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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베스트셀러 허준의 『동의보감』과 도가의학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11)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우리 민족이 남긴 전적(典籍)에는 우리 민족의 사상과 철학 및 종교, 과학과 문화, 예술, 그리고 생활상 등이 들어가 있다. 현대에 있어 과학은 특별히 중요하여 강조되고 있는데, 우리 민족에게도 전래의 과학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과학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모두 그 계승이 단절되었고, 지금은 대체적으로 과학사(科學史)의 대상으로만 남아있다.
우리 민족에게 지금 남아있는 대표적인 과학이 있다면 그것은 전통의학, 즉 남측에서는 한의학(韓醫學)이라 부르고 북에서는 고려의학(高麗醫學)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물론 요즘의 서양의들은 우리 민족의 전통의학을 비과학적이라는 명목 아래 배척한다.
그러나 북에서는 고려의(高麗醫)와 양의(洋醫)가, 중국에서는 중의(中醫)와 양의가 한 병원에서 협업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을 보면, 오히려 한국의 양의는 우리 민족의 전통 의학에 대한 이해 부족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10)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과 도가의학(道家醫學)
“우리 민족의 국혼을 재발견하는 장정(長征)에 전통의학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필자는 우리 민족의 전통의학은 민족정신과 매우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남측의 한의학이나 북의 고려의학은 그 원류는 같다. 북에서는 한때 고려의학을 동의학(東醫學)이라 하였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동의’란 단어를 따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동의보감』에는 우리의 중요한 민족이념이 담겨 있다. 바로 단군 사실(史實)에 나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이다.
가, 고조선 의학의 원류
『삼국유사』 권제1, 1512년본, 목판본. 서울대 규장각 소장본.[사진제공 - 이양재]
6행10자부터 13자까지 “홍익인간(弘益人間)”. 홍익인간은 환웅신시와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이다. 그리고 이 홍익인간의 이념은 우리 민족의 태내(胎內) 사상이자 우리들의 정체를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무당과 제사장이 이질적인 존재이듯 샤머니즘(巫俗)과 홍익인간의 이념은 전혀 이질적인 개념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중략)‥‥‥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이라 하였다.
즉 “(중략)‥‥‥ (환)웅이 무리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여기를 신시라 이르니 이가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곡식), 명(생명), 병, 선, 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사를 맡아서 세상을 다스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웅(神雄, 즉 桓雄)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신웅은 영(靈)스러운 쑥 한 타래(艾炷)와 마늘 20줄기(蒜二十枚)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못 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라는 말이다.
여기에 인간의 360여 사에 생명과 병이 포함되어 있으니, 당연히 이는 병을 치료하는 의료행위를 의미한다. 또한 쑥 한 타래와 마늘 20줄기를 식약(食藥) 처방으로 언급한 것에서는, 고조선으로부터 전래한 우리 민족의 전래 의약(醫藥)과 본초학(本草學)의 시작점으로 보아야 한다.
즉 환웅은 우리 민족의약의 창시자로, 식약 요법으로서 영험한 쑥과 마늘을 주었고, 요양법으로서 기도와 금기를 가르친 것이다. 이 의료 기록은 고대인의 언어이자 신앙인 신화의 기록으로서는 아주 명확한 사실(史實) 표현이다.
『함북 종성 상삼봉 출토 석기 석침 석촉』. 참고 문헌 : 국립중앙박물관 발행의 『유리원판목록집』 Ⅲ 231. 유리 원판 번호 : 369-3., 유리 원판 크기 : 16.4×11.9cm. [사진제공 - 이양재]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발굴한 함북 종성군 남산면 삼봉동의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출토한 석침이다.
초기 문명시대 이전의 신석기시대의 고고(考古) 유물 가운데 폄석(砭石)이라고 있다. 석침(石針, 石鍼)이라고도 하는데, 순우리말로는 ‘돌침’이다. 돌침의 유래는 구석기시대에 물고기를 잡고 수렵을 할 때 쓰던 돌조각으로 피부의 표면을 찔러서 치료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에서 시작한다.
이후 신석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석침은 돌을 갈아서 만들게 되므로 점차 가늘어지고 치료에도 효율성이 있었을 것이다. 석침은 점차 시대가 변하면서 골침(骨針)‧죽침(竹針)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초기 문명시대로 접어들면서 구리침(銅針)‧철침(鐵針) 등으로 발전하고 은침(銀針)‧금침(金針)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폄석, 즉 석침(石鍼)의 실제 유물은 1923년 8월 9일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동의 신석기시대 패총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그 출토품 중에 석촉(石鏃)⦁석침⦁골침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러한 물증은 과학사와 의학사에서 주목하는 유물로서 이미 초기 문명시대 이전에 폄석술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증명된다.
『함북 종성 동고나진 마제석침과 마제석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 사진 원판. 소장품 번호 : 건판 35010., 유리 원판 크기 : 30.3×25.2cm.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발굴한 함북 종성군 동고나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한 석침이다.
『골침(骨鍼)』, 경남 김헤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장품 번호 : 본관 2815. [사진제공 - 이양재]
함북 경흥군 이외에도 함북 종성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마제(磨製) 돌침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폄석, 즉 돌침은 피부에 생기는 옹저(癰疸)‧옹양이 화농(化膿) 되었을 때 수술하는 외과적인 치료기구로 쓰였다. 당시에 이와 같은 방법은 크게 흥행하여 일반 화농성질환에 많이 활용하였다.
그러나 금속 기술의 발달로 사용하기 불편한 이 기구는 간편하고 효과적인 침 치료기로 대체되었다. (참조 : 『한국의학사』, 김두종, 1981년, 탐구당)
신석기시대에서 초기 문명시대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돌침’과 ‘뜸(구 灸)’이 같은 침구(鍼灸)의 원리로 시술되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의료 시술로서의 뜸은 쑥으로 애주(艾炷)를 만들어 사용한다. 그 쑥이 단군신화에 용(用)한 효능을 가진 약용(藥用) 식품으로 등장한 것이다. 또한 뜸 뜰 자리에 애주를 직접 올려놓지 않고 소금‧마늘 등을 먼저 놓은 다음 그 위에 애주를 놓고 뜸을 뜨는 간접 뜬 법도 있다.
이래저래 쑥과 마늘은 약용이자, 우리 민족이 즐겨 먹는 식물이다. 고금을 통틀어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약재는 인삼이다. 그런데 조선중기만 해도 인삼 재배법, 즉 가삼(家蔘)의 재배법은 개발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의 가삼 재배의 역사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槁)」의 내용을 근거로 하면 정조 첫해인 1776년에 시작한 것으로 되며, 일본 가토겐쥰(加藤玄順)의 저서 와칸닌진코(和漢人葠考)의 내용을 근거로 하면 1690년대에서 1700년대 초기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경북 영주시에서는 “주세붕(周世鵬, 1495~1554) 군수에 관한 구전(口傳)과 이흥로(李興魯, 1849~1923)가 지은 ‘인삼송(人蔘頌)’이란 시를 근거로 하여 1541~1545년 사이에 인삼 재배가 풍기에서 시작되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흥로가 ‘인삼송’ 지은 시기는 일제강점기이고, 주세붕이 인삼 재배를 지시하였다 것은 옛 기록은 없어 의문시되고 있다.
반면에 파주지역 인삼재배자들은 개성인삼의 재배기술이 풍기와 금산을 위시한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사실상 고려로부터 조선말기까지 우리나라 상권은 개성상인들이 쥐고 있었기에 이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한다. 조선에서의 인삼 재배의 시작에 대한 고찰은 의학사학계에서 옛 문헌으로 명확히 증명하여야 할 일이다.
조선에서 인삼 재배가 17세기 말에 성공하기 이전에 중국이나 일본으로 수출한 그 많은 인삼은 사실은 지금은 산삼(山蔘)으로 부르는 천연삼이다. 요즘에야 인삼이다 산삼이다 구분을 하지만 원래 인삼이란 말은 “사람처럼 생긴 삼”이란 뜻이다.
이러한 인삼은 기원전부터 약재로 쓰였는데, 인삼에 대한 가장 오해된 역사 기록은 전한 원제(前漢元帝, BC 48∼BC 33) 때 사유(史遊)의 『급취장(急就章)』에 삼(參)이 나와 있고, 후한 헌제(後漢獻帝)의 건안(AD 196∼220) 때 장중경(張仲景)의 『상한론(傷寒論)』에도 인삼 처방 기록이 있다. 인삼 처방이 기록에 남기 훨씬 이전에, 고조선시대부터 한반도와 동북삼성 지역에서 널리 자생하였던 인삼은 매우 중요한 약재로 사용되었다.
나. 침구 의학의 원류는 고조선
전설적인 동방 의약의 창시자는 불의 이용을 발견하고, 팔괘를 만들었다고 하는 복희(伏羲)와 농경법과 약초에 의한 치료법을 만들었다는 신농(神農), 그리고 예와 의학의 창시자 황제(黃帝) 등 삼황(三皇)이라고 주장한다.
전설에는 신농이 중국의학의 고전인 약물 원전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을 저술하였고, 『황제내경』을 황제가 저술했다고 하지만, 중국의 서지학에서는 동북아의 가장 오래된 의학 고전(古典)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은 BC 200년 무렵의 누군가가 황제의 이름에 가탁(假託)하여 저작한 위서(僞書)라는 것이 정론이다.
『신간황제내경영추(新刊黃帝內經靈樞)』 권제1, 원판본(元版本). [사진제공 - 이양재]
장1의 앞면 5행 15~6자에 ‘폄석(砭石)’이 보인다. 『황제내경』의 「영추」편은 주로 침구(鍼灸) 치료를 다루고 있는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의 고전적(古典的) 명저(名著)이다. 그런 책에서 폄석을 논하고 있고, 또한 『황제내경』의 「소문」편 권제4 이법방의론(異法方宜論) 제12장에서는 “폄석은 동방에서 유래하였다(貶石者亦東方來)”라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내경』은 중국 신화의 인물인 황제(黃帝, BC 2600년경에 활동)와 그의 신하이며 천하의 명의(名醫)인 기백(岐伯)의 의술에 관한 대담을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모두 18권으로 전반 9권은 「소문(素問)」, 후반 9권은 「영추(靈樞)」로 구분된다.
「소문」은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등 자연학에 입각한 병리학설을 주로 하고 실제 치료에 대한 기록은 적다. 「영추」는 침구(鍼灸)와 도인(導引) 등 물리요법을 상술하고 있으며, 약물요법에 대하여는 별로 언급이 없다.
현존하는 『황제내경』으로는 당나라의 왕빙(王氷)이 주석(注釋)을 한 24권본만이 전존(傳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문」 권4 이법방의론(異法方宜論)에는 “동방(東方)은 병이 모두 옹양(癰瘍: 종기)으로 되어 있고 그 치료는 폄석으로 하는데, 폄석 또한 동방으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또한 BC 3~4세기경에 지어진 동아시아 최고(最古)의 신화집 『산해경(山海經)』의 「동산경조(東山經條)」에 “고씨(高氏)의 산 아래에 잠석(箴石)이 많다”라고 한 것에 곽박(郭璞, 276~324)이 주(註)를 달기를 “잠석은 가히 지침(砥針)이 되어 옹양을 치료한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서지학에서 『황제내경 소문』과 『산해경』의 저작 연대가 각기 BC 200년 경과 BC 3~4세기쯤으로 보는데, 그때는 고조선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즉 우리나라는 고조선시대에 이미 민족의학으로서의 침구(鍼灸)가 실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침구의 시술은 경락(經絡)과 경혈(經穴)에 대한 이론이 확립되어야 가능하다.
필자의 조부는 침에 능통하셨고, 필자는 20대 중반에 한때 침술(鍼術)을 배운 적이 있다. 당시 필자에게 침술을 가르친 이정수(李廷洙)씨는 “침술은 고조선이 원류”라 주장하였고, “탕약은 중국이 본류”라고 가르친 바 있다. 고조선에서 시작된 침술이 중국에 전해져 침구를 다룬 『황제내경』 「영추」의 저술을 가능케 한 것으로 주장한 것이다.
조선 왕조의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조선의 의학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시작되었다는 기존의 주장을 뒤집은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필자가 허준의 유묵을 입수한 이후에 허준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하는 촉매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침술의 원류가 고조선이라는 것은 한의학계에서 보편적인 주장이 되었다.
다. 환웅은 무당이 아닌 천제 환인의 제사장
초기 문명시대에 의료행위는 중요하고, 제사장(祭司長)이 주재(主宰)하였다. 당시 ‘의(醫)’자의 본 글자 ‘의(毉)’자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의(毉, 醫)’자의 속자(俗字) ‘의(医)’자는 상자 ‘방(匚)’자 안에 화살 ‘시(矢)’를 넣은 글자이다. 그 ‘의(医)’자에 창 자루 ‘수(殳)’자를 붙이고, 그 아래 무당 ‘무(巫)’자를 붙였다.
즉, 무당이 환자의 몸에 든 악귀를 화살이나 창을 써서 내쫓는 치료를 한 것을 본뜬 글자라는 것이다. 아랫 글자를 ‘무(巫)’자 대신 술 ‘유(酉)’자로 대치한 것은 주술(呪術) 대신에 술(酒)을 사용하여 치료하는 경우를 말한 것이라 한다.
전한(前漢)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권105의 「열전」 제45의 편작전(偏鵲傳)에는 무(巫)를 믿고 의(醫)를 믿지 않는 자는 6불치(不治)의 하나라 하였는데, 편작(扁鵲, BC 401~BC 310) 당시에도 무(巫)가 의료행위로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환웅(桓雄)을 제사장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고대 문명에 있어 제사장은 두 부류로 나뉜다. 최선의 부류는 단군 사실에서 나타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추구하는 바람직한 제사장이며, 구약에서 보여 주는 제사장과 상통하는 의미가 있다. 구약 성경의 유태교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을 위한 번제(燔祭)를 드리는 존재로서 그 위치가 사익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에 최악의 부류는 마야문명이나 잉카문명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들을 위한 인신공양(人身供養)까지 자행하여 사익을 추구하는, 구약 성경에 보이는 바알의 숭배자와 같은 사악한 제사장이다.
단군 사실에서의 제사장은 천신(天神) 환인(桓因)의 아들로서의 제사장 환웅이다. 즉 요즘에 흔히 말하는 잡신(雜神)이나 만신(萬神) 등등 사귀(邪鬼)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당(巫堂)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초기 문명사회를 지배한 자들을 시베리안 샤머니즘의 무당과 같은 존재로 비하하게 하는 것이 일제의 정한론파 사학자들의 숨은 의도였다. 그렇게 해야 일본 신도(神道)가 조선의 단군 이념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에 대하여 가장 크게 갖는 불만은 그는 개신교인으로서 단군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단군 신앙을 무속화(巫俗化) 시켜 한 세기나 되도록 우리 민족의 본질을 무속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흐트러트린 것에 있다. 요즘 무당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고조선의 단군에게서 찾는다. 그 빌미를 최남선이 준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 제사장과 무당의 차이는 명백하다. 고조선의 제사장은 홍익인간의 이념에 충실한 공익을 추구하는 인물이고, 그러한 제사장이 타락하였다고 할 수 있는 무당은 고조선 말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인주(人柱)와 같은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인물이다.
무당이라고 모두 사익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타락한 무당은 사익을 추구하는 사교(邪敎)의 인물로 인식되어 있다. 따라서 고조선의 제사장과 타락한 무당을 동일시하는 것은 역사와 민족정신의 왜곡이다.
신화는 고대인들의 신앙이고 생각이다. 단군 사실은 우리 민족은 천제(天帝)의 피조물이 아니라 천손(天孫)으로 천제와 동일한 인격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사상‧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이러한 『삼국유사』의 단군 사실(史實)을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것에는 결국에는 우리 민족의 의학사와 과학사도 부정하는 것이 되고, 우리 민족의 사상‧철학적 이념을 손상시키는 것이 된다.
라. 고조선 의학과 허준의 의학은 도가의학(道家醫學)
도가의 비조(鼻祖)는 노자(老子)이다. 그는 춘추시대(春秋時代, BS 8C~BC 3C)의 사상가이자 제자백가의 시초격인 인물로서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다. 노자의 생존 연대를 대체로 BC 580부터 BC 480 사이일 것으로 추정한다. 도교(道敎)에서는 노자를 신격화하여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노자는 사상가(思想家)이지 종교가는 아니었다.
노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사상가는 장자(莊子, BC 369년?-BC 286년)이다. 노자와 장자는 도가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러던 노장(老莊)의 사상을 후한(後漢, 25년~220년) 말기에 패국(沛國)의 풍읍(豊邑)에서 태어난 장도릉(張道陵)이 조직화하고 종교화한 것이 도교이다. 즉 중국에서의 도가사상은 BC 5C에 노자에 의하여 출현하였고, 도교는 2C 말에 장도릉에 의하여 나왔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도교가 들어 온 연대는 고구려 영류왕 7년(624)이다. 당시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이 도사(道使)를 파견하여 도법(道法)을 강론하도록 하였다. 이후 643년 보장왕(寶藏王) 때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이 도교 수입을 주장하여 당에서 숙달(叔達) 등 도사 8명이 입국하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의 대학자 이능화(李能和, 1869~1943)는 『조선도교사』에서 조선에 도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있었던 우리 본래의 고유사상인 신선사상(神仙思想)이 중국 도교로 전파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필자 역시 고구려에 중국 도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고조선시대부터 신선사상이 신봉되고 있었다고 단정하며, 중국 도교와는 결이 다른 고구려 특유의 도가(道家) 사상이 있었다고 본다. 북부여나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보면 중국 도교와는 다른 결이 느껴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도교사상은 이상향에 치우쳐 인간 세상과는 다소 이질적이지만,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신선사상은 인간 세상과 이질적이지 않고, 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사상을 최치원(崔致遠, 857~?)이 ‘난랑비서(鸞郎碑序)’에서 ‘풍류(風流)’로 언급한 바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조(眞興王條)에 화랑제도 설치에 관한 기사 가운데 아래와 같이 76자 일부를 전하고 있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 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라고 한 것이다.
즉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을 베푸는 바탕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그 실제 내용은 삼교(儒佛仙)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어 백성을 교화한다는 것이다. 집 안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인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처신하고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노자 사상의 종지이다. 어떠한 악도 실행하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방식이다”라고 한 것이다.
동북아의 철학과 의학은 자연에서의 음양과 오행의 철리(哲理)에서 시작하고 발전하였다. 오늘날의 양의가 인체의 현상과 증상을 중심으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의술이라면, 우리의 전래 의학은 소우주(小宇宙)인 인체가 병든 원인을 파악하여 약리(藥理)와 침술의 물리치료를 병행하여 치료하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의술이라 표현할 수도 있다.
고조선의 의술은 이러한 동방 철학의 바탕 위에서 형성하고 발전한 것이다. 아울러 고조선 시대 의술의 전달은 책을 통한 교습(敎習)보다는 도제식(徒弟式) 교습으로 진행되었다. 오늘 우리는 “고조선의 의학이 전승되어 허준의 『동의보감』에 어떻게 전승되었나 하는 것은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고조선 의술은 인접 국가의 의술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다고 보아야 하고, 어느 의술이 누구의 것이라 특정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 고조선의 의술은 중국의 의술에 들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다. 고조선의 의술로 대표되는 것이 침구(鍼灸)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을 살펴보면, 그 체계 정립에 도교의 철학 원리가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후생과 실용을 존중하는 도교의 특성이 의약의 본의 천명에 적용되어 있으며, 심지어 도교 잡술에 속하는 방법까지 소개되어 있다. 『동의보감』 내경편(內景篇) 집례(集例)에 “도교에서는 청정과 수양을 근본으로 삼고 의문에서는 약이(藥餌)와 침구로 치료를 한다. 이는 도는 그 정(精)을 얻었고, 의는 그 조(粗)를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견해를 살린 정연한 구성 밑에서 동양의약에 흔히 있는 허황하고 공상적인 의학론은 극력 배격하였고, 의학에서 추구해야 할 궁극의 이치를 파악하여 당시 의학계의 온갖 지식을 총집결하여 편찬한 것이다.
마. 허준의 의학은 조선 민족의학의 핵심
허준의 『동의보감』 「내경편」 집례(集例)의 끝부분에서 “王節齋有言曰, 東垣北醫也, 羅謙甫傳其法以聞於江浙. 丹溪南醫也, 劉宗厚世其學以鳴於陝西云. 則醫有南北之名尙矣. 我國僻在東方, 醫藥之道不絶如線, 則我國之醫, 亦可謂之東醫也.”라고 하였다.
즉 “왕륜(王節齋)이 "동원(東垣)은 북의(北醫)인데 나겸보(羅謙甫, 羅天益, 元代)이 그 의학을 (남쪽에) 전하여 강소성과 절강성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단계(丹溪 : 주진형, 1281~1358)는 남의(南醫)인데 유종후(劉宗厚)가 그 학문을 이어 (북쪽의) 협서성에서 명성이 자자하였었다"라고 말하였으니, 의학에 남과 북이라는 이름이 있은 지가 오래되었다. 우리나라는 동쪽에 치우쳐 있고 의학과 약의 도(道)가 끊이지 않았으니 우리나라의 의학은 ‘동의(東醫)’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동의’란 말은 우리나라의 전래 의학은 원(元) 나라의 남의나 북의와는 다른 우리 동방에서 발달한 의학이라는 것이다. 허준에게는 그러한 조선의 주체적인 의학 정신이 있었다.
『동의보감』은 편찬 당시까지 전해져 오던 고전과 고문헌 230여 종을 인용하고 있음을 최수한(崔秀漢)의 『조선의적통고』(중국의약출판사, 1996)에서 밝히고 있다. 『동의보감』 첫 부분에 실린 「역대의방고」에는 중국 의서 83종과 조선 의서 3종이 실려 있는데, 「역대의방고」는 당시에 널리 알려졌던 대표적인 의서의 일부일 뿐이다.
고전과 고문헌 230여 종에는 우리나라의 임상경험의(臨床經驗醫)들 사이에 비전(祕傳)되어 내려오던 비방집(祕方輯)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나 북의와는 차이가 있는 동의라 한 것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을 보면, 도가라든가 도교의 의술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허준은 유교의 유의(儒醫)나 불교의 불의(佛醫)보다는 도가(道家) 및 도교(道敎) 의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물론 허준에 의하여 『동의보감』이 편찬되기까지는 세종의 명에 의하여 1433년에 출판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85권30책이 기본 자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바. 허준의 의학은 ‘민족정신’의 구현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古記云,‘ 昔有桓 庻子雄數意天下貪求人世. 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遣徃理之.’”라하고 하였다. 즉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의 아들 중에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탐냈다.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홍익인간 할만하거늘,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라는 것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말은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준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는 목적이다. 즉 환웅이 건설한 신시의 목적이며 후일 고조선의 건국이념이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단군신화에서는 다른 나라의 신화와는 달리 신들 사이의 대립이나 신과 인간 사이의 갈등이 전혀 없다. 신과 인간은 공생의 관계이다. 심지어 곰과 호랑이도 같은 굴에서 살며 대립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이 신시의 ‘홍익인간’ 이념으로 조화와 평화를 중시하는 세계관으로 우리 민족의 본성이다.
홍익인간은 선택된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이익이 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자기 민족을 위하여 타민족을 해치는 유태교의 선민사상과는 다르다. 하느님이 인간을 강압하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환웅의 아들 단군은 하늘과 인간이 합하여 하나가 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존재이다.
그리고 「고기(古記)」에서 말하는 서자(庶子)는 첩의 자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서자는 맏아들 이외의 모든 아들(衆子)을 의미한다. 근세조선 중기 이후에 심화하였던 적서(嫡庶)의 차별, 즉 적서의 불평등한 개념은 『삼국유사』를 편찬하던 고려시대에는 없었다. 더욱이 단군 사실에서는 모든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을 주창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홍익인간의 이념은 사해일가(四海一家), 또는 세계주의, 박애주의와 통하지만, 그 기본은 평등주의이다. 우리 민족의 의학 정신은 이러한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천하는 길이기도 하다.
허준은 단순한 한의사가 아니다. 그는 『동의보감』에서는 생약학자(生藥學者)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고, 또 다른 저서인 『벽역신방(辟疫神方)』(1613년)에서는 병리학자(病理學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를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한 인물”로 규정하며, 아울러 “허준은 단순한 한의사가 아니라 생약학자(生藥學者)이자 과학자(科學者)로 기려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사. 시대를 초월한 국제적인 베스트셀러 『동의보감』
국보 『동의보감(東醫寶鑑)』 첫 장(序), 1613년, 초판본, ‘훈련도감 목활자’로 내의원(內醫院)에서 간행. 1614년 오대산 사고에 내사하여 보존하게 한 책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009년 7월 31일 자로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국보 『동의보감(東醫寶鑑)』 간기(刊記) 부분과 총목(總目), 초판본, 1613년 11월에 ‘훈련도감 목활자’로 내의원(內醫院)에서 간행하였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1991년 9월 30일 당시의 문화재관리국은 『동의보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오대산 사고본)을 보물 제1085호로 서둘러 지정하였고, 2008년 8월 28일에는 장서각 소장본(적성산 사고본)과 규장각 소장본(태백산 사고본)을 보물 제1805-2호와 3호로 추가 지정하였다.
2009년 7월 31일, 제9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바베이도스)에서 『동의보감』 25권25책 두 질(오대산 사고본, 적성산 사고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고, 이후 세계기록유산이 국보가 아닌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는 비판을 의식하여 2015년 6월 22일 보물 제1085호에서 국보 제319호로 승격되었다.
이외에도 의학자이자 한국의학사 학자 고 김두종(金斗鍾, 1896~1988) 박사가 한독의약박물관에 기증한 『동의보감』 「내경편」 권2와 「외형편」 권1, 「침구편」 등 3책이 2012년 10월 12일 자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5호로 지정되었다.
단군조선의 건국이념 홍익인간을 돌이켜 검토하고, 고조선 의학의 유물과 그 흔적을 따라 탐색하면서 우리 민족의 전래의학이 남긴 최대 성과물인 허준의 『동의보감』의 의미를 평가하면, ‘『동의보감』은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을 이어받은 저술이다’라고 판단할 수 있다.
『동의보감』 침구편(鍼灸篇), 필자 소장본, Ⓒ이양재. 1613년 11월에 ‘훈련도감 목활자’로 내의원(內醫院)에서 간행. 허준은 『동의보감』 여러 곳에서 병증에 따른 침술 처방을 하고 있고, 별도로 「침구편」을 한 책으로 하여 침구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있다. 필자는 『동의보감』 초판본의 「내경편」 권3과 「침구편」, 그리고 허준과 의학 관련 자료들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동의보감』 25권25책은 1613년에 내의원(內醫院)에서 훈련도감 목활자로 초판본을 인출한 이래, 곧이어 내의원 교정본이 나왔으며, 이후 영영(嶺營)과 완영(完營)에서 4종의 판본이 나왔다. 즉 1910년 이전의 조선시대에만 여섯 판이 나온 것이다.
또한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1724년(京都書林版)과 1799년(大阪書林)에 각기 판본이 나왔고, 중국 청나라에서는 1763년에 초판본이 간행된 이래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무려 22종 이상의 판 종이 출판되었다.
즉 1613년에 훈련도감 목활자로 초판본이 나온 이래 이 책은 지난 400년간 우리 민족이 세계에 내놓은 최고(最高)의 베스트셀러였다. 이토록 지난 400년간 이 책 『동의보감』 25권25책처럼 인간들에게 골고루 유익(有益)을 준 우리 민족이 남긴 고전(古典)이 몇 종이나 될까? 필자가 알기로는 『동의보감』 25권25책이 유일하다.
아. 추기(1) : 민족사학자들이 되살려낸 홍익인간
홍익인간은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 거론된 후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주목되지 않았다. 홍익인간을 되살려낸 이들은 1920~1930년대의 민족주의자들이다. 특히 단군의 건국으로부터 민족사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민족사관 학자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좌우통합의 통일이론으로 제안된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나 안재홍의 ‘신민족주의(新民族主義) 같은 정치이론들은 자기 이론의 사상적 기원을 민족고유의 홍익인간 이념에서 찾고 있다. 정인보나 김구는 홍익인간을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윤리로 해석하여 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기초 덕목으로 삼았다.
이들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찾아낸 홍익인간 이념은 해방 직후 1945년 12월 미군정의 교육분야 자문기구인 조선교육심의회에 의해 교육의 기본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정부수립 후 1949년 12월 「교육법」이 정식으로 제정될 때 법제화한다. 「교육법」 제1조에서는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의 자질을 구유케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상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이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채택한 이유를, “홍익인간은 우리나라 건국이념이기는 하나 결코 편협하고 고루한 민족주의 이념의 표현이 아니라 인류공영이란 뜻으로 민주주의의 기본정신과 부합되는 이념”으로서, ‘우리 민족정신의 정수’이면서, 기독교의 박애정신과 유교의 인(仁), 그리고 불교의 자비심과도 상통되는 모든 인류의 이상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홍익인간이 현대 한국의 정치와 교육을 규율하는 기조 원리로 실천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이다. 제시하는 바가 추상적이고 사실이 아닌 신화 속에서 거론된 것이라는 이유로,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홍익인간의 실천이 미흡한 것은 추상적이거나 신화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세계화라는 미명아래 조선의 민족의식과 정신이 쇠퇴하는 데 있고, 특히 자본주의사회의 소득격차로 인한 계층화와 세대간‧지역간의 위화감 조성 등등에 원인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평등의 개념이 사라지고 없으므로 홍익인간의 실천이 미흡한 것이다.
어떠한 명분으로라도 홍익인간을 부정하는 것은 단군과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결국에는 민족주의와 민족사관, 그리고 우리나라의 인본주의적인 건국이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사람이 먼저”라는 민주주의의 행동강령으로 나타난다.
자. 추기(2) : 의성(醫聖) 허준과 『동의보감』을 찾아서
『허준의 유묵』, 크기: 42×28cm. 지본묵서(紙本墨書). Ⓒ이양재. 허준의 이 유묵은 1993년도에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개최한 ‘조선중기서예전’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허준의 유묵(遺墨)으로는 공인된 유일한 진품이다. 이 유묵은 필자가 우여곡절 끝에 허준의 묘소를 찾아내고 그에 관하여 잘못 알려졌던 오류들을 바로잡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필자는 고 김상엽(전 고려대 총장)이 구장(舊藏) 하던 것으로 전하던 허준(許浚)이라 기명(記名)한 간찰(簡札) 한 점을 1981년에 입수하고서 허준을 찾고 규명하는 10년 장정(長程)에 돌입하게 되었다.
‘허씨대종회’를 방문하여 자문을 구한 결과 “이 정도의 글씨를 쓸 수 있는 허준은 허씨를 통틀어 구암 허준이 유일하다”라는 답을 들었고, 그의 종손 허형욱과 그 자손들은 해방전에 모두 황해도 해주군 대거면 은동리(현재 황해남도 옹진군 은동리)에 살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그의 자손이 한 분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준 묘』.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 [사진출처 - 문화재청]. 『양천허씨세보(陽川許氏世譜)』에는 허준의 묘소가 “長湍下浦廣岩洞巽坐”에 있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옛 장단군 일대는 민통선 내의 군사시설 지역이어서 정확한 위치를 찾는 데 매우 힘들었다. 1991년 9월 27일 태풍 "미레이유(Mireille)"의 여파가 한반도를 급습하여 북상하던 날, 민통선 지역에서 필자에 의하여 천우신조로 발견되었고, 30일 자로 KBS가 현장을 취재하여 저녁 9시 뉴스에 보도되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필자는 해방전에 현재의 황해남도 옹진군 은동리에 거주하였던 그의 자손들을 찾고 싶다.
『허준의 묘비』, 상단부는 6·25 때 총탄을 맞아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묘소를 처음으로 공개한 1991년 7월 30일에 그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의성 허준 선생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의 문종화 회장이 잘 보관하겠다며 임의로 가져갔다. 이후 이 묘비 파편의 간 곳을 알 수가 없다. 파주시와 문화재청은 이 묘비 파편을 반드시 회수하여 복원 처리하여야 한다.
『허준 묘비 전면부 탁본』, 1991년 9월 30일 허준 묘소 공개 현장에서 묘비 발견 후의 초탁(初拓)이다. 당시의 문화재관리국에서는 2부를 탁본하여 1부를 필자에게 주었다. 당시 필자는 묘비 탁본 앞뒤를 한지(韓紙)에 축소 영인(影印)하여 기념사업회에 수백부를 주었다. 허준은 단순한 한의사가 아니다. 그는 『동의보감』에서는 생약학자(生藥學者)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고 『벽역신방(辟疫神方)』에서는 병리학자(病理學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그를 홍익인간의 이념한 인물로 규정하며, “허준은 단순한 한의사가 아니라 생약학자(生藥學者)이자 과학자(科學者)로 기려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후 1982년 봄에 장단지주회 김병집 회장을 만나 협조를 구하고, 경기도 장단 옛 땅을 드나들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91년에 9월 27일에 허준의 폐허가 된 묘소를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번지에서 찾아냈다.
그리고는 다시 수년에 걸쳐 허준의 고향이 파주(옛 장단), 현재의 북측 ‘황해북도 장풍군 국화리(옛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라는 사실, 귀양지(평북 의주), 생년 등등 잘못 알려졌던 많은 사실 등을 규명해 내었다.
필자가 의성 허준에 집중한 이유는, 허준이 단군의 건국이념을 구현한 의학자이자 과학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필자는 성역화되어 있는 의성 허준의 묘소가 있는 민통선 지역, 즉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 인근에 그의 기념관이 세워지길 희망하며, 거기에는 단군조선의 건국이념 홍익인간을 구현한 인물로서의 허준이 기려지길 기대해 본다.
아울러 해방전에 황해도에 거주하였던 허준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남북이 함께 조선시대의 주체적 의학자 허준을 과학자로 기리는 역사적 사업을 펼치기를 희망한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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