에는 나오지않는다) 명성황후 시해로 인한 당시의 반일감정 때문인지 조선 법부는 고종황제가 전화로 인천감옥장에게 내린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 집행 예정일 하루전날 형 집행을 보류시켰다고 위키백과에서는 밝히고 있다.
중앙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고종은 전화가 아니라 전보로 인천감옥에 있는 김구의 사형 유보를 지시했다고 한다. 1894년 12월 1일부터 인천우편국에서 전보를 취급했고 전화는 1898년에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판결에 대한 언질도 없이 옥중 생활을 하다가 11월 7일자 독립신문을 통해 자신이 교수형 판결을 받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사형에 대한 중압감으로 경황이 없던 김구가 잘못 들었거나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하였다.
2007년 김완섭이 김구가 죽인 쓰치다가 민간인이며 김구는 잔인한 살인자라고 주장하다가 법원의 판결로 인해 허위사실로 판결 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김완섭의 주장 중 '허위사실'로 들어나 유죄를 인정 받은 부분은 유관순에 대한 비난과, 김구가 중국으로 가게 되는 과정 부분이다.
재판부의 판결문(상부 판결문 링크)에서 쓰치다의 신분에 대하여는 '쓰치다가 명성황후 시해에 연관 된 일본 군인인지, 무고한 상인인지에 대해 판단할 아무런 증거도 현출되지 않았기에 허위사실 판단이 무리이다'라고 쓰고 있다.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도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 라는 부분은 김완섭을 고소한 '검찰'의 고소 이유이지, 재판부에서는 이에 대하여 '위장한 일본군' 부분은 허위사실 판단 무리, '망명을 도주로 표현한 부분'은 허위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참여하고 임시정부의 간판을 유지하며 임시의정원 의원, 경무국장[9], 임시의정원 의원 재선,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총리 직무대리 등을 거쳐 국무령 및 국무위원, 주석에 취임하기도 했다.
1930년부터 3년간은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더 적극적인 항일저항운동을 펼쳤다. 이봉창, 윤봉길등의 독립투사를이 한인애국단출신이라 한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1938년 한 차례 암살 위기를 넘긴 후 1940년 기존 임시정부 수석이 병으로 사망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주석이 되었다. 이후 임정에서 축출당한 이승만을 복권시키고 그를 통해 미국과 접촉하여 한반도 본토 해방 계획을 세웠으나 계획이 실행되기 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일본이 항복했으며,국내진공계획은 무산되었다.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를 가진 미군정에 의해 임시정부 주석자격으로의 귀국이 불허되고, 한참 뒤에야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귀국후한국독립당을 창당 하였으나 김구의 입지는 생각보다 좁았다. 민중의 지지를 받긴 햇으나, 다른 지도자들과 사이는 소원했다. 이는 김구가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한 벌인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서 백색테러에도 관련 되었기 때문인데 해방후의 정치노선으로 갈아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펜과 언변으로 고상한 독립 운동을 한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며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또한 김구는 임정 법통성을 지지하였는데 귀국이 늦어짐에 따라 여운형이 세운 건국준비위원회와 그곳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박헌영 계열 사회주의 세력 주도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것을 보고 격분했었다고 한다.
한민당 총수 장덕수가 피살되는 일이 벌어지자 미군은 김구를 배후세력으로 지목하며 증언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김구가 반탁운동을 진행하며 신탁통치의 주체가 될 미군정과 정면으로 충돌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정은 김구를 난폭한 호랑이란 Black Tiger이라 부르기도 했다.
장덕수가 피살 된 시기,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주도한 비상국민회의를 버리고 한민당과 연합해 독자적 행보를 걷기 시작하였고 정치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김구를 배후세력으로 지목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김구는검찰에 의해 미군정 재판정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일로 김구는 이승만이 자신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고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사실을 인식하였는지 사실상 관계를 정리해버렸다.
최후의 건곤일척으로서 김규식과 방북하여 김일성과 연석회의를 가져 남북 총선거를 실현하려 했으나 실패, 북한의 프로파간다의 대상이 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10] 그런데 애초에 남북 연석회의 자체가 북한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자리였다는 평. 왜냐하면 그 때는 이미 남북한 정부 수립은 사실화되었고 애초에 김일성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할 생각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북한영화 위대한 품에서 보면 조롱을 당하는데, 김구가 김일성에게 절을 하면서 자신에게 땅을 몇마지기 주면 황해도에서 과수원한다면서 반공운동을 한것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11] 지만원은 여기에 대해서도 '북한에서도 김구를 놀린다'고 깠다.
1949년, 사저였던 경교장에서 한국군 장교 안두희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하여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친다. 암살의 배후는 이승만, 김창룡이나 미국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실행범이 안두희란 것 뿐이다. 안두희는 50여년 뒤, 박기서의 둔기에 의해 피살당한다.
1949년 6월26일 순국한 그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뤄졌으며 해방이후 최대의 인파가 몰렸는데, 국사편찬위의 연구에 따르면 26일 오후 12시30분께 서거한 후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명이 종로구 평동의 빈소인 경교장을 다녀갔다고 한다. 장례가 10일장으로 치러져서 조문객수는 2백만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진을 보려면 본 링크를, 국민장 동영상을 보려면 이 링크를 참조하자. 1949년 10대 뉴스 1위였다고 한다
해방 후에 출판된 백범일지의 부록 "나의 소원"에서 이념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피력하여 친좌익적인 인물로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임정 시절부터 극우적 태도를 견지한 인물이다.
백범일지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그의 생각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레닌의 방귀구멍을 꿀물핥듯하는 자들!"[12]. 일단 민족이 있어야 인민 혁명이든 뭐든 한다며 당시 사회주의 계열을 빙 돌려서 깐 부분도 있다.
당시에는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대단히 긍정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조셉 매카시(매카시즘의 선구자)의 등장 이전까지는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정치가는 드물었다. 이승만마저도 취임연설에서는 "평화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다면, 공산주의자의 참여를 받아줄 수 있다"고 연설했던 일이 있다. 물론 폭력에 의한 자본주의 체제 전복과 혁명만이 자본주의 체계를 무너뜨릴수 있다고 칼 마르크스가 자기 책에 써놨으므로 폭력혁명 노선을 부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는 하다.
애초에 김구는 해방 이전부터 사회주의 계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 처럼 공산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소련의 국제공산당에 의지하려드는 것이 친일파와 다름 없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보았고, 이들의 활동을 임정 주류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곱게 보지 않았다.공산당 활동을 민족해방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느냐(여운형, 조봉암, 이동휘), 실제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민족을 넘어선 사해주의 계급투쟁을 주장했느냐(박헌영) 그런 구분없이 공산당=매국노라고 간주했다.
또한 해방 이후, 소수의 우익세력(한민당)이 임정 봉대를 주장했던 것에 비해 당시 조선 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회주의 세력들은 임시정부 봉대를 반대하자 김구는 사회주의 세력을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적으로 보고 우익세력과 합작해 사회주의 세력을 배척하는 데에 앞장서게 된다.
김구가 내세운 임시정부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국내 좌익계열은 이러한 주장에 크게 반발했다.
좌익계열은 사실상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데다가 그나마 한것도 지하활동으로 구분되는 경우라 임시정부의 활동앞에선 자연스레 위축 될수 없었다.
단, 지나치게 정통성을 내세우는 김구에 대해 당대에 명성을 날리던 민족변호사 허헌은 김구를 아주 제대로 깠다.[13]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 양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면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이들의 무장투쟁을 도왔을 것이다.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단독정부수립을 직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민국의 부활, 민국 30년[14]을 말했지만 일각에서는 3.1운동을 통해 전국(한반도) 인민의 합의를 거친 정부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이뭐병.
2008년 교과서포럼에서 출판된 근현대사 대안교과서[15]에는 일본에 대한 테러 활동을 수행하였다고 나왔는데, 이것이 일반인들에게는 테러리스트로 활동하였다는 식으로 잘못 알려져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이것 때문에 이외수와 진중권이 비난했으나 이는 단어선정 기준에 대한 오해가 낳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교과서에 사용하는 어휘가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김구가 독립운동 당시 수행한 일은 단순히 일본 군부에 대한 테러전에 국한되는 것만이 아니라 임시정부 조직, 광복군 조직 등의 체계적인 일이었기에 이 교과서의 설명이 매우 부족한 감은 있다. [16]
그리고 김구의 활동을 테러활동이라고 기술한 것은 사실 우파들에게 좌익적이라고 한참 욕을 먹었던 금성출판사가 먼저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외수나 진중권이 금성출판사를 옹호한적이 있을지언정 깐적은 없다.
편싸움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실제로 대안교과서의 기술이 테러리스트라고 한 것처럼 알려진 것은 흑색선전의 영향이 지대하다. 말하자면 해방 이전 일본을 상대로 한 테러와 해방 이후 국내 정치인을 상대로한 테러에 대한 관점의 문제다. 예를 들어 해방 이전에 김산과 같은 인물은 테러리스트라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서술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무수히 많은 정치인들이 테러로 죽어가면서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봉암의 경우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싫어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조봉암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어찌됐든 이것과 별개로, 사실 김구는 김원봉과 더불어 역사상 최고액 현상범이란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봉창 및 윤봉길 사건 이후 배후에 그가 있음을 안 일제는 그의 목에 6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는데, 이 액수는 현재 기준으로 따진다면 약 200억 원에 달한다. 반면, 의열단 단장으로 활약했던 김원봉은 현상금이 100만원이었다. 이 기록은 훗날 오사마 빈 라덴(500~600억원)이 출현할 때까지 반 세기도 넘게 깨진 적이 없다. 물론 당시의 일제가 그만한 돈을 지불할 의지나, 심지어 능력이 있었는지는 다분히 의심스럽다(...).
라이벌로 비추어지는 이승만을 아주 높게 평가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김구의 평가가 압도적으로 높다.
이승만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외세에 의존한 독립운동을 주장하여 자주성이 없다는 평을 듣는데 반해, 김구는 한민족만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였고 끝까지 이 견지를 고수하며 임시정부를 이끌어갔다. 게다가 이승만은 6.25 사변때 서울사수를 주장하는 방송을 하며 퇴각하는 제대로 병크를 터뜨려 평가가 최악으로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부라는 칭호가 당연한,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란 것은 부동의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당시 원톱에 위치에 설 걸물이 없고,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사상과 보수와 진보 양측에서 공격 받기도 한 정치색등이 쿠데타로 세워진 국사정권이 근대사를 설명하며 거론하기 쉬운 인물이라 후대들어 존경을 강요한 인물이란 분석도 있다.
흔히 보는 김구의 모습은 노년기의 모습이라 은근히 허약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번 백범일지를 읽어보길 바란다. 기묘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
예를 들어 1미터가 넘는 벽을 뛰어 넘는다든지[18], 감옥에서 죽으려고 결심한 뒤 숨이 끊어졌다고 묘사해놓고 다시 일어난다든지(…). 그밖에 김구 선생 본인이 한 일이 아니긴 하지만 절에서 세 스님들이 석유통을 조사하기 위해 불을 붙여 일시에 모두 죽는 사고가 난 일도 있다.
사실 백범일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춘원 이광수가 윤문했다. 사실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지만 말이다. 이광수는 친일파 행적만 돌출되어 알려져있지만 누구도 부정못하는 당대최고의 명문가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광수가 윤문했을 때 백범일지의 내용이 약간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백범기념회관 및 관련 학자 등에 의해 반박되었다. 다만 구어라던가 한문 어투는 모두 손봤는데, 중요하지 않은 몇 부분은 알아먹기가 힘들고 지루해서 잘라버린 건 있다. 1990년대 후반 원전 백범일지가 나왔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비교해도 좋을 것. 참고로 이 책은 사실 자신의 아들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쓴 책이다. 1929년 판본이 있는데, 엄항섭이 등사기로 일일이 출판한것이라고 한다(...) 복사기가 없던 그시절에 등사기로 일일이 등사하다니...(등사판본을 칼로 일일이 새겼을 수고를 생각하면) 그 판본은 현재 미국 대학에 보존되어있다.
생전 부인 최준례와의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지만 두 딸 김화경, 김은경은 둘 다 유년기에 급사했다. 나중에 태어난 아들 둘은 딸에 비해 오래 살았는데, 장남 김인은 1945년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급사했다. 그리고 자녀들 중 그의 만년까지 생존한 유일한 차남 김신은 김구 생전에 아버지를 도와 크게 활약했고 이후로도 대한민국 현대사에 상당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 때문에 현재 김구의 자손은 장남 김인이 남긴 유일한 딸이자 김구의 장손녀인 김효자 쪽을 제외하면 전부 김신의 가계다.
그러나 2007년 즈음해서 광고계에서 나레이션 성우로 등장. 웬만한 광고는 거의다 그가 성우를 맡고 있을 정도로 광고계에서 기존 성우들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간간히 TV 프로그램의 나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스타크래프트2 GSL 에서 선수의 아이디를 호명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성우를 본업이 아닌 부업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고 외화나 애니메이션 더빙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광고 나레이션으로 벌만큼 벌었기 때문인지도.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당색은 서인노론. 본관은 청풍 김씨이며 자긍(子咽), 호는 관복재(觀復齋)이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현종 10년(166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종 8년(1682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성균관전적과 각 조의 낭관을 거쳐 대사간, 장예원판결사를 지냈다.
판결사로 재직 중 세조에게 쫓겨난 노산군의 복위를 주장하여 단종복위를 성사시켰고 아울러 단종비 송씨의 묘를 왕비의 능으로 추봉하고 능을 조성하는 공사를 감독했다.
이후 형조판서를 거쳐 육조의 판서를 모두 지내고 숙종 29년(1703년)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그의 집안은 4대에 걸쳐 6명의 정승을 배출한 집안이기도 하다. 사도세자를 공격했던 영의정 김상로와 좌의정김약로의 삼촌이며, 후에 영의정이 된 김재로는 그의 아들이다. 또한 나중에 죄의정이 된 김치인은 김재로의 아들이자 김구의 손자며, 정조 때의 서인 노론의 거두 김종수는 김구의 아들 김희로의 손자, 즉 김구에게 증손자가 된다. 형 김유는 대제학을 지냈고, 조카 김취로는 호조참판(종2품)을 지낸 정치 거물들이다. 또한 독립운동가 김규식은 그의 동생 김무의 7대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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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일제강점기때 총독부에서 내건 현상금 순위로 따지자면 김원봉이 단연 1위였다. 김구는 3위.
[16] 학자들 사이에서는 견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학계에서는 의열 투쟁으로 테러와 구분하고 있다. 의열활동과 테러에 가장 큰차이는 테러가 다수의 민간인을 목표로 하는데 비해 의열투쟁은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와 중요인사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지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 아니다. 이는 한국내부만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등지에서 일어나는 의열활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17] 당시 주류였던 독일의 우익 지도층은 나치와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였다. 보수파는 국민의 지지가 높은 나치당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방패로 삼고, 히틀러는 잘 달래서 순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예컨대 그들은 '무식하고 헛소리하는 종자들'이 설마 '고상하고 똑똑한 자신들'을 이용해 정권을 잡을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정말 무식했던 것은 그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좌파는 나치당이 집권한 후의 모습을 보면, 유권자들이 실망하여 자연히 자기들의 지지가 높아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좌파 또한 히틀러를 과소평가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