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역시 번역을 평가하는 이런 작업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몇년 전부터 <안과밖>이란 잡지에 그와 관련된 시리즈가 연재되었고, 저도 몇 편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데, 그 글을 읽으면서 그는 느낌은 그들이 할 일은 이런 식의 번역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아니라, 실제 작품을 번역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우습게도, 여러 번역본을 가지고 원문과 비교하여 비판하는 필자들 대부분이 자기자신은 단 한 권의 제대로 된
번역서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백낙청 제자들이
주축이 된 영미문학회의 문제점은 스승을 잘 본받아 작품번역은 하지 않고, 거창하게 민족문제, 식민지주의, 글로벌화니 이런 것만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이 잡지에 실린, 모레티와의 대담을 읽고 웃을 뻔한 일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번역한 걸, 원문과 대조해 이러니저러니 비판하긴 쉽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번역을 하는 처지에 서고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작 번역에 열심인 사람들은 타인의 번역에 대해 상당히 신중하죠.
결론적으로 말해, 전 번역 평가, 왜 이런 걸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오만과 편견>에 수십종의 번역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중 진짜 번역은 대여섯 종 불과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과연 한국에서 영문학을
하는 사람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건 번역본에 의존해 외국문학을 읽는 사람이면 그냥 다 아는 사실입니다. 딱히 연구비를 타먹어가면서까지 연구할 꺼리도 안되죠.)
해서, 전 영미문학연구회가 이따위 평가니 뭐니 하는 것보다, 그들이 직접 번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외국문학 전공자가 자국 국민이 자국어로 해당 외국문학을 읽을 수 있게 하는 것 외 중요한 게 뭐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간단히 말해, 영미문학연구회 박사님들이 일년에 개인당 1권씩만 번역을 한다면, 3년 정도면 영어권
중요한 고전들은 거의 다 다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연구회 박사님들은 회원 전부 합해, 일년에 단 한 권의
작품 번역도 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영미문학 뭘 연구한다는 건지...)
영미문학연구회 공동대표 두 사람, 전수용·윤지관과 산하
번역평가사업팀 팀장인 김영희를 예로 들어 봅시다. 알라딘을 검색한 결과, 전수용은 단 한 권도 번역을 하지 않았고, 윤지관의 경우 이론서는 3-4 종 번역했으나(물론, 대학원시절), 작품 번역은 단 한 권도 없으며, 번역사업 팀장이라는 김영희라고 해봐야 겨우, <토박이>, <거인의 도시> 두 작품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슨 번역
심사를 하겠다고 나서는지... 차라리 앙드레 김과 함께 미스 코리아 심사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조차 자발적으로 한 게 아닙니다. 학술진행재단이라는 기묘한? 재단의 공돈을 받고 한 일입니다.
학생들이 납부금이나 국민들 세금에서 주어진 연구비를 이런데 쓰고도,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떠들어대는지, 그들보다 더 멍청한 언론(여기서 전 요즘 박완서의 발언: 조선일보와 한겨례가 뭐가 다르냐? 라는 말이 자주 떠오릅니다)은 뭐 대단한 발견을 했다고 그렇게...
번역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었습니까?
헉, 흥분했습니다.
전 그렇습니다. 수십년 로렌스를 울거먹은 우리나라 위대한 비평가 백낙청 선생의 로렌스 번역은 고작 200페이지
짜리 문고본 단편집 하나 권뿐입니다. (그의 수제자 윤지관은 역시 스승을 본 받아 평생 울거먹는 매슈 아놀드 번역을 딱 한권 했다) 문제는 제대로 된 교양을 갖추지 않은 번역가들의 불성실한 번역/오역에 있는 게 아니라,
백낙청과 그의 제자들이 번역을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한때, 전 이런 사람들은 민족(분단체제 연구)을 위해 일하니까 바쁘기 때문에 그렇구나 생각했습니다.
한데, 요즘은 그들의 외국어(영어) 실력을 의심하게 됩니다. 실은 번역을 하면, 외국어 실력이 탄로날까봐... 아님, 한국어 실력이 탄로날까봐. 미국 버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난 영미문학연구회 사람들이 과연 제대로 된 박사를 받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전부에게 공개적으로 토플 시험을 볼 것을 제안합니다. (물론, 한글 받아쓰기 시험도 함께)
번역평가는 그들만의 영미문학을 끝낸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전 절대 안정효 단 한 사람을 영미문학연구회 회원 전체(50명이든 100명이든 상관없습니다)하고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즉, 안정효가 번역한 <생의 다른 곳에>를 영미문학연구회가 쓴 영문학 관련 논문 1000편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열심히 작품 번역을 하는 사람은 대체로 '권력'과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대신, 번역은 하지 않고,
비평 담론에만 매달리는 사람의 마음 속엔 사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숨어있습니다. 번역이란 노동은 번역자를 한없이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에, 다르게 표현하면 원저작자(타인)에 대한 이해심이 깊어지기 때문에, 거창한 담론의 무용함(무책임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데, 전 문학이란
바로 이런 노동을 통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영미문학연구회는 사실 '작품을 둘러싼 노동'을 경시하면서도, 연구비를 공짜로 얻어(단체 연구비는 상당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번역 비평'이라는 고상한(초월론적) 발화-쾌감만을 얻으려는 노력하죠.
전 이런 연구비를 실제 번역을 하는 번역자들에게 지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데, 그들이 이런 주장에 동의할지 어떻지는 모르겠습니다. 민족문학이니, 민주화니 어쩌니 목이 터지도록 떠들어도,정작 시간강사의 부당한 처우를 개선하려는 교수들은 없죠.
참고자료: 한겨례 인문학 데이트: 윤지관 편
http://www.ngokim.pe.kr/inmun/inmun19.htm