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익숙해 있는 시간과 장소에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과 따뜻한 이웃들을 가까이 느끼고 함께 호흡하면서 살아가는 日常을 누릴 수 있는 삶은 참으로 행복한 삶이다. 눈을 뜨면 바로 옆자리에 습관처럼 늘 함께해 온 다정하고 달달한 짝이 있고, 안방 문을 열고 나가노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제 할일들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들을 보면서 기지개를 켜고 다가선 베란다 앞에 서게 되면 창 너머로 익숙한 정경들이 펼쳐지는 소소한 일상의 시작과 반복은 우리가 바로 그 안에서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정으로 소중하고 확실한 행복을 누리고 있음을 뜻한다 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훈훈하고 여유로울 때는 구름에 달이 가려지고 흐린 밤하늘로 인해 별들이 굳이 명멸하지 않더라도 전혀 안타깝지 않은 밤을 우리가 보낼 수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훈훈하고 여유로운 일상은 다소간의 부족함과 불편함이 따르더라도 그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풍요로움이요, 또 아늑함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의 일상에서 가족이 갖는 의미와 비중은 그만큼 크다 할 것이다. 야전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비록 떨어져 지낸다 하더라도, 전화라도 하면 반가운 목소리를 금세 들을 수 있고, 보고 싶다고 말하면 당장 한걸음에 달려올 수 있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고국 땅에서의 생활’은 이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다른 하늘을 이고 사는 이국땅에서의 생활’에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이다. 그러하니, 소소하고 평범하지만, 이렇듯 소중한 일상을 누리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혼자 버티고 사는 생활은 어떠하겠는가! 한마디로, 외로움이라는 짐을 습관처럼 지고 사는 고달픈 생활이다. 그래서인지 그리운 이들을 담아 놓은 아련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사진은 그나마 외로움과 곤고함을 참고 견뎌나가는데 커다란 위안이 되기도 한다. 모스크바에서의 나의 유학생활이 바로 그러했다.
사실 내가 모스크바 유학길에 오르면서, 우리 가족들은 그곳으로 함께 가서 사는 문제를 놓고 말할 수 없는 고민과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심각한 ‘To be or not to be-Dilemma’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족 동반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고려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녀들의 수학(修學) 문제였다. 러시아어 알파벳 ‘ㄱ’자도 모르는 아이들이었기에, 영어권이 아닌 곳에서의 11학년제로 편성된 러시아 학교로의 편입학 문제는 기본적으로 언어소통이라는 어려운 문제에서 오는 심각한 기초학력의 부족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했고, 러시아 학생들과의 修學過程에서 오는 인종적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매우 어려우면서도 실질적인 문제까지도 안고 있었다.
러시아는 100 여개 민족(구소련 시에는 150 여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서구나 외부 민족에 대해 배타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었고, 심지어 구소련 붕괴 직후의 혼란한 사회적 상황에서 ‘스킨-해드(Skin-Head)’라는 극우적인 인종 차별 집단마저 횡횡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사실상 이러한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게 된 배경에는 전통적인 슬라브주의 원칙, 말하자면 ①서유럽 문명이 곧 유럽문명이라는 공식을 부인하고, ②유럽이 러시아를 적대하고 있으므로, 러시아와 유럽 간의 적대관계는 당연한 것이며, ③동방문제 해결수단으로서 유라시아에 걸쳐 있는 러시아의 對서구 투쟁은 마땅할 뿐만 아니라, ④러시아 내 슬라브 민족주의자들과 전통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서구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며, ⑤러시아를 주축으로 하는 슬라브 동맹에 대한 역사적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5가지 원칙 등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학교가 아닌 외국인 학교(Foreign School)에 아이들을 입학시키는 것도 생각해 볼 수도 있었지만, 유학생 자녀의 신분으로 외국인 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그 자체에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부담해야 할 높은 기부금과 등록금으로 인해 그 당시 유학생의 형편으로는 경제적 문제도 뒤따르고 있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결국 그러저러한 복잡한 연유로 인하여 러시아에서의 유학생활은 자연 혼자 가는 것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최선의 방안을 강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차선의 방안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또 가족 모두에게는 힘들었던 서로 떨어져 사는 생활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는 그래도 최선의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가장과 아빠를 멀리 떠나보낸 후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따뜻한 언덕을 잃어버린 채, 가장이 없는 동안 끊임없이 닥쳐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외로웠을 수많은 상황들에 처해서도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내색함이 없이 슬기롭고 꿋꿋하게 잘 견디고 극복해준 가족과 아이들에 대한 이루다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과 함께,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굳건히 잘 지켜주지 못했던 한없는 미안함과 크나큰 죄스러움이 지울 수 없는 진한 그림자처럼 크고 깊숙이 남아 있다.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나의 유학생활의 일상은 엄밀히 따지면, 곤고(困苦)함으로 가득 찬 학업도 학업이려니와 외로움과의 싸움 그 자체였다. 나의 하루의 일상은 대충 이러했다. 아침 8시를 조금 지나 가방을 들고 집을 나와 8시 30분경에 군사대학원에 도착하게 되면, 우선 ‘까뻬쩨리(Kaфeтepий ; Cafeteria)’라고 불리는 간이식당에서 샌드위치 한 조각에 홍차 한잔을 서둘러 마시고 강의실로 들어가 신속하게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책상에 앉기가 무섭게 시작되는 3-4 교시 정도의 강의를 듣게 되는데, 통상 12시경이면 교육이 끝나게 된다. 강의는 통상 50분 강의에 10여분 정도의 휴식시간이 부여되어 지는데, 강의에 지쳐 어쩌다 강의실 밖으로 나가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눈치를 채지 못해 고개만 갸우뚱하였으나, 후에 다른 외국인 학생 장교들의 말을 듣고 나서 모두들 담배를 피우기 위해 화장실에 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흡연은 화장실에서만 인정되고 복도에서의 흡연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원했던 생활에서 빠져나와 교육과정을 통해 부족하나마 외국인 학생들과 대화를 하고 교제를 나누고 싶었는데, 나는 그 당시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니 참으로 낭패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으면서 용변만 마치고 계속 화장실에 남아 있기도 거북하여 강의실로 돌아오곤 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외국인 학생 장교들(주로 CIS 국가들의 장교)이 흡연을 하는지라 나는 어쩔 수 없이 강의실에 한동안 거의 혼자 남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사실 피우지도 못하는 독한 니코틴 냄새를 맡으면서 화장실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일이기도 하였지만, 눈물겨운 일이기도 하였다.
군사대학원에서의 하루 교육이 종료되면, 교내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는 교육 교재 및 자료들을 대충 정리한 후 군사대학원 교직원·학생 식당인 ‘스딸로바야(Cтaлoвaя)’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는데, 짧은 시간이나마 그곳에서 나는 강의실에서 보지 못했던 러시아 장교들이나 다른 국가들의 학생 장교들(주로 동구유럽 국가들의 장교)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갖곤 하였다. 식당 구조는 교수진이나 교직원들이 식사하는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따라서 식당 입구나 통로에서 강의에 들어 왔던 교수에게 인사를 건네면 악수를 하면서 같이 있는 동료 교수들이나 일행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서로 소개하고 소개받는 형태로 수인사(修人事)가 이루어졌다. 혹여 조정된 모스크바 대학 강의 시간에 맞춰 급히 가야할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교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가방만 챙겨 곧장 나가기기도 하였지만, 통상 교내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면, 복도에 전시된 도서류를 둘러볼 여유나 겨를이 없이 다시 강의실에 돌아와 재빠르게 평상복(사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는 바쁜 걸음으로 대충 15분 정도 소요되는 ‘유고-자빠드나야 역(Стaнция Югo-зapaднaя ; West-Southern Station)’이라 부르는 모스크바의 최남단 지하철역에 도착하여 지하철 편으로 곧장 모스크바 대학으로 향하게 된다.
지하철을 일단 타고 나면 하차할 역을 헤아리는 것을 빼고는 아예 다른 생각에 깊이 잠길 겨를이 없다. 왜냐하면, 거의 폭주하다시피 빠르게 질주하는 지하철 속도로 인해 모스크바 대학 역처럼 두 구간 정도의 짧은 구간을 갈 경우 자칫 잘못하면 해당 지하철역을 지나쳐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출발역을 떠나 7~8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에 두개의 역을 통과하고 나면 하차하게 될 모스크바 대학 역에 금세 도착하게 되는데, ‘스탄치야 우니베르시쩨따(Cтaнция Униврситeтa ; Univer- sity Station)’라는 방송이 들리면서 문이 열리기 무섭게 뛰쳐나간다. 모스크바 지하철의 속도는 서울 지하철과 비교하여 참으로 빠르고, 또 열차 간 운행시간 간격도 무척 짧다. 모스크바 근교에서 유입되는 유동 인구까지 합쳐 약 1,000 만 명 이상이 되는 도시 속에서의 바쁜 삶을 영위하는 ‘모스크비치(모스크바 사람)’들의 교통 체증을 줄이기 위해 고안해 낸 러시아 특유의 노하우인 듯싶었다. 그렇다고 지하철이 서로 충돌했다거나 운행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얘기는 TV 뉴스나 뜬소문으로라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 장교 가운데 한 사람에게 지하철의 이러한 상황을 얘기했더니, 그는 대뜸 “그렇게 빠른 속도와 짧은 운행 시간 간격에도 불구하고, 충돌 사고 한번 없고 운행 시간도 지체됨이 없이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사실은 러시아가 그만큼 탁월한 수리 역학적 제어 시스템에 대한 탁월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는 으스대는 투의 말을 은근히 늘어놓기까지 하였는데, 생각건대 그것은 러시아가 충분히 자랑할 만한 사실임이 분명했다.
러시아 지하철은 지상으로 빠져 나오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 이유는 핵전쟁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핵 대피시설을 마련하느라 지하철 인프라를 과도할 만큼 지하 깊숙이 구축하여 기나긴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지하철 밖으로 걸어 나오는 구간이 그만큼 길기 때문이다. 군사대학원에서 가깝게 사귄 한 장교의 말에 따르면, 국가의 모든 기간시설(基幹施設)과 국가기관의 주요 직위자들이 거주하는 아파트 지역은 지하철과 함께 구축된 핵 대피시설과 연결되어 있다고 언급한 바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흘려듣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무관으로 부임하여 대사관에 재직하던 어느 겨울날 저녁 이러한 지하철 내 핵 대피시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국가기관의 무책임성을 고발하는 TV 프로가 방영됨으로써 그 당시 이 문제가 러시아 내에서 커다란 사회적·국가적 이슈로 등장하여 모스크바 사회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라는 식으로 떠돌았던 추측성 소문이나 의혹성 정보가 제대로 입증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통상 지하철역에서 빠져 나오면, 나오기가 무섭게 대학 정문을 향해 뛰어가곤 하였다. 강의 시간이 2시부터 시작되므로 체면을 차릴 신사적인 여유나 어물쩍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렇게 바삐 뛰어 다니는 내 모습이 안 되어 보였던지 학과 조교가 나를 보더니, 지하철 입구에서 우측 정문으로 가지 말고 좌측으로 10여 미터 정도 가면, 샛문(사실은 고의로 무너뜨린 담)이 있으니, 그쪽으로 들어오라고 일러 주었다. 그 후 나는 그 샛문을 통과하여 사회과학대학 건물 뒷문으로 들어가면서 “어느 곳을 가든지 초보자(Beginer)들은 어쩔 수가 없구나!”라는 자조 섞인 말을 되뇌면서, 마음속으로는 허탄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나의 모스크바에서의 초기 생활은 마치 사관학교 1학년이 겪는 두더지 생활처럼 정신없이 바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생각하는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모스크바 대학의 학사체계는 사회주의 국가체제의 영향 탓인지 한국에서의 강좌개설 방식보다는 훨씬 유연성 있게 잘 짜인 실질적인 강좌개설 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주간 강좌체계에 제한을 받는 나와 같은 학생들에게는 매우 편리한 수강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학사체계가 주·야간으로 구분되어, 담당 강의 교수는 물론, 주야간 강좌와 강의 시수가 동일한 형태를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주간학부 수강체계와 동일하게 야간학부 수강체계가 운영되는 학사체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학생들이 주야간 수강체계를 동시에 활용 가능함으로써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는 학생들이 각자의 修學 與件과 事情을 고려하여 자신이 가용한 시간대에 신축성 있는 수강계획을 짤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실질적인 학사체계였다. 대신, 평일 기간 중 강의 시수가 부족한 야간 학사체계는 과목과 교수 사정에 따라 토요일에도 강의를 하는 유연성 있는 수강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러한 학사체계 운영 덕분에 나처럼 오후 시간 이후가 되어야만 수강이 가능하거나 시간에 쫒기면서 학업을 지속해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고맙고 편리한 학사 운영체계일 수가 없었다.
아침 9시부터 시작되는 군사대학원에서의 강의에 이어,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모스크바 대학에서의 강의를 수강하는 과정에서 중간 중간 비어 있는 空講 時間을 보내다보면 저녁 식사까지 해결하고 야간 강의를 수강해야 했기 때문에, 모스크바 대학에서의 강의는 결강 사태가 아니면 대체적으로 늘 밤 9시 정도가 되어서야 끝나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렇게 강의를 마치고, 지하철과 버스 편으로 밤 10시가 되어서야 다시 아파트에 돌아오게 되면, 하루 종일 계속된 노어 강의로 인해 그야말로 대장간에서 쇠를 갈아붙일 때 나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같은 삭막함으로 가득 찬 두통으로 참을 수 없을 만큼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오고 온 몸은 완전히 그로기 상태에 이를 만큼 노곤하여,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을 여유조차 없이 그대로 침대에 쓰려져 잠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참을 자고나면, 밤 2시 정도가 되어서야 눈을 뜨고 겨우 일어나게 된다. 잠들기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무거운 몸을 움직여 습관적으로 세면장에 들어가 지하철과 강의실에서 뼛속까지 베어버린 듯한 퀴퀴한 냄새를 떨쳐내 버릴 냥 머리칼과 온 몸을 벅벅 문지르듯이 사워를 하고 나면, 그래도 정신이 좀 드는 듯하였다.
그리고서는, 전날 저녁 식사로 샌드위치 두 조각과 러시아식 전병이라 부르는 손바닥 절반만한 얇은 ‘브린(Блин)’ 몇 조각으로 식사를 때운 탓에 등바닥까지 붙어버린 배를 채우기 위해 ‘농심 라면’ 한 그릇을 끓여 개 눈 감추듯 먹고 나면, 라면 한 그릇이 세상에서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고, 또 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었다. 그러노라면, 시간이 어느덧 새벽 3시 가까이 되고, 그제 서야 그날 있었던 강의 내용 확인과 과제물 정리에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어느덧 시간은 6시 가까이 다 되어간다. 그러고 나면 다시 피곤해진 육신과 몽롱해진 눈을 다독이기 위해 알람(Alarm)을 7시 50분으로 설정해 놓고 또다시 곧바로 짧고 깊은 단잠에 들게 되는데, 그 시간이 어찌 그리 빨리 지나갔는지 무섭게 울려대는 알람소리에 정신없이 벌떡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는 곧장 세면장에 들어가 얼렁뚱땅 칫솔질과 고양이 세수를 마친 다음, 불이 나게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갖추노라면 아무리 빠른 동작을 취한다 하더라도 시간은 벌써 8시 20분이 다 되어 간다.
지난 간밤에 10시가 되어서야 들어선 문 앞에 서서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나갔구나!”하는 안도의 긴 한숨을 내리쉰 순간부터 어둠에 묻혔던 시간들이 금세 지나가고, 그 다음날 아침 8시 20분경이 되어 또 다시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서게 되면, 그야말로 선뜻 발을 내디딜 용기조차 나지 않은 채,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시지프(Sisyphe)의 기약 없는 바위 굴리기나 탈탈로스(Taltalos)의 타들어가는 목마름에서 오는 무한한 허우적거림처럼, 힘들고 익숙하지 못한 시간들로 이어지는 나날의 일상들이 어김없이 되풀이되곤 하였다. 회고해 보건데, 그 당시에는 물론 전혀 눈치 채지 못했으나, 그러한 생활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으니, 유학을 떠날 당시 65kg 정도의 체중이 귀국 후에는 50kg도 채 안될 정도로 왜소하게 감소되어버릴 만큼 자신도 모르게 몸이 점차 야위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떻든 그러한 날들이 연속되다가 마침내 금요일 밤 10시가 될라치면, 마치 태엽이 끊어져 멈춰서버린 시계처럼 모든 것이 정지된 채, 졸라매어졌던 굴레에서 어렵사리 풀려져 자유로워진 시간이 비로소 내게도 다가왔고, 그 다음날인 토요일 아침에는 원도 없이 느긋하게 늦잠을 즐길 수 있는 ‘가난한 행복’이 나를 찾아오곤 하였다. 그래서였을까? 나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금요일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관성적인 습관이 몸에 베이게 되었고, 지금도 금요일이 되면 막연하지만 무언가 희망이 보이는 작은 기대를 습관적으로 갖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는지도 .... 모르겠다!
모스크바 대학에서의 강의는 주로 해당 교수가 집필한 저서나 교재(빠소비에 ; Посбие) 위주로 진행되었지만, 강의에 임하는 학생들은 한결같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열심히 경청하며 정신없이 필기할 정도로 학구열이 넘쳐흘렀으며, 학점 평가에 대해서도 모두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악화된 경제상황 속에서 취업 경쟁률이 지나치게 치열하다 보니, 우리의 서울대학교나 다름없는 모스크바 대학 학생들에게도 대학이나 대학원 재학 간의 성적과 평점은 취업에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던가 싶다. 1997년에 러시아가 IMF 경제위기를 맞는 상황이었으니, 그 직전의 러시아의 경제상황은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것임이 분명하고, 굳이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안정적이고 어엿한 직장에 취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유학 초기 강의실에서의 이러한 치열한 학업 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강의에 임하면서, 나는 물론 교재를 중심으로 예·복습에 열심히 임하고 있었으나, 사회과학 분야의 학업이 다 그러하듯이 가끔 주어지는 감당하기 곤란할 정도로 많은 양에 대한 발표나 토의 시에는 큰 어려움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제대로 된 요점 정리를 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턱없이 부족한 능력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강의시간이 되면, 대체적으로 비교적 성실하게 노트 필기를 하는 학생의 옆자리에 앉아, 그 학생의 필기내용을 곁눈질하려는 속보이는 전략을 세웠으나, 막상 그러한 학생 옆에 앉게 되더라도 휘갈기는 글씨체를 도저히 알아볼 수 없어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벼라 별 궁리를 다해 보았으나, 머리를 싸매고 책을 보는 것 이외에는 뾰쪽한 묘수를 찾지 못한 채,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고민에 고민을 되풀이하던 끝에, 결국 학과장을 찾아가 상담해 보기로 하고, 후배였던 대사관 무관 보좌관에게 부탁하여 시바스 리갈 양주 한 병을 구하여 학과장실을 어렵게 찾아가 면담을 요청하였다.
학과장인 뾰도르낀(Фёдоркин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 Fyodorkin Nikolai Cemyeovich) 교수는 전형적인 슬라브적 애주가로서, 통상 학과장실을 방문하면 상담이나 면담이 끝난 후에는 품에서 열쇄 꾸러미를 꺼내어 잠귄 옷장 문을 조심스레 열고, 비밀스럽게 보관한 아르메니아 산 ‘아라라트’ 코냑 한 병을 꺼내다가, 우리의 맥주잔만한 유리잔에 코냑을 2/3 이상을 붓고는 ‘다드나(Додна ; Bottom-Up)’를 외치며, 한두 잔 정도는 상대에게 권하면서 거뜬하고 호기롭게 코냑 한 병을 거의 혼자 다 비우는 호주가에 가까운 그런 분이셨다. 이렇게 학과장실에서 코냑을 대접받는 날에는 학과장은 늘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러시아식의 전통적인 건배 제의와 축배사를 내게 가르쳐 주곤 하셨다. ‘들랴 끄레쁘꼬보 즈다로비야(Для крепкого здоровия ; 강인한 건강을 위하여)’, ‘자 까자끄스탄스꼬에 즈다로비에(За Казакстанстанское Здаровие : 매서운 까자끄스탄 겨울 추위에도 능히 견딜 수 있는 건강을 위하여)’, ‘들랴 따보, 끄또 나 모레(Для того, кто на море : 바다에 나간 이를 위하여, 즉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나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멀리 집을 떠난 사람을 위하여)’ 등과 같은 러시아 고유의 전통적인 축배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뾰도르낀’ 학과장이 즐겨 마시는 아르메니아 産 진짜 ‘아라라트’ 코냑은 사실 모스크바 시내에서도 구하기 힘들만큼 매우 좋은 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평소 술을 못하였지만, 그런 귀한 술을 선뜻 내놓고 잔을 내밀었던 학과장의 성의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주는 대로 다 들이키곤 하였는데, 그러고 나면 얼굴이 부끄러울 정도로 벌겋게 되어 금방 혼절할 것 같은 몽롱한 상태로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런 날이면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할 정도로 공교롭게 “The Lift is not Operated!(엘리베이터가 작동 안 됨!)"이라는 쪽지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삐딱하게 붙어 있곤 하였다. 지금은 이렇게 담담하게 글을 써나갈 수 있지만, 강의 듣는 몸부림(사실 머리 부림)에 술기운까지 겹쳐 가중된 극심한 피로에 절어버린 나는 무려 25층이나 되는 계단을 세 번도 쉬고, 네 번도 쉬다가, 심지어 다섯 번까지 쉬면서, 한숨과 콧노래를 섞어가며 기어오르곤 하였다.
그런데 러시아에는 아르메니아 産 ‘아라라트’ 코냑에 얽힌 사연들이 꽤 많다. 물론 학과장에게서 들은 얘기지만, 그러한 사연들 가운데는 스탈린이 연두 순시 차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면서 있었던 일화가 유명하다. 스탈린은 평소 아르메니아 산 ‘아라라트’ 코냑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어느 해인가 우즈베키스탄 지방공화국 공산당 서기는 매년 있는 스탈린의 연두순시에 대비하느라 크레믈린 내 지인과 얘기를 나누다가, 그를 통해 스탈린이 아르메니아 산 ’아라라트‘ 코냑을 즐겨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스탈린이 순시하기 직전 아르메니아에 특사를 파견하여 50년 이상 발효된 ’아라라트‘ 코냑 6병들이 박스 몇 십 개를 어렵사리 구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카자흐스탄을 거쳐 우즈베키스탄 지방공화국 정부의 업무보고를 받기 하루 전 오후 무렵에 타슈켄트에 도착하였는데, 하루 밤을 묶고 그 다음날 아침에 우즈베키스탄 지방공화국 정부 청사에서 업무보고를 받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지방공화국 공산당 서기는 스탈린이 도착한 날 저녁에 주최한 만찬에서 미리 구입한 아르메니아 산 ’아라라트‘ 코냑을 만찬석상에 내놓음으로써 스탈린으로부터 대만족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여 그로부터 큰 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 계획된 연두 업무보고에서는 칭찬에 늘 인색하기만 했던 스탈린으로부터 웬일인가 싶을 정도로 큰 칭찬을 받는 등 우즈베키스탄 지방공화국 방문 전에 들렀던 카자흐스탄 지방공화국 방문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또한 스탈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업무보고가 끝난 뒤, 전날 대접받은 코냑에 대한 답례라도 하려는 것처럼, “딱 한 가지 건의사항을 들어 줄 테니, 한번 얘기해 보라!”는 생각지 못한 반가운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 지혜롭기 짝이 없었던 우즈베키스탄 지방공화국 공산당 서기는 평소 아열대성의 무덥고 건조한 날씨 탓에 물이 부족하여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어 농업 실적이 부진하다는 애로사항을 얘기하면서, 담수 저장고인 아랄 해에서 우즈베키스탄까지 전용 수로를 개설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스탈린은 이러한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 즉시 관개수로 공사가 이루어져 우즈베키스탄은 그 이후로 농사짓는데 필요한 농업용수 부족 사태를 말끔하게 해결하고, 사막과 다름없이 거칠었던 황야를 옥토로 변환시켜, 목화 농사와 밀·감자·옥수수 농사를 장려하여 해마다 대풍작을 이루게 되었는데, 특히 구소련 붕괴 이후에는 값싸고 질 좋은 우즈베키스탄 산 면화가 한국으로 수출되어 한국 의류 가공업이 성황을 이루게 된 기초와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최근 들어 아랄 해의 담수도 점차 고갈되어가는 실정에 놓여 있는데다, 2-3개 국가를 거쳐야만 바다를 볼 수 있는 내륙국가의 취약성으로 인해 해수의 담수화를 통한 수자원 문제 해결에는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어 부족한 수자원 문제 해결을 위해 부득이 내륙의 담수 개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거기다가 우즈베키스탄을 관통하는 대하천 ’아무다리야 강‘과 ’사무다리야 강‘은 물론, 이 두 강의 지류인 나린 강·제랴프샨 강·카라다리야 강 또한 국제하천에 해당됨으로써 우즈베키스탄이 이 하천들에 대한 담수 저장(댐) 공사를 진행할 경우 자칫 주변국들과의 수자원 분쟁으로 번질 위험성까지 안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얘기가 자칫 엇나갔지만, 어떻든 학과장이신 노 교수는 강의를 들으면서 직면했던 어려운 학습문제에 대한 나의 어설픈 애로사항을 듣고 나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찾아올 줄 진즉 알았다!”는 듯이 씩 웃으시더니, 벨을 눌러 옆방에 있던 조교를 부르더니, “강의를 듣는 학생 중에 착실한 학생을 한명 소개해 주라!”는 부탁을 해주셨다. 학과장실을 나와 학과 행정실에 들어간 나에게 조교는 일단 수강과목과 시간이 나와 같은 학생을 찾아 소개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 “강의가 시작되기 전 학과 행정실로 들러 달라.”는 조교의 연락을 받고 학과 행정실로 찾아 갔더니, 강의실에서 늘 보던 학생 한 명이 조교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조교의 소개로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그날부터 나는 그 학생의 옆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게 되었다. 좌석 확보는 그 학생이 먼저 오는 날이면 그 학생이, 내가 먼저 강의실에 도착하는 날이면 내가 바로 옆자리를 확보해 놓기로 서로 약정하였는데, 그 학생이 다른 학생들에게 어떻게 양해를 구해 놓았는지 두 사람의 좌석 확보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조교의 이와 같은 진심어린 배려와 그 학생의 도움으로 그때까지 고민해 왔던 강의상의 어려운 문제들을 그런대로 무난히 극복하면서, 강의에 전념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강의가 끝난 후 복사실에서 그 학생의 노트를 복사하는 과정에서 나는 당혹감에 빠지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그 학생의 날림 글씨체를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 학생은 대뜸 나에게 “까까야 프로블렘마 우 바스(Какая Проблема у вас? : What's Your problem?)”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학생에게 “글씨를 알아 볼 수가 없어서 그렇다. 미안하지만 수고료를 줄 테니, 강의 내용에 대한 타이핑(워드 프로세싱)을 좀 해 줄 수 없겠느냐?”는 조심스런 제안을 하였다. 나의 이러한 우려 섞인 조심스런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은 생각보다 시원스럽게 “니에뜨, 쁘로블렘!(Нет, Проблем! ; No problem)”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타이핑 1매당 1달러의 수고료를 주는 것으로 하되, 매월 마지막 주 강의가 끝난 후 계산하여 지불하는 것으로 서로 약정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월 평균 그 학생에게 100달러-150달러 정도의 수고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그 당시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성인 직장인들의 월 평균 보수액이 50-100 달러 정도에 달했으니, 내가 그 학생에게 지불했던 수고료의 액수는 그 당시 학생 신분의 아르바이트 수고료 치고는 그런대로 괜찮은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그 학생이 참으로 스마트한 학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핑 매수가 많아지면, 나의 입장에서는 성의 있는 강의 자료를 받을 수 있어서 좋았고, 그 학생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준비하기 위한 강의 자료를 미리 정리하면서, 웬만한 수준의 아르바이트성 수익을 얻을 수 있었으니, 그 학생과 나와의 이러한 계약은 서로가 Win-Win할 수 있는 상생의 결과를 가져다 준 셈이었다. 그런 긍정적이고 좋은 영향 탓에서였을까? 후에 내가 다시 모스크바로 다시 돌아와 무관 직무를 수행할 때, 러시아 국방성의 주요 실무자들과 수많은 협정 체결과 VIP 방문 등 주요 현안에 대한 논의와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있었던 사안들에 대해서는 항상 내가 먼저 “니에트, 쁘로블렘!”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무관으로 일하게 된 것도 사실인 즉슨, 그 학생의 고마운 배려가 잠재의식적으로 내개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서였는지, 내가 이 말을 할 때마다, 러시아 총참모군사대학원 동기들이기기도 했던 러시아 장교(대부분 대령)들은 한결같이 “띄이, 빠츠치 루스끼!(야!, 넌 거의 러시아인이 다 됐어!)”라는 농담 섞인 말을 해주곤 하였는데, 이는 외국인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최대의 친근감과 호의을 표시하는 말이기도 하여, 나로 하여금 직무수행에서 오는 보람을 크게 느끼게 해 주었다.
대체적으로 학과장을 만나게 되면, 학과장은 그 자신이 모스크바 대학 출신이어서 라기 보다는, 나름대로 객관적인 긍지를 갖고 모스크바 대학생들의 우수성에 대해 얘기해 주곤 하였다. 학과장의 설명에 따르면,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하려면 고등학교 졸업 시까지의 11년간의 수학과정에서 전 교과 성적이 ‘아트리츠나(Aтлично ; 탁월 : A+)’를 획득하지 못하면 원서 접수조차 생각할 수 없고,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으로 구분되어 있는 본고사에서도 ‘아트리츠나(Aтлично ; 탁월 : A+)’ 평점을 받아야 비로소 합격권에 들어가며, 이에 부가하여 학교장 이상의 사회 지도층 인사추천이나 해당 분야의 상장 또는 표창장을 얻지 못하면 합격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모스크바 대학(원래 명칭 : 엠·게·우, 또는 Moscow State University)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고 하면 일단 능력뿐만 아니라, 그 성실성과 기타 사회적 관계 및 환경 면에서도 탁월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근한 예로서, 모스크바 대학의 사회과학대학에서 국제관계 학부가 ‘무기모 국제관계 대학’이라는 특수 대학으로 분리·독립되어, 여기서 배출되는 학생들이 일정한 직업 연수교육을 마친 후 러시아 직업 외교관으로 임용되어 왔고, 인공위성과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물리학부와 화학학부에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이론과 신기술이 개발되어 왔다는 사실 등에서 모스크바 대학 출신들이 얼마나 뛰어난 자질과 우수성을 겸비하고 있는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래서였던지 내가 모스크바 대학에서 수학하던 당시 물리학부와 화학학부 건물은 별도의 차단시설이 설치되어 삼엄한 경계와 함께 철저한 보안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목격할 수 있었고, 학과장도 이 시설들은 가급적 피해 다니는 게 좋다는 조언과 경고를 해주기도 하였다.
어떻든 나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치긴 하였으나, 친절하고 훌륭한 인품을 소유하신 학과장과 기타 많은 교수들 및 조교의 사려 깊은 도움으로 학기 초기에 직면했던 언어소통의 어려움 등을 나름대로 무난히 극복해나가면서, 주어진 교과목에 대한 수강도 비교적 착실하고 알차게 임할 수 있었고, 각 교과목 별로 주어진 개별 과제들에 대해서도 그런대로 무난하게 소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과 “盡人事하고 待天命하라”는 금언에 대한 굳은 믿음과 굳센 실천만이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자, 모든 것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2021. 9. 19)
첫댓글 벽송의 유학고생기를 보노라니 그 치열한 수업의 모습과 홀아비의 몰골이 생생히 보이네요. 정말 진지하게 열심히 공부하신 모습에 감탄합니다. 저도 1년간 베이징에서 혼자 공부하며 지내 본 일이 있었는데, 그때 오간 부부의 편지를 보면 좀 낯 간지럽기도 하고 부끄러운 생각도 들더군요
벽송의 모스코바 유학시절 모습이 마치 내가 겪기라도 한 듯이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송백의 대만 유학생활, 무위의 영국 유학생활도 벽송의 정도는 아니지만 무척이나 치열했던 것으로 이야기를 들었된 듯한데요.
'곤고(困苦)함으로 가득 찬' 시간이라고 했던가요? 그런 시간 속에서 느끼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 요즘 '소확행'이라는 말도 있던데요. 더구나 가족과 떨어져서 겪은 그 곤고함, 학업의 어려움도 어러움이지만 그 모습이 어렴풋이 상상이 가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문화권에서 겪어낸 무척이나 독특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가 큽니다. 출간을 염두에 두고 장편으로 엮어서 출판을 추진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재밋게 잘 읽었습니다~
러시아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알 수 있었고, 유학시절 개인적 고충과 나름대로의 슬기로운 해결방법을 읽으며 문제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해결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무기력함이 문제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나이가 되면 열심히 산 사람들의 경우 모두가 장편소설 분량의 파란만장한 삶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벽송도 차제에 지난 질풍노도기의 삶을 정리할 수 있으니 부수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나만 군 출신으로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이수하느라고 고생한 줄 알았는데, 비교가 불가하군요. 김난도 교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말했지만, 인생 자체가 고난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벽송의 모스크바 유학생활에 100% 공감합니다. 나도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때 마음 속으로 그랬습니다. 소위 말하는 일류대학이 아니더라도 언어 습관 문화가 전혀 다른 외국에서 공부하여 졸업하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시다고. 우리의 우방국이자 자유민주주의 리더국가인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벽송에 비하면 나의 유학생활 고생은 조족지혈이군요.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하나가 나의 가슴에 와닿습니다. 40년 전의 나의 모습을 잊을 수 없게 합니다. 이런 기록들이 산 역사입니다.
벽송친구의 글을 읽으니 군사대학원과 모스크바 대학에서의 생활이 눈물겨운 장편 소설 같네요.가족과 헤어져 있으면서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고생하신 점과 그 외로움과 농심라면으로 허기를 때운 일등이 얼마나 힘드셨나요 ? 그래도 친절하고 따뜻한 학과장의 배려와 월 100~150불을 주면서 학우의 도움을 받아 슬기롭게 대처를 잘 하셨네요.그야말로 두더지생활의 아픔과 고통을 두번 겪으며 큰 성취를 거두신 벽송의 암초와 격랑의 인생길에 큰 박수와 격려를 표합니다.수고 많으셨고,감사합니다.
벽송의 고생은 크게보면 언어장애와
불비한 생활여건인데 이를 무사히
극복ᆞ어려운 박사학위까지 받았
으니 역시 대단합니다.
나는 벽송에 비하면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은 누워서 떡먹기였네
요.
나는 미 OAC 6개월 교육에 미8군
2년 근무후 갔는데도 교관강의
내용파악을 어려워 사전 복습을
하면 이해에 도움이되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